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1화 (22/527)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1)

그 날 늦은 오후.

칼리안은 금고 상판의 마법 문양을 맞춰 문을 열었다.

옛 칼리안은 그것을 직접 건드린 적이 없어 기억하지 못했고 일전에 얀이 여는 것을 보아 두었던 대로 조작하느라 몇 번을 틀리다 간신히 열었다.

칼리안 정도는 들어가도 될 만큼의 크기를 가진 금고 안에는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몇몇 서류와 상당한 돈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수표를 제외한 금 은 동화를 한 움큼 씩 집어 주머니에 담아 품에 넣었다.

"미안. 조금만 꺼내 쓸게."

그것이 어디가 조금만이냐고 물을 얀은 이미 밖에 있었으므로, 칼리안의 말에 다른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체르밀 궁 앞에서 얀과 함께 칼리안을 기다리던 앨런은 검은 색의 로브를 손에 든 채였다.

그리고 옆에는 품격 있는 말의 자세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듯한 모습으로 한 다리를 살짝 구부린 채 서 있는 레이븐이 있었다.

"레이븐."

반가운 마음에 부르자, 레이븐이 머리를 들며 푸르륵 소리를 냈다. 그런 레이븐의 고삐를 넘겨주는 얀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자님. 저 없이 가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함께 가는 것이 세계 최강의 마법사인 것을 또 까먹은 모양이다. 칼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븐에 올랐다.

훌쩍- 하고 전보다 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 오르는 그 모습에 앨런의 눈이 조금 가늘게 변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으나 앨런은 곧 상념을 감추며 얀을 향해 말했다.

"쓸데 없는 걱정은 하지 말게. 전하께서도 허락하셨고, 또 옆에 내가 있을 테니."

"그래, 걱정 마. 내일 새벽까지는 올게."

그 때 칼리안이 기습적으로 말했고, 레이븐이 알아서 출발했다.

얀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소리 죽여 외쳤다.

"내일이라니요! 자정 전에 오겠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칼리안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상태였다.

힘내라는 듯 얀의 어깨를 툭툭 쳐 준 앨런이 칼리안을 따라 달려 나갔다.

성공적으로 얀을 따돌리고 앨런의 동행을 보증 삼아 왕궁 밖으로 나온 칼리안은 앨런에게서 건네 받은 로브를 재빨리 뒤집어 썼다. 깊은 후드가 머리와 눈을 가려주었다.

"예전에는 다른 이유로 얼굴을 가렸는데. 기분이 이상하네요, 스승님."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리안의 몸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가져 보는 자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 좋으십니까?"

"네, 이게······ 얼마나 기다려 졌었는데요."

하마터면 '이게 얼마만의 외출인데요' 라고 말할 뻔한 것을 간신히 돌렸다. 옛 칼리안은 지금이 첫 외출이었으니까.

앨런이 대답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븐의 갈기를 흐트러뜨리며 장난치던 칼리안이 물었다.

"정말 전하께서 허락을 하신 겁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르메인도 왕자님의 외출을 보고 받았겠지요."

나몰라라 하는 태평한 말.

르메인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앨런이 알아서 해줄테니까.

그리고 그 시간 르메인은 칼리안이 왕궁을 또 나갔다는 보고를 받고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앨런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스승님."

그래서 이번 외출을 알아서 책임져야 할 앨런은 이렇게 튀어나온 칼리안의 말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까지 두고 다니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칼리안이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왕궁 밖으로 나온 것은 실리케의 독차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준비물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온 김에 키리에도 찾으려 했다. 이 모든 것이 칼리안이 아닌 베른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었으니 앨런과의 동행은 어려웠다.

이 시간을 위해서 연기까지 한 칼리안이었다. 독차를 피하기 위해 차를 받아들다 실수인 것처럼 떨구었던 것이다. 혼자 다니다 만에 하나의 상황이 생기더라도 최소한 도망칠 정도의 체력은 되어야 했으니까. 두 번은 쓰지 못할 방법이었으나 어차피 내일부터는 제대로 차를 마실 생각이니 상관 없었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한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순순한 허락이라 칼리안이 오히려 놀랐을 정도였다.

"테이난샤 거리에 마법사 협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뭉그적거리고 있을 테니 찾아오시지요."

카이리시스의 지도는 이미 세작들을 통해 세크리티아에 잘 전해져 있었다. 옛 칼리안보다 베른이 카이리시스 구조를 더 잘 알 정도였으니까. 따라서 칼리안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스승님. 감사합니다."

앨런은 더 이상 칼리안이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 않았고 칼리안도 말하지 않았다. 둘은 그대로 광장을 지나자마자 헤어졌다.

* * *

첫 목적지는 세뉴 강 건너편 동쪽에 있는 바넨샤 거리였다.

- 다각, 다각.

수도 내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기 때문에 칼리안은 빨리 걷는 정도로 레이븐을 움직였다.

경쾌한 발굽 소리를 들으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 칼리안이 레이븐의 움직임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바넨샤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석양이 지는 시간이었음에도 망치질 소리가 멈추지 않고 울려퍼지는 곳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었던 까닭이다. 거리에 진동하는 쇠 냄새를 맡으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긋지긋했던 냄새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바넨샤는 대장장이들의 거리였다. 작은 도로를 가운데 두고 스무 곳이 넘는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어떤 상점의 무기가 좋은지까지 보고를 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칼리안은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 고삐를 쥔 채 천천히 상점들의 물건을 훑어보며 걸어갔다.

"마땅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네."

한동안 가게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게 될 쯤, 비로소 칼리안의 이목을 끄는 상점이 나왔다. 다른 곳과 달리 방패나 방어구 없이 무기만 진열된 곳이었는데 언뜻 보아도 상품들의 품질이 상당했다.

'로튼 대장간' 이라는 이름의 그 상점 앞에서 칼리안이 걸음을 멈춰 서자, 상점에 있던 아이가 쪼르르 달려나와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검을 보러 오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레이븐의 고삐를 넘겨 주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동전 한 개를 쥐어주며 당부를 했다.

"쓰다듬으면 큰일 나. 얌전히 데려가서 고삐만 묶어 둬."

아이가 겁을 먹은 듯 침을 꿀떡 삼켰다. 그게 귀여워서 칼리안이 동전 하나를 더 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얌전하니 걱정 말고."

그렇게 아이를 보낸 뒤 가게로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고 있자니 상점의 주인인 듯한 중년 남자가 나왔다. 물건도 직접 만드는지 두꺼운 근육질의 팔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찾으시는 종류가 있으십니까?"

"열 일곱 전후의 아이가 사용하기에 좋은 검이 있겠나? 길이는 성인의 것과 같아도 되지만 무게는 가벼웠으면 하네. 검을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이라서."

남자가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마치 자신보다 훨씬 어린 아이의 검을 찾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 말을 꺼낸 이의 목소리는 열 일곱 근처도 못 가봤을 만큼 어리게 느껴졌던 탓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의문을 깊이 가지는 것은 명을 단축하기 딱 좋은 태도임을 알기 때문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보여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남자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뒤, 칼리안이 발을 옮기며 무기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뼘 길이의 얇은 나이프에 눈이 갔다. 옷 속에 숨겨 사용하는 경우를 염두에 두었는지 가드가 없었고 칼집에는 팔뚝에 채울 수 있는 가죽 벨트가 달려 있었다.

칼리안이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고작 나이프일 뿐이었으나 손에 잡히는 느낌만으로도 중심이 잘 잡힌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을 뽑아보니 묵철로 된 예리한 날이 빛을 발했다. 칼리안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내 것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고."

방금 주인에게 요청한 것은 칼리안의 것이 아니었다.

기마 공연장에 가는 길에 마주쳤던 키리에가 검을 연습할 때 쓰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칼리안이 직접 검을 쓰게 되더라도 일반적인 철로 만들어진 것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오러를 오랫동안 견디지 못할 테니까.

'뭐. 지금은 내 몸도 오러를 못 견디겠지만.'

문득, 베른이 죽던 날 부서진 검의 울음이 생각났다.

지금이야 당연히 부서지지 않고 멀쩡히 있겠지만 칼리안이 그 검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세크리티아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던 보검이었으니까.

검을 생각하니 검을 부수고 베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마법사도 떠올랐다. 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를 떠올린 칼리안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되게 아팠다. 언제 만나기만 해봐라. 뭐 이런 식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여기 있습니다."

어느새 물건을 찾아온 상점 주인의 목소리가 칼리안을 현실로 불러냈다.

주인이 꺼내 온 것은 세 자루의 장검이었다.

가벼운 편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칼리안은 그 조차 한 손으로 들어올릴 수 없었다.

'엉망이군.'

때문에 스스로를 비웃은 칼리안이 양 손으로 검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살짝 휘둘러 보기도 하며 검의 이곳 저곳을 세심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처음으로 쓰게 될 검이었으니 대충 고를 수가 없었다.

'무게 중심이 잘 잡혔다. 유연성이며, 예리함이며. 평범한 상점 같은데,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그런 모습을 본 주인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아마도 소년일 것 같은 손님이 검을 살피는 모양새가 범상치 않았던 탓이다.

중요한 부분들을 정확히 짚어가며 확인하는 태도는 상급 기사보다도 엄정했다. 헌데, 검을 제대로 들어올리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하겠네. 이 나이프도 함께."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데 칼리안이 한 자루의 검을 골라냈다. 주인이 골랐다 해도 같은 것을 선택했을 법한 물건이었다.

곧 은화 8개를 꺼내 장검과 나이프 값을 치른 칼리안이 물었다.

"이 곳의 무기는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세 개의 금화가 카운터에 올려졌다. 방금 지불한 것의 네 배 가까이 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조금 더 튼튼한 장검, 그리고 가드 없는 단검이 필요하네. 무게는 일반적인 것과 같으면 되고."

"이 검을 쓰실 분께서 검에 더 숙련되었을 때 사용하실 것입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맞네. 키가 매우 크고 검을 묵직하게 다루지만 속도가 느린 것은 아니네. 둘 모두 오랫동안 쓰게 될 것이니 신경 써서 만든 좋은 검이었으면 하는데 만들어 줄 수 있겠나?"

사용자에 대한 설명을 기억한 주인은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혹시 검에 새길 이름이 있습니까?"

"아니. 그런 것은 없네."

"알겠습니다. 그럼 기간은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물어보아야 할 말이지. 기간은 상관 없이 제대로 만들어주면 되니."

주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가능한 좋은 재료를 구해 마음에 드실 만한 검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한 달 정도 뒤에 다시 한번 들러 주시겠습니까?"

"그리 하겠네. 혹여 돈이 부족하다면 그 때 더 지불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인사한 주인은, 나이프를 칼리안에게 건넨 뒤 장검을 들고 나가 레이븐의 안장에 실어주려 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레이븐의 눈에서 흰자위를 본 칼리안이 손사래를 치며 검을 받았다.

"아니, 그러지 말게. 내가 하겠네."

주인에게만 친절한 이놈의 말 덕분에, 칼리안은 낑낑거리면서 직접 안장에 검을 매었다.

그리고는 나이프 집과 연결된 가죽 벨트를 소매 안쪽에 채운 뒤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이제 가야 할 곳은 조금 특별한 것을 파는 상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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