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7화 (18/527)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1)

칼리안이 이제 막 점심 식사를 시작했을 그 시각.

세뉴 관 1층에 마련된 홀에 모인 귀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 축제 마지막 날이었으나 분위기는 첫 날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 축제 둘째날,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 마법사 협회에 들어가 하루종일 머물렀다.

- 협회의 마법사들이 갑작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다.

이런 소식들이 발빠르게 퍼져나가던 중,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함께 들려왔다.

- 앨런 마나실이 처음으로 사제의 연을 맺은 이는 다름아닌 3왕자 칼리안이다.

- 이에 대해 국왕 르메인과도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 둘의 만남이 가져올 파장을 따져 본 귀족들의 혼란은 막지 못할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 소식이 미처 전해지지 못한 곳도 있었다.

소식을 전해 들을 이가 늦은 아침까지도 잠에서 깨지 않은 탓이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방의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그를 깨우던 상급 시종의 것이었다.

"왕자님. 일어나십시오. 왕자님!"

그의 시종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지도, 종을 울리지도 않았다. 커튼으로 가려둔 침실 밖에 선 채로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왕자님!"

다시 한번 시종이 그를 부른 뒤에야 닫혀 있던 눈꺼풀이 살짝 열리며 연두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평소 같지 않은 풍경에도 그는 그저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것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아팠던 듯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은 그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커튼 밖에 시종이 서 있었다.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시종이 다시 한번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플란츠 왕자님, 일어나셔야······!"

그 때 시종의 뒤에 나타난 또 하나의 인영이 팔을 뻗어 시종을 옆으로 밀쳐내고는 커튼을 잡아들었다.

강한 향기가 온 방 안을 잠식했다.

르니에리 향기.

플란츠가 얼굴 가득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마."

들어가도 되겠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었다.

항상 그리하였다.

먼저 물어보고 배려하는 방법 따위, 모르는 사람이었다.

새하얀 손가락이 커튼을 젖혔다. 그 후에는 민트색 드레스 자락과 그 끝의 연노란색 구두가 플란츠의 침실로 한 발 들어왔다. 실리케였다.

실리케의 뒤로 플란츠의 시종이 함께 들어왔다. 당황하여 어찌해야 할 지를 몰라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한 두번 있던 일이 아니었건만 여전히 적응을 하지 못한 듯 했다.

플란츠가 시종을 향해 나가라는 듯 손을 한번 휘저었고, 시종은 그를 향해 깊숙이 인사하고는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실리케가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여 플란츠는 그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실리케가 천천히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르니에리 향에 가려져 술 냄새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플란츠는 그것을 언급하는 대신 말 없이 침대 옆에 놓인 술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마셨으니 냄새가 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행동이었다. 물론 르메인의 금주령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이기도 했다.

실리케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그 눈빛과 별개로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가 부채 뒤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고작 열 다섯이란다. 술에 매여 살 나이는 아니잖니. 게다가 곧 나가야 하는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고."

순간 플란츠는 서류 뒤에 숨은 르메인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플란츠가 술에 손을 댄 것은 15세의 성인식을 다녀온 직후부터였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늘 술냄새를 풍기며 사는 것까지 이해해 줄 수 있을 문제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심지어 저 꼴을 하고 궁 밖에 나서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실망스러운 행동일까."

"그걸 말씀하시려던 것은 아닐테고."

플란츠가 마시다 남은 술이 담긴 술잔을 들어올렸다.

게슴츠레 뜬 눈은 잠이 덜 깬 것인지 혹은 술이 덜 깬 것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분명한 것은 대화를 하겠다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 뿐이었다.

"왜 오셨는데요."

부채를 쥔 실리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를 참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플란츠는 그 역시 보지 않았다.

"네가 자꾸 이런 모습을 보이면 전하께서 어찌 생각하시겠니. 아무리 이 어미가 애를 쓴다 하여도,"

"듣기 싫은데······ 그런 얘기."

나른한 목소리.

실리케의 눈가가 떨렸다. 곧 실리케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는구나. 전하와 이야기 나눌 때에도 그리 한 것은 아니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내가.'

살짝 눈을 뜬 플란츠가 조소를 보였다.

"왜 오셨는지. 그것만 말하고 가세요."

대답 대신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풀어 헤쳐진 옷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만 가득했다.

"칼리안이 마법사를 등에 업었단다. 앨런 마나실, 그 마법사가 칼리안을 제자로 들였다며 벌써부터 귀족들이 동요하고 있더구나."

마법사.

실리케를 스치듯이 지나쳐 소파로 향하던 플란츠의 발이 잠시 멈칫했다. 플란츠가 시선을 내려 손에 들린 술잔을 봤다. 잔 속의 술이 출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 플란츠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그래서요."

실리케가 플란츠 쪽으로 돌아섰다.

무슨 의미인지, 어째서 이렇게 달려왔는지 알아듣지 못할 플란츠가 아님을 알았다. 때문에 실리케는 더 설명하는 대신 물었다.

"계속 나에게 이렇게 실망을 줄거니?"

"하지 마세요. 애 쓰는 거."

플란츠는 실리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수없이 이야기했던 말을 다시 꺼내놓았다.

실리케가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플란츠가 말을 막았다.

"짜증나니까."

곧 플란츠가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실리케는 그런 플란츠를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플란츠의 손은 내려오지 않았다.

"······ 오늘 갈 곳도, 앞으로 가야 할 곳도. 늦지 말고 나오렴."

부채가 접히고, 실리케가 다시 한번 플란츠의 얼굴을 쳐다봤다.

"네 걸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도록 해두마."

실리케는 그대로 몸을 휙 돌려 밖으로 나갔다.

곧 쾅, 하는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플란츠가 문을 가리켰던 손을 내렸다.

들고 있던 술잔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플란츠가 이를 악물며 그것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 쨍그랑!

산산조각 난 유리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튀어 오른 유리 조각에 손등이 베여 피가 흘러내렸다.

밖에서 눈치를 보던 시종과 시녀들이 잔이 깨지는 소리를 듣곤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플란츠는 손 끝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가."

"왕자님, 손에서 피가 납니다. 치료를······!"

"나가! 나가라고! 꺼지라고!"

······ 칼리안!

* * *

식사를 마친 칼리안은 왕자의 정복으로 갈아 입었다.

해독약이 벌써부터 효과를 내는 것인지 숨을 쉬는 것이 조금 편안해졌다. 앨런이 찾아와 급히 준비하게 된 덕분에 모닝 티를 마시지 않은 것도 이유일 것이다.

시녀들이 칼리안의 머리를 빗기고 마지막 점검을 해 주는 동안 옆에 선 얀이 축제의 마지막 일정을 설명했다.

"곧 기마 공연을 보러 가실텐데 왕궁 밖에 있는 곳이라 1시간 정도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후 8시부터는 무도회가 있습니다."

왕자들도 기마 수업을 받고 국왕의 생일에 기마 공연을 보는 것은 르메인이 말을 좋아해서였지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무튼 레이븐과 함께 있는 것은 칼리안도 좋아하는 일이었으니 달리 불만은 없었다.

"브리센 상단에서 취소했던 그 공연인가?"

"네, 맞습니다. 그 일로 브리센 자작이 직접 찾아와서 왕자님들과 석찬도 했었지 않습니까?"

국왕이 참석할 정도의 큰 공연은 보통 대형 상단에서 주최했다. 그만큼의 인원이 모여 있는 극단이 없었기도 했고 대부분의 대형 공연장이 상단 소유였던 까닭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 공연은 폴룬 상단에서 주최하기로 했습니다. 브리센이 아닌 다른 곳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처음이네요."

"폴룬?"

'익숙한데. 뭐지?'

칼리안이 눈썹을 오므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칼리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폴룬 남작."

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해주었다.

"네. 멜피르 폴룬이라는 젊은 남작인데 상당히 똑똑하고 수완이 좋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브리센에서 공연을 양보한 셈이 되었네요."

칼리안이 실소했다.

'교수형 당하기는 싫을 테니 양보할 수 밖에.'

칼리안이 입 밖으로 대답하지 못할 그들의 사정이란 것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칼리안이 멜피르 폴룬을 기억하는 것은 세크리티아에까지 알려진 꽤 유명한 일 때문이었다.

무려 왕족, 그것도 1왕자가 다쳤던 사고.

기마 공연을 마치고 국왕 일가가 나오던 시간에 공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구조물이 무너졌다. 그리고 하필 그 때 계단 위에 있었던 란델이 무너진 구조물에 맞아 한 층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텐실에서 한 달쯤 요양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게 지금이었구나. 르메인이 기마 공연을 하도 많이 봐서 그 일이 오늘 공연에서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거기까지 떠올린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지.'

구조물을 고정한 밧줄을 날카로운 것으로 잘라두었던 흔적이 나왔다. 그것이 멜피르가 란델을 해치려 했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으나 하필이면 다친 것이 텐실 국왕의 손자였다. 때문에 텐실의 불만이 많았고 결국 르메인은 멜피르를 교수대로 보냈다.

그 일을 듣고 왕족을 노린 것 치고는 허술한 테러였음에도 너무 섣부른 처사가 아니었는지에 대해 체이스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었다. 체이스는 뭔가를 알아낸 것 같았지만 베른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베른은 그것을 맞추기 위해 한동안 고민을 했었다. 그 덕에 여전히 기억이 났다.

'폴룬이 범인이 맞았을 확률은 없다고 보아야겠지.'

진짜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공연장에서 그렇게 티 나는 증거를 만들어놓고 왕족을 노릴 리가 없지 않은가. 얀이 말한 것처럼 상당히 똑똑하고 수완이 좋다면 이 공연을 기회로 삼지 교수대 올라갈 발판으로 삼을 생각을 하진 않을 터였다.

'역시 브리센이 제일 의심스러운데······. 란델을 왜 노린걸까. 그것도 적당히 다칠 만큼. 아니면 단순히 폴룬 상단을 노렸나.'

그것을 위해 왕족에 텐실까지 건드릴 만큼 폴룬이 위협적일 이유가 있었던가.

상단과 관련해서는 베른도 옛 칼리안도 기억하는 내용이 많지 않았다. 칼리안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왕자님······?"

옆에서 들린 얀의 목소리에 칼리안이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응?"

미간을 찌푸린 채 거울을 보며 말을 안하니 얀이 눈치를 보았던 모양이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뭣 좀 생각하느라."

그러고 보니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내면 얀이 항상 불안해한다. 옛 칼리안이 대체 거울을 얼마나 깨뜨렸으면 저러는지.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울은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네, 왕자님."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들킨 얀이 민망해하는 얼굴을 했다. 그것을 짐짓 못 본 척, 칼리안이 다른 질문을 했다.

"오늘 공연 중에 폴룬 남작이 인사하러 오나?"

"보통 공연 시에는 주최자가 전하의 옆자리에 앉으니까요. 공연 시작 전에 인사를 올릴 겁니다."

"그래."

브리센이 개입한 이유가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어딘가 구린내가 진동을 하는 것이다.

'일단 살려놓고 확인을 좀 해봐야겠어.'

그래서 이렇게, 일단 멜피르 폴룬부터 살려놓고 사정을 파악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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