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3화 (24/527)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3)

카이리시스는 넓었다.

애초에 왕궁 크기가 그 정도이니 수도라 해서 좁을 수가 없었다. 그 넓은 땅에서 키리에를 찾는 것은 모래 밭에 묻어 둔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이 시기의 키리에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알았으나 그 위치를 찾는 것이 힘들었다.

게다가 또 하나.

칼리안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팔 만한 곳도 마땅히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이 미친 짓이었다. 세크리티아 세작들에게 카이리스의 정보와 물건을 구하는 것.

이들은 단순한 정보 상인이 아니었다.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를 염탐하기 위해 오랜 준비 끝에 보내온 진짜 칼잡이들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곳이었다.

게다가 칼리안은 지나가다 만난 사람도 곧바로 알아볼 만큼 눈에 띄는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붉은 눈을 스치듯 보기만 해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질 터였다. 그러니 미친 짓이라 한 것이다.

"모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소."

세작들의 거점을 지키는 자, '하얀 수리'가 그렇게 말했다. 적이 아님을 확인한 뒤로는 더 이상의 적의나 살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아직 죽을 때는 아닌가보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칼리안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가능한 하얀 수리의 검격 범위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며 그의 뒤를 따라 가게 뒷편으로 갔다.

세작들은 서로의 신상을 몰랐다.

본국에서도 언제 몇 명을, 혹은 누구를 세작으로 보낼지 알려주지 않았다. 첩보 활동이 발각될 경우 다른 세작들이 줄줄이 엮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또한 세작들은 서로에게도 얼굴을 노출하지 않았다. 마찬가지 이유였다.

게다가 이 시기의 세크리티아 세작들은 나이와 성별에 대한 구분도 없이 양성되었다. 따라서 칼리안과 같은 나이의 세작이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칼리안은 이런 상황만 믿고 하얀 수리로 하여금 자신을 세크리티아에서 새로 파견된 어린 세작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었다.

"잠시만 있으시오."

칼리안이 선 곳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빈 새장, 모이통, 여러 모양의 횃대, 청소 도구 등등. 먼지가 풀풀 풍기는 그 안에서 하얀 수리는 이리저리 잘도 피해가며 움직였다. 그러더니 잡동사니인 냥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던 나무 막대기를 잡아 반대쪽으로 밀었다.

- 드르륵!

체인이 감기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둘이 서 있는 방 전체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우르릉 소리와 끼릭거리는 마찰음이 울리더니 곧 칼리안이 서있던 곳이 어느 집의 창고와 이어졌다. 하얀 수리가 창고 문을 열자 좁은 마당이 나왔다. 둘은 곧 마당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칼리안은 하얀 수리를 따라 그 집의 거실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고 또 한번의 비밀 공간을 지나 커다란 서재 같은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큰 테이블이 있고 사방으로 책장과 선반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앉으시오."

하얀 수리가 컵에 물을 따라 칼리안에게 건넸다. 최근 마시는 것 때문에 굉장한 피해를 입고 있었던 칼리안은 물을 받아 내려놓은 후 마시지 않았다.

그것을 본 하얀 수리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나도 원래는 차를 내어줬소. 근데 아무도 안마시는 것이 아니오? 비싼 찻잎 버리는 게 아까워서 이제는 그냥 물만 주고 있소. 그런데도 안 먹는 것은 여전하니 이젠 아무것도 내주지 말까 생각중이오."

아마 음료를 거부하는 것이 칼리안만은 아니었는지 성의가 매번 무시되니 불편했던 모양이다.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거나 집어먹지 말라고 누가 그래서."

"하기사. 맞는 말이긴 하지. 신참인가본데, 앞으로 종종 마주칠테니 이름이나 알아 두시오. 나는 하얀 수리요."

칼리안은 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 곳에 오기 전부터 미리 생각해 두었던, 세크리티아의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별칭을 알렸다.

"붉은 고니."

르메인을 처음 만났을 때 백조가 된 기분을 느꼈던 칼리안이었다. 칼리안의 겉과 속이 다르니, 그에게 이만큼 어울리는 별명도 없을 터였다.

"그래. 반갑소. 허면 무슨 모이를 찾아 오셨소?"

지금 칼리안이 찾은 이 곳에서 맡고 있는 일은, 첩보 활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와 장비를 세작들에게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모이'였다.

칼리안이 책장과 선반을 한번씩 쳐다봤다.

"정보 하나, 물건 하나."

하얀 수리의 손바닥이 펼쳐졌다.

"정보 5플로린, 물건 3플로린. 선불이오."

무슨 정보, 무슨 물건인지도 묻지 않고 이렇게 가격을 말해주는 것이 이상했다. 이 곳의 운영은 오로지 하얀 수리의 자율이었으며 따로이 세크리티아에까지 알려져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칼리안도 이것 까지는 알지 못했다. 칼리안의 생각을 눈치챈 하얀 수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정가제라서."

금괴를 구해달라 하면 3플로린에 살 수 있는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어 바보 취급을 받을 일을 만들지는 않았다.

칼리안이 품에서 금화 8개를 꺼내 하얀 수리에게 건넸다. 생각보다 값이 비쌌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값을 받은 하얀 수리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말했다.

"그래. 얘기하시오."

칼리안의 설명이 이어졌고 하얀 수리는 두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곧 그가 지도 하나와 종이에 싸인 작은 물건 하나를 들고 와 칼리안의 앞에 다시 앉았다.

먼저 작은 것을 칼리안의 쪽으로 민 하얀 수리가 말했다.

"일단, 물건 하나."

그 뒤에는 지도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보."

받아 보니 카이리시스의 상세한 지도였는데, 그 가운데 한 곳에 점이 찍혀 있었다. 칼리안이 의문을 가지며 물었다.

"이곳은 카이리시스 외에는 없는 것인가?"

하얀 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공에 주먹을 뻗어보이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당신이 설명한 시설이 있을 정도의 규모라면 그 곳 뿐이오."

키리에가 카이리시스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말이었다. 공연장 가는 길에 마주쳤던 아이가 키리에가 맞았을 것 같다는 생각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다행이군."

그나저나 점 찍은 지도 한장이 5플로린이라니. 괜스레 바가지를 쓴 기분을 느끼며 두 가지를 챙겨 품에 넣자, 하얀 수리가 종이 쪽지 하나를 더 내밀었다. 빼곡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선뜻 받지 않으니 하얀 수리는 하얀 이가 보이도록 웃으며 말했다.

"사용 설명서."

영 바가지는 아닌가보다.

칼리안이 피식 하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창고를 통해 다시 가게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가정집 대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새 판매점의 뒷건물인 것 같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판매점까지 걷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이븐."

오래지 않아 다각 다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두운 가운데 하얀 띠만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레이븐이 걸어나왔다. 칼리안은 빠르게 레이븐의 등에 올라 일단 그 곳에서 멀어졌다. 잠시 뒤 적당히 밝고 외진 카페 앞으로 간 칼리안이 지도와 설명서를 열어 보았다.

'몸 조심하시오. 험한 곳이니.'

하얀 수리의 말이 떠올랐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렴 당신보다 위험할까."

지도에 나온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온 길을 다시 되짚어가야 했다. 설명서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고 외운 칼리안이 카페 입구에 켜져 있던 촛불에 지도와 설명서를 태워 없앴다.

* * *

칼리안의 눈에 깊은 근심이 들었다.

지도를 태워버려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지도는 정확했고 인근에 문을 연 곳은 한 곳 뿐이었다. 지금 칼리안의 머릿속에 갖가지 상념을 들게 한 것은 바로 2층짜리 건물 입구에 적힌 가게 이름 때문이었다.

-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

왜 하필?

"하······."

새 판매점으로 향하던 길에 보고 질색했던 바로 그 술집이었다. 다시 고개를 내려 술집 입구를 쳐다보던 칼리안의 마음이 참으로 복잡했다.

"아니 대체 누가 가게 이름을 저렇게 짓나? 시스파니안도 엄연히 왕족인데, 왕실에서는 왕족 모독죄도 안 묻는 거야?"

옛 칼리안의 기억이 답을 주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츠아라 사후의 시스파니안은 왕비로서 활동한 것이 아니므로 온전한 왕족으로 보기 어려웠다.'

칼리안은 참으로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지으며 시동에게 레이븐의 고삐를 맡긴 후 술집에 들어갔다.

술집 내부는 세크리티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묵은 오크통의 퀘퀘한 냄새와 쌉쓰름하면서도 시큼한 홉 특유의 냄새가 그득했다.

"일행이 있으십니까?"

곧 점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칼리안의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밤중에 후드를 쓰고 있는 손님이 들어선 까닭인지 약간 경직된 걸음이었다.

"혼자 왔네."

새 판매점에서는 상관이 없었는데 이 곳에서는 상관이 있었다. 너무 어린 목소리에 점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칼리안은 설명 대신 은화 하나를 꺼내 점원에게 쥐어 주었다. 말 뜻을 잘 알아들은 점원이 곧바로 의심을 풀었다.

"빈 자리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용 설명서에 쓰여 있던 대로 말했다.

"4층으로 가겠네."

그 곳은 누가 보아도 너무 명백한 2층 건물이었다. 그러나 점원은 이 건물에 4층이 없다는 말을 하는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네. 따라오십시오."

칼리안은 다시 긴장하며 점원의 뒤를 따랐다. 시간이 늦어 대부분의 손님들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크게 주목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대여섯 개 정도의 테이블을 지나 코너를 돌자 두꺼운 나무 문이 하나 나왔다. 점원은 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연 뒤 칼리안에게 손짓했다.

"이 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여보인 뒤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점원은 방의 불을 켜고 다른 설명 없이 밖에서 문을 닫았다. 얼마 뒤 점원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칼리안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댓 명 정도가 조용히 모여 술을 마실 수 있을 만한 공간으로 꾸며진 곳이었는데, 네모난 테이블과 장식장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카운터의 종을 울려 점원을 부르는 용도의 손잡이 달린 끈과 의미 모를 그림이 그려진 액자 하나, 그리고 옷을 걸 수 있을 붙박이 행거가 전부였다.

그러니 그 곳은 언뜻 보기에는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만들어진 특실같을 뿐, 특별히 이상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칼리안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나비 모양, 세 번째.'

설명서는 이 상황에 대해서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따라서 칼리안은 당황하지 않고 맞은편 벽으로 걸어갔다. 외투를 걸어둘 수 있도록 만들어진 나비 모양의 주석 행거에 시선을 둔 채였다.

칼리안이 여섯 개의 행거 중 세 번째 것을 잡고 비틀었다. 그러자 행거가 서서히 원을 그리듯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거의 90도 가까이 눕혀졌을 즈음.

- 딸깍.

무언가에 걸리는 소리와 함께 행거가 멈췄다. 칼리안은 옷걸이에서 손을 뗀 뒤 방 모서리에 놓여있던 장식장을 붙들고 옆으로 밀었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잠금 장치가 풀린 장식장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움직이며 어딘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심호흡을 한 번 한 칼리안이 언제든 나이프를 뽑아들 준비를 한 뒤 계단 아래로 발을 옮겼다.

딱 발 밑을 구별할 정도의 빛이 계단을 비춰주고 있었던 탓에 내려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가던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추었다.

"3층."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3'이라고 쓰여 있었다.

"카드 도박장이겠군."

입구는 어두운 천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커튼 틈새로 동그란 테이블을 하나씩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몇몇 남자들의 인영이 보였다. 칼리안은 3층 풍경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3층으로 올 때의 거의 두 배 쯤 되는 계단을 내려감에 따라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4'가 쓰여진 입구가 보이며 계단이 끝났다.

"여기군."

고함소리가 귀를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져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머뭇거림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칼리안이 들어선 곳은 바로 격투기 도박장이었다.

검을 포기한 검사 키리에가 있을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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