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3)
얀은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사실 슉 하는 소리가 나면서 없던 사람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다분히 그간 충실하게 쌓아 온 시종으로서의 습관 덕분이었다. 아니었다면 당장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을 테니까.
게다가 홀연히 나타난 이 남자가 누구인지를 곧바로 알아보았으므로, 어제 손목을 삐끗한 시녀를 대신해 손에 들고 있던 세숫물을 쏟아 붓지 않는 침착함까지 발휘했다.
그에 따라 얀은 굉장히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칼리안이 잠들어 있는 침실의 커튼 앞을 막아설 수 있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외쳤다.
"마나실 경,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얀의 앞으로 워프한 것은 당연 앨런이었다.
그런데 앨런의 표정이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와 한바탕 다투고 온 듯한 얼굴을 한 앨런이 손가락으로 침실 쪽을 가리켜보이며 물었다.
"왕자님은 아직이신가?"
"왕자님께서는 지금 컨디션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까지 말하던 중, 시녀들이 침실 커튼 안쪽에서 밖으로 나오다 멈칫했다. 앨런이 누구인지 몰라 놀란 눈치였다. 얀은 설명할 겨를도 없이 시녀들을 재빨리 내보낸 뒤 문을 잠그고 침실 반대편의 욕실로 앨런을 끌고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숫물이 든 작은 대야를 손에 든 상태였다. 내려 놓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 쪽으로 오세요."
왕자의 방에는 침실과 샤워실, 서재와 거실, 그리고 화장실과 욕실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문이었다.
암살자의 침입이나 각종 사고를 대비하여 그리 만들어졌다. 때문에 욕실의 커튼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특별히 방음이 되지 않아 난처해하던 얀이 앨런이 누구인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조용해지는 것 좀 써주세요."
"음?"
멍하게 얀을 쳐다보던 앨런이 뭔가를 이해했다는 표정이 되어서는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그리고 '조용해지는 것'을 시전했다. 곧 그들 주변에 사일런트 마법의 반투명한 막이 생성된 것이 보였다.
얀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이십니까?"
앨런이 손가락만 튕겨 마법을 발현한 것에도 얀은 놀라지 않았다. 얀에게 있어 지금의 앨런은 꽃 같은 우리 왕자님의 방에 침입한 무뢰한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앨런이 걸친 옷이 7서클 마법사를 의미하든 말든. 방금 쓴 것이 무영창 마법이든 나발이든.
그런 생각이 빤히 드러났기에, 앨런이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나를 혼내려고 나한테 마법을 써달라 한 것인가?"
"왕자님이 깨시면 안되니까요."
국왕 르메인에게 일침을 하고 온 그를, 왕자의 시종이 예의 없다며 혼내는 상황이라니. 얀의 태도가 가히 좋지 않았으나 시종으로서 해야 할 일에 충실한 결과라 너그러이 이해한 앨런이 대답했다.
"체르밀 궁에는 외부인이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없다고 하더군. 르메인한테 아직 말을 못 들은 모양이라 어쩔 수 없었네."
"허가가 안나서 텔레포트인가 뭔가를 하셨다는 겁니까?"
앨런이 자기 자신을 대견스러워하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워프라네. 좀 더 어려운 것이지. 내가 마법을 좀 쓰거든."
얀이 함께 웃으며 말했다. 워프든 나발이든.
"나가세요."
"어차피 깨우려던 것 아닌가? 내 기다리지."
얀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됩니다. 조금 더 쉬셔야 할 듯 하여 저희들도 되돌아가는 길입니다."
앨런은 아무 소리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가루가 섞인 검은 타일로 사방이 둘러싸인 그 곳에 오닉스 스톤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검은 욕조가 놓여 있었다. 앨런이 진심으로 감탄하더니 말했다.
"호화롭기 짝이 없는 곳이군. 늙은 스승님 9시 30분까지 왕궁에 오라 해놓고 주무시고 계시는 것도 이해가 되네."
"늙었다뇨. 몹시 팔팔하신데요."
얀이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그 곳이 칼리안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임을 깨달은 얀이 화들짝 놀라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러자 그 표정을 읽은 앨런이 한발 빠르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면 마법 범위 밖인데 이제는 시끄러워져도 괜찮은가?"
얀이 마뜩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앨런을 밀어내기는 그만두었다. 대신 다시 한번 강경하게 말했다.
"전할 말이 있으시다면 일어나신 뒤에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기다리시는 것은 안됩니다."
"난 왕자님 상태를 보러 온 것이네. 그러니 전할 말도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렇다고 왕자님 상태를 자네와 얘기할 수도 없지 않나."
그 말에 얀이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이 앨런과 만났다는 것은 물론 전해들었다. 사제의 연을 맺었다는 것도 들었다.
하지만 앨런이 칼리안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칼리안이 마법사에게 도움을 구하겠노라 했던 적이 있었지만 앨런에게 벌써 그 말을 했는지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모르는 척 하기로 결정을 했다.
"상태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계속 말을 안 듣는 얀을 보던 앨런은 결국 조금 아껴두려 했던 패를 일찌감치 꺼내들었다.
"자네. 나를 알지?"
"······ 그야, 당연히 알지요. 왕자님께 들었으니까요."
앨런이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는 얀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새끼 코끼리. 까불지 말고. 나를 알지 않느냐고 물었잖나."
얀의 눈이 홉떠졌다.
사람들이 지그프리드를 두고 코끼리라 부른다는 것을 모를 얀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앨런이 슉 나타난 것을 보았을 때보다 더 놀라는 바람에, 세숫물이 담겨있던 대야를 기어코 떨구고 말았다.
- 땡그랑!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동시에 앨런이 손가락을 튕겼다.
앨런의 앞에 반투명한 실드가 생성되어 물이 옷에 튀는 것을 막았다. 물론 얀에게까지 실드 범위를 넓혀 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으니 얀 혼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다. 어쩐지 세숫물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은 물이 쏟아지며 앨런이 웃음을 참듯 입가를 씰룩였음에도, 놀란 얀은 눈치 채지 못했다.
"어떻게······?"
"몇 년 전에 아빠 코끼리와 리베른에 왔었지 않나. 좀 컸다고 다른 사람인 척 하면 내가 못알아 볼 성 싶던가?"
순간 슬레이만이 했던 말이 얀의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 내 아들이 워낙 귀티가 안 나니 아무도 의심을 안 할 만도 하지.
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닌데요! 들켰는데요! 그 동안 엄청 컸는데도 바로 들켰는데요!'
그것이 숨길 수 없는 귀티 때문이었을지, 앨런의 귀신 같은 기억력과 촉 때문이었을지, 얀의 브론즈 색 곱슬머리와 청회색 눈 때문이었을지.
혹은 이틀 전 늦은 밤, 마법사 친구를 만나 거나하게 술에 취한 어떤 소드마스터의 주사 때문이었을지는 오직 앨런만 알 수 있을 일이었다.
왜 그것을 숨기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됐건 얀의 큰 약점을 틀어쥔 앨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깨우게. 잔다고 낫는 것 아니니 시간 낭비 말고."
결국 5분여가 지난 뒤, 칼리안이 얀의 종 소리를 듣고 잠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온 몸이 푹 젖어 있는 얀의 꼬락서니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축제 서프라이즈야?"
"······ 죄송합니다, 왕자님."
"우는 거 아니지?"
"안 울어요."
칼리안이 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얀이 조금 안심한 듯 말했다. 밖에 앨런이 있다는 말을 전해주는 것도 잊어버린 채였다.
"이제 좀 나아지신 것 같아 보입니다, 왕자님."
축제 첫날 앨런을 만나고 돌아온 칼리안의 얼굴은 그야말로 죽을 상이었다. 강행군 끝에 앨런의 공격 아닌 공격을 받았던 탓이 컸다.
만약 그런 내용을 얀이 알고 있었다면 앨런을 보자마자 물세례를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종일 잠만 잤으니까."
"플란츠 왕자님 덕분이라 해야 할 지는 몰라도 다행이네요."
본래대로라면 일정 상 축하 사절과 만나야했다.
그런데 플란츠가 술을 먹고 광장에 나선 것을 르메인이 알게 되었다. 카이리스 귀족들이야 플란츠가 하루 이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엘프까지 끼어 있는 사절들은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플란츠가 그들의 앞에서 실수를 할까 걱정한 르메인은 사절단과의 자리에 왕자들을 부르지 않았다.
"응. 어제 일정이 다 비었으니 좋은 일이지."
덕분에 칼리안은 긴 숙면을 취하며 휴식하는 행운을 누렸다. 의도치 않게 칼리안에게 도움을 준 꼴이 된 플란츠를 생각하던 얀이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전하께서 플란츠 왕자님께 금주령을 내리셨다 하더라고요."
"금주령이라니?"
"플란츠 왕자님께 술 가져다 주지 말고, 술 마시는 자리에선 음료수만 주라 하셨다고 합니다."
그 르메인이 저런 말까지 했을 정도면 우려하는 목소리가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말했다.
"퍽이나 안먹겠다. 축복이 있는데도 취할 정도로 마시는 것을."
"그래서 플란츠 왕자님의 시종들이 걱정이 많은 모양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안의 시선이 침실을 막아 둔 커튼으로 향했다. 그제야 앨런을 생각해 낸 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지금 마나실 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깜짝 놀랐다. 어쩐지 커튼을 걷지 않았더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앨런이 칼리안의 얼굴을 정확히 쳐다보며 한 손을 흔들었다. 칼리안이 서둘러 앨런을 향해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얀이 말했다.
"왕자님께 긴히 확인할 것이 있다 하여 부득이하게 이리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응. 잘했어."
잠시 얀의 몰골과 스승의 방문 사이의 상관 관계를 따져보던 칼리안이 결국 답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우선 간단한 옷을 입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행사를 위해 정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던 탓이다.
준비가 모두 끝난 뒤 커튼이 걷혔다.
"두 분께서 함께 식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라 전하겠습니다."
"아. 나는 되었네. 바로 가야 하니."
얀과 시녀들이 밖으로 나간 뒤 칼리안은 비로소 앨런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칼리안이 오래 기다려 준 앨런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앨런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건 이제 하지 마세요. 되었습니다."
"네, 스승님."
칼리안이 앨런의 앞에 마주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침에 르메인을 만나러 올 적당한 시간을 일러준 것은 맞았지만 자신까지 보러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다.
앨런이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칼리안에게 건넸다.
"잊지 말고 매일 하나씩 챙겨 드세요."
그것은 붉은 색의 장식 없는 주머니였다. 안을 열어보니 진주빛을 내는 반투명한 구슬같은 것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왕자님이 가지고 계신 문제가 둘 입니다. 하나는 마나 운용이 안 되는 것."
대답 대신 이렇게 말한 앨런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칼리안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본능적인 회피였다. 앨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번 확인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마나를 쏟아넣는 짓은 더 안 할 테니 걱정 마세요."
덕분에 하루를 꼬박 앓았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칼리안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금 왕자님 몸이 바짝바짝 말라 가는 것."
"마나도 그렇고 몸 상태도 그렇고. 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리 잘 아시는지 신기하네요"
고개를 끄덕여보이기만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앨런이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시스파니안의 축복의 힘을 지니셨지요."
"네. 맞습니다. 치유력이 생기고 마법에 대한 친화력이 늘어나는 힘입니다."
"혹여 그것이 다소 이상한 조합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 없습니까. 치유력과 마법이라니 말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바가 있었다.
비슷한 생각을 했을 때 떠올랐던 옛 칼리안의 기억을 되새긴 칼리안이 대답했다.
"축복의 힘이라는 것이 결국 심장을 강화하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나와 생명의 근원이 모두 심장에 있기 때문에요."
"네. 맞습니다. 시스파니안은 심장의 힘을 강화시키는 축복을 내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왕자님의 치유력도 사라졌을 듯 한데, 맞습니까? 그러고 보니 문제가 세 개인 것이군요."
칼리안의 머릿속에 플란츠가 던진 나이프에 상처를 입었던 날이 생각났다. 결국 상처가 모두 아물기까지 꼬박 2주일이 걸렸다.
혹시라도 이상한 소리가 나올까봐 상처를 숨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을 떠올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네. 그것도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칼리안이 손에 올려진 약 주머니를 쳐다봤다.
심장을 고칠 약인지를 궁금해하는 모습이었으므로,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료약이 아닙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입니까."
앨런이 혀를 차며 말했다.
"왕자님은 심장이 고장난 것도 아니고 마나가 막힌 것도 아니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 뭔가를 집어먹을 땐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을 좀 해보시지요."
칼리안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 독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