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7화 (28/527)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7)

칼리안은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칼리안의 목 앞에서 나이프가 멈추었다는 것을, 막지 않아도 될 공격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손에 들린 칼이 그리도 원망스러울 줄은 몰랐다.

조금 전 벽에 날아가 박힌 나이프가 저절로 뽑히더니 앨런의 손 안으로 들어갔다. 칼날에 깊은 검흔이 남아 있었다.

"정말 빠르십니다. 그런 몸으로."

그렇게 입을 연 앨런은 그리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나이프를 막을 것이라는 것을 익히 예상했다는 태도였다. 입을 열지 못하는 칼리안을 보며, 앨런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입을 열고자 앨런이 대신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뵈었던 날. 왕자님이 한참 전부터 저를 기다리고 서 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궁금했지만 우연이겠거니 생각했지요. 그것을 묻기엔 왕자님께서 이미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고 다른 생각을 하기엔 조금 바빴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들켰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 않고 칼리안을 도왔던 사람에게 믿음을 운운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그런데 이상한 것이 점점 늘어나더군요. 르메인은 왕자님이 말을 무서워한다고 하였고 귀족들은 왕자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며 신기해하고. 공연장에 갔던 마법사는 왕자님이 사고를 막아냈다 하지를 않나."

칼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연장의 일을 앨런이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까 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또 있었습니다."

허탈한 웃음이 칼리안의 입가에 맴돌았다. 또 있다니. 이래서는 얀이 왜 칼리안을 의심하지 않는지를 고민해야 할 판이었다.

"중독됐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 왕자님 눈에 살기가 보였습니다. 헌데 또 금방 지우더군요. 그 눈은 나비 한 마리 죽여보지 못했을 왕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에 어지간히도 많은 피를 묻혀본 자나 그런 것을 뿌리고 멋대로 거둘 줄 아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 하나 뒤얽힌 실타래가 풀리질 않아서, 저는 밤새 그것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앨런이 손에 들린 나이프를 살짝 들어보였다.

"시스파니안이 만든 것입니다. 숨긴 무기를 보여준다기에 올려두어 보았는데 화분이었던 것이 나이프로 바뀌더군요. 왕자님께서 나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고, 또 왕자님은 살기를 내보일 줄 아는 분이니. 혹시나 하여 건네드려 보았습니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실소하며 대꾸했다.

"목젖을 뚫을 기세로 건네주셨는데."

앨런은 고개 숙여 다시 한번 사과의 뜻을 보인 뒤 말했다.

"저는 왕자님을 믿고 제 삶의 한 면을 고스란히 맡겼습니다. 처음으로 만든 제자라는 놈이 꽁꽁 숨겨놓고 풀어놓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의심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설명해주시지요. 듣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이 진짜 칼리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니, 더 숨길 것도 없었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은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꺼내놓기로 했다. 그리하여 조용히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베른입니다. 본래의 제 이름입니다. 베른 세크리티아."

세크리티아.

앨런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 시점에 튀어나온 그 이름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체이스, 그리고······.

칼리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이름을 들은 앨런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탓이다. 때문에 계속되는 칼리안의 말이 앨런에게는 진실을 원했으니 모두 듣고 함께 감당하라는 듯 느껴졌다.

"지금의 왕세자, 제가 있던 시간에서는 왕이셨던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의 동생이었습니다. 기사였고요. 그래서 말도 타고 살기도 다루고 칼도 좀 쓸 줄 압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크리티아의 왕자였던 베른이 세자위를 받지 않으려 기사가 되고 체이스가 왕위에 오른 것. 그리고 이어진 카이리스와의 전쟁.

수도 세크레타를 둘러싼 학살과도 같았던 마지막 일주일.

왕을 수호해야 할 친위대까지 왕을 두고 성 밖으로 나서야만 했던 절망적인 상황. 모두가 죽고 홀로 성문 앞을 지키던 베른마저 결국 죽음을 맞이한 것까지. 칼리안에게 있어 과거가 된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한번 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세크리티아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물건입니다."

- 달그락.

앨런이 테이블에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다음 말을 들으면, 그것을 떨굴 것 같아서였다.

"스승님께서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시간의 축이라는 그것은."

이번엔 앨런이 눈을 감았다.

나이프를 내려놓으니 대신 심장을 떨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앨런의 얼굴에 그 동안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혼란스러움이 나타났다.

"······ 시간을 되돌린다 하였지요."

앨런의 말에 칼리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은 소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런 칼리안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앨런이 물었다.

"언제로 돌아오셨습니까."

칼리안의 입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 아닌가.

당장 설명부터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앨런의 얼굴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손 끝이 떨려오는 것을 간신히 붙든 칼리안이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달······ 한 달 전입니다. 눈을 뜨니 제 시종 얀이 저를 깨우고 있었습니다. 10년의 시간을 앞당긴 채였습니다."

앨런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말 없이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왜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밤새 고민을 해놓고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므로, 칼리안은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다렸다.

비로소 앨런의 입이 열린 것은 어느새 창문 틈 새로 햇살이 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미 독에 당한 상태셨을 테고. 본래의 칼리안 왕자가 어찌 죽는지도 알고 계셨을 것이니. 제가 올 것을 알았다는 듯 기다리다 나온 것은 그런 이유였군요."

칼리안이 침통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맞습니다. 스승님을 만났던 날의 일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첫날의 패기는 다 어디다 두고 어미 잃은 고양이 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칼리안을 지긋이 쳐다보던 앨런이 말했다.

"어차피 왕자님 앞길에 쓰려고 저를 찾으셨던 것이니 미리 알고 기다렸든 아니든 상관치 않습니다. 그런 일로 실망하지 않으니 마음 쓰지 마시지요."

앨런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간의 축을 어찌 알았는지 말해주기 전에 칼리안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다만 왕자님께서 먼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앨런이 꺼내는 말은 모두 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세크리티아에는 체이스 왕세자 뿐입니다. 체이스는 본래부터 외아들이었고, 왕비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아마도 모르시는 듯 하여."

칼리안이 말 없이 앨런의 눈을 보았다.

앨런이 우려했던 것 같은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 있으니 베른이 또 있을 수는 없으리라고요. 그것이 이른 죽음일지 무엇일지 몰라서 어찌 사라졌을지가 걱정이었는데. 아예 태어나지 않은 것이군요."

"네. 그리 된 것 같습니다."

삶이 지워진 것은 어떤 기분일지 가늠이 어려웠다. 때문에 앨런은 어줍잖은 위로 대신 그렇게만 말했고 칼리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다행한 일입니다."

어찌하겠는가. 칼리안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이미 베른도 다른 이의 생을 빼앗지 않았는가.

"허면, 본래의 칼리안 왕자는 죽은 것입니까?"

앨런은 마치 칼리안이 누구를 떠올렸는지를 읽은 것처럼 물었다. 지금 이 순간도 옛 칼리안이 살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그리고 심장을 가리켜 보이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아직 있습니다. 예정된 날이 되면 떠날 것 같지만요."

칼리안의 말에 대답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그것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문득 알게 되었다. 항상 질문을 해야 기억이 떠올랐던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옛 칼리안의 대답이었기 때문이었음을.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을 겪어 제가 이 곳에 들어온 것인지는 알려주질 않습니다. 옛 칼리안도 모르는 상태일 수도 있고요."

앨런이 고개를 끄덕여 알겠다는 뜻을 전했다.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시간의 축. 어떻게 아십니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앨런이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답했다.

"작년에 세크리티아를 방문했습니다. 체이스가 비밀리에 불렀지요. 시간의 축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며 그것에 대한 자문을 구했습니다. 저는 체이스만 만난 후 돌아왔으니 이전 시간에 같은 일이 있었다 해도 왕자님은 모르셨을 겁니다."

칼리안이 바짝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따로이 알아보고 계셨던 거군요."

"혹시 기대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죄송하게도 그에 대해 달리 알아낸 것은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것이라 생각 했습니다. 스승님께서 알아내신 것이 있었다면 저도 알고 있었어야 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여 보인 앨런이 다시 말했다.

"시간의 축이라는 그 물건이 아무래도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닌 듯 하여, 세렌티의 신물은 아닐까 하는 의견은 주고 받았습니다만."

"신물은 신관들이 쓰는 것 아닙니까? 신력을 대체하는 수단이지 신물 자체가 다른 능력을 가졌던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양신 전쟁으로 악신이 봉인되고 주신 세렌티는 잠들었다.

그 이후로 신관들은 신력을 발현하지 못했다. 때문에 세렌티의 신물에 남아있는 신력을 소모하여 치유력을 행사했다.

"맞습니다. 때문에 결국은 의문만 남았지요. 게다가 이제는 그것에 대해 확인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앨런의 손이 칼리안을 향했다.

"한 달 전, 시간의 축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이렇게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온 모양이군요. 아무튼 체이스나 왕자님이나 이 일로 저를 찾으신 셈이니 형제는 형제라고 해야 할지."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조금 아프게 웃었다.

앨런은 그것을 보지 못한 척 했다. 대신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나이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저를 처음 보셨던 날. 왕자님께서 원하는 것은 왕좌가 아니라 하셨었는데.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대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칼리안이 선뜻 답했다.

"전쟁을 막으려 했습니다."

"전쟁의 원인이었던 시간의 축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아도 되지 않을는지."

칼리안이 답했다.

"원인을 모릅니다. 플란츠가 시간의 축을 가지려고 했던 이유를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원인이 남아있다면 결국 문제는 되풀이 될 뿐이니 그것을 알아내어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체이스를 위해서입니까?"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봤다. 질문의 의도를 알기 어려웠다. 그것을 눈치챈 앨런이 설명을 덧붙였다.

"체이스를 만나보고 제가 아주 감탄했습니다. 인품이며 학식이며 능력이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더군요. 카이리스 왕자 셋을 다 합쳐도 체이스 하나만 못 할 겁니다."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었다. 무슨 말로 설명해도 체이스를 온전히 칭찬할 수는 없으리라.

"맞습니다. 형님은 더 없이 훌륭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카이리스의 3왕자는 그리 훌륭한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과거에 얽매여 살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칼리안이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곳에 온 첫 날에 베른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은 버렸습니다."

앨런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탁자의 나이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한번 물어볼 만한 이는 있지요. 저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저나 체이스는 만나지 못하지만 왕자님께서는 머지않아 만나시게 될."

앨런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린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들어 앨런을 쳐다봤다. 답을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젤리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이름이 떠올랐다.

"시스파니안이 있군요."

로젤리타, 카이리스 왕자의 성인식.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를 찾아가 진짜 왕족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로젤리타에 나선 왕자는 시스파니안의 의지와 만난다 하였다.

"그러니 독차는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십시오. 코끼리들의 땅, 지그프리드의 영지는 꽤 멉니다. 준비하셔야지요."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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