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1)
아침이 되어서야 궁에 돌아와 한 숨을 자고 일어나니 눈이 시뻘겋게 변한 얀이 바로 옆에 앉아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뜨악한 칼리안이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뒤로 뺐다.
"깜짝아."
얀의 눈에 핏줄이 서고 눈 밑이 거무죽죽한 것이 도무지 잠을 잔 모양새로 보기가 어려웠다.
"밤새 기다렸으니 너도 좀 자라고 했잖······."
"왕자님."
진지한 표정을 지은 얀이 칼리안의 말을 잘랐다.
"모닝 티, 왜 드십니까?"
독이 들었는지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 칼리안이 지레 뚱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네가 줬잖아."
작은 책망을 담은 말이었다.
물론 독이 든 차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칼리안도 독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단지 아침마다 저 차를 꼬박꼬박 가져다 준 둔하디 둔한 성실함에 아주 조금 심술이 났을 뿐이었다.
그런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고자 한 것의 답을 듣지 못한 얀은 침대 옆의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마시지 않은 모닝 티가 있었다.
얀은 그것을 들어 주저 없이 제 입으로 가져갔다.
칼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 탁!
칼리안이 얀의 입에 닿으려는 찻잔을 뺏어들었다. 그 바람에 찻물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갈색의 물이 카펫에 스미는 것을 쳐다보던 얀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꼴을 본 칼리안도 화가 치밀었다.
숨긴 것을 말하라며 죽이려고 들질 않나, 죽으려고 들질 않나.
곱게 물어보질 않고 다들 왜 이렇게 극단적인지!
"뭐하는 짓이야!"
얀을 향해 무섭게 소리친 칼리안이 다급히 손을 뻗어 얀의 얼굴을 살폈다.
"삼켰어?"
얀이 칼리안의 손을 치웠다. 평소 같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그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말 없는 얀이 답답해진 칼리안은 다시 소리를 높였다.
"먹었냐고!"
"안 먹었습니다!"
얀이 마주 소리질렀다. 칼리안은 그런 얀을 질책하지 않았다. 잠시 뒤, 얀이 입을 열었다.
"제가 제 손으로 왕자님께 독을 드렸군요."
그리고는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 표정에 얀이 하고 싶은 말이 모조리 드러났다. 온갖 욕설과 분노, 후회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든 것은 칼리안이 아닌 얀 스스로를 향해 있었다.
"칼도 못 쓰시는 분이 나이프를 구해오셨기에 왜일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그놈의 나이프. 괜히 샀다!
"왕자님의 상태와 연관 짓게 됐습니다. 마나실 경이 준 약을 떠올리니 리베른에서 독살당한 마나실 경의 아드님이 생각났고."
칼리안이 깜짝 놀라 얀을 쳐다봤다.
앨런의 일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제야 자신을 처음 보았을 때 앨런이 왜 그렇게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는지, 어떻게 자신의 상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는지가 이해되었다.
"그러다 보니 독을 염두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다가. 모닝 티, 저것이 아닐까 하고."
찻잔을 뺏었을 때 이미 긍정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성격에 혹여 자책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얀은 생각보다 냉철하게 대응했다.
"······ 실리케입니까?"
평소 얀은 실리케를 저리 부르지 않았다.
맞다고 했다가는 당장이라도 헤이시아 궁에 쳐들어갈 태세였다. 칼리안이 그런 얀을 잠시 바라보다가 가만히 대답했다.
"왜. 복수해주려고?"
"못할 것도 없지요."
차갑게 식은 목소리였다. 얀의 주먹에서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끼리들은 그냥 있어. 전쟁 나."
뭔가를 말하려던 얀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칼리안이 한 소리를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얀은 한참동안 말을 잃은 채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러다 결국은 놀란 목소리가 입술 새를 비집고 나왔다.
"······헐."
애초에 슬레이만과 닮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하루 종일 얀과 붙어다니는 칼리안이 몰라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설마설마 하기는 했으나, 앨런을 붙들려 왕궁을 나갔음을 알았을 르메인이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완전히 눈치를 챘다. 물론 그들을 코끼리라 부르는 것은 앨런 덕에 알았다.
칼리안은 앞에 앉아 눈을 꿈뻑거리는 새끼 코끼리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차 하나 물리자고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전쟁을 불러올 수는 없지. 그러니 너는 개입하면 안돼. 내 일이니까 그냥 둬."
초식동물은 초식동물 답게.
그들의 신념이 상처 입지 않도록.
"어차피 화요일에 해결 될 거야."
느긋한 목소리로 말한 칼리안이 잔에 남아 있던 차를 마셨다.
* * *
칼리안이 마차를 보내 앨런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얀이 예상했던대로 사절단 송별식과 오찬이 왕자들의 참석 없이 진행되어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앨런은 칼리안을 만나기가 무섭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그간 마법사들이 모아둔 정보들, 즉 실리케가 저지른 일들의 정황을 추린 것이었다. 칼리안이 반가운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협회에도 고생 많았다고 꼭 전해주세요."
"가져와 달라고 하셔서 드리기는 합니다만 보시다시피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칼리안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니까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것을 나중에 보기 위해 일단 금고에 넣어두도록 한 칼리안이 앨런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앨런이 진행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잠시 걸으시죠."
하늘이 계속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와 걷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앨런과의 대화 내용이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한 칼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섰고, 앨런이 묵묵히 발을 옮겼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이 그렇게 운을 뗀 것은, 이 곳에 온 첫날 시스파니안 조각상을 보며 분을 삼켰던 바로 그 자리를 지나칠 즈음이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목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둘의 주변에 얇은 사일런트 막이 생겼다. 그런데 둘이 걷는 걸음을 따라 막도 함께 움직였다. 그 막을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면 얀이 앨런에게 할 말이 좀 있었을 터였다.
"마법이 있었는데 굳이 나올 필요가 없었네요."
칼리안이 겸연쩍게 웃었다.
"마법사 스승님을 두니 좋군요."
"편히 말씀하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앨런이 칼리안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제가 본격적으로 마법에 손을 대면 실리케든 브리센 후작이든 견제를 하고 싶어 할 겁니다. 어떻게든 방해할 명분을 만들려고 머리를 굴리겠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심해질테고요. 물론 스승님의 이름이나 협회만으로도 대응할 수는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스승님께서 보다 제대로 된 세력을 가지시는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앨런이 슬쩍 웃었다. 말을 꺼내는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저를 방패로 쓰실 생각입니까?"
"아시다시피 쓰임새가 너무 많으시니. 다만 방패라기보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을 마저 정리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무기입니다. 브리센의 기사단을 견제할 정도는 될 테고요."
앨런이 살짝 웃었다. 본격적으로 재미있는 일이 생기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기대되는군요."
"네. 스승님 마음에도 드실 겁니다."
"그럼 제가 어떤 무기가 되어 드리면 될는지요?"
둘의 걸음이 장미 정원이 있는 곳에 들어섰을 때 쯤 칼리안의 대답이 들려왔다.
"마법사단."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들은 앨런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단도 아니고 마법사단이라니.
"말 그대로 마법사로 구성된 군대입니다."
카이리스의 마법사단, 발칸.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칼리안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냈다.
어찌 잊을까.
베른의 생과 세크리티아를 앗아갔던, 오로지 마법사로만 이루어진 군대의 힘을!
- 하얀 악마들.
세크리티아의 사람들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하얀 갑옷과 하얀 망토, 그리고 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들이 나타나면, 어김 없이 재앙이 내렸다.
성곽을 파괴하고 계곡을 메꾸어 길을 내고, 도시를 불태우며 기사들을 얼려버린 집단. 속수무책으로 세크리티아를 잃게 한 그들은 진정 악마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기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법사단을 만드는 겁니다."
한 번 더 힘주어 말한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겼다. 의외로 앨런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다. 칼리안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거나 혹은 거부감이 든 까닭은 아니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마법사라는 족속을 아시지 않습니까. 단체 행동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기사처럼 함께 훈련받고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반응이었다. 모두가 그랬으니까. 르메인이 마법사들을 모아 군대를 만들겠다 했을 때, 비웃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들었다.
지금 앨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들로 어찌 군대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군대가 제대로 돌아가기는 하겠는가? 라고.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말보다 확신을 주는 대답이었다. 이미 지난 과거이자 미래에 대한 증언이었으니까.
"그것도, 이 카이리스에서 해냈습니다. 오로지 르메인의 손 안에서 이루어졌던 일이예요."
"허."
앨런이 헛웃음 소리를 냈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르메인이 마법사를 홀대하던 입장을 하루 아침에 바꾸어 마법사단을 만든다 했을 때, 브리센에서는 그에 대해 반대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들었습니다.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덕분에 만들어졌습니다. 한 번 가능했으니 시기를 앞당긴다 하여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앨런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만들고 운영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알려주어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앨런의 생각을 잠시 방해했다.
"제대로 된 군대가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단이 완전한 모습을 갖춘 직후 르메인이 죽었습니다. 의문사였어요."
어떻게 죽었는지 그 사인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완성된 마법사단은 왕위를 이어 받은 플란츠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단의 힘은 르메인이 아닌 플란츠가 실감했고, 세크리티아는 통감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위험할테고요. 단순히 스승님의 명성으로 마법사를 모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요."
"위험한 일이니 할 수 있겠는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위험이 따르니 참고하라는 소리가 맞으신지요."
"네. 맞습니다. 필요한 일이지만 걱정이 되어서요."
새롭고 위험한 일을 맡기는 제자의 담담한 얼굴을 쳐다보던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제가, 마법을 좀 잘 씁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시작은 쉽지 않겠군요."
만약 앨런이 나서서 마법사단을 만든다 하면 브리센 가문은 이전에 르메인이 일을 추진했을 때처럼 무시하고 넘기지만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방해가 있을 터였다.
"네. 그래서 지금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잠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쳐다보다,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만간 르메인이 실리케와 선물을 주고 받을 일이 한번 더 생길 테니까요. 플란츠의 실수를 봐주는 대신 브리센 상단의 이득을 일부 줄인 것과 같은 일이요. 이번엔 실리케의 실수를 봐주는 대신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드디어 독차를 물리실 생각이십니까."
앨런이 자신의 말 뜻을 곧바로 알아 듣자 칼리안이 혀를 내둘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람을 속이려고 했는지.
"눈치 진짜 빠르시네요. 맞습니다. 차, 이제 치우려고요. 다만 이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이번 일로 실리케를 처벌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 다른 방법을 쓸 생각이고요."
마법사의 증언과 독을 지닌 크리모사를 수입했다는 기록만으로는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독차를 주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독차를 마신 것이 밝혀지면 칼리안의 주변인들이 줄줄이 피해를 보게 되므로 칼리안은 그것으로 실리케를 처벌할 생각을 아예 접었다.
"어떤 방법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칼리안이 대답 대신 옅은 미소만 지었다. 아직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실리케가 제게 독을 썼다는 것을 협상의 빌미로 잡을 수 있도록은 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전 플란츠의 말실수에 이어 실리케까지 사고를 친 셈이 되니, 브리센에서도 큰 소리를 내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그 때 브리센 후작과 실리케에게 마법사단 창설을 방해하지 말라 요구하시면 됩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를 물리는 일에 대해서는 마법사 협회에서 도와주실 것이 있습니다. 정리가 되면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언제든 말씀하시지요."
흔쾌히 대답한 앨런이 잠시 누군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왕자님의 독차 문제가 해결되면 르메인도 한시름 놓겠군요."
"르메인이 한시름을 놓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실 제가 이 곳에 왔던 날, 르메인의 작태에 화를 좀 내었습니다. 그러다 실리케가 왕자님께 어떤 선물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앨런이 이런 말과 함께 당시 무슨 말이 오갔는지를 설명했다. 열심히 편을 들어준 것에 감사를 전한 칼리안이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덕분에 이번 일로 얻을 것이 늘어나겠네요. 운이 좀 따라야 되겠지만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왕자를 살해하려 한 정도의 큰 실책을 저들이 언제 또 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반드시 이번에 협상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마법사단의 윤곽이라도 계획이 되어있어야 하고요. 그러니 곧바로 시작해주세요. 르메인과도 의견을 나눠봐 주시고요. 분명 르메인이 생각하던 것이 많을 겁니다."
"늙은 스승을 너무 부리시는군요."
"몹시 팔팔하시다고 얀이 그러던데요. 그래서 가책 없이 부리려고 합니다."
앨런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사일런트 막 안을 작게 울렸다.
"그리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