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1화 (32/527)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4)

칼리안의 고개가 살짝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실리케의 웃는 얼굴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내키지 않던 마음을 한번 돌려보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가느다란, 아직 변성기도 겪지 않은 소년의 맑고 예쁜 목소리.

그 소리에 한기가 어렸다.

"함부로 찔러 보지 마요. 형제간의 우애가 그리 깊진 않으니."

실리케의 얼굴에 만연했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친아들의 안전을 두고 협박해오는 의붓아들의 말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얼굴에도 살짝 주름이 졌다.

칼리안이 스푼을 들어 커피잔 끝을 톡톡 쳤다. 영롱한 소리와 함께 칼리안의 얼굴이 본래의 평온함을 찾았다.

"그래서. 차, 어떻게 할까요?"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늘게 뜬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을 뿐. 칼리안은 묵묵히 실리케의 결정을 기다렸다.

"할 만큼 해보려무나."

칼리안이 웃었다.

"거절의 뜻인 걸로."

칼리안이 잔을 들어올렸다.

실리케를 바라보던 시선을 흐트리지 않은 채 남은 커피를 모두 입 속에 흘려넣고, 삼켰다.

그와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귀족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마부 옆에 앉아 안달을 내던 얀이 급하게 마차를 세웠다. 왕도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소년과 소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바쁘게 움직이던 길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냥 소년과 소녀였다면 당연히 지나쳤을 것이다. 물론 남자의 머리가 물색이고 여자의 머리가 은색인 것도 알아봤지만 그 뿐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고 갈 길을 갔을 것이었다.

"······ 칼을 들고 왕궁으로 들어가려 했다는 거죠?"

저렇게 번쩍이는 장검을 옆에 차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마차를 세우지 않겠느냔 말이다!

일단 얀은 남매를 마차에 태우고 자신도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마차는 세 사람을 태운 채로 마법사 협회를 잠시 들른 뒤 앨런의 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얀의 질문을 들은 키리에가 표정 없는 얼굴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네. 왕자님께서 하사하신 검입니다."

아 나 미치겠네.

"오늘은 몸만 들어가요. 칼은 지금 가는 마법사 집에 두고요. 아무튼 오늘은 절대 안돼요."

왕자 품 속의 나이프도 궁 밖으로 빼낸 마당이다. 장검을 가지고 들어가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얀의 앞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은발의 소녀, 히나가 키리에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 강아지. 이 사람인가봐. 귀엽대서, 여자인 줄 알았는데.

키리에가 그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대답은 얀 쪽에서 나왔다.

"얀입니다, 강아지가 아니라. 보시다시피 멀쩡한 남자고요."

수어를 알아듣자, 히나가 어깨를 움찔했다. 말투가 평소와 다르게 딱딱했다는 것을 깨달은 얀이 다시 말했다.

"대충은 알아들으니까 나한테 할 말은 나한테 해요. 아무튼, 지금 정신이 좀 없는 상황이라. 이렇게 맞이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키리에를 향해 고개를 돌려 다시 무어라 말하려는데, 마차가 멈춰섰다. 창문 너머로 앨런의 저택이 보였다. 얀은 남매에게 일단 기다리라 말한 후 앨런의 집으로 달음박질쳐 들어갔다.

한편 앨런은 아침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탓에 이제 막 잠에서 일어난 참이었다.

"손님이 오시나."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묶고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있던 앨런이 조용히 주방으로 걸어가 커피잔 세 개를 더 꺼냈다.

그러다 또 조금 뒤에는 빈 잔 두 개를 다시 집어넣었다. 마차에서 내려 달려오는 것이 한 명 뿐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잠깐 마나를 확장하여 집 근처를 살피던 앨런이 마차 안의 둘을 느끼고는 혼잣말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프엘프라니. 우리 왕자님, 발이 참 넓기도 하시지."

두 잔의 커피가 테이블에 놓였을 때 쯤 넓디 넓은 정원을 가로지른 얀이 도착했다. 앨런이 손가락을 튕겨 얀을 가로막았던 문을 활짝 열었다.

그와 동시에, 문 옆에 세워둔 꽃 모양의 대리석 조각상이 넘실거리듯 움직이며 흥에 겨운 목소리로 노래했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아······ 진짜 미치겠네."

칼 쓰는 놈이나 마법 쓰는 놈이나 왜 다 제정신이 아니냐고.

이런 소리를 입 속으로 꾹꾹 눌러 담은 얀이 서둘러 들어갔다.

조각상에 대한 얀의 반응을 기대하며 웃던 앨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평소와 달리 얀의 얼굴에 아무것도 드러나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이 생겼군."

얀은 대답 대신 가져온 것들을 꺼내 앨런에게 건넸다.

나이프와 약 주머니, 보고서. 그리고 편지 한 장이 있었다. 편지를 봉한 인장이 누구의 것인지는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을 안하십니다. 곧 누군가 왕자님의 방을 조사할 수 있으니 그것을 숨겨달라고만 하셨어요."

앨런은 얀의 손에서 편지를 뺏다시피 하여 펼쳐들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앨런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 이 놈의 새끼가."

방법을 찾았다 하더니.

"이딴 것을 방법이라고!"

앨런이 편지를 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급히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사이 얀이 칼리안의 편지를 펼쳤다.

눈에 닿은 한 문장에 손이 떨려왔다.

- 그러니 혹시라도 제가 바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얀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칼 차고 왕궁에 들어가려는 놈.

조각상에 노래 시키는 놈.

도련님 때려치고 시종 노릇 하는 놈.

그 놈들을 다 모이게 한, 독 차 싫다고 독 처먹는 놈.

그런 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 * *

석찬의 시작을 알리는 르메인의 연회사가 끝날 무렵.

두근!

칼리안의 심장이 한 번 요동쳤다. 굳이 손을 가져다 대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불규칙적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모두의 잔에 와인이 채워졌다.

칼리안의 앞에 놓였던 빈 커피잔이 치워지고, 와인을 대신할 음료잔이 놓였다. 칼리안이 그 음료잔을 쳐다봤다.

물론 멀쩡한 음료였다. 그러나 칼리안은 마치 음료에 독이 들었던 것처럼 보이게 할 생각이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독에 당했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마법 시약을 이용한 독 검출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반나절 정도가 걸린다 했고. 그 뒤에는 음료가 정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상관 없으니까.'

지금 이 시간 협회의 마법사들이 거리에 마구 뿌려대고 있을, 수많은 미스터리한 죽음들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칼리안의 소식이 더해지는 것이니 그 때 쯤에는 아무도 검사 결과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칼리안이 음료 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실리케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둘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하다 약속한 것처럼 서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콜록.

기침 소리에, 란델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눈과 란델의 눈이 아주 잠시 마주쳤다. 순간 란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들여다 본 것이다. 칼리안의 밑바닥을.

제 동생이 어떤 상태인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을 걸어왔는지. 오늘, 자신에게 어떤 역할을 맡겼는지.

'멀쩡합니다.'

건강을 걱정해주는 말에 왜 조금도 멀쩡하지 않은 얼굴로 그런 대답을 했는지.

두근!

심장 소리가 다시 들렸다. 약이 완전히 스몄다.

칼리안의 심장이 해독을 멈추었다.

조금씩 사그라져가던 타크리모사의 독기가 물에 닿은 핏방울처럼 번져나갔다.

칼리안이 떨려오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기침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또 잦아졌다. 귀족들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실리케가 불편한 얼굴을 하는 것과 르메인이 칼리안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진한 피 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 쿨럭!

칼리안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토해졌다. 귀족들이 경악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근!

심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더해졌다.

죽지 않는다 하여 아픈 것까지 줄어들지는 않으니까.

아르센 헤르츠라는 놈이 내리 꽂았던 얼음의 창도 이보다는 덜 아팠던 것 같았다. 기도가 타오르고 폐가 조각나는 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그러다 결국,

- 쿵!

힘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왕자님!"

장내가 소란에 휩싸이고 카에라의 기사들이 연회장을 둘러쌌다. 곧 르메인이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칼리안."

르메인이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칼리안의 몸을 안아들었다. 앙상한 몸이 쑥 들려 올라오자 르메인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칼리안은 버텼다. 버티며, 르메인을 응시했다. 같은 사람에게 같은 짓을 당한 누군가를 기억하고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꺼내놓도록. 그래서 조금만, 이성을 잃도록.

결국 르메인의 눈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칼리안이 비로소 정신을 잃었다. 축 늘어진 칼리안의 모습에 르메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쳐다봤다. 귀족들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 그 아이가 살기 위해 찾은 것이 일면식도 없는 마법사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야 마땅하지요!

"기어코······."

르메인이 읊조리듯 입을 열었다. 곧 그것은 분노가 되었다.

"기어코 나의 아들까지 해하려는 것인가!"

- 관망만 하시다가는, 잃게 되실 겁니다.

르메인의 눈이, 분노가, 누군가에게 닿았다. 노기 어린 목소리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실리케!"

처음으로 마주한 국왕의 모습과 그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들은 장내의 모든 귀족들이 경악했다.

플란츠가 고개를 숙인 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두근!

축복의 힘이 다시 발현됐다.

퍼져나간 독을 갈무리하고 죽은 조직을 떼어냈다.

아주 느리지만 분명한 움직임으로, 치유를 시작했다.

르메인은 칼리안의 숨이 조금씩 고르게 변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홀로 그 모습을 본 실리케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 * *

귀족들의 시선이 실리케와 칼리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실리케가 남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르메인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 그렇게 경솔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칼리안의 몸에 나타난 증상들을 살피던 치유사가 입을 열었다.

"중독이 맞습니다."

귀족들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왕자가 정말 독에 당한 것이다. 르메인은 치유사에게 빨리 조치를 하도록 일렀다.

치유사가 목걸이를 손에 쥐고 세렌티의 신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설에나 나오는 신관들처럼 자신의 신력을 쓸 수는 없었으니 해독을 위한 힘이 발현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중독이 아니니라."

그때 실리케가 치유사의 행동을 막으며 입을 열었다.

르메인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것을 귀족들이 모두 들은 이상 이 자리에서 그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독이 아니라 병이니라. 평소 지병이 있다 들었으니."

"실리케. 거기까지. 더는 참지 않겠으니."

이번에는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르메인이 실리케의 말을 막았다.

그래. 프레이야가 죽은 것도 병 때문이라 하였다.

기사단을 전부 끌고 나타나서는 그렇게 말했다.

치유사가 재빨리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실리케는 침착을 가장한 얼굴로 웃어보이며 말했다.

"전하께서 모르시는 듯하여 그럽니다. 우선 다른 이들을 먼저 물리시지요. 소란스러운 와중에 내 아이 상태가 더 나빠질까 걱정이 큽니다."

그 뻔뻔함에, 르메인이 결국 더 참지 못하고 카에라의 단장을 향해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르메인의 말을 막으며 튀어나왔다.

"칼리안은 멀쩡했습니다. 왜 없던 병을 주시는지 모르겠으나 매일 아침마다 보았어도 이상이 있다고 여겼던 적 없습니다. 그런데 '내 아이'라는 소리. 다른 사람도 아닌 칼리안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닙니까."

실리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실리케가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애쓰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을 했었는데."

실리케의 말을 한순간에 뒤집어 놓은 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말을 맺었다.

"······ 어머니."

그녀를 보는 연두색 눈.

그것은, 란델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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