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0화 (31/527)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3)

칼리안이 가벼운 기침을 하며 식당으로 나섰다.

그 소리에 뒤를 따라오던 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둔하다지만 멈추지 않는 저 기침이 감기 기운 때문에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만큼은 아니었다.

"약속대로 오늘까지는 기다렸습니다. 내일도 독차가 도착한다면 저는 시종 노릇 그만하겠습니다."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려고?"

"네."

그 날로 지그프리드 공작은 바이올린 활이 아닌 검을 들어야 할 테지만, 얀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해 줄 슬레이만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래. 든든하네."

"저 농담 하는 것 아니에요."

"알아. 나도 거짓말 아니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식당에 들어섰다.

이미 도착해 먼저 식사중이던 란델의 시선이 한동안 칼리안의 얼굴에 머물렀다. 어제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란델이 쳐다보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칼리안은 별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샐러드 몇 개만 간단히 주워먹은 칼리안이 포크를 내려놓았을 때 쯤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석찬에서 뵙겠습니다."

요 근래 칼리안은 란델에게 하루에 한 마디씩 말을 했다.

뜬금없는 장미 얘기를 시작으로, 다음 날에는 비바람이 심해 잠에 들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그 다음 날에는 새 소리가 그립다고도 했다. 란델은 그런 칼리안에게 매번 '그래' 라는 말 밖에는 해주지 않았었다. 레이븐한테 말을 가르쳐도 란델보다 유창하게 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건강 챙기거라."

드디어, 마주보는구나.

고개를 숙여 보인 칼리안의 입매가 올라갔다.

식당에 함께 있던 탓에 란델의 말을 함께 듣게 된 다른 이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란델의 시종과 얀은 물론이고, 식당의 시종들과 시녀들까지도.

오로지 칼리안만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멀쩡합니다."

란델은 더 이상의 말 없이 밖으로 나갔고 칼리안도 밖으로 나와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가 되었다.

한층 더 창백해진 칼리안의 얼굴을 쳐다보던 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귀족 회의가 진행되고 있으니 한 시간 뒤에는 석찬에 드셔야 합니다."

"그래. 알았어."

"더 안좋아지신 것 같은데 정말 참석할 생각이세요?"

이렇게 묻고는 있었지만 사실 얀은 이미 칼리안의 대답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화요일에 해결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칼리안이 기다리는 것이 바로 지금 시간임을 알았으니까.

"당연히 가야지."

복잡한 눈으로 칼리안을 바라보던 얀이 천천히 말했다.

"쉬고 계세요. 시녀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그렇게 얀을 붙든 칼리안이 소매를 걷어 나이프를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얀에게 넘겨준 뒤 금고를 가리켜 보였다.

"그 나이프랑 해독약, 실리케를 조사한 자료. 전부 챙겨줘."

"챙기다니요?"

"내 방을 확인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스승님께 맡겨놔. 들키면 곤란하니까."

"방을 확인한다니요."

누가 감히 왕자의 금고를 확인한다는 말인가.

대체 무엇을 할 생각이기에.

칼리안은 그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봉인된 편지 두 장을 얀에게 건네주었다. 얀이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자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하나는 마법사 협회에, 하나는 스승님께 전해줘. 꼭 협회 먼저 들렀다가 스승님께 가."

얀을 거쳐 전달될 편지를 굳이 봉했다는 것은 정확히 얀을 겨냥해 내용을 열어보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불안하다.

"무슨 생각이신지 말씀 안해주실 거죠?"

"응. 안 할 거야."

칼리안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태연한 웃음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얀은 말 없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더 이상 그 차를 드실 일은 없을테고 나이프를 지니고 연회장에 가실 것도 아니라시니 일단은 말씀하신대로 하겠습니다만······."

"그래.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딱 그렇게 웃으면서 알아서 하겠다고 한 날에 플란츠의 칼에 다치셨죠."

"그런 일 아니야."

칼리안의 웃음이 그때보다 조금 더 짙게 변했다.

그런 일 아니다.

그보다 더 한 일이다.

얀은 일단 칼리안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얀이 금고 문을 닫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만찬장에는 혼자 갈 수 있어. 그러니 석찬 준비 끝나는대로 다녀와줘."

"······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얀은 칼리안이 말한 물건들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곧 말 없이 밖으로 나가 시녀들을 불러왔다.

석찬 준비를 도운 얀이 칼리안의 심부름을 위해 밖으로 나간 뒤 칼리안이 금고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작은 물건을 꺼냈다.

새 판매점에서 사온, 작은 설탕 조각처럼 생긴 물건.

칼리안은 하얀 수리라는 이름의 세작에게 받은 그 조각을 쳐다보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을 올려 심장 부근을 쓸어내린 뒤 밖으로 나갔다.

그것은, 실리케를 위해 준비한 칼리안의 독이었다.

* * *

연회장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칼리안에게 말했다.

"왕자님. 귀족 회의가 다소 지연되어 석찬 시간이 미뤄졌습니다. 때문에 아직 연회장 안에 귀족들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귀족 회의를 10분만 미뤄달라고 했던 부탁을 르메인이 잘 들어 준 모양이다.

"괜찮아. 들어가서 기다릴게."

"네, 알겠습니다."

격식을 갖춰 예를 올린 기사가 연회장 문을 열었다.

연회장 안의 모습이 보이는 것보다 더 앞서서 느껴지는 르니에리 향기에, 칼리안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실리케.'

넓은 연회장에 실리케가 홀로 앉아 있었다.

회의에 자리하지 않으면서 석찬에 참석하는 이는 칼리안과 실리케 뿐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석찬이었으니 회의가 지연된다면 당연히 모두 늦을 것이다.

때문에 르메인에게 부탁을 했다. 오로지 실리케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뚜벅 뚜벅 걸어간 칼리안이 실리케의 맞은편에 앉았다.

기다려야 하는 칼리안을 위해 시종 한 명이 와서 커피를 내려놓았다. 칼리안이 그를 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오기 전까지 자리 좀 비켜 줘."

"네, 왕자님."

고개를 숙여 보인 시종이 모두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물린 이유를 모르는 실리케가 칼리안을 쳐다보았고, 습관처럼 부채를 손에 들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손을 내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면, 쓰지 말죠. 서로."

실리케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부채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자꾸나."

칼리안은 실리케를, 실리케는 칼리안의 눈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렇게 앉아있었다.

양쪽 모두 겉모습은 여유로웠으나 그 속내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연회장의 시계 초침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는 고요함이 이어졌다.

결국 실리케의 입이 먼저 열렸다.

"나를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니?"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커피잔을 손에 들었다.

"가면을 쓰지 말자고 했지,"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실리케에게서 떨어져 내려와 잔 속의 검은 커피를 향했다.

"예의까지 지키지 말라 한 것은 아니었는데."

순간 실리케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칼리안은 왕의 핏줄이었으니 아무리 실리케가 왕비라 하더라도 말을 내려서는 안되었다.

"······정말, 많이 자랐구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아니잖습니까."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닐 실리케는 여전히 말을 낮추고 있었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신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실리케."

실리케의 아름다운 얼굴에 독기가 스몄다. 칼리안은 부채 뒤에 저런 얼굴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의 표정이 되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역시 천한 핏줄은,"

"방금 내가 당신에게 예의를 모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실리케의 말을 자른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핏줄 얘기를 꺼내면 브리센 후작이 뭐가 됩니까."

실리케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이 자리에서 당장 칼리안을 쳐낼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한 실리케가 입 속으로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실리케."

"다음에 하는 것이 좋겠구나. 더 이상 함께 있고 싶지 않으니."

실리케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 탁!

칼리안이 조금 큰 소리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 그 차."

실리케를 바라보는 칼리안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란델이 그러했듯이 실리케의 밑바닥을 들여다봤다.

"그만 좀 보내줬으면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요. 참고 먹자니 차 향이 끝을 모르고 짙어지기에."

마치 르니에리 향기처럼.

실리케가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전해듣기로 칼리안은 오늘 아침까지도 모닝 티를 마셨다 했다. 때문에 칼리안이 차에 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칼리안은 독을 늘린 것까지 아는 눈치였다.

'알면서 마셨구나.'

칼리안에게 건네진 차에 독이 든 것이 알려지면, 실리케는 칼리안의 시종과 시녀들에게 죄를 물어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직접 독을 넣었든 아니든, 왕자에게 독을 건넨 행동만으로도 이미 죄가 되니까.

'주제에 그것을 걱정했구나. 제가 죽을 것을 모르고.'

칼리안이 차 속의 독을 왜 모르는 척 마셔왔는지 눈치 챈 실리케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구나."

칼리안이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는 일이군요."

"모르는 일이란다."

잠시 커피잔을 톡톡 두드리던 칼리안이 가지고 온 조각을 꺼내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설탕 통에도 똑같이 생긴 것이 가득 들어있었다. 물론 생김이 같을 뿐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것은 설탕이 아니었다.

시계 소리를 뒤로 미뤄내며, 칼리안이 솔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면은 쓰지 않기로 했으니까.

"사실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레넌에게서 빼낸 증거를 써먹어볼까. 그냥 레넌을 잡아다 협박을 해볼까. 스승님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볼까. 전하께 얘기를 해볼까. 아니면 나도, 내 형제에게 뱀의 피를 줘 볼까."

실리케가 눈꼬리를 좁혔다. 칼리안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했다.

"독을 쓰는 것은 그리 내키질 않았고. 다른 것들은 뭐, 다 피해가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그냥 당신이 가진 패를 강제로 가져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딴 패는 앞으로도 영영 사용하지 못하도록. 두 번 다시, 독 따위를 쓸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칼리안이 손에 든 것을 실리케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려면 나도 뭔가를 걸어야 할텐데 당장은 가진 게 튼튼한 심장뿐이라. 그래서 그것이라도 한번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실리케의 연두색 눈이 칼리안의 손에 올려진 것을 바라봤다.

"독입니다. 은에도 반응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독이 아니라서 마법 시약에도 검출되지 않습니다. 아, 그럼 약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을 살리는 데 쓴다고도 볼 수 있으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실리케의 손가락이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았다. 칼리안의 속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 계획을 실리케가 모두 알아도 상관 없다는 듯,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이것을 먹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잠시 심장을 멎게 하는데 산 사람을 꼭 죽은 것처럼 만들어놓는다 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피신을 위해 소지하는 독이었다. 물론 세크리티아에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실리케가 독의 정체를 안다 해서 칼리안과 세크리티아를 연관지을 여지는 없었다.

칼리안은 정말로 신기한 물건을 본다는 눈으로 독인지 약인지 모를 그것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내가 이걸 먹더라도, 축복의 힘이 있어서 심장이 멈추지는 않을 테니까요."

"먹어도 소용 없는 약을 왜 가지고 왔을까."

"대신."

칼리안이 느린 목소리로 실리케의 의문에 대한 대답을 전했다.

"해독을 멈추겠죠."

독보다 덜 중요한 손바닥 상처가 낫지 않았던 것처럼.

축복의 힘은 심장이 멈추는 것보다 덜 중요한 독을 무시한다.

옆 집의 장미가 말라죽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도 지금의 칼리안보다 평온한 표정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심장이 멈추리라 말하는 칼리안의 태도는 그만큼 담담했다.

"축복의 힘이 이 독의 기운을 없애는 동안, 오늘까지 내가 열심히 먹은 독이 퍼질테고요. 물론 그렇다 해도 심장이 하도 튼튼해서······."

"안 죽어요. 고생은 좀 하겠지만. 대신, 당신은 조금 귀찮아질테고."

매일 조금씩 병들게 하는 정도의 독이 잠시 퍼지는 것으로는 죽지 않는다. 심장이 멈추지 않도록 한 뒤, 다시 해독을 시작할테니까.

칼리안의 커피잔에서 퐁당, 하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일부터 차를 보내지 않겠다 약속한다면 마시지 않겠습니다. 아픈 것은 나도 지긋지긋해서."

실리케는 그제야 칼리안의 의중을 파악했다.

죽지 않더라도 중독 증상은 나타날 것이다. 모두의 앞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면 누구나 독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증상만으로는 얼만큼의 양을 섭취했는지 알 수도 없으니 축복의 힘으로도 해독되지 않을 만큼의 양으로 독살을 시도했다고 보여질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 실리케는, 칼리안과 단 둘이 연회장에 있었다.

의심의 시선이 반드시 자신에게 닿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실리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맹랑하게도. 내가 네게 독을 주었다, 이런 말이라도 해서 나에게 누명을 씌우겠다는 생각이로구나."

"그것을 누명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런데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지금 내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당신만큼 간절할 사람이 없을 텐데."

실리케의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이 다시 드리워졌다.

어린 아이가 하루 종일 만들어 둔 모래성에 한쪽 발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그 좋은 기분에 가면을 벗은 실리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는 만들어 두었니?"

칼리안이 어린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분히 놀리는 것 같은 과장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증거! 그런 것이 필요합니까?"

칼리안이 스푼을 들어 커피를 천천히 저었다. 그러면서 실리케가 짚어낸 것을 정정해주었다.

"나는 당장 당신을 쫓아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스승님이 계신다지만 브리센 후작이 그 많은 기사들을 전부 끌고 오기라도 하면 제가 어떻게 이깁니까."

"다행히 알고는 있구나."

실리케가 웃으며 대답하자, 칼리안이 함께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당신이 더 이상 독을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라서. 그러니 증거 같은 건 필요없어요. 이번에는 그냥,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서 당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하도록 만드는 것까지만 할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아서 더 숨막히는 감옥도 있으니까."

의심만으로는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실리케였다.

"그런 감옥으로는 나를 붙들어 둘 수 없단다. 보이지 않는 감옥이라니. 겪어본 적 없었단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다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지금까지 숱하게 죄를 저지르고도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지 않은가.

실리케가 허리를 숙여 칼리안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이같이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네 어미 그리 보낸 것이 나라는 것을, 이 세상의 누가 모를까!"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처럼, 실리케가 이렇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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