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2)
왕비 실리케가 머무는 헤이시아 궁.
그곳의 후원에는 칼리안의 방 두 개를 합친 정도는 될 듯한 크기의 온실이 있었다.
벽과 천장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는 온실은 언제나 르니에리 잎으로 가득했다. 짙게 풍겨 나오는 실리케의 향수 냄새와 달리 온실 안에서는 특별한 향이 나지 않고 있었다. 하얀색의 신비로운 르니에리 꽃은 1년에 단 하루만 피었기 때문이다.
그 온실 안에 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마치 그린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의 실리케가 앉아 있었다.
다만 그 눈매가 사나운 것을 본 레넌이 어깨를 움찔했다.
'또 기분이 별로인 모양이군······. 하긴. 좋을 리가 없지.'
축제 첫날 2왕자 플란츠가 술에 취한 채 광장에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터지는 일인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틀이 지난 지금 그 누구도 플란츠를 욕하지 않고 있었다. 칼리안으로 인해 플란츠에게 질책의 눈길조차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리케를 더 자극했다.
덩달아 레넌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오자마자 카이리스에 앨런 마나실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려 했는데 저래서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소식이야 굳이 레넌을 통하지 않더라도 전해들을 수 있을 테니까.
'구두만 전해주고 빨리 돌아가자.'
레넌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뒤에 서 있던 집사에게 눈짓을 했다.
집사가 손에 들고 있던 선물 상자를 시녀장에게 건넸고 시녀장이 건네받은 상자의 뚜껑을 열어 실리케의 앞에 들어 보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실리케가 이렇게 물으며 상자 속을 쳐다봤다.
그것은 실리케의 눈빛과 잘 어울릴 연한 노란 색의 구두였는데, 구두를 장식한 금 조각의 가운데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구두를 훑어 본 실리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흡족해하는 것이다.
"말씀드렸던 텐실의 다이아몬드입니다. 운하를 건설하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했지 않습니까. 그 곳에서 나온 첫 원석들로 만든 상품 중 하나라 합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눈을 돌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실리케가 대답했다.
"나쁘지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계획한 일이······!"
"그건 그렇고."
레넌의 입이 민망하게 닫혔다.
레넌의 말을 자른 실리케가 고개를 돌려 시녀장을 잠시 쳐다봤다.
구두에 대한 감상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감사 인사는 고사하고 정작 하려던 말까지 막히자 레넌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것이 얼마짜리인 줄 알고!'
그런 레넌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을 시녀장은 무덤덤한 얼굴로 예를 보인 후 레넌의 집사를 데리고 온실 밖으로 나갔다.
"두 달이 지났습니다. 어찌 아직입니까."
테이블 위에 올려진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목소리가 잇사이로 흘러나왔다.
갑작스럽게 변한 실리케의 얼굴에도 레넌은 놀라지 않았다. 원래 그런 성격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탓이다.
레넌이 가까스로 웃어보이며 실리케를 달랬다.
"그것이······ 아무래도 시스파니안의 축복 때문일 것 같습니다."
"축복의 힘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다 하지 않았습니까. 3왕자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주 큽니다. 무척 거슬려요."
레넌이 마른 침을 삼켰다.
부채를 팔랑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는대로 물건을 더 보내세요. 양을 늘릴 테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다른 수를 쓰시는 것이······!"
실리케는 레넌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며 문 쪽을 향해 손짓하는 것이 마치 날벌레를 쫓는 듯한 태도와 비슷했다.
레넌의 입 속에서 작게 이 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뿐, 결국 레넌은 꺼내려던 말을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 * *
르메인이 더 깊어진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카이리스에 머물 집이라니.'
물론 반가운 일이다.
안 그래도 앨런을 카이리스에 두고자 하는 생각으로 불러다 앉힌 참이었다. 지금 실리케의 세력을 누르려면 앨런 정도의 인사는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속내로 저런 말을.'
그런데 앨런이 먼저 이런 이야기를 꺼내놓으니 오히려 그 의도가 의심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광장에서 빨간 눈 고양이 한 마리를 봤는데 꽤나 마음에 들더군요. 이것 저것 가르치고 키워야겠다 했는데 그러자니 정작 제가 머물 곳이 없지 않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르메인이 말했다.
"칼리안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물은 앨런이 앞에 놓인 탁자에서 쿠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반 잘라 입에 넣더니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국왕의 질문을 받은 뒤 취하기에는 참으로 무엄한 행동이라 하겠으나 르메인은 말 없이 기다렸다. 곧 차까지 한 모금 마셔 입을 적신 앨런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검은 머리와 붉은 눈. 그리고 마법이라."
"그러니까······. 그대가 칼리안 왕자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 카이리스에 머무르겠다는 소리인가."
"뿐만 아니라 고양이가 좋아할 환경도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집주인을 도와서 집 정리도 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를 키우겠다는 것은 핑계고, 실리케 세력을 정리하여 칼리안을 다음 왕세자로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그것이 르메인에게 해가 될 것은 없었다. 르메인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은 뒤 물었다.
"감당이 되겠나. 알겠지만 지금 집안 꼴이 엉망이네."
"저도 뭘 키워보는 것이 처음이라. 감당하실 수 있을는지."
르메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이 걸렸다.
"그나저나 명분이 좋군. 스승과 제자라니."
왕자와의 사제 관계.
앨런이 카이리스에 눌러앉을 가장 그럴싸한 명분이다.
물론 실리케를 포함한 브리센 후작가에서 왕자의 마법 교육을 반대하려 하겠지만 상대가 앨런 마나실이다.
"제가 먼저 칼리안 왕자님을 제자로 삼겠다 지목했으니 브리센에서 막을 명분이 뚜렷하지 않고. 또 제가 하루종일 마법 수업만 할 수는 없을 테니, 시간이 남는 스승이 전하를 도와 일을 좀 한다 해도 방해할 수 없을 테지요. 제법 제대로 된 초대장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르메인이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마치 이 명분을 칼리안이 만들었다는 듯한 뉘앙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런은 그에 대한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곧 생각을 정리한 르메인이 앨런에게 대답했다.
"그래. 머물 곳을 마련해 주겠네. 안 그래도 엉망인 집에 고양이 키울 이가 들어온다 한들 더 나빠질 것도 없겠지."
앨런이 가볍게 고개 숙여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대화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허락과 별개로 르메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헌데 어째서인지 궁금하군. 특별할 것이 없다던 아이인데."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까."
되묻는 앨런의 눈이 의미심장했다.
"오히려 저는 칼리안 왕자님에게서 특별하지 않은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쓸데없이 건강 상태까지 특별했다.
"그 아이가 겁이 많다고는 들었네. 말도 무서워한다 하던데 경을 쫓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것은 고쳤나보군."
앨런은 칼리안이 매우 숙련된 솜씨로 말을 몰던 것과 그 말에 기대어 서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왜 아까부터······.'
그러다 문득, 르메인의 말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란델은 깊은 물과 같고 플란츠는 성난 파도와 같다 들었지. 칼리안은, 글쎄. 탈 없이 조용한 아이라 하였을 뿐. 재능이 있는 줄 몰랐네."
'어째서 전부 전해들었다 말하는거지? 마치······.'
직접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만약 무언가 특출한 것이 있었다면 내게도 전해졌을 테지. 그래서 사실 조금 놀랐네."
차를 들어 목을 축인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창가로 걸어가 밖에 펼쳐진 정원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조금 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저도 전하와 마찬가지로 조금 빨리 결혼을 했었지요. 그러다보니 벌써 망아지 같은 손녀도 하나 있습니다."
순간 르메인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알고 있었으나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에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물론 앨런이 생각한 '더 놀라운 이야기'는 손녀 자랑이 아니었다. 앨런은 손바닥을 아래로 둔 채 팔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머리가 제 허리춤에 왔으니. 아마 이 정도······. 지금은 더 컸을 겁니다. 그럼, 이 정도."
앨런의 팔이 조금 더 올라갔다.
뜬금없이 왜 키 얘기를 하나 싶었으나 르메인은 일단 조용히 앨런의 말을 들었다. 그런 르메인을 응시하던 앨런이 물었다.
"전하께서는 혹시 왕자님들 키를 아십니까. 전하와 함께 섰을 때 어디까지 오는지를요."
르메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몰랐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라 예상한 앨런이 시선을 옮겨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때로는 관심이 독이 되기도 하고 무관심이 약이 되기도 하는 것을 압니다. 바쁘다는 것은 아무 핑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잘 알지요. 어제도 왕자님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까. 같이 걷고 같이 서 있었는데 어떻게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르메인의 눈빛이 식었다.
앨런이 지금 국왕의 사적인 영역에까지 간섭하려 한다고 느낀 것이다.
"마나실 경. 관심이 지나치군. 자네는 오늘 나를 처음 보았네. 자식을 대하는 나의 방식이 그대의 기준에 맞을 필요는 없지 않나."
불편하다는 심기를 굳이 가리지 않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것을 설명하는 것도 우습지만 나는 왕자들을 아끼고 있네."
"정말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르메인이 잠시 말을 멈추고 앨런을 응시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르메인은 빨리 이 소모적인 대화를 마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경이 만난 칼리안, 그 아이는 특히나 그렇지. 내게 있어 깨물어 보기도 전에 이미 아픈 손가락이니까. 그 아이를 가르치겠다 하니 지금의 태도는 이해해보겠지만,"
"하!"
앨런이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국왕의 말을 자르고 튀어나온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르메인의 얼굴에 노기가 나타났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앨런이 아니었다. 앨런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르메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전해 듣는 것은 그만하시고 좀 들여다 보시지요."
"무엇을 말이지?"
르메인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고민 없이 물었다. 대체 무엇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줄이야!'
앨런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화를 삭이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깨물어 보기도 전에 이미 아픈 손가락이라 하지 말고 그냥 한번 깨물어 보시라는 말입니다. 예전보다 더 아픈지, 아니면 덜 아픈지."
"······."
"관망만 하시다가는 잃게 되실 겁니다."
르메인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마나실 경. 똑바로 말하게."
앨런이 다시 걸어와 르메인의 앞에 섰다.
칼리안의 바싹 마른 등이 생각난 탓에 이번에는 앨런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더 작고 더 빠르게 몰아치듯 말했다.
"피부에 푸른 기운이 돌고 손톱 밑이 보랏빛을 띱니다. 입술은 말라 있고 숨을 몰아쉽니다. 눈동자 가장자리에는 어두운 빛이 돌기 시작했더군요. 몸을 일으키다 말고 눈을 감고 멈추어 섭니다.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예복은 급히 수선한 티가 났습니다. 분명 크기를 줄였을 겁니다. 예복을 짓는 데에 얼마나 걸립니까. 한 달?"
르메인의 얼굴에 드러났던 노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앨런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아랫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앨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챘기 때문이다.
"설마, 누가 그 아이에게······."
앨런이 르메인의 말을 또 잘랐다.
"네. 바로 알아들으시는군요. 그렇다면 바로 알아보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이미 한번 같은 일을 겪으신 전하라면. 저도, 그랬으니까요."
프레이야.
르메인의 머릿속에 간신히 접어두었던 이름이 떠올랐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도 고작 한 달 만에 옷을 줄였다면 한 눈에 티가 났을 겁니다. 키를 모르더라도, 손이든 입술이든 보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말라가는 것은 아셨어야죠. 그 아이가 살기 위해 찾은 것이 일면식도 없는 마법사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야 마땅하지요!"
르메인이 허리를 구부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 끝이 떨려왔다. 전혀 생각지 못했다.
"독이라니······."
"정말 아낀다던 그 손가락, 이제는 좀 깨물어 보시지요."
앨런이 허리를 숙여 남은 반쪽의 쿠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씹어 삼키며 르메인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감싸쥔 손가락 사이로 참담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니면 지금 같은 그런 얼굴을 하지 마시던가요."
앨런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칼리안에게 해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르메인의 심기를 더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계속 모르는 것으로 하십시오. 이제와서는 그것이 낫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여 감히 말씀드렸습니다. 용서하시지요."
말을 맺은 앨런이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예를 보인 뒤 그대로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