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1)
세뉴 강.
카이리스 수도인 카이리시스에 흐르는 강이었다. 왕궁의 건물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이 강은 카이리시스를 대각선으로 나누며 흐른다. 왕궁은 강의 북동쪽 지역 중앙에 있었고, 카이리시스 남서쪽의 외성 정문 밖에서부터 이어져 들어온 왕도가 세뉴 강을 건너 카이리스 왕궁까지 이어졌다.
하츠아라 사후 시스파니안이 떠난 뒤.
침체되었던 국가를 일으킨 것이 바로 왕도 건설 사업이었다. 주요 도시로 쭉쭉 이어진 이 널찍한 도로 덕분에 카이리스가 다시 부흥을 맞이했다 할 만큼, 카이리스에서 왕도는 상당히 중요한 시설이었다.
- 다그닥, 다그닥······!
그 왕도 위에서 각각 흰 색과 검은 색으로 칠해진 마차 두 대가 왕궁을 향하고 있었다.
나란히 달리던 그 마차들은 모두 더할 나위 없이 호화로운 외관을 자랑했다. 둘 모두 진주 가루를 섞어 바른 반짝이는 외벽에 커다란 유리 창문을 달아 두었던 것이다.
다만 한 대는 흰 색 바탕에 금박으로 장식을 했고 또 한 대는 검은 색 바탕에 자개로 장식을 했다는 점이 달랐다.
헌데 자개라는 것이 카이리스에서는 상당히 귀했다. 카이리스가 대륙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유일하게 없는 것이 바다였기 때문이다. 진주는 담수에서도 양식이 되었으므로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나 자개 재료가 되는 금조개는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금 값보다 자개 값이 더 비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카이리스였다.
그런 자개로 거대한 마차를 치장한 것이 고스란히 보였으므로 이 검은 마차를 향한 시선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보니 오른쪽에서 나란히 달리던 흰 마차 탑승자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마차 안에 있던 이가 창 밖에 보이는 검은 마차를 보며 혀를 찼다.
"저 꼴을 보게. 그야말로 굴러다니는 돈 덩어리로군. 사치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자 마부석에 앉아있던 집사가 마부석과 연결된 들창 너머로 그 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금박은 싼 줄 알고 저런 소리를 하나. 게다가 지금 남을 보며 사치를 논할 때인가?'
텐실에서 공수해 온 최상급 다이아몬드가 박힌 구두가 실려있지만 않았어도 마차 주인에게 이런 생각을 할 일은 없었으리라.
흰 마차의 외벽에는 날카로운 검을 쥐고 있는 그리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왕비 실리케의 집안인 브리센 후작가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차에 타고 있던 이는 브리센 후작의 둘째 아들이자 브리센 상단주인 레넌 브리센이었다.
"마차 주인이 지그프리드라도 되는가? 아니지. 덩치만 산만한 코끼리들이 저럴 리는 없는데."
카이리스의 코끼리.
그것은 지그프리드를 일컫는 말이었다. 오랜 기간 단 한번도 왕좌를 탐낸 적 없으나 그 힘은 막강하니 맹수도 건드리지 못할 초식동물이라 하여 그리 불렀다.
지그프리드 외에는 저런 마차를 탈 만큼이 된다 여겨지는 가문이 없자 답을 찾지 못한 레넌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말했다.
"대체 어떤 자가 마차에 저렇게까지 돈을 처바른 것이야?"
집사가 들창을 통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조금 전 테이난샤 거리 쪽에서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다만 문장이 반대편에 있는지라 정확히 어느 가문의 마차인지는······."
"테이난샤 거리?"
"네.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집사의 말에, 레넌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내가 몰라서 되물어 본 것 같나.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실리케나 칼리안이 들었다면 비웃었을 법한 말로 집사에게 무안을 준 레넌이 다시 한번 커튼을 걷어 검은 마차를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검은 마차의 창문에도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어 도무지 누가 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법사들 중에 저런 재력을 가진 사람이 있던가."
"반대편 쪽의 가문 문장을 살펴볼까요?"
"그래. 그렇게 하게."
말을 들은 집사가 마부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레넌의 하얀 마차가 속도를 줄여 뒤쳐진 뒤 다시 속도를 높여 검은 마차의 반대편으로 따라잡았다. 레넌이 재빨리 손을 움직여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벽에 새겨진 문장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넌이 눈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 문장 한번 복잡하네. 저건 뭐야, 꽃인가? 꽃이 하나, 둘······."
마차가 조금 더 앞으로 움직여 문장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제야 문장을 정확히 확인한 레넌이 자신의 눈을 세게 비볐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금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붉은 꽃 일곱 송이와 은색 지팡이입니다, 브리센 자작님."
"내가 그걸 몰라? 입 좀 닫아!"
붉은 꽃 일곱 송이, 은색 지팡이!
"이게 무슨 일인가? 허어······ 미치겠군. 난리가 났어. 어찌 저 자가 여기에, 카이리스에 있느냔 말이야? 왕궁에는 왜 가는 것이지?"
대체 저 문장이 어느 집의 것인지도 모르겠고 입도 닫으라고 했으므로 집사는 그저 눈만 꿈뻑거리며 앞을 쳐다봤다.
두 대의 마차는 귀족들이 거주하는 에이난샤 거리도 통과했다. 때문에 레넌이 아닌 다른 귀족들도 왕궁으로 향하는 이 값비싼 검은 자개 마차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붉은 꽃들이 핀 덩굴이 은색 지팡이를 이리 저리 휘감은 모양이었다고?"
"네. 그런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마차 외벽에 새겨진 문장의 모양을 들은 귀족들은 저마다의 하인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그 뒤에는 분명히 그렇게 생긴 문장이었다는 확신 어린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귀족들은 손사래를 치고 난 뒤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잘못 봤겠지."
에이, 설마.
"그 앨런 마나실이 여기에 왔을 리 없잖아."
그 뒤에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각자 하던 일을 싹 다 집어치우고 왕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 * *
축제 셋째날. 오전 9시 30분.
많은 이들의 시선과 관심 속에 왕궁에 도착한 앨런은 국왕으로부터 받은 초대장을 보여주며 왕궁의 열린 문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닫힌 문의 문턱이 높은지 낮은지는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검은 자개 마차의 외벽에 새겨진 앨런의 문장은 멀리서도 아주 잘 보였다. 그리하여 시종장은 아침에 인사를 온 귀족들과 접견한 뒤 집무실로 향하는 르메인에게 지금 왕궁에 누가 왔는지를 급히 알렸다.
"전하. 조금 전 앨런 마나실이 왕궁에 찾아왔다 합니다."
르메인이 발을 멈추었다.
앨런 마나실. 대륙에 세 명 뿐인 7서클 마법사.
하지만 다른 두 명과 달리 어떤 국가에도 정착하지 않은 콧대 높은 능력자.
그의 이름이 가지는 힘이 어떤 것인지는 르메인 역시 잘 알았다. 앨런을 얻게 되면 왕위 계승 후보에 오르리라는 칼리안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나라를 운영하느라 하루가 부족한, 그래서 왕자들에게 단 5분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던 르메인이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집무실로 바로 안내하도록."
덕분에 앨런은 왕궁의 작은 마차로 옮겨 탈 필요 없이 자신의 그 화려한 마차에 탄 채로 곧장 르메인이 있는 아르피아 궁까지 올 수 있었다.
의도한 것 같은 9시 30분.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는 아르피아 궁 앞에 나와 있는 귀족들이 참 많았다.
축제 기간동안 늦춰진 일정 덕에 나르실 관으로 여유있게 출근하던 왕실 업무 담당자들, 외무 담당과 오찬을 마치고 루비아 관으로 돌아가던 사신들, 그리고 국왕 접견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던 귀족들까지.
"저것은 앨런 마나실의 문장이 아닌가?"
"허어······ 리베른과 맺었던 계약이 끝났다더니."
그렇게 모이게 된 많은 귀족들은 카이리스에 파란을 몰고 올 검은 자개 마차가 소리 없이 멈추어 서는 것을 두 눈으로 고스란히 보게 되었다.
"헌데 어찌 카이리스에 왔을까. 리베른에 계속 있는 것이 몸도 마음도 편안할 터인데."
"그런 일을 겪었는데 편했을 리가 있겠나? 리베른 국왕과의 관계만 아니었어도 아마 진작에 떠났을 걸세."
"음? 아아, 그래. 내 미처 떠올리질 못했군······."
마차의 문이 열렸다.
뒤에서 앨런의 카이리스 방문 목적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모두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 명의 마법사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은색에서 시작해 붉은 색으로 끝나는 특유의 머리 색이 햇빛 아래 드러나자 그가 앨런 마나실이 정말 맞다는 것을 확인한 귀족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마차에서 내린 앨런이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첫날 입었던 누더기를 대신해 보란듯이 걸친 붉은 색의 로브에는 7서클을 상징하는 문양이 금사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날카로운 눈은 차갑게 빛났고 가는 입술에는 도도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중년 남자가 다가가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마나실 경, 어서 오십시오. 저는 국왕 전하를 모시는 시종장 라울 하르트입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모시겠습니다."
시종장을 직접 보낸 르메인의 의도가 분명했으므로 귀족들이 다시 술렁였다. 물론 앨런은 어딜가든 이 정도의 환대는 받았기 때문에 익숙한 상황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궁으로 들어섰다.
"정말 카이리스에 올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이겠나. 설마하니 천하의 앨런 마나실이 카이리스 국왕 전하의 탄신일 축하나 하고 돌아가자고 왔을까."
귀족들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들어찼다.
당연한 일이다.
실리케의 기에 눌려 사는 르메인에게 앨런 마나실이 찾아왔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한편, 복도에 들어서 더는 마주치는 사람이 없자 라울의 뒷통수를 쳐다보던 앨런의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해맑은 웃음을 짓던 새 제자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9시 30분, 정확히 그 때 오세요. 물론 이번에는 꼭 '열린 문'으로 오셔야 합니다.'
덕분에 앨런은 마법사 연합에서 만들어 주었으나 한번도 입지 못했던 부담스러운 옷을 입고 리베른의 국왕이 작별의 선물로 주었던 거대한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왕궁을 찾은 길이었다.
칼리안의 의도대로 수많은 귀족이 아르피아 궁 인근에 모여있던 시간에 도착한 앨런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제자님께서 나를 끌어들였다고 아주 널리 홍보하시겠다는 생각을 하셨군.'
곧 르메인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앨런이 안으로 들어섰다.
르메인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집무실에 마련된 응접용 소파에 앉아있었다. 앨런은 칼리안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르메인에게 인사했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르메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앨런의 인사를 받았다.
앨런이 굉장히 어려보였으나 사실은 르메인 자신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칼리안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그래. 이리 와 앉게."
르메인이 살짝 손을 들어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고 사양 않고 걸어온 앨런이 르메인의 앞에 마주앉았다. 르메인이 깊이 있는 눈으로 앨런을 바라보며 잠시 해야 할 말을 정리하는 동안, 앨런은 자신의 것으로 나온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첫날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내 대신 사과하지."
"첫날의 이야기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어떤 이야기에 대한 사과입니까?"
르메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앨런의 말에 든 뜻까지 부드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왕궁에서 벌어진 일은 수비대원이 무례를 저질렀던 것 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 대한 사과로 알아듣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앨런은 어떤 이야기인지를 묻고 있었다. 르메인이 그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그대가 찾아온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정도로만 전해 들었지. 3왕자에게서 따로이 전해 들은 이야기가 없었네."
공작 슬레이만이 예상한대로 르메인은 칼리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말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르메인은 수비대원에게 화가 나 돌아가던 앨런을 칼리안이 쫓아갔었다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사과하실 일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화는 즐거웠고 정문에서의 일도 설명을 들었습니다. 물론 설명을 들었다 하기보다는 괜한 꼬투리 잡지 말라고 혼이 났다 해야 맞을 듯 합니다만 아무튼 잘 마무리 하였습니다."
르메인의 눈에 의문이 들었다.
방금 칼리안이 앨런을 혼냈다는 말을 들은 것이 맞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르메인이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앨런의 말이 이어졌다.
"전하. 카이리스에 제가 머물 만한 집이 있습니까."
설명 없이 곧바로 튀어나온 본론에 르메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