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2화 (23/527)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2)

하늘이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다.

잠시 품을 살피니 잘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어린애가 모아 둔 코 묻은 돈을 함부로 빼 쓰는 기분인데.'

어차피 이게 다 살자고 하는 것이니 옛 칼리안도 크게 노여워 하지는 않으리라.

아무튼 제일 우선했던 검을 구했으므로 다시 강 건너편으로 돌아가야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온 길을 되짚어 다리를 향해 왔다.

세뉴 강의 다리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그런데 다리 입구에서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멀리서 다가오는 칼리안을 보곤 길을 가로막고 섰다.

그들을 본 레이븐이 속도를 줄여 멈추었다.

"레이븐, 왜 그래?"

레이븐이 워낙에 길을 잘 찾아갔던 탓에 칼리안은 다음으로 갈 목적지 생각에 잠겨있었다. 때문에 레이븐이 멈춘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칼리안도 검은 옷의 사람들을 보았다.

칼리안의 얼굴에 경계하는 빛이 어렸다.

다행히 멀쩡한 수도의 왕도 위를 점령한 간 큰 강도 따위는 아니었다. 방금 산 무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칼리안이 안심하며 앞을 쳐다봤다.

가장 앞에 서있던 이가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함부로 길을 막아 죄송합니다."

입고 있던 검은 옷은 바로 상복이었다.

많이 울었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쉬어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굉장히 정중한 태도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지금 망자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여,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세뉴 강을 쳐다보니 작은 촛불이 올라간 붉은 안네루시아 꽃들이 강물을 따라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저 멀리 꽃이 내려오기 시작하는 곳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영결식인가."

"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선뜻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서며 대답했다.

"굳이 망자의 걸음을 방해할 이유가 없지. 죄송할 일이 아니네."

칼리안이 말한 것과 같이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카이리스의 장례 의식이었다. 망자를 기리는 이들이 망자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강변에 모여 생의 마지막 길을 비춰줄 촛불을 띄워 보낸다는 뜻이 있었다.

다만 강물에 꽃잎이 떠내려가는 동안 산 사람이 그 위를 지나가면 망자가 산자를 따라 나서려다 길을 잃는다는 속설이 전해졌다. 때문에 이렇게 잠깐 동안 다리를 건너지 말아주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우연히 마주한 이 숙연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세뉴는 언제나 고요하게 흐르는 강이었다.

그러므로 안네루시아 꽃도 출렁이지 않고 조용히 흘러 내려왔다. 바람도 잠잠하여 촛불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평안히 가시겠군. 명복을 비네."

"감사합니다."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굳이 걸음을 멈춘 것으로 모자라 말에서 내리더니 명복까지 빌어주는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남자가 한번 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형님께서는 내 무덤에 시나스타를 올려주셨으려나. 아니면 그 전에 시간의 축을 돌리셨으려나.'

달빛에 두 번째 꽃을 피우는 시나스타를 무덤 위에 올리는 세크리티아의 관례를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에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다시 길에 오르시지요."

어느새 안네루시아가 다리 아래를 모두 지나간 듯 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고마운 마음에 어느 가문의 자제인지를 가늠해보고자 말 위의 칼리안을 올려다보았던 남자가, 어깨를 움찔하더니 서둘러 비켜섰다.

왕도에 설치된 마법 등불이 밝았으므로 깊은 후드로 숨겨둔 것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는 것을 눈치 챈 칼리안이 조용히 말했다.

"기억에 두지 않았으면 하네만."

"······ 알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여보였고 칼리안은 천천히 다리 위를 건넜다.

잠시 뒤 고개를 들어올린 남자는 그런 칼리안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에게 다가온 또 다른 검은 옷의 일행들이 물었다.

"아르센. 왜 그러나? 아는 사람인가?"

남자, 아르센 헤르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저, 좋은 사람인 듯 싶어 그러네."

그 사이 많이 멀어진 촛불이 작게 일렁이고 있었다.

* * *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제부터 갈 곳은 대장간과 달리 시간에 상관 없이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정말 온통 시스파니안이네."

- 수도 카이리시스는 마치 시스파니안의 추종자들이 사는 곳 같습니다. 어느 곳이든 시스파니안이 있습니다.

카이리스로의 파견을 무사히 다녀온, '푸른 솔새'라는 별칭의 세작이 전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제 공연장에서도 하츠아라와 시스파니안을 이야기 했었는데 칼리안의 눈에 보이는 간판에 적힌 이름이 온통 시스파니안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시스파니안의 단잠' 이라는 이름의 호텔이나 '시스파니안의 여유'라는 이름의 카페, 심지어 '시스파니안의 한끼'라는 식당까지.

칼리안이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 막 갖다붙이는 것 아니야? 용의 한끼가 맛있게 느껴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다 구석진 곳에 있던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라는 술집을 본 뒤에는 대다수의 가게 이름이 참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곤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가니 '나에랑샤' 거리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였다. 두 번째 목적지가 있는 곳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급속도로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나에랑샤 거리로 들어섰다.

그 곳에는 카이리시스의 서쪽 시장이 있었다.

밤이 되었으므로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고 밤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식당과 술집, 카페들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다만 모두 칼리안의 목적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주저없이 그 앞을 지나쳤다.

"둘, 셋, 넷······ 여기인가."

서쪽 시장의 골목 세 개를 지나치고 네 번째 골목으로 들어서니 어두운 거리에 홀로 불을 밝힌 상점이 보였다. 문 앞에 늘어선 여러 가지 크기와 모양의 새장이 눈길을 끄는 곳이었는데, 간판에 적힌 것을 본 칼리안이 목적지를 제대로 찾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나에랑샤 새 판매점 (전서구 대여)단순히 애완용 새를 파는 곳이라면 이 시간에 문을 연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그 옆의 전서구 대여라는 내용 때문에 이해가 되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소식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찾아올 테니 말이다.

그런데 가게 건물이 작아서인지 혹은 시간이 늦어서인지는 몰라도 따로이 말을 받아 줄 시동이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말을 매어 둘 수 있는 곳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어찌한다."

레이븐의 등에서 내린 칼리안이 난감한 마음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차피 레이븐이야 몸 편히 돌봐줄 재력가 주인을 두고 다른 데 갈 리 없는 놈이란 것을 칼리안이 가장 잘 알았으니, 레이븐을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민했던 것은 누가 레이븐을 훔쳐가려 할까봐서였다. 물론 레이븐이 아니라 발광하는 말에 채일 운 나쁜 이에 대한 걱정이었다.

결국 칼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레이븐의 안장 위에 고삐를 올려놓았다.

"기다리고 있어. 사고치지 말고."

레이븐이 칼리안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푸르륵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가게 옆으로 가만히 걸어가 섰다. 검은 말이 어두운 건물의 그늘 속에 들어가니 오른쪽 앞 발목의 하얀 털만 유난히 잘 보였다.

칼리안이 레이븐을 그대로 두고 몸을 돌렸다.

그 후에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후드를 잘 눌러쓴 뒤에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딸랑.

얀이 울리는 것보다 조금 더 큰 종소리가 울리며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알렸다. 그러자 종소리 때문에 잠을 깬 것인지 가게 안의 새들이 일제히 지저귀기 시작했다. 마치 시장 한 켠이 아닌 숲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겉으로 보기 보다는 넓은 곳이군.'

엄청 많은 종류의 새장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새들이 보였다. 칼리안의 주먹보다 작을 것 같은 애완조부터 당장 사냥에 쓰여도 좋을 매까지.

오히려 없는 새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외눈 안경을 끼고 새 모이를 주던 가게 주인이 칼리안을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전서구를 원하시오?"

어둠이 내린 밤.

검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새 가게에 들어온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대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유독 조용한 새장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 안의 하얀 애완조 두 마리가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을 한 쌍의 새였으나 칼리안은 그것이 아주 잘 만들어진 가짜 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새들은 잠에서 깨질 않는군."

목소리가 어린 것은 상관 없었지만 혹시라도 긴장한 것이 드러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주인이 대답했다.

"잠이 많소."

베른이 기억하는 것과 같은 대답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오가야 할 말이 이미 정해져 있는 대화가 이어졌다.

"먼 곳에서 날아온 모양이지? 매우 고단해 보이는데."

"······ 그러니 저렇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니겠소?"

주인이 잠시 침묵하며 칼리안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외관으로는 티가 나는 것이 없었으니 칼리안은 오로지 눈 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기사. 그러고 보니 고단한 새가 잠시 쉬기에는 이만 한 곳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군."

"그렇게 보았다면 다행이오."

주인은 무심하게 말한 뒤 쓰고 있던 외눈 안경을 벗어 소매로 슥슥 닦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시 끼며 물었다.

"무엇을 찾으러 왔소?"

이제부터의 대답이 중요했다.

자칫 잘못된 대답을 하거나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였다가는 그대로 목이 날아갈 터였다.

"새 모이가 필요해서."

"그래. 여기서 새 모이도 팔기는 하오."

두 사람의 대화가 두런두런 이어지는 탓에 한참을 지저귀던 새들이 다시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어느새 가게 안은 옷이 스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져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칼리안의 뒤로 걸어와 섰다.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 주인의 품 속에 서슬 퍼런 칼이 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주인은 말 없이 한참동안 칼리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칼리안의 귀에 스스로의 숨소리가 나지막이 들렸고 진득해진 것 같은 공기가 폐를 압박했다. 서늘한 느낌이 온 몸을 엄습했다.

'살기.'

숨막히는 긴장 속에 주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근래에 누군가에게 새를 판 기억이 나질 않소만. 아무래도 못 보던 손님인 듯 하여."

이것은 정해져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알아서 생각하고 대답을 해야 했다.

곧바로 칼리안의 입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나왔다.

"이제 막 둥지를 떠나 먹이 찾으러 왔으니, 이 곳에서 팔았을 리 없지."

칼리안에게 다가오던 주인의 발이 멈추었다.

"어디에서 온 새인지는 아시오?"

정해진 질문이 다시 나왔다. 칼리안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남동풍을 타고 왔다 하던데."

"그렇다면, 그 새는 누구의 새요?"

칼리안이 천천히 몸을 돌려 주인을 향해 마주 섰다.

깊이 내려온 후드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입술 사이로 마지막 대답이 나왔다.

"네빌라드의 새."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 네빌라드는 데블란의 이름 철자를 섞어 만든 호칭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칼리안은.

카이리스에 숨어든 세크리티아 세작들의 근거지에서 카이리스 정보를 얻어내려는 최초의 카이리스 왕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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