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6)
"키리에 남매는 만나보셨습니까, 스승님?"
열 한 개.
그렇게 물어오는 칼리안의 입 속으로 열 한 개째의 바나나가 사라져갔다. 침대 옆에 바나나 껍질이 하나 더 늘어났다.
실리케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하기에 놀라서 왔더니 실리케는 어느새 가고 없고 일주일만에 눈을 뜬 그의 제자가 태평한 얼굴로 바나나를 까먹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걱정되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간 칼리안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생한 것으로 인한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하여 앨런은, 앞에 있는 제자를 한 대쯤은 때려도 괜찮지 않을까 아까부터 고민하다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음 바나나를 집어들었다. 하는 양을 보아하니 그 독특한 남매에 대해 설명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므로,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앨런이 잠시 화를 집어넣고는 사일런트를 발현하며 물었다.
"이전 생에서 연이 있던 아이들입니까?"
"키리에만. 히나는 없었어요."
언제나 앨런은 눈치가 빨랐다. 더 물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러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히나라는 그 아이가 치유사인 것을 모르셨던 겁니까?"
입에 바나나가 가득 찬 칼리안의 머리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앨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럼 축복의 힘 하나만 믿고 무턱대고 몸 속의 독을 풀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입에 든 것을 삼킨 칼리안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바나나 맛있네요."
맛있겠지. 아무렴.
죽다 살아나서 처먹는 게 맛이 없을 리가 있나.
앨런이 주먹을 꾹 쥐며 큰 숨을 내쉬었다. 참는 것이다. 아무리 제자라지만, 왕자니까.
"저도 듣고 놀랐습니다, 스승님. 치유사였다니."
"덕분에 빨리 일어났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앨런이 냉랭하게 대꾸하자 칼리안은 상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개운하네요."
해맑은 미소와 함께 나온 말에, 앨런이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이 기어코 끊어졌다.
"개운······ 같은 소리 마시지요. 독차 물리겠다고 어디서 근본도 없는 생독을 가져와 집어 처드신 덕에 일주일을 내리 자빠져 계셨으니."
세상 그 누가 카이리스의 왕자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멍한 얼굴로 앨런을 보던 칼리안이 한참을 웃다 답했다.
"실리케가 자작극이라 우기지 못할 정도는 되어야 했어요."
"자작극이라니. 아무도 그것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연극 한판을 제대로 짰기에, 피만 좀 토했지 꾀병일 줄 알았다.
그러나 칼리안은 일주일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두 달을 넘게 먹어온 독이 속을 다 망가뜨려 둔 상태에서 퍼진 맹독이었다.
"히나, 그 아이가 자연의 힘을 부리는 치유사가 아니었거나 때마침 화요일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셨을 것 아닙니까."
뿐만인가.
속이 녹아내리는 것을 고스란히 참으면서 날을 기다리다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앨런도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 지독한 놈이 어느새 열 다섯 개째의 바나나를 해치우고 있었다. 일주일 굶은 것을 바나나로 채워넣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제 몫은 했잖아요."
빈혈 때문에 아직까지도 창백한 얼굴을 한 칼리안이 실리케와 담판을 지은 것을 말하며 또 웃었다.
결국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탁 내쉬던 앨런이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입술 끝이 아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얼굴은 왜 그렇습니까? 싸우셨어요?"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염려하지 마시지요."
입술을 가리켜보이는 칼리안의 말에 앨런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책상 앞에만 앉아있던 놈이 주먹은 또 왜 그렇게 맵던지.
터진 입술에는 제자에게만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속사정이 있었으므로 앨런은 시선을 돌리기 위해 얼른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에게 주었다. 칼리안이 맡겼던 나이프와 돌돌 말려 있는 두 장의 양피지였다.
베개 밑에 나이프를 넣은 칼리안이 양피지를 펼치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새로 아이들의 신원 보증이 필요하다시기에 준비했습니다."
칼리안이 반색하며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에 신경을 쓰느라 그 일에 대한 부탁을 드리는 것을 잊고 있었네요."
"새끼 코끼리가 대신 얘기했으니 되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확인한 칼리안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건······ 기대 이상이네요."
"그 아이들의 신원 때문에 곤란한 일은 없을 겁니다."
앨런에게 부탁하려던 신원 보증서가 아닌, 제대로 된 신분 증명서였다. 키리에 남매는 칼리안의 소유인 휘트린 영지에 거주하던 평민이 되어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칼리안의 영지민이었던 것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증명서를 살피던 칼리안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이건, 더 생각하지 못했는데."
증명서에 적힌 남매의 이름 때문이었다.
- 키리에 베른, 히나 베른.
눈을 돌린 칼리안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름을 다시 꺼내 둔 스승을 쳐다봤다. 앨런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성이 필요하다기에 일러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우연히 만나서 데려온 아이들은 아닌 듯 하여."
"······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자, 그런 것은 질색인 앨런이 바나나 더미를 가리켜 보이며 말을 돌렸다.
"그것이나 더 드시지요. 어디 얼마나 더 들어가는지도 볼 겸."
칼리안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바나나를 또 집어들었다.
감동과 허기는 별개니까.
그러다 문득 앨런이 어떻게 신분 위조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 칼리안이 물었다.
"증명서 만들어내기 어렵지는 않으셨습니까? 스승님은 카이리스에 부탁할 만한 분도 없었을······."
말을 하며 쳐다보니 앨런의 표정이 참으로 의미심장했다.
그것을 알아본 칼리안이 말을 바꾸어 물었다.
"설마 르메인이 만든 겁니까?"
"제가 이 곳에서 아는 이들이라고는 고작해야 셋 뿐이니. 그나마 요즘 자주 보는 이에게 부탁을 해보았지요."
국왕과 왕자와 공작을 '고작 셋'으로 묶은 앨런이 말을 이었다.
"왕자님의 청이라 하니 다른 말을 묻지도 않고 곧바로 도와주기에 놀라기는 했습니다."
"의외네요. 그런 것을 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앨런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지금 르메인이 칼리안을 얼마나 신경쓰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원인을 칼리안이 직접 제공한 것 같았기에, 앨런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며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날 르메인이 생각보다 더 화를 내는 바람에 국왕이 그렇게나 아끼는 아드님으로 소문이 나셨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그 날의 일을 생각하던 칼리안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운이 좋았나 보네요."
르메인으로부터 '내 아들' 이라는 소리를 꺼내게 만들어 프레이야가 아닌 르메인의 아들이 된, 그래서 왕위를 가지고자 할 때 프레이야의 출신이 방해하지 못하게 할 근거를 얻은 막내 왕자가 그렇게만 말한 뒤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물론 앨런이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얻을 것이 늘어나겠네요. 운이 좀 따라야 되겠지만요.'
며칠 전에 들은 말을 생각한 앨런이 칼리안의 표정을 보고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독 한번 먹고 얻은 것이 참 많다 싶어서였다.
"덕분에 르메인이 왕자님 걱정을 꽤 많이 합니다. 오늘은 로젤리타 가는 것을 미뤄야 할지를 고민하더군요."
칼리안이 고개를 한 번 가로저은 뒤 대답했다.
"어차피 실리케는 당분간 저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재채기만 해도 실리케 탓이라고 할 테니."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마나를 운용했다. 아직 불안정하지만, 따뜻하면서도 강한 느낌이 팔을 감싸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몸을 보호해주는 오러의 힘이었다.
"그리고 로젤리타가 시작될 즈음이면 어지간한 것으로는 저를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심장이 아프지 않았다.
이 몸을 가진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자유로운 기분이 된 칼리안이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앨런이 지어보였던 표정을 따라하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제가, 검을 좀 잘 씁니다."
앨런이 마법사 제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 * *
앨런이 돌아간 뒤 다시 잠자리에 드는 칼리안의 옆에 키리에가 말 없이 다가와 섰다. 칼리안이 잠들어 있던 일주일 동안 낮에는 얀과 앨런이, 밤에는 키리에가 곁을 지켰다고 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일주일을 내리 자고 나서도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이 곳에 온 뒤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지금껏 함께 있던 아이를 비로소 만났다.
그리고 영영 헤어졌다.
잠에서 깨어난 칼리안이 한동안 울었다.
동이 틀 무렵의 어두운 새벽에, 한 명의 마법사가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왕자를 데리고 왕궁 밖으로 나섰다.
오른쪽 앞 다리에만 하얀 털이 난 검은 말은 간신히 앉아있는 제 주인이 행여 떨어질까 조심스러워하며 세뉴강을 향해 걸었다.
체르밀 궁과 가장 가까울 강기슭에 선 마법사의 손에는 그 새벽에 차마 구하기 어려웠던 안네루시아 꽃을 대신할 붉은 불이 피어올랐다. 떠나가는 아이의 눈과 꼭 닮은 색의 불꽃이었다.
왕자의 고개가 꽃을 향해 숙여졌다.
세뉴는 언제나 고요하게 흐르는 강이었다.
강물에 올려진 불의 꽃도 말 없이 흘러 내려갔다.
왕자는, 꽃이 떠나는 동안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이 없기만을 바랐다.
* * *
기사단 파벨이 급히 해체되어 브리센 후작가로 돌아갔다.
앨런 마나실이 마법사단이라는 것을 만들겠다 선언했다.
르메인은 왕실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믿지 말라 일렀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칼리안은, 요즘 감기가 참 독하다 했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났다.
오찬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칼리안을 보던 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얼마 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얀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 메를린."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던 시녀 메를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대답했다.
"슬레이크 경을 만나고 올까요."
"네. 아무래도 많이 작을 것 같다고 전해줘요."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심어두었던 시녀가 그만둔 뒤 얀의 바로 다음 위치에 오른 메를린이 알겠다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 의상 담당자 섀틴에게, 칼리안의 탄생 기념일 연회를 위해 한달 전 맞추었던 예복을 이번에는 늘려야 할 것 같다고 전하려는 것이다.
매일 칼리안을 보는 그들의 눈에도 확연이 차이가 느껴질 만큼, 칼리안은 부쩍 키가 컸다.
본래에도 또래에 비해 큰 편이었지만 독차를 끊은 뒤부터는 정말 눈에 띄게 자라고 있었다. 조찬에서 란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볼 정도로 많이 먹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키리에와 온갖 체력 단련을 하며 지냈더니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얀은 어느새 자신과 주먹 하나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칼리안을 보며 웃었다. 그것이 왠지 체이스가 베른을 보며 지어보이던 것과 비슷해서, 칼리안도 마주 웃었다.
준비를 마친 칼리안이 오찬을 위해 세뉴관의 소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연회장의 안에는 르메인과 앨런,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 자리가 정확히 어떤 것을 위한 오찬이었는지는 얀에게도 따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르메인이 있는 자리인 줄은 전혀 몰랐던 칼리안이 조금 놀란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 자리에 앉도록 손을 들어 보였다. 칼리안이 그 곳으로 걸어가 조용히 앉았다.
그런 칼리안을 가만히 지켜보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그 사이에 키가 더 컸구나. 이젠 플란츠보다도 커 보이는데."
칼리안은 르메인이 이 곳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보다 지금 들린 말에 훨씬 더 놀랐다. 르메인이 달라졌다고 듣기는 했으나 저렇게 살가운 말까지 꺼내놓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칼리안의 눈이 아주 잠시동안 앨런을 향했다. 그 눈에는 찬탄의 빛이 담겨 있었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구박했으면 저렇게 변한단 말인가?'
사실 르메인이 변한 것은 앨런의 구박 때문이라기보단 무관심이 자식들 목숨 유지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알려준 칼리안 덕분이었다. 앨런은 그저 칼리안의 목숨이 위험함을 알려줬을 뿐,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 칼리안에게 있었다.
앨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한 얼굴로 얌전히 앉은 채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속으로 실소하며 적당한 대답을 골라 꺼내놓았다.
"네, 전하. 조금 자랐습니다."
"그래. 살도 많이 붙고. 보기 좋구나."
"감사합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앨런을 쳐다봤다. 그제야 앨런이 칼리안에게 살짝 인사하며 말을 꺼냈다.
"소개시켜 드릴 이가 있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왕자님."
앨런이 옆의 남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번 로젤리타에서 왕자님을 호위하게 될 마법사입니다. 저를 대신해 왕자님의 마법도 보아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앨런이 로젤리타에 함께 가지 않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 앨런이 궁에서 나오면 마법사단에 대한 일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하거니와 르메인의 안전에도 문제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래도 이미 지그프리드 공작가에서 호위기사들을 보내준 터라 마법사의 호위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던 칼리안이 기대감 어린 얼굴로 그 남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낯이 익은 자인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채 깨닫기도 전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칼리안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자님."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심장에 내리꽂히는 순간.
칼리안의 가슴에 시린 냉기가 들어찼다.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마치, 베른의 마지막 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