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6화 (17/527)

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4)

그래. 분명 몸에 이상이 있었다.

"처음에는 밖에 나서지 않았었기 때문이라 넘겼고 심장의 통증을 느낀 이후에는 마나 문제일까 생각했습니다.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했었고요."

그것이 모두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이것은 해독약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급히 만들기는 하였으나 해독이 되는 것은 확인했으니 그걸 다 먹을 즈음이면 다 나으실 겁니다. 그럼 저도 그때부터 왕자님의 마법을 보아 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의 시선이 약 주머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앨런이 그런 칼리안을 가만히 쳐다보다 칼리안이 아닌 제3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 담담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타크리모사라는 맹독입니다. 몇가지 독초에 크리모사라는 뱀의 피와 독을 섞어 만들지요. 어제까지 건강했던 왕자가 갑자기 죽는다면 이상하게 여길 터이니 서서히 병드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헌데 어지간한 독은 축복의 힘으로 고쳐질 테니 소량의 맹독을 꾸준히 섭취하게 해 온 것이겠지요."

참으로 잔인하다.

칼리안은 고작 열 넷이었다.

잘못한 일이라고는, 프레이야를 닮았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려면 향도 없고 맛도 없고 은에도 반응하지 않으면서 병증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또 오랫동안 먹일 정도의 많은 양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을 겁니다. 왕자님의 증상과 그런 조건에 맞는 독이 바로 그것입니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앨런이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그가 말하고 있는 것들은 전날 하루 종일 마법사 협회 건물에 눌러앉아 테이난샤에 거주 중인 마법사들을 달달 볶아 알아낸 정보였다.

"축복의 힘이 없었다면······. 아무리 적게 먹는다 해도, 폐에 병이 난 것처럼 기침을 하다 일주일 안에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겁니다. 그런 독한 것을 치유하다 보니 심장에 무리가 왔을 터. 그리하여 치유력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고 마나를 쓰려 하면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지요. 이미 힘들어 죽겠는데 또 힘을 쓰겠다 하니 아프다고 소리를 지를 밖에요."

칼리안이 약 주머니를 닫으려다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알약 몇 개가 무릎 위로 떨어졌다. 칼리안이 서둘러 그것을 집어 다시 넣었다.

집어드는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칼리안은 분명히 암살됐다. 독살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마나를 쓸 수 없던 것을 보면 내가 상황을 바꾸어 독에 당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들이 원래의 과거에서도 칼리안에게 독을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사실이 가져오는 또 다른 의문에, 참을 수 없을 분노가 치밀었다.

"······ 왜."

주머니를 손에 꼭 쥔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봤다.

'이미 죽어가던 아이를 왜, 목을 졸라 죽였는가!'

앨런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붉은 눈에 그득한 살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것은 분명 소년이 가질 수 있을 눈빛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그 쪽으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앨런은 조금 전 보았던 눈빛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 눈 앞으로 날아오는 칼만 날카로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예리한 법이니."

칼리안은 앨런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소드마스터는 독에 해를 입지 않는다. 때문에 방심을 했다.

방법을 막론한 각종 암살 시도가 난무하는 전장도 겪어보았던 베른이다. 그런데 방심을 했다.

'교살됐다는 사실에 얽매여서 중독을 의심하지 않았다.'

명백한 증상에도 불구하고 독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칼리안이 저질러서는 안됐을 큰 실수였다.

"심하게 중독된 상태입니까."

"제가 보기엔 오늘 내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칼리안이 풉 웃었다. 앨런의 말에 기분이 한결 풀어진 것을 느끼며 물었다.

"만약 독과 해독약을 같이 먹는다면 그래도 더 심해질까요?"

앨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 하지 마시지요. 속도야 늦춰지겠지만 결국은 위험해질 것이니."

"어느 정도 늦춰지겠습니까."

"저도 치유사가 아니니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열흘이 될 지, 보름이 될 지."

칼리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늦춰진다면 충분합니다. 함께 먹겠습니다."

"진심으로 독이랑 약을 같이 처드시겠단 말입니까?"

이것이 욕인지,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네. 몸의 단순한 이상이었다면 몰라도 독이라면 신중히 대처해야 합니다. 당장 안 먹겠다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앨런의 걱정어린 눈을 보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침마다 마시는 차인 것 같습니다. 그것 외에는 매일 같은 것을 먹지 않았어요. 다만, 항상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셨습니다. 시녀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만에 하나의 경우를 간과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예전의 칼리안은 자신이 서서히 중독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이 든 차를 거부했을지 모른다.'

칼리안이 차에 독이 들었다 눈치챈 것을 실리케가 알았다면 이미 중독되어 죽어가는 아이에게 암살자를 보냈을 수 있다. 실리케라면 분명히 그리 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차를 물리면 곧바로 다른 방법을 쓸 텐데 그때와 지금의 내 상황이 다르니 그들이 무엇으로 죽이려 들지 확신하기가 어려워.'

생각을 정리하는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 범인을 잡을 증거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근래 몇 달 동안 브리센 상단에서 가죽을 쓴다며 뱀을 잔뜩 들여온 증거는 이미 모아두었고 지금도 마법사 협회에서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고작 하루 사이에 앨런은 참 많은 것을 알아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카드로 남겨두면 되겠네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실리케를 잡을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뿐만아니라 증거까지 모았다니 대단할 따름이다. 이 정도를 알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마법사가 동원된 줄은 모르는 칼리안이 그저 씩 웃었다.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차에 독이 들었음을 제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실리케가 몰라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시녀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그 차를 마셔왔어요. 먹지 않고 버릴 방법이 없으니 해독약을 함께 먹더라도 차는 계속 마셔야죠."

"게다가 모닝 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얀과 다른 시녀들이 다칩니다. 저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독을 건넸으니 아무 일 없이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새끼 코끼리는 괜찮을텐데."

앨런의 혼잣말같은 중얼거림에, 칼리안이 되물었다.

"네?"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시종은 어찌 그리 믿으십니까?"

그 질문에, 칼리안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켜보이며 대답했다.

"거짓말 못해요. 여기, 얼굴에 다 티가 나서."

그리고는 오른 손바닥을 쳐다봤다. 작지만 분명한 흉터가 남아 있었는데 플란츠와의 일로 다쳤던 자국이었다.

그 손을 붙들고 어린애처럼 울던 얀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냥. 믿습니다."

앨런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하루 이틀 써야 할 독이 아니니 실리케 역시 들킬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는 것은 들켰을 때 빠져나갈 방법도 확실하게 마련해 놨다는 말이겠지요. 심지어 제 앞에서 버젓이 저를 죽이겠다는 말까지 했으니까요."

레넌 브리센 자작과의 석찬에서 보여준 실리케의 태도가 생각났다. 그것은 분명 걸릴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자칫하면 실리케는 잡지 못하고 제 사람만 잃습니다. 오히려 누명을 씌웠다며 저까지 몰아세울 테고요. 그렇게 되면 자객이 들거나 또 다른 독에 노출되더라도 막기 어렵습니다."

앨런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최소한 독이라는 수단 만이라도 완전히 포기하게 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만 함께 먹겠습니다. 그 후에 날아들 눈에 보이는 칼들은 어떻게든 막으면 되니까요."

앨런이 복잡한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해독약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그것을 입에 쑥 넣어 삼켰다. 그것을 본 앨런이 눈썹을 모로 세웠다.

"의심을 하고 집어 먹으라 했지 않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짜 독이면 어찌하려고요."

"그럼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제가 믿는 만큼 스승님이 저를 믿지 않으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믿음을 못 드린 제 잘못 아니겠습니까."

앨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 한번 번지르르하십니다."

"앨런 마나실을 꼬셔낸 입에서 나오는 말인데 오죽하겠습니까."

마치 칭찬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칼리안이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칼리안을 보며 잠시 침묵하던 앨런이 물었다.

"그래요. 이제 제가 또 무엇을 해 주면 되겠습니까."

살 수 있는 방법을 일러 준 것만으로도 과분했으나 아직 칼리안은 앨런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일 저녁, 저를 한 번만 왕궁 밖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데려가 드리지요."

* * *

- 자르륵.

손에 들린 약 주머니를 살짝 위로 던졌다 받으니 해독약들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앨런이 돌아간 뒤, 칼리안은 지금 처음으로 얀과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점심 식사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주머니만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다.

칼리안이 앨런과 나눈 이야기가 건강 상태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을 아는 얀이 불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옆에 서있기만 했다.

자르륵.

칼리안의 손에서 약 주머니가 다시 소리를 냈다.

"······ 얀."

"네, 왕자님."

"열흘 안에, 귀족들이 참석하는 일정이 있어?"

"축제 전 한달 동안 귀족과의 일정이 중단되었던 탓에 당분간 조금 많이 있습니다."

다행한 일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으로 뭐가 있지?"

잠시 칼리안의 일정을 떠올려보는 것인지, 얀은 한 동안 시선을 내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가까운 것부터 나열하기 시작했다.

왕궁 외부로 나가는 일정, 그리고 내부에서 진행되는 일정들이 주르륵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질렸다는 얼굴이 됐다.

'많기도 하다!'

칼리안이 손을 살짝 들어 설명을 멈추게 했다.

"됐어. 그 정도면 충분해. 고마워."

"네, 왕자님."

지금 칼리안은 실리케가 독을 포기하도록 만들 방법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다.

앨런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생각난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것이 지금의 칼리안이 열흘 안에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래서 앨런에게 왕궁 밖에 나가겠다 말했고 때마침 딱 들어맞는 귀족들과의 일정도 하나 있었다.

다만 좀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고민이 길어졌던 것인데.

- 상대의 패를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지.

문득 베른의 아버지, 지금 세크리티아의 국왕이기도 한 데블란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럴 때 생각이 나긴 나네요. 아버지.'

덕분에 칼리안은 결국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얀을 쳐다봤다.

밥좀 먹으면 안되냐는 말이 새겨지듯 나타나 있는 그 얼굴에, 칼리안이 웃으면서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주머니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자르륵, 하는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자연히 얀의 시선도 주머니를 따라 움직였다. 매우 걱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칼리안이 약간의 진실을 덜어내고 설명을 했다.

"약이야. 다 먹을 즈음이면 나을테니 걱정하지 마. 대신 이것에 대한 건,"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잠깐 말을 멈추자 칼리안의 의도를 눈치챈 얀이 먼저 대답했다.

"네. 다른 곳에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눈치가 빠른 것인지 느린 것인지.

칼리안이 씩 웃고는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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