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5화 (26/527)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5)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후드를 벗지는 않았다.

칼리안의 뒤에는 칼을 찬 장정 넷이 문을 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철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쳐다보는 중이었다. 칼리안이 지금껏 낸 증서들이었다.

"3플로린으로 6천 플로린을 넘게 벌다니. 대단하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특별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증서들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칼리안을 이렇게 불러 온 이유는 뻔했다. 금액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저 돈을 다 꺼내주려면 엄청난 손해를 보아야 하니 아마도 적당한 협상이나 협박을 해올 것이라 생각했던 칼리안도 스스럼 없이 따라 나선 길이었다.

"아무리 도박장을 운영한다지만 우리도 상도의는 있는지라. 돈은 내어 드리겠소."

그렇게 말한 남자는 가볍게 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 그러자 남자의 뒤에 있던 이가 주머니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의외로 순순히 돈을 내어놓자 칼리안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후드에 가려져 그 표정을 볼 수는 없었겠으나 고개가 움직이는 것을 본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데 왜 불렀느냐면."

남자가 칼리안 쪽으로 돈 주머니를 열어 보여주었다. 금화가 들은 것을 확인하라는 듯한 모양새였는데 칼리안은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어린애한테 이런 큰 돈을 쥐어 주자니 좀 걱정이 되서 말이지."

어느새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키리에에게 소리지르는 것을 누군가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들이 하는 말은 '돈을 주기는 주겠지만 지금은 못 준다. 다 커서 와라.' 이런 뜻인 것이다. 마치 누가 짜 둔 순서라도 있는 양, 방금 돈 주머니를 내려놓은 이가 키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큰 돈인 것은 아는데."

후드 아래로 간신히 보이는 것은 입술 뿐이었다. 그 입술이 웃고 있었다. 분명한 소년의 목소리였으나 당황하거나 놀란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칼리안이 고개를 약간 움직이며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협상 정도는 걸어올 줄 알았더니."

남자는 대답 대신 칼리안의 머리를 가리켜보였다.

"일단 그 답답한 모자나 좀 벗지, 꼬마야."

칼리안이 손을 들어 모자 끝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오히려 조금 더 깊숙이 눌러 쓰며 짧게 대답했다.

"안돼."

"사람이 눈을 보고 얘기해야지. 안 그래?"

꽤 큰 돈을 가지고 있던 것을 보면 평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호위도 없이 온 것을 보면 그리 높은 가문일 리도 없었다. 그런 확신이 있으니 남자도 이렇게 위 아래 없이 굴고 있는 것이다.

"이거 벗으면."

칼리안의 입술 끝이 비틀려 올라갔다. 플란츠에게 배운, 사람 심기를 뒤트는 데 아주 일가견이 있는 웃음이었다.

"곤란한 일이 생겨. 진짜로."

플란츠의 것을 꼭 닮은 웃음은 아주 탁월한 효과를 냈다.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뒤에 있던 이를 향해 턱짓을 한 것이다. 돈 주머니를 꺼내놓았던 사내가 칼리안에게로 걸어가 손을 뻗어 후드를 잡아챘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도 움직였다.

- 쉬익!

칼리안은 왼손을 들어 벗겨지려는 후드 끝을 붙들고 그 손에 채워진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뒤로 돌아 후드를 잡고 있던 이의 손등을 내리그었다.

"으아악!"

사내가 제 손을 붙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 칼리안은 어느새 다시 자리에 앉은 뒤였다.

"뭐, 뭐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칼리안의 컨디션은 최상이었으니 말라 비틀어진 몸으로도 이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잠깐, 그리고 한 두 번 뿐이겠지만 상관 없었다.

동료의 비명에 문을 막고 있던 네 명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칼리안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뻗어나왔다.

명백한 살의를 담은 짙은 살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남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역시 기사들의 살기라는 것을 상대해 봤으나 확연히 달랐다. 칼리안 주변의 남자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칼 끝이 떨려왔다.

이런 곳에서 살아온 놈들은 눈치가 빠르다.

제 몸 사리지 않고 끝까지 칼을 맞대는 기사와는 다르다. 힘의 우위를 깨달으면 웬만해선 더 덤비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이 가지고 얕보는 건 재미 없어. 얼굴은 궁금해하지 말고. 칼 넣고, 시끄러운 애 치우고. 협상 먼저, 협박은 그 뒤에."

지금 뒤에서 손이 반쯤 잘려나간 이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음에도 앞에 앉은 칼리안의 목소리는 너무나 태연했다.

"알아들었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던 살기가 씻은 듯이 가라앉고,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후드 때문에 입만 보이니 더 살벌한 것이다.

'젠장! 칼 쓰는 미친놈을 불러들였어!'

밖의 수하들을 부르면 이길 수 있을까. 남자가 재빨리 머리를 굴려 힘의 차이를 가늠했다.

'움직임이 빠르다. 굼뜬 놈들이 저 속도를 따라갈 리가 없어. 게다가 저런 살기를 뿜어대는데 반은 제대로 칼도 못 뽑고 뒈질 판이다.'

계산의 결과는 간단했다. 괜히 싸워서 피도 보고 돈도 뺏기느니 돈만 뺏기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직접 검을 겨뤄보지도 않고 질 것을 걱정하여 발을 빼는 것이다. 칼리안이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돈을 다 줘버리면 나도 죽은 목숨인데. 어쩐다?'

남자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센 척 한답시고 저 돈을 다 꺼내오긴 했어도 정말로 저 큰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곤란했다. 당장의 사업에도 차질이 생길테고 상납금도 모자랐다.

그래도 칼리안이 협상을 얘기했으니 남자는 그것을 믿고 사정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꺼번에 돈을 주는 것은 어렵소. 지내는 곳을 알려주면 매주 돈을 나누어 보내겠소."

- 까드득!

칼리안의 나이프 끝이 철 책상을 긁어냈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칼리안이 말했다.

"칼, 시끄러운 애."

조금 전에 칼리안이 말했던 것을 상기한 남자가 손짓을 했다. 네 명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고 그 중 두 명이 비명 지르는 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나갔다.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됐소? 이제, 지내는 곳을 알려주면······."

- 까드득!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소리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사실 저 돈을 한꺼번에 주는 것은 어렵소. 우리도 매주 상납금을 올려야······!"

조용히 하라는 듯, 칼리안이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알아봐야 귀찮을 얘기는 하지 말고."

"아니, 줄 돈이 없는데 어쩌라는 거요?"

남자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뜨끔한 듯 죽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아니. 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그냥 얘기해달라는 뜻이오."

칼리안이 나이프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돈은 안 받을게."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칼리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남자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졌다.

"대신 사람 하나 줘. 괴물 눈알."

"아니, 그것은······!"

- 까드득!

"아 씨, 진짜!"

남자가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무리한 요구에 악다구니가 생긴 것이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도 남자의 심경 변화를 눈치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주면 싸움이 벌어질 테고 그럼 별볼 일 없는 그냥 어린애라는 것을 들키게 된다. 그러니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된다.

칼리안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제 막 돈이 되기 시작한 놈인데다, 마스터께서······!"

그렇게 말하던 남자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의 나이프가, 검도 아닌 그것이 작은 울림 소리를 내는 것을 들은 탓이다.

- 우우웅!

곧 푸른 기운이 나이프를 감싸며 넘실거리더니 예리한 날이 되어 쭉 뻗어나갔다.

무엇이든 잘라버릴 것 같은 푸른 오러가 나이프에 맺혔다.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말로만 듣던 것을 눈 앞에서 본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설마'하는 눈으로 칼리안의 손 끝을 쳐다봤다. 그 설마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 칼리안이 검의 길이 만큼의 오러가 맺힌 나이프를 들어 그대로 남자의 코앞에다 내리찍었다.

남자가 움찔 놀라며 어깨를 확 움츠렸다.

"······!"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두꺼운 철제 테이블이 무슨 푸딩이라도 된다는 듯 소리 없이 내리꽂힌 나이프가 테이블을 뚫고 쑥 들어갔다. 푸른 빛의 잔상만 악몽처럼 길게 남았다.

테이블 밑, 양 무릎 사이를 스치듯 지나간 후 사라진 오러의 날에서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남자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바지가 길게 잘려 맨 다리가 훤히 보였다.

"당신 뭐야!"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울컥, 몸 속에서 핏물이 치고 올라왔다.

칼리안은 양 손으로 테이블 귀퉁이를 잡아 몸을 지탱하고는 치미는 핏덩이를 가까스로 되삼켰다.

'두 번은 못한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칼리안이 간신히 입을 열어 여유로운 척 말했다.

"6천 플로린에 네 목숨이면······ 괴물 눈알 바꿔주나."

목소리가 떨렸다. 아픔을 참기 위한 것이었으나, 남자의 귀에는 영락없이 화를 참는 것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미친! 소드마스터다! 나 같은 놈 백 명. 아니, 천 명이 모여도 상대가 안 된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남자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뒤에서 댕그랗게 치켜 뜬 눈으로 오들거리는 두 수하에게 눈짓을 했다. 데려오라는 뜻이었고, 두 명이 앞다퉈 달려나갔다.

칼리안이 손을 뻗어 나이프를 챙겼다.

오러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나이프는 의외로 멀쩡했다. 만든 이의 솜씨도 좋았고, 오러가 워낙 짧은 순간 발현되고 사라졌던 이유도 있으리라. 칼리안이 실소했다.

'칼보다 내가 약했군.'

칼리안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픈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내리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5년 같은 5분이 흘렀다. 그럭저럭 견딜만 해 질 정도로 통증이 줄어들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답답해진 칼리안이 나이프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수명이 줄어들 것 같아서 남자가 허둥지둥거렸다.

"금방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그 직후 사무실 문이 열리며 조금 전 나갔던 남자들이 뛰어 들어왔다. 헌데 둘 뿐이었다. 키리에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다. 남자가 다급하게 물었다.

"애는 어디 두고 너희들만 와?"

"놈이 하는 말이······ 히나, 그것을 두고 못가겠다고······."

칼리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간신히 지킨 후드가 벗겨질 뻔했다.

히나.

들어 본 이름이다.

'설마, 아까 그······?'

칼리안의 고개가 들리자 남자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같이 가겠다 했다는 거지?"

"네. 히나라고, 똑같은 반쪽짜리······."

"상관 없으니까 데려와! 둘이든 셋이든 다 데려와, 그냥!"

"네, 네!"

다시 달음박질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달칵.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네 사람이 들어왔다. 남자의 수하들을 뺀 한 명은 키리에, 그리고 또 한 명은 칼리안도 조금 전 보았던 사람이었다. 증서를 전해주던 은색 머리의 소녀였다.

이들을 본 남자가 반색하면서 말했다.

"자. 다 데려가시오. 얼른 가시오."

드르륵,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남자와 수하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따라와. 둘 다."

더 이상 다른 이들에게는 볼 일 없다는 듯 말한 칼리안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

남자가 안심한 듯 심장을 쓸어내리는데 짧은 소리를 낸 칼리안이 돌연 뒤로 돌아서서는 다시 다가왔다.

"왜, 왜 그러시오?"

남자의 앞에 선 칼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남자가 까무러칠 듯 놀랐다.

'마음이 바뀌었나? 돈까지 달라고?'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입장료랑 원금 돌려줘."

금화 5개.

아껴 써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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