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2)
하루 종일 날이 흐리더니 다음 날이 되자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물과 바람 소리 때문에 칼리안은 새벽같이 잠에서 깼다. 얀이 아침 맞이를 위해 칼리안의 방을 찾았을 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칼리안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좋은 꿈 꿨어?"
항상 자신이 묻던 아침 인사를 들은 얀이 어색한 얼굴로 칼리안의 인사를 받았다.
"네, 왕자님. 좋은 꿈 꾸셨습니까?"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차를 달라는 것이었다. 마뜩치 않은 얼굴로 건네는 차를 받은 칼리안이 그것을 한 입 마셨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찻잔에서 살짝 입을 뗐다.
'다르다.'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마시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만큼의 작은 차이였으나 분명했다.
이유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실리케가 독을 늘렸다는 것을.
칼리안이 잔에 다시 입술을 가져다 대며 살짝 웃었다.
'실리케. 독기가 올랐구나.'
축제 기간 동안 속만 뒤집어 놓으려고 했더니 이성도 뒤집어버린 모양이었다. 칼리안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으니까.
'이번에도 모르는 척 마실 것인가. 혹은 물릴 것인가.'
찰나와 같은 고민 끝에, 칼리안은 남은 차를 모두 마신 뒤 얀에게 돌려주었다.
'당장 죽을 만큼 양을 늘린 것이 아니라면 화요일까지는 큰 문제가 없을 테니.'
이런 사실을 모르는 채로 아침 준비를 끝낸 시녀들을 돌려보낸 얀에게 칼리안이 말했다.
"수요일에 두 명이 찾아올거야. 하프엘프 남매니까 놀라지 말고."
그 말에 얀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말했다.
"말씀하신 호위입니까?"
"응. 오빠 쪽이 키리에, 동생은 히나. 키리에가 호위야. 그런데 성도 모르는 상태라 신원 확인이 안되거든. 그래서 너에게 부탁을 좀 하고 싶은데."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얀이 살짝 웃었다. 왕궁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원 확인이 되어야 하는데 둘은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원 보증 말씀이십니까?"
"응. 신원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지그프리드에서 보증해주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경우라면 저희 가문보다는 마나실 경의 보증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예 경이 리베른에서부터 데려온 아이들이라 하면 성이 없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테니까요. 혹시 타국의 사람이라 안 된다 하면 그땐 저희 가문에서도 보증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다른 말을 하지는 못할 거예요."
칼리안이 얀을 다시 봤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 지금 좀 능력있는 사람 같아 보였어."
그 말에 헤벌쭉한 표정이 되었던 얀이 흠흠거리며 얼굴을 다시 고쳐 붙였다. 그리고선 칼리안의 셔츠 핀이 돌아간 것을 똑바로 고쳐준 뒤 물러나며 물었다.
"간혹 엘프들은 신력이 아닌 다른 것으로 치유의 힘을 쓰기도 한다던데요. 그 남매는 그런 능력은 없는 겁니까?"
칼리안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쳐 보이며 대답했다.
"치유력이 있다 해도 나에게 굳이 도움이 될 것도 아니고.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어."
"하긴. 축복의 힘이 있으니 그렇기는 하겠네요."
그때 갑자기 창 밖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쳤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창 밖을 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오늘 일정은 사냥 뿐이었지?"
"네. 조찬 후 사냥 대회가 있습니다······ 만."
"취소되겠네."
조금 아쉬웠다.
"축제 첫 날을 빼면 귀족들 앞에 나서지 않아서 기간이 더 지나기 전에 한번 더 눈도장을 찍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됐네."
"네. 오늘은 힘들 것 같네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창문에서 눈을 뗀 칼리안이 말했다.
"오늘 잠깐 스승님께 다녀와줘. 언제 가든 상관은 없고."
"네, 왕자님. 무엇을 전할까요?"
"전하께 화요일 회의를 10분 정도만 지연시켜주시도록 부탁해달라고 해줘."
"알겠습니다. 조찬 마치시면 바로 다녀올게요."
의도를 알기 어려운 말이겠으나 얀은 달리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칼리안은 그 외의 별다른 말 없이 준비를 마치고 식당으로 갔다.
* * *
플란츠는 나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플란츠도 축제 이후 계속 조찬에 나서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잘 됐다. 지금부터 화요일까지는 플란츠가 이 자리를 망쳐놓으면 안 되니까.'
유리창을 타고 어지러이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보는 칼리안의 귀에 식사를 마친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이 창 밖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상적인 대화가 나온 것도 그렇지만 칼리안이 란델에게 먼저 말을 붙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때문에 란델이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 깊은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았다.
그에, 칼리안도 고개를 돌려 란델을 향했다.
어쩐지 처음으로 그 눈을 제대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장미 정원에서 맞닥뜨렸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사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려 하는, 푸른 눈.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지 알 것 같아서 칼리안이 편안한 웃음을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산책을 했고, 장미를 봤습니다. 란델 형님께서 가꾸시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나서 말씀드린 겁니다. 다른 뜻 없습니다."
물론 의도까지 없지는 않았다.
이제 나를 좀 보라는 마음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래야, 화요일의 칼리안에게 란델이 힘을 보태 줄 수 있을 테니까.
란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정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짧은 말만 내려두고는 식당을 나갔다.
얀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자, 얀은 달이 두 개로 갈라지는 것을 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곧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가는 칼리안에게 얀이 다가와 작은 소란을 떨었다.
"장미라니요, 왕자님!"
칼리안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장미가 왜?"
"태어나셔서 처음으로 란델 왕자님께 먼저 말씀하신 거예요. 장미가 필 것 같다고, 의미라고는 개똥만큼도 없는 말을요!"
"개······?"
칼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제 말에 놀란 얀이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칼리안이 얀에게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너 요즘 자꾸 버릇이 없어지는데."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러니까 너같은 사람이 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느냐고. 칼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러다 돌연, 기침이 나왔다.
- 콜록!
장난처럼 울상을 짓던 얀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얀이 불안감을 가득 담은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아니야."
"······ 왕자님."
"어제 창문을 열고 잤어. 비가 올 줄을 모르고."
목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향에,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떴다.
* * *
도무지 그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내리던 비는 월요일의 오후가 되어서야 쏟아지기를 그만두었다. 그 뒤에는 마치 언제 비가 왔었느냐는 듯 티 없는 햇빛이 들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반가운 햇살에, 건물 사이사이에 이어진 빨랫줄에는 젖은 옷들이 한가득 널렸다.
겨울이 유난히 혹독한 카이리스에서 이제 완연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타고 여러가지 색의 옷들이 꽃잎처럼 흔들렸다. 보고 있는 마음에 절로 졸음이 밀려올 듯한 그런 봄날이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흔들거리는 옷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히나가 옆에 앉아있던 키리에에게 손짓을 보냈다. 수어였다.
- 반짝반짝.
테이블에 놓인 검을 애지중지 닦고 있던 키리에는 히나가 고개를 든 순간부터 이미 히나의 눈과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움직임을 느끼는 감각도 좋았지만 동생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하다 보니 히나가 조금만 움직여도 쳐다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히나. 햇빛이 반짝여?"
히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아니. 사람들. 반짝반짝, 기분 좋아 보여.
사람들이 반짝인다니. 키리에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나마도 히나의 앞에서만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본 히나의 손이 키리에를 가리켰다.
- 오빠도.
그 말에, 키리에는 멀리 보이는 왕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칼리안을 만났을 때 다쳤던 얼굴은 치료를 받아 이미 말끔히 나은 상태였다. 그래서 키리에는 그날보다 훨씬 더 좋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좋아."
- 왕궁, 내일이야.
히나는 굉장히 들뜬 얼굴이었다.
칼리안이 '닷새 뒤에 오라'고 말한 것의 의도는 분명 수요일이었다. 이들 남매를 만난 것이 금요일 새벽이었기 때문이다. 키리에도 그렇게 이해를 하였는데 히나는 달랐다.
칼리안을 만난 뒤 금요일 아침이 밝았으므로 금요일도 하루 뒤로 보아야 한다면서 화요일에 왕궁에 가야된다고 유난히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둘은 결국 중간 시간, 즉 화요일 저녁 때 왕궁에 가는 것으로 협의를 본 상태였다.
그 뒤로 히나는 이렇듯 왕궁에 가는 날을 손꼽아가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키리에가 다 닦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물었다.
"히나. 가면 다시 일해야 하는데, 괜찮아?"
히나가 위 아래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사흘만에 비추는 햇살보다 더 밝게 웃었다.
- 왕자님, 보고싶어.
그 말을 들은 키리에의 표정이 약간 경직되었다. 그러자 히나가 생긋 웃으며 몇 개의 동작을 덧붙였다.
- 잘생겼어. 오빠보다. 훨씬, 더. 많이.
눈에 넣어도 안아플 여동생의 손이 만들어내는 단어가 늘어날 때마다 검을 쥔 키리에의 손에 아주 조금씩 더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히나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했다.
사실 히나는 자신보다 키리에가 왕궁 갈 날을 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틈만 나면 여관 뒷마당에서 검을 휘두르고 검이 닳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닦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곧 히나의 손이 키리에의 앞에 있는 검을 가리켜 보였다.
- 칼, 어떻게 가지고 가?
당연히 왕궁에는 무기를 소지하고 들어갈 수 없었다. 옛 추억에 빠져 허우적 거리느라 검을 사줄 생각만 했지 그것을 어떻게 들고 왕궁에 들어올지는 생각 못한 칼리안의 실수였다. 키리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생각해 두셨겠지."
키리에는 벌써부터 칼리안에 대한 믿음이 차고 넘쳤다. 어쩐지 그것이 조금 과한 것 같았으나 히나는 굳이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 아이스크림, 또 사줘. 맛있었어.
어제 처음 먹어 본, 봄 딸기가 가득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생각한 히나가 행복한 얼굴을 하며 이렇게 졸랐다. 키리에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준 돈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가자. 사 줄께."
히나가 봄꽃처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 무엇보다 더 반짝이는 동생을 보는 키리에의 얼굴에도 한번 더 작은 미소가 피어 올랐다.
* * *
사흘간 계속된 폭우로 마지막 조경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아 아스트리샤에 세워진 왕립 미술관 개관식이 일주일 미뤄졌다.
덕분에 그 시간 만큼 여유가 생겨야 했으나 르메인은 그런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마법사 때문이었다.
"한번 봐주시지요."
르메인이 앞에 놓인 서류 뭉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족히 한 뼘은 넘을 두께를 본 르메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나에게 아직도 불만이 있나."
날카로운 선을 가진 앨런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한가로운 늙은이가 소일거리를 좀 마련했다 여기시지요."
애초에 늙었다고 할 나이도 아니었거니와 저런 말을 해도 될 외양도 아니었건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르메인은 본래부터 들고 있던 서류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흘깃 쳐다 본 앨런이 입을 열었다.
"엘린느는 그런 것까지 보지는 않던데 열심이시군요."
"그런가."
자칫 비꼬는 것으로 들릴 법한 말이었으나 그런 의도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앨런을 처음 만났던 날에 하도 비꼼을 많이 당했더니 비교가 되었다.
잠시 리베른의 국왕을 떠올려보던 르메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 여자 만큼 태평한 성격이 되질 못하네."
곧 앨런의 서류 뭉치를 든 채 소파로 걸어간 르메인이 안경을 쓰며 말했다.
"앉지."
고개를 끄덕인 앨런이 르메인의 맞은편에 앉았고, 곧 시종장이 들어와 두 잔의 차와 디저트를 내려놓고 나갔다. 르메인이 차 향을 음미하듯 입에 머금다 삼키고는 말했다.
"외박을 했던데."
"일거리를 보아 달라 하였더니 칼리안 왕자님 말씀을 하십니까."
"걱정이 되어 그러네."
"한참 밖에 나가고 싶어 할 나이 아닙니까."
"그리해도 좋을 상태인가?"
독에서 벗어났는지를 묻는 말임을 알아들은 앨런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구체적인 사정을 전해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간단하게만 대답을 전했다.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 중입니다. 왕자님 성격이 워낙 신중하신 터라, 지금은 우선 지켜보고 있습니다."
"독이 든 것을 알면서 마신단 말인가?"
조금 높아진 르메인의 목소리에, 앨런이 진정하라는 듯 말했다.
"약도 함께 들이고 있으니 당장 위험한 상태는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듯 하니 두고 보시지요."
"······경을 통해 전해 듣는 칼리안은 나를 항상 당황하게 하는군. 다른 이들이 전해오던 말과 너무 다르니."
앨런은 가벼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그러다 '전해들었다'는 말에 앨런이 또 훈계를 둘까 싶었는지, 르메인이 말을 더 보탰다.
"이제 플란츠와 비슷하고, 란델보다는 작고. 내 어깨 아래까지 온다는 것은 알고 있네."
칼리안의 키.
관심을 가지려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르메인이 한참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러니······ 그대가 말하는 그 신중함 때문에 내가 또 자책할 일은 없었으면 하네."
앨런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가방 속에서 또 하나의 서류 뭉치를 꺼내 르메인에게 건넸다.
"얇은 가방 속에 무슨 종이가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자꾸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 같자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굉장히 놀랐겠으나 앨런은 르메인이 얼마나 무표정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입을 열었다.
"무료하실 때 한 번 읽어 보시지요."
"또 무엇인가?"
"그리핀의 날개를 잠시 접을 수 있을까 하여 모아보았습니다."
실리케에 대해 조사했던 내용들을 추린 서류였다. 칼리안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는데, 몇 장 뒤적이던 르메인이 그것을 도로 옆으로 내려놓았다. 자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용 없을 짓을 했군."
"이미 알고 계시는 내용인가 봅니다."
앨런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입에 담았다.
차의 맛 때문인지 르메인의 목소리 때문인지 몰라도 쓴 맛이 확 느껴졌다.
달그락, 하고 앨런이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앞으로도 그딴 소리나 계속 하실 요량이라면 모르겠으나."
앨런이 초콜릿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입이 썼던 탓에 이번에는 단 맛이 확 올라왔다. 앨런의 손가락이 르메인의 무릎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
"만약 아니시라면, 이제 뒤집어 보는 것이 어떠신지."
그것이 서류든.
아니면 이 나라든.
무례한 말투는 이제 그냥 알아서 걸러 듣기로 한 르메인이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곧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변해갔다.
앨런의 입 안에서 초콜릿이 다 녹아 사라졌을 때 쯤, 가늘게 떨리는 르메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법사단."
"마음에 드십니까?"
능구렁이 같은 말이었다. 이미 르메인이 같은 것을 고민중이라는 이야기를 칼리안에게 들어놓고서도 의중을 떠보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의 생각이지?"
"저는 아닙니다. 그저 쓰임새 많은 스승일 뿐이니."
"그 아이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가."
르메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르메인은 다시 서류를 넘겨가며 앨런과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다 다시 밝아오도록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