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4화 (25/527)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4)

습한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피 냄새.

그런 냄새에 익숙한 세월을 살았던 칼리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입장료."

어떤 사내가 칼리안에게 다가와 두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에게 금화 2개를 주었고, 사내는 숫자가 새겨진 명패를 하나 건넸다. 칼리안의 이름을 대신할 숫자판이었다. 칼리안은 말 없이 그것을 받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도박장 한 가운데에는 널찍한 철창이 있었고 그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한참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흑색의, 그리고 또 한 명은 백색의 머리띠를 두른 채였다.

쉰 명 남짓의 도박꾼들이 그 모습을 보는 중이었다. 일부는 철창을 둘러싸고 소리를 지르고, 또 다른 일부는 작은 테이블이 딸린 의자에 앉아 관전 중인 것이 보였다.

그렇게 제 자리에 선 채로 도박장 풍경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한 사람이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짧은 원피스를 입은 은색 머리의 소녀였다. 어려보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에 칼리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스스로 원해서 입은 옷이 아니라는 것이 눈에 훤했던 까닭이다.

소녀는 곧 칼리안의 팔을 감싸잡고 손짓을 해 가며 빈 자리로 안내했다.

'말을 하지 못하나.'

칼리안이 자리에 앉자 소녀가 잠시 어디론가 가더니 손에 들고 있던 쟁반 같은 것을 칼리안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절반으로 나뉘어 반은 흑색, 반은 백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 용도를 알아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잠시 경기장 안의 싸움꾼들을 쳐다보던 칼리안은 품에서 금화 세 개를 꺼내 백색 편에 놓았다.

하얀 머리띠를 한 남자가 이길 것이라 건 것이다. 소녀는 칼리안에게 지급된 번호와 백색에 3플로린을 걸었다는 것을 적어 돌려주고는 돈을 가지고 돌아갔다.

칼리안이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흰 머리띠의 남자가 검은 머리띠의 남자에게 맞아 휘청이고 있었다.

"더 숙이고 들어가야지!"

"팔꿈치 조심하라고, 머저리야!"

등등의 욕설 섞인 말들이 들려왔다.

칼리안은 싸움의 결과를 볼 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쿠당탕!

거대한 것이 내동댕이쳐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눈을 떠 보니 흑색 머리띠의 남자가 경기장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곤죽이 된 얼굴은 알아보기조차 어려웠다.

조금 전 칼리안으로부터 돈을 받아갔던 소녀가 다가와 종이 하나를 주고 돌아갔다. 칼리안이 3플로린을 걸었던 남자가 승리했으니 두 배의 금액을 지불한다는 증서였다.

"네! 피투성이 제라드가 오늘도 승리했습니다! 그럼 오늘의 세 번째 경기를 시작합니다!"

방금 본 것이 두 번째 경기라 하니 첫 경기는 칼리안이 오기 전에 끝난 것 같았다.

검은 머리띠의 남자가 질질 끌려 나가고 하얀 머리띠의 남자가 기진맥진한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지체없이 다음 경기가 시작됐고 종전의 소녀가 다시 걸어왔다.

칼리안은 이번엔 검은색 쪽에 걸었다. 대신 새로운 돈을 낸 것은 아니었고 조금 전에 받은 6플로린 짜리의 증서를 냈다. 소녀는 똑같이 칼리안이 선택한 정보를 적어 주고는 돌아갔다.

한 경기에는 거의 5분에서 10분 가량이 소요되었고 칼리안은 그 때마다 증서를 내고 결과를 예측했다.

그렇게 열 번째 경기가 종료되었다.

"열 번째 경기가 끝났습니다. 승리자는 강철 무릎 판테론입니다!"

경기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곧 소녀가 다시 걸어와 예측 결과에 대한 증서를 건네주었는데 그것을 주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리안에게 있어 싸움의 승리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3플로린은 어느새 1500플로린이 넘는 엄청난 금액으로 불어나 있었다.

계속하여 경기 결과를 맞추는 의문의 손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지 경기 진행자가 칼리안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칼리안이 고갯짓을 했다. 빨리 다음 순서를 진행하라는 뜻이었다.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도박 따위를 하러 온 것이 아니야.'

아직까지도 키리에가 나오지 않았다.

잘못 알았던 것일까, 혹은 시기가 맞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칼리안이 놓친 첫 경기에 이미 나왔던 것일까.

일단은 다른 손님들을 위해서라도 다음 경기 진행을 해야 했으므로 진행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이제 마지막 경기입니다. 무려 네 배의 배당금이 걸려있죠! 많은 분들께서 이 특별한 경기를 기다려 주셨을텐데요!"

그러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기대감을 드러냈고 진행자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우렁찬 소개를 시작했다.

"소개합니다! 피망치 숀!"

근육질의 거한이 앞서 나왔다.

하얀 머리띠의 그가 경기장 바닥을 발로 탕탕 구르더니 양 팔을 들어올리며 포효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에게 도전하는,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

마지막 경기. 이번에도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말로 숨이 멈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행자의 말과 오래된 언젠가의 기억 속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패배가 벌써 열 번을 넘었는데요! 비록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쥔 적 없었으나 과연 오늘도 그러할 것인가!"

- 그 때 저는 싸움을 팔아 돈을 버는 곳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도전자가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검은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 머리띠 위로 선명한 물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칼리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승패를 예단하지 마십시오. 어제보다 더 강해져서 왔습니다!"

- 그러다 누이가 죽은 후 카이리스를 떠났습니다.

도전자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칼리안이 있는 곳을 향했고 덕분에 칼리안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소개합니다!"

파란 색과 검은 색의, 오드 아이를.

"괴물 눈알!"

키리에.

"키리에!"

찾았다.

* * *

소녀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건 돈이 너무 컸던 탓이다.

칼리안이 내어놓은 것은 조금 전 받은 증서였다. 1500여 플로린을 건 것이다. 예측한 승리자는 당연히 키리에였다.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어이, 어마어마한 돈인데 그렇게 날리지 마쇼. 저 새끼 저거 한 번도 못이겼소. 경기는 볼 만 하니 그냥 응원이나 하고 돈은 하얀 쪽으로 거쇼."

"아니지! 오늘이야말로 이길 거야! 어제 딱 일 초만 빨랐어도 이길 수 있었다구."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는데도 검은 색에 돈을 거는 이들이 꽤 있는 모양이었다. 쟁반을 든 소녀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종이에 내용을 써준 뒤 돌아갔다.

이제 막 시작된 싸움에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경기장을 봤다.

키리에 역시 열 일곱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큰 키였으나 숀이라는 상대방의 앞에 서니 어린 애가 따로 없었다. 키가 족히 2미터는 될 듯한 거구의 숀이 팔을 휘둘렀다. 마치 레이븐의 다리를 보는 것 같은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오르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 쉬익!

팔을 휘둘러 나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소리가 들렸고 키리에가 살짝 몸을 틀어 피해냈다. 그러자 숀의 왼팔이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왔다. 키리에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두 번째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자 휘둘렀던 팔을 빠르게 회수한 숀이 다리를 뻗었다.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던 탓에 다시 피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키리에가 양 팔을 들어올려 공격을 받았다.

- 퍽!

막아내기 위한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키리에의 상체가 휘청였다. 그렇게 키리에가 다시 한 발을 물러나자 숀이 다가오며 다시 한번 발을 올려찼다.

키리에가 숀의 다리를 잡아챘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게 하고자 한 행동이었으나 그러기에는 둘의 체급이 너무 달랐다. 숀은 자신의 다리를 붙든 키리에의 옆구리로 주먹을 뻗었다.

- 타앗!

키리에가 다리를 놓은 뒤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그리고는 주먹이 지나가기 무섭게 달려들었다.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 키리에의 뒷꿈치가 숀의 턱을 강타했다. 턱이 옆으로 획 돌아가며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혼미해진 정신을 챙긴 숀이 키리에에게 달려들었고 키리에의 허리를 붙든 채 철창 벽을 향해 돌진했다.

- 쾅!

키리에의 몸이 철창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숀의 주먹이 키리에의 배를 가격했다. 키리에 역시 주먹을 뻗어 조금 전 발로 찼던 숀의 턱을 쳐올렸다.

그렇게 이십 여 차례의 공방이 이어졌다.

키리에의 무릎에 얻어 맞은 숀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왼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니 팔을 꺾일 때 다친 모양이었다.

물론 키리에 역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숀에게 한 발 다가서던 키리에의 몸이 잠시 휘청였다. 조금 전 뒷목을 얻어맞은 여파가 남아있는 듯 했다. 스치듯 맞은 눈은 퉁퉁 부은 채였고 입술도 터져 있었다.

"검이 없으니 아주 물러터졌군."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유로운 듯한 말이었으나 마음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키리에가 맨손으로 싸움을 하는 것을 보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숀이 허공을 가르며 키리에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오른쪽 주먹이 키리에의 얼굴을 향해 뻗어나왔다. 키리에가 순간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는데 그와 동시에 숀의 왼주먹이 키리에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커헉!"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낸 키리에가 철창에 몸을 기대고 섰다. 어깨가 흔들리는 것을 보니 급소를 제대로 맞은 모양이었다. 칼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숀이 달려왔다.

키리에가 발을 들어올려 숀을 강하게 걷어찼고 그 힘에 주춤 물러나는 숀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 직후 주먹으로 숀의 명치를 때렸으나 숀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 퍼억!

숀이 마치 약을 올리듯 똑같이 주먹을 쥐고 키리에의 복부를 가격했다. 조금 전 다쳤던 옆구리 근처였는지 키리에가 다시 한번 몸을 휘청였다.

숀이 씩 웃으며 주먹을 감아 쥐었다. 키리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섰다. 숀이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열댓 번의 주먹이 키리에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을 막아내던 키리에가 어느 순간부터 속절 없이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간신히 중간 중간 주먹질을 했으나 숀에게 큰 피해를 주질 못했다. 기어코 키리에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더는 두고 보지 못한 칼리안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키리에! 너는 공격 직전에 어깨를 물리는 버릇이 있다!"

수많은 소음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키리에의 어깨가 움찔했다.

키리에가 숀의 주먹을 막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손 끝부터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팔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손등서부터 팔뚝에 이르는 곳까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키리에가 숀의 배를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뻗어냈다. 단지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이번 공격 때는 어깨가 제대로 움직였다.

- 퍼어억!

숀의 발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꽤나 충격이 컸던지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쥔 상태였다. 키리에의 반격이 제대로 먹히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도박장을 뒤흔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키리에의 공격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팔을 뻗고 턱을 들이받고 돌려 찼다. 정신을 차릴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쉼 없는 공격이 가해졌다.

그리고 결국,

- 쿠웅!

몇 발자국 물러나던 숀이 눈을 까뒤집으며 대자로 쓰러졌다. 진행자가 재빨리 숫자를 세었으나 정신을 잃은 숀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진행자가 말을 더듬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외쳤다. 키리에의 첫 승리에 매우 흥분한 목소리였다.

"드디어! 키리에가 승리했습니다!"

좌중이 들썩였다.

키리에의 승리에 돈을 걸었던 이들이 오늘의 큰 행운에 기뻐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경기 승자는! 괴물 눈알 키리에입니다!"

키리에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서였다. 후드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으나 어쩐지 그 속의 눈을 마주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지.'

키리에가 느낀 것 같이 칼리안도 후드 너머로 키리에를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피눈깔에 괴물 눈알이라."

그리고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올 때가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칼리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키리에가 승리함에 따라 금액 지불 증서를 가져와야 할 소녀는 아니었고 숀 만큼이나 덩치가 큰 남자였다. 그는 증서를 건네는 대신 말을 전했다.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따라오시죠."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가자, 칼리안은 고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