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5)
한 점의 그림을 훑어보듯, 란델의 푸른 눈이 조용히 움직였다.
'장미가 곧 피겠다더니.'
왜 그렇게 아침마다 말을 붙여왔는지를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눈빛을 대한 순간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칼리안이 무슨 이유로 이런 상황을 준비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실리케가 그간 칼리안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를 알았다고 해야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으니 란델은 이제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칼리안의 손을 들어줄지.
혹은 항상 그랬듯 한 발 물러나 있을지를.
란델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멀어졌다.
대신 그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칼리안이 원했던대로 우선은 칼리안의 말이 되어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장미, 어떻게 피어날지 궁금했으니.
그런데 홀로 의자에 앉아있던 플란츠가 일어났다. 그리고 연회장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더니 란델의 것으로 따라져 있던 와인을 제 입 속으로 비워내곤 밖으로 나갔다.
솔직히 란델은 플란츠가 직접 실리케를 구석에 몰아넣었다는 것보다 플란츠가 앞 뒤가 완성된 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에 더 놀랐다. 때문에 거칠 것 없다는 듯 걸어 나가는 플란츠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어찌됐거나 자신이 하고자 했던 노릇을 플란츠가 이미 해버렸으니, 떼었던 발을 도로 내려놓을 수밖에.
플란츠가 떠난 뒤 실리케는 큰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연회장을 떠났다. 르메인의 다른 지시가 없었던 탓에 카에라의 기사들은 왕자와 왕비가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어서, 치료를."
르메인이 치유사를 채근했다.
세렌티의 신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조금씩 빛나기 시작하더니 곧 눈부신 흰 빛이 뭉클거리기 시작했다. 치유사가 칼리안의 몸으로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붉은 빛이 감도는 반투명한 실드가 칼리안을 보호하듯 감싸안았다. 그 바람에 칼리안에게로 향하던 치유사의 신력이 실드에 가로막히며 서로 충돌했다.
- 파지직!
그것은 단순한 실드가 아니었다.
실드에 감돌던 붉은 빛이 흰 빛을 뒤덮는 것을, 그리하여 세렌티의 기운이 칼리안의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신물의 힘을 막아낸 그것은 6서클의 그레이트 실드였다.
"아예 죽으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마법사가 등장했다.
르메인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할지 뻔히 보였으므로 급한대로 실드를 보내 칼리안의 몸부터 보호했던 앨런은 연회장으로 저벅 저벅 걸어 들어오며 먼저 말했다.
"심장에 이미 서클이 있습니다. 저런 상태에서 신력까지 들어가면 상황만 나빠집니다."
다급하게 처치하느라 칼리안의 몸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치유사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앨런은 그런 치유사를 질책하는 대신 칼리안을 향해 다시 한번 마력을 운용했다. 이번에는 무영창이 아니었다. 짧은 몇 마디의 주문과 함께 앨런의 입에서 시동어가 흘러나왔다.
[아브턴던트]
한 번 밖에 사용해보지 않았던,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었다. 곧 칼리안의 얼굴이 편안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 모습을 말 없이 내려다보던 앨런이 르메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제 탓도 있으니, 나중에 한 대만 맞아드리겠습니다."
르메인에게 그리 큰소리를 쳐놓고 칼리안이 이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한 앨런 나름의 사과였다.
* * *
한가로운 저녁 시간.
말 많은 귀족들이 삼삼오오 몰려 있는 아스트리샤 거리의 하늘에서 하얀 종이가 비처럼 떨어졌다. 종이에는 실리케와 브리센 가문에 의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이들에 대한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 누군가 3왕자를 독살하려 했고 국왕 르메인이 왕비 실리케를 지목했다.
귀족들의 시선이 손에 들린 종이를 향해 뚝 떨어졌다.
'왕자에게까지 마수를 뻗는 왕비이니 그 전의 사람들을 해친 것도 모두 왕비의 짓이 맞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이들을 죽인 왕비라면 세자위에 위협이 되는 왕자도 얌전히 두었을 리 없다.'
칼리안에 대한 살해 시도와 그간 브리센이 저지른 악행이 얽혀가며 서로가 서로의 증거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는 동안 수도 카이리시스는 제대로 된 태풍을 맞이했다.
프레이야 한 명의 죽음이 가져왔던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심지어 칼리안도 이 정도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만큼 큰 혼란이 생겨났다.
피해자들로 알려진 이들과 연관된 사람들이 모여 자료의 사실성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브리센 상단과의 거래를 거절했고 브리센 기사 양성소에 다니던 학생들이 줄줄이 퇴소했다. 아침마다 브리센 후작가에 인사를 올리던 귀족들의 행렬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만에 하나 실낱같은 증거라도 발견되면 하츠아라 광장이 피로 물들 것임은 자명했으니 행여라도 브리센과 얽혀 광장을 적시는데 일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실리케의 축출을 요청하는 종이가 곳곳에 몰래 붙기에 이르자, 브리센 후작가는 잠시 대문을 닫았다.
더불어 칼리안의 방에는 선물상자가 다시 쌓였다.
귀족들이 칼리안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며 보낸 것이었다. 물론 명분이 그랬다는 말이다.
"많이 급하셨나 봅니다."
그렇게 쌓여있는 선물들과 불청객을 멀뚱히 쳐다보던 칼리안이 커튼 너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목소리는 다소 잠겨있었으나 여유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실리케가 찾아오자 칼리안은 침실 커튼을 내렸다. 와병 중이라 손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오래지 않아 르니에리 향이 방안 가득 퍼졌고 칼리안은 옆에 서 있던 얀을 향해 말했다.
"창문 좀. 머리 아파."
꽃 같은 우리 왕자님께서 머리가 아프시다니!
얀이 소란을 떨며 방과 테라스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르니에리 향기가 창문을 넘어 빠져나갔다. 실리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서······."
창문이 모두 열린 뒤, 칼리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실리케."
칼리안은 이 일의 마무리를 앨런과 르메인이 진행하도록 해두었으나 르메인은 이번 선물 교환을 온전히 칼리안에게 맡겼다. 목숨을 걸었으니 알아서 제 값을 받아내 보라는 뜻이었다.
한동안 말 없이 서 있던 실리케가 칼리안의 소파에 가 앉았다. 멋대로 구는 그 행동에 칼리안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다시 일어나라는 말을 할 만큼 야박하게 굴지는 않았다.
곧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마법사 협회가 조금 바빴던 모양이더구나."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재미가 있어서 짓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에 가까웠다.
정신을 잃고 있던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은 얀에게 전해들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실리케가 완벽한 약자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오자마자 무릎 꿇고 사과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칼리안이 웃음을 지워내며 대답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그것은 정확히 일주일 전,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했던 말이었다.
실리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만에 눈을 뜨자마자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달받았고 30분도 되지 않아 불청객을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기꺼운 마음으로 상대할 컨디션이 되지 못했던 칼리안이 다소 지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내가 조금 오래 쉬었습니다."
그 날의 칼리안이 기억났는지, 실리케의 시선이 잠시 드레스 자락에 가 닿았다.
"그런데 하마터면 저승까지 가서 쉴 뻔한 터라 오래 대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 하나씩."
비로소 실리케의 입이 열렸다. 다른 이도 아닌 칼리안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에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교환을 하는 것은 어떻겠니."
"일주일 전에 그렇게 말했으면 서로 좋았을 것을요."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실리케가 커튼 너머를 볼 수는 없을 것이므로, 그에 대한 말도 덧붙여 주었다.
"들어보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몰리셨던 것 같아서. 어찌해야 할지."
잠시 시간을 둔 칼리안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일단 어떤 것을 준비해 오셨는지 들어보고요."
실리케가 무언가를 간신히 참고 삼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억지로 말하는 티를 굳이 숨기지 않으며 원하는 것을 말했다.
"자료가 사실이 아니라 해 준다면 전하께서 준비하고 있는 일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마."
커튼 너머에서 잠시 작은 웃음 소리가 났다. 칼리안은 웃음기가 아직 남아있는 목소리로 실리케의 약점을 쿡 찔렀다.
"전하께 후궁 후보 명단이 올려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후궁일지. 혹은 새로운 왕비일지. 아직 잘 모르겠네요. 혹시 아십니까?"
실리케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카이리시스에 불어닥친 태풍은 생각보다 컸다.
실리케는 칼리안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깊은 감옥에 갇혔다. 고작 마법사단 창설만으로 꺼내 주기 어려울만큼.
그래서 칼리안의 마음도, 바뀌었다.
"게다가 군대 창설에 왕비의 허가 같은 것은 애초부터 필요하지 않으니. 그것 말고 다른 것으로 얘기해주세요."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법사단 외의 다른 것을 들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답은 어차피 정해져 있을 것이므로, 실리케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려무나."
칼리안은 더 지체할 필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스파니안의 후손이 지배하는 땅에, 검 부딪히는 소리가 이리 크게 들려서야 되겠습니까."
무슨 말이 이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실리케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칼리안의 침실 쪽을 쳐다봤다. 그 안쪽에서 여전히 여유롭고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가 이어져 나왔다.
"기사단 파벨, 물리시죠."
파벨이라니!
실리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카이리스 왕실 근위기사단은 본래 라온과 카렌 뿐이었다.
파벨은 '왕의 검'이라 불리는 국왕 친위대 카에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브리센 후작이 실리케에게 선물한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은 실리케의 검을 내어 놓으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목숨을 걸었으니 상대의 무기 정도는 빼앗아야 셈이 맞지 않겠는가, 라고.
"파벨 해체. 마법사단 창설."
실리케가 얼마나 놀랐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던 칼리안이 쐐기를 박듯이 다시 말했다.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꽉 쥐어진 부채에서 까득거리는 소리가 났고 칼리안은 조금 가벼워진 말투로 덧붙였다.
"나한테 붙여둔 당신의 시녀도 다시 데려가고요."
실리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칼리안은 그런 실리케에게 한참동안 생각할 시간을 내어줬다. 그리고 그 인내심의 끝에, 실리케가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 그리 해주마."
칼리안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칼리안은 실리케의 결심을 재차 확인하는 대신 곧바로 얀을 보며 말했다.
"가져다 드려."
"네, 왕자님."
기다렸다는 듯 얀이 협탁 위에 놓인 것을 들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들고 나간 것을 실리케에게 건넸다.
그것은 맹세의 인을 담은 서약서였다.
약속한 내용을 서로의 심장에 새기고 만약 어길 경우 심장을 조이는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서약서를 본 실리케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그런 것까지 준비해 둔 것에 대한 놀라움인지, 아니면 거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생긴 짜증인지, 혹은 둘 모두인지는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칼리안이 상관할 바 아니었으니까.
칼리안은 그저 당연한 절차라는 듯 말했다.
"나와 당신의 신뢰 관계는 그리 돈독하지 않으니까."
잠시 눈을 감고 큰 숨을 내쉰 실리케가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러자 실리케가 지켜야 할 것들로 적혀 있던 글자들이 빛을 내며 떠오르더니 하나의 긴 띠를 이루는 듯한 형상을 만들며 실리케의 팔을 타고 올라가다 사라졌다. 심장으로 향한 것이다. 물론 칼리안에게도 똑같은 제약이 걸렸다.
볼 일을 끝낸 실리케가 일주일 전에 비해 확연히 수척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안이 그런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혹시라도 형제 사이가 꽤 좋았다고 오해를 하고 있을까봐 얘기하는데."
실리케가 잠시 발을 멈췄다.
하지만 침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플란츠는 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실리케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시초가 된, 연회장에서의 말.
아들에 대한 배신감을 상기한 실리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커튼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 모습에 칼리안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리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만약 당신이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했었다면."
르메인이 생각보다 더 이성을 잃었었으니.
그 화가 어떻게 번졌을지.
"왕의 검은 그 자리에서 왕비의 목을 쳤을 겁니다."
가만히 서 있던 실리케가 한 걸음씩 걸어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