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2)
이보다 더 도도할 수는 없으리라.
자신의 말 레이븐을 보는 칼리안의 감상이었다.
지금 레이븐은 파도처럼 갈라진 사람들의 사이로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다각 다각 하는 발굽 소리를 더 크게 내는 것을 보면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말을 참 많이 봤지만 이런 녀석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레이븐의 검은 갈기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보니 카이리스에서 눈을 뜬 뒤 왕궁 밖을 제대로 본 것이 처음이지 않은가.
앨런을 만나기 위해 광장에 나선 적은 있었지만 그 때는 밤이었고 또 앨런에 대한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워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확실히 카이리시스는 정돈이 잘 되어 있네. 이런 길이 카이리스 전역의 도시로 이어져 있는 것도 대단하고.'
지금 밟고 있는 왕도는 감탄을 금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실 강대국 다운 배짱이 아닐 수 없다.
이 길을 타고 적이 올 수도 있다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길을 통해 세크리티아로 왔겠지.'
마지막 기억이 피할 길 없이 떠오른다.
덕분에 칼리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플란츠에게로 갔다.
플란츠는 말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 성질 하고는.'
안장의 손잡이를 잡은 손등에 베인 듯한 상처들이 눈에 띄었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고만 생각했지 사이가 나쁜 줄은 몰랐는데.'
그날 오전, 칼리안은 의도치 않게 플란츠의 방에서 나오는 고함소리를 듣게 되었다. 날씨가 좋아 창문을 열어 두었고 칼리안의 방 바로 위에 플란츠의 방이 있었으니까.
또 실리케가 왔나보다 하던 얀의 말을 듣게 된 칼리안은 상당히 놀랐었다. 예상 외로 플란츠와 실리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왕자님,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조그만 얀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념을 애써 집어넣은 칼리안이 플란츠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쳐다봤다.
귀족들의 거주 공간인 에이난샤 거리의 저택만큼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고급스러운 외관의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들어서 있었다. 아스트리샤라는 이름의 거리였는데, 귀족들을 위한 고급 상점과 문화 시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 거리의 끝에 있는 폴룬 상단 소유의 공연장이 오늘의 목적지였다.
멀찍이서 국왕의 행렬을 쳐다보는 아이들이 칼리안의 눈에 들어왔다.
'옷을 보니 귀족은 아니겠고······ 구경하러 이 곳까지 온 건가.'
평민의 아이들로 보이는 그 무리를 향해 살짝 웃어주자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사뭇 순수하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한 마디를 꺼냈다.
"아이들이 참 귀엽네."
"왕자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데요."
지금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이 된 얀의 대꾸에,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까지도 어려진 것이 당연하게 와닿질 않아서였다.
그런데 무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행렬을 빤히 바라보는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주변의 평민들과도 확연히 비교될 만큼 남루한 행색의 아이가 바라보는 곳에는 정복을 갖추고 르메인을 호위 중인 카에라의 기사들이 있었다.
모두가 국왕 부부와 왕자들을 보고 있는 가운데 홀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던 눈길이 낯설어,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그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칼리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 키리에?"
멀리서도 눈에 띄는 물색의 머리.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와 벌써부터 큰 키.
칼리안이 찾아와 호위로 두고자 했던 아이와 매우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 정확한 확인이 어려웠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고 싶은 기분이 끓어오르자 옆에서 얀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얘가 갑자기 왜······!"
퍼뜩 놀라 얀을 보니 레이븐의 고삐를 쥔 얀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칼리안이 원하는 것을 읽어버린 레이븐이 옆으로 방향을 틀려 한 것이다. 칼리안이 서둘러 레이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아니야, 레이븐. 지금은 그러면 안돼. 가면 안돼."
고집을 부리던 레이븐이 그제야 다시 앞을 보며 걸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던 얀이 안도한 한숨을 쉬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나 때문이야. 괜찮아."
그렇게 답한 칼리안이 다시 옆을 쳐다보았으나 어느새 물색 머리의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칼리안이 그리운 것을 찾는 듯한 눈이 되어 주변을 살폈다.
'키리에.'
카이리스에서 많은 것을 잃고 세크리티아를 찾아온 고아. 그리고 천재 검사.
키리에의 재능을 알아봤던 베른이 그를 거두어 직접 검을 가르쳤고 키리에는 그 보답으로 목숨을 바쳤다.
베른의 마지막 날, 베른에게 날아오는 화살비를 몸으로 막아냈다.
'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찾아낼 테니.'
칼리안은 달음박질 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키리에와의 만남을 뒤로 미뤄야 했다.
"왕자님. 도착했습니다."
그 후 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릴 즈음 기사들이 바삐 움직이며 주변을 방비하기 시작했다.
공연장이 보인다.
외벽은 석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검은색과 흰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모양새가 왕궁의 나르실 관을 떠올리게 했다.
곧 칼리안이 레이븐의 등에서 내렸고 얀은 공연장의 하인에게 레이븐의 고삐를 맡겼다.
"왕자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말이니 꼭 조심스럽게 다뤄주세요. 꼭이요.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얀은 레이븐의 성깔을 잘 알았으므로 '왕자님이 없으면 지랄이 심해요.'라는 얼굴로 이와 같이 말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국왕 일가를 위해 깔아두었을 붉은 융단이 공연장 정문까지 이어진 것이 눈에 띄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리고, 멜피르 폴룬도 눈에 들어왔다.
* * *
멜피르 폴룬.
회색 머리를 짧게 자른 동글동글한 인상의 사내였다.
브리센 상단의 상단주인 레넌 브리센과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 폴룬의 첫인상이 확연히 달랐다. 인사를 건네는 그 짧은 순간, 멜피르는 왕의 일가 모두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상대를 살피고 자신의 인상을 남기려는 행동이다. 아무 생각 없이 입부터 열던 레넌과는 무게감부터 차이가 났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멜피르가 직접 길을 안내했다.
그 뒤를 따르는 동안 칼리안은 사고가 발생한 곳을 가늠하려 주변을 살폈다. 오래지 않아 어느 한 지점을 본 칼리안의 눈이 살짝 빛났다.
'저것이군.'
문제가 될 만한 요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할 꽃잎 등을 담아둔 듯한 커다란 바구니였다. 밧줄로 묶인 임시 구조물은 그것 뿐이었다.
공연장은 타원형의 운동장을 가운데 두고 8개 층의 관객석이 주변을 감싸는 형태였다. 관객석 중앙에 특별석이 있었는데, 바로 국왕 일가가 앉게 될 자리였다. 그 한참 위에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
'저게 떨어진다는 얘긴데. 기사들이 미리 확인을 안 했다는 말이 되나.'
분명 이 곳까지 동행한 기사들이 있었다.
국왕 친위대인 카에라의 기사들은 오로지 르메인만을 밀착 호위했고, 르메인 외의 왕족을 호위하거나 주변의 사람들과 일대 기물들을 살피는 것은 왕실 기사단 파벨의 기사들이 담당했다. 그러니 저 밧줄도 분명 파벨에서 점검을 했을 것이다.
'점검을 했는데도 사고가 났다면 파벨에서 알고도 모른척 했거나 아예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물론, 파벨은 브리센의 손 안에 있는 기사단이었다.
칼리안이 소리 없이 툴툴거렸다.
'세상에 믿을 놈이 없어.'
곧 국왕 일가가 특별석이 있는 곳으로 올라서자 미리 자리를 채우고 있던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르메인이 그들을 향해 손을 올려 화답했다. 그 뒤 멜피르가 팔을 올려 좌석을 가리켜보였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르메인과 실리케가 각자의 자리에 앉고 란델과 플란츠가 그 뒤에 마련된 좌석으로 걸어갔다. 언제나와 같이 칼리안은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칼리안이 걸음 속도를 늦췄다.
유난히 느린 걸음으로 멜피르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리 위가 불안하군요. 살펴보세요."
짧은 순간, 멜피르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닿았다.
하지만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눈을 내리 뜬 채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멜피르 역시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살짝 숙였던 허리를 똑바로 세워 섰다.
'드러내놓고 도울 상황은 되지 않으니 더 자세히 설명을 해줄 수는 없고. 그래도 상단주라면 그 정도 눈치는 있겠지.'
만약 멜피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고가 난다면 란델을 끌어당겨 다치지 않도록 지킬 생각이었다. 란델이 표적이었다는 것만 드러나지 않으면 멜피르도 목숨은 건질 테니까.
멜피르의 시선이 르메인의 옆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머물렀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다른 귀족의 방해 없이 르메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자리였다. 당연하겠지만, 남작인 멜피르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르메인의 옆에 앉을 기회를 가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멜피르가 몸을 돌렸다. 자신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얼굴의 칼리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멜피르는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가, 르메인을 향해 말했다.
"전하.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제가 직접 아래에서 감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알겠네."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똑똑하네.'
칼리안의 한 마디에 르메인의 옆에서 대화 할 수 있을 기회를 바로 내버렸다. 당장의 이득보다 만일의 상황을 더 중시할 만큼은 신중한 자라는 소리다.
르메인의 양해를 얻은 멜피르가 자리를 벗어났다.
- 만나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 진행자가 운동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한 손을 배꼽 위로 가져다 대며 특별석을 향해 허리를 숙여보인 진행자가 관객석을 보며 다시 한번 인사했다.
- 그리고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 관객 여러분, 환영합니다.
관중들이 큰 박수로 화답했다. 진행자가 말을 이었다.
- 여러분께서 앉아 계시는 아스트리샤 폴룬 공연장은, 아주 유서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양신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려 하시는 시스파니안 선왕비님의 말을 하츠아라 선대왕 전하께서 붙들어 세우신 곳이 바로 제가 서 있는 이 자리입니다!
관중들이 일제히 웃었다.
카이리스의 모든 기마 공연장에서 다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의 주의를 끌어낸 진행자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 그럼 더 기다리시지 않도록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끝낸 진행자가 안으로 들어간 뒤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됐다.
여러 마리의 말을 이끌고 나온 기수들이 말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달리는 말의 다리 밑을 지나는 등 여러가지 묘기를 보여주었다.
칼리안은 그 모습을 조금 따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대다수는 그 스스로도 쉽게 해왔던 것들이었으니까. 물론 그런 능력이 없을 대부분의 관객들은 탄성을 내며 좋아했다.
실리케는 여전히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아슬아슬한 묘기가 펼쳐질 때마다 그것으로 얼굴을 가리며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칼리안의 대각선 앞에 실리케가 앉아있었고 그 방향에서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던 탓에 칼리안은 실리케가 하는 꼴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다.
'들으라는 듯이 나를 죽이겠노라 말하던 그 실리케는 어디 갔나.'
그 가증스러운 모습을 더 참아주기 힘들어진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칼리안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던 플란츠와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오는 길에 키리에의 죽음이 떠올라 플란츠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난 상태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증오감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플란츠를 마주 노려보았다.
그 때, 달리는 말 위에 올라 있던 기수가 안장에서 뛰어 올라 뒤에서 달려오던 다른 말의 안장에 완벽하게 착지했다.
관객들이 큰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보냈고 그 시끄러운 틈을 타고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소름끼치도록 기분 나쁘고 음산한, 하지만 칼리안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쾌하고, 음흉하고, 약삭빠르고."
칼리안에게 하는 말이었다.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플란츠는 칼리안을 보며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제 주제도 모르는."
실리케는 독을 보내고 플란츠는 욕을 보내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칼리안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미친놈이, 처돌았나!'
순간적으로 플란츠에게 달려들 뻔 한 칼리안이 주변의 이목이 많음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굳이 이 자리에서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칼리안이 눈을 감았다 떴다.
날이 서 있던 눈빛과 표정이 거짓말처럼 지워지며 본래 플란츠를 대하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입이 비틀어졌다.
"역겹다. 토악질이 나와."
플란츠는 아니었다.
주변을 신경 써 화를 추스르는 법 따위는 몰랐다. 플란츠가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 네 놈에게 흐르는 그 천박하고 더러운 피가."
란델이 눈을 치켜뜨며 플란츠를 쳐다봤다.
뒤에 서있던 기사들과 시종들의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플란츠를 보았다.
그리고 르메인.
그의 가라앉은 눈도 플란츠를 향했다.
어느새 1부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소리가 사라진 그 곳에 플란츠의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 특별석 위의 모든 이들이 플란츠의 말을 듣게 되었던 탓이다.
'플란츠.'
실리케의 눈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적이 흘렀다.
표정을 숨길 자신이 없어진 칼리안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하얀 손에 가려진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