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2화 (13/527)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6)

칼리안이 차분한 눈으로 앨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었으나 원하는 바는 분명했다.

'대화를 하자는 것이겠지.'

아무리 타국의 왕자라 하나 말 위에서 상대할 수는 없었으니 앨런도 별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 그제야 칼리안도 앨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칼리안은 상당히 놀랐는데 분명 50대라 알고 있던 앨런의 얼굴 생김새 때문이었다.

아무리 높게 보아도 20대 중반.

다행히 아래로 내려갈수록 붉은 빛이 진해지는 독특한 머리 색이 그가 앨런 마나실이 맞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7서클을 완성시키면 나이를 한번 역행한다더니.'

그제야 정문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생각보다 젊었던 것이 이해되었다.

'과연. 제대로 찾았어.'

칼리안은 감탄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고 앨런을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을 대한 앨런의 눈에도 이채가 돌았다.

'고작 열 넷인데. 어떻게 저런 눈으로 사람을 살피는가?'

자신을 훑어본 것은 수비대원과 다르지 않았으나 그 시선이 달랐다. 어쩐지 자신의 차림새가 아닌 쓰임새를 살펴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간단한 인사. 그 태도가 사뭇 당당했다.

왕족이 아닌 그 누구도 왕자를 처음 마주하는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인사하지는 못한다.

지금 앨런은 칼리안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한 치기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왕족의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인재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는 자다.'

르메인의 앞에 서더라도 앨런의 이런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이 진심어린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얀에게 말한 것처럼 칼리안은 왕족이었으니 제 입으로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다. 곧 칼리안이 잠시동안 앨런을 쳐다보다 물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어찌 그냥 돌아가십니까."

"닫힌 문을 열려니 문턱이 너무 높더군요."

잠시 칼리안을 살피던 앨런이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돌려 말하기를 해보자는 건가.'

앨런의 대답을 들은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지금 앨런은 수비대원이 허름한 차림새를 보고 쫓아냈다는 것을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티 나지 않도록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적당한 말을 골라 꺼내놓았다.

"문을 열어두었는데 굳이 닫힌 곳을 찾으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초대장 준 건 어따 두고 꼬투리를 잡느냐고.

앨런이 묘한 기분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눈빛도 그렇더니 열 넷의 소년이 할 법한 대꾸가 아니다.

미안하다는 사과 말고 앨런의 태도부터 꼬집은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많다보니 문턱에 티가 쌓입니다. 바람을 막는 것에 급급하여 미처 닦아 두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나 못 들어오게 막느라 수비대원이 실수를 하는 것까진 신경쓰지 못했다는 뜻을 담아 말을 덧붙였다.

사과도 아닌 그 말이 솔직하다 해야 할지 뻔뻔하다 해야 할지. 앨런의 양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지켜보면 재미가 있을 아이구나.'

그런 생각을 한 앨런이 칼리안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 보았을 땐 보이지 않았던 여러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앨런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웃음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잠깐······?'

앨런의 시선이 칼리안이 입고 있던 붉은 예복의 끝자락에 닿았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쳐다봤다. 그런 앨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칼리안은 그저 묵묵히 앨런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던 탓에 칼리안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어렸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앨런이 갑자기 팔을 뻗어 칼리안의 손목을 잡아챘다.

- 휙!

평소와 같았다면 이 정도는 피했을 테지만 오늘은 유난히 심신이 혹사된 날이었다. 하루 종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느라 말 그대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더욱이 왕궁에서는 칼리안의 몸에 이렇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덕분에 여러 모로 방심했고 하릴없이 손목을 붙들렸다.

칼리안의 손목을 잡은 앨런이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눈을 내리떴다.

"이게 무슨······!"

칼리안이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앨런이 칼리안의 몸에 자신의 마나를 흘려넣었다.

익숙해지기 힘든 날카로운 통증이 심장을 찔러왔다. 말을 모두 맺지 못한 칼리안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간 느껴온 것의 몇 배는 될 듯한 아픔에 몸이 휘청거렸다.

- 다각!

주인의 상태를 알아본 레이븐이 한 발 다가와 칼리안에게 제 몸을 가져다 댔다. 그런 행동에 놀랄 경황도 없이 레이븐의 몸에 기대어 선 칼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기도 전에 상태를 들키다니.'

이런 모습을 쳐다보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력이 칼리안에게 무슨 영향을 줄지 알았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문을 닫아 두어도 바람을 모두 막아내지는 못하는 법이지요."

'참 잘도 말한다!'

칼리안이 사나운 눈으로 앨런을 쳐다보며 붙들려 있던 손목을 잡아 뺐다. 놓지 않으려 하다가는 앙상하게 마른 손목이 그대로 부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앨런이 손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더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 하."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고 화를 가라앉혔다. 오래지 않아 칼리안의 입에서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인할 게 있다 미리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앨런의 마음을 돌려놓기도 전에 아픈 것을 먼저 들켰으니 이 이상 해야 할 말도 없지 않나. 물론 목소리까지 곱게 나오진 않았다.

"바람을 다 막지는 못한다······ 네, 맞습니다. 다 막지는 못했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마나를 쓸 수 없었습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계셨습니까."

허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마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진짜 문제가 따로 있다는 것은 모르는 눈치인데.'

용의 후손이 이끌어가는 나라에서 정작 마법사들을 홀대하기에 왔다. 제 발로 찾아 온 귀한 대마법사를 코앞에서 놓쳤다 여기게 할 셈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마주하게 되었다.

"흐음."

문득 고개를 든 앨런의 눈에 분수대 가운데 세워진 시스파니안의 조각상이 들어왔다. 오늘 하루 종일 온 거리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

그것도, 지켜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은.

시스파니안의 조각상과 왕궁을 한번씩 쳐다본 앨런이 다시 칼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곧바로 따라오셨습니까?"

칼리안의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앨런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는 왕자가 시기 적절하게 쫓아와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을 우연이라 하기엔 억지스러운 점이 많지 않나.

'저 질문이 나올까봐 제대로 마음을 사기 전까지는 아픈 것을 숨기려 했던 것인데.'

칼리안이 잠시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내가 미래에서 왔는데 당신이 왔다 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의 환심을 사려고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앨런이라면 그 정도는 간파할 것이 분명했다.

"말을 타고 근처를 거닐다 수비대원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달려왔습니다."

주신 세렌티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지금 한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다. 말장난에 가까운 속임수였지만 어찌됐건 솔직하게 답을 했다.

잠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칼리안을 응시하던 앨런이 다시 물었다.

"왜 달려오셨습니까."

"달려가셨으니까요."

순간 앨런이 피식 웃었다.

딱 제 나이에 맞을 대답이 비로소 나온데다 아직 앙금이 남아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많이 아팠던가 보다, 하고 생각하던 앨런이 다시 물었다.

"그럼. 저를 왜 찾으셨습니까."

칼리안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마나를 쓸 수 없는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알텐데 왜 굳이 묻는 것일까.'

앨런은 생각에 잠긴 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대답이든 빨리 하라 채근하지도 않았다.

잠시 후 칼리안의 입이 열렸다.

"왜, 라고 하신다면."

치유사도 찾지 않고 앨런을 기다린 이유.

돌아가면 난리가 날 것을 알면서도 왕궁 밖으로 나왔던 이유. 분명 있었다.

칼리안은 레이븐에 기대고 있던 몸을 똑바로 했다.

"앨런 마나실. 내가 그 이름을 얻고자 함입니다."

작은 한숨을 내쉬는 듯한 말이 이어졌다.

"······ 조만간 진짜 바람이 불 것 같아서요."

사실 암살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적당히 세자위를 사이에 둔 자리 싸움 정도로만 이해해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앨런이 검지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짝 긁적였다.

지금 앞에 있는 왕자가 어떤 처지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카이리스 왕궁 안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왕비 실리케가 가진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잘 알았다. 때문에 앨런 마나실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이 셋째 왕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적당히 알 것 같았다.

"왕자님께서는 바람을 막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잠재우고 싶으신 겁니까."

다른 세력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것만 할 생각인지. 아니면 전부 물리치고 정점에 설 생각인지.

칼리안이 말 없이 앨런을 쳐다봤다.

정말로 믿어도 좋을 자인가. 마지막으로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을 마주한 앨런의 눈에도 같은 빛이 떠올랐다.

잠시 후, 칼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을 전했다.

"당장은 막아야겠지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왕좌가 아닙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위해 왕좌가 필요하다면 잠재울 생각도 있습니다."

왕좌를 그저 선택사항으로 치부하는 오만한 말.

당장 죽어가는 몸 말고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왕자가 저런 말을 한다.

벌써부터 재미가 있었다.

'앞으로는 얼마나 더 재미있으려고.'

앨런의 양쪽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손가락을 들어 카이리스 왕궁을 가리켜보였다.

"초대장, 다시 주시지요."

고작 국왕 탄신 기념일 축하파티에 참석할 사흘 짜리 초대장이 아닌, 내가 널 도울 수 있을 제대로 된 명분을.

칼리안이 웃었다. 그리고 곧 웃음을 지워냈다.

날카롭게 빛나던 붉은 눈이 앨런에게서 멀어져 바닥을 바라본다. 고개가 숙여지고 무릎이 굽혀졌다.

- 사락······.

하얀 망토가 잠시 부풀어올라 허공에 맴돌다 곧 깃털처럼 바닥에 내려앉았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칼리안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앨런은 자신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칼리안의 등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더니만.

그 등은 또 어찌나 작은지.

앨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일생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제자를 향해 대답했다.

"초대에 응하겠나이다."

그래, 내 너를.

살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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