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5)
연회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지그프리드 관으로 급히 달려온 시종이 시종장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시종장이 안색을 굳히며 서둘러 르메인의 뒤로 다가왔다.
"전하."
르메인이 살짝 뒤를 쳐다봤다.
주변에 듣는 이가 많았던 탓에 손으로 입을 가린 시종장이 최대한 작은 소리로 말을 전했다.
"칼리안 왕자님이 조금 전 왕궁 밖으로 나갔다 합니다."
르메인의 고개가 시종장을 향해 조금 더 기울어졌으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시종장의 말이 이어졌다.
"헌데 그것이, 지그프리드 공작이 보증을 하였다 합니다."
지그프리드 공작과 칼리안이 무슨 관계일지를 생각해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잠시 말 없이 있던 르메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알겠다."
그 뿐. 르메인은 별다른 지시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조치 없이 그대로 두라는 뜻을 알아들은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지그프리드라.'
르메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 * *
한편 그 시간.
정원에 나와있던 공작 슬레이만의 입이 일그러졌다. 그러다 결국은 그 입에서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푸하하하! 으하핫! 푸으어하하하!"
웃음을 참으려 애쓰다가도 폭소가 터졌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슬레이만이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다 입이 또 벌어졌다. 말 대신 웃음이 다시 쏟아졌다.
지그프리드의 남자들은 웃음이든 울음이든 한 번 터지면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르는 것이다.
"푸······ 하. 으큽큽큽!"
"지금 웃을 일이 아니라고요!"
결국 그 앞에 서 있던 이가 두 손을 들어 슬레이만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들을까 걱정된다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을 한 사람, 바로 얀이었다.
"내 아들이 나를 믿고 일을 벌였다는데, 내 기분이 좋지 않겠느냐?"
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멈춘 슬레이만이 고불거리는 머리를 여전히 풀어둔 얀에게 말했다.
얀의 얼굴에 속이 터질 것 같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러자 슬레이만이 뭐가 걱정이냐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아마 이 모습을 칼리안이 봤다면 아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둘이 부자 사이임을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둘 다 똑같이 얼굴에 모든 것이 나타났으니까.
"네 꼬맹이가 도망가면서 수비대가 쫓아오지 못하게 해달라 했고, 네가 지그프리드를 팔아 먹었더니 수비대원이 안 쫓아갔다. 그럼 된 것 아니냐?"
아들이 사고를 쳤는데 도리어 좋아하던 슬레이만이 얀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알고 했는지는 몰라도 아주 잘 했다. 좋은 해결책이었다."
"해결은 이제부터 해야죠. 전하께서 왕자님과 아버지가 어떻게 아는지 물어 보실 게 아닙니까?"
"한 수 앞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일을 벌일 만큼 급했느냐?"
슬레이만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재미가 있어 짓는 웃음이 아니라 아직 모두 자라지 않은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웃음이었다.
"걱정 마라. 안 물어본다."
"네?"
"물어보기엔 르메인은 생각이 너무 많다. 그러니 못 물어본다. 징계는 고사하고 아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갈거다. 알겠느냐?"
그 말에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겨있던 얀이 물었다.
"지그프리드라서?"
슬레이만이 정답이라는 듯 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네가 머리 하나는 날 안닮아서 다행이다. 네 나이 때 나보다는 네가 낫다!"
"뭔들 닮았을까봐요."
슬레이만은 자신의 아들이 아직까지도 '우리 왕자님은 기마술도 글로 배우신 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몰랐다. 때문에 얀의 말에 '맞아, 맞아.' 하고 중얼거리다 뭔가 생각난 듯 유쾌하게 웃었다.
"아니지. 그래도 네가 바이올린 하나는 잘 켜니까. 그것은 확실히 날 닮았다!"
검은 못 쓰지만 바이올린은 켤 줄 아는 지그프리드. 그것이 바로 얀이었다.
그러니 조금 전 왕궁에 막 도착한 슬레이만을 봤을 때 얀이 질색한 표정을 지은 것은 아들을 팔며 호탕하게 웃던 아버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화끈하게 팔아 먹은 내가 그래도 이름 값이 좀 나간다."
얀이 뜨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무게를 내려놓고 왕궁으로 왔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르메인이 네 꼬맹이에게 나랑 무슨 관계냐 물으면 그 뒤에 돌아올 대답이 있을 텐데, 대답을 듣고 나서 르메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아무 관계가 없지만 우연한 도움을 받았다는 대답을 하게 되면 지그프리드의 선의를 경계한 꼴이 된다.
관계가 있어 도움을 받았다는 대답을 해도 마찬가지.
그 대답을 듣고 왕자에게 벌을 주면 왕자를 보증했던 지그프리드를 무시한 꼴이 되고, 그 대답을 믿고 벌을 주지 않으면 왕자와 지그프리드의 우호 관계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 땐 브리센 후작이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선택지가 없는 문제였다.
"르메인은 아마 내가 보증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무 것도 안하겠다고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니 꼬맹이도 오늘 미리 예정된 외출이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행동하면 된다. 그래서 내가 잘 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슬레이만이 듬직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종종 팔아먹어라. 내가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해주마. 그러라고 있는 아빠 아니냐?"
얀이 감동했다는 듯한 얼굴로 슬레이만을 쳐다봤다.
그 눈빛에 뿌듯함을 느낀 슬레이만이 허리를 곧게 피더니, 어깨를 쭉 넓혀보이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막 그렇게 비루먹지는 않았다!"
그럼 그렇지.
잠깐 멋있다고 생각한 내가 멍청이지.
얀이 혀를 쯧쯧 찼다. 그 소리를 못들은 척한 슬레이만이 정원에 놓여있던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그 뒤를 따라간 얀이 입을 열었다.
"왕궁 사람들이 제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는 것 맞죠? 전하나 다른 왕족 분들도요."
"나도 생각이라는 걸 하긴 한다. 아니었으면 내정 담당관이 진작에 보고했을거다. 손은 잘 써뒀으니 걱정 안해도 된다."
"하긴. 누구 한 명이라도 알았다면 실리케가 저를 왕자님 옆에 두었을 리도 없겠네요."
슬레이만이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아들이 워낙 귀티가 안 나니 아무도 의심을 안 할 만도 하지."
얀이 눈을 찌푸리며 슬레이만을 흘겨봤다.
하지만 슬레이만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슬레이만과 똑같은 블론즈 색 곱슬머리를 보다 보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푸들 '얀'이 생각나서 자꾸 손이 갔다.
"그런데······."
그렇게 입을 열었던 얀이 곧 말을 멈췄다.
사실 요즘 칼리안의 증상에 대해 물어보려 했던 것이나, 마법과 관련된 내용이라던 칼리안의 말이 생각난 까닭이다. 어차피 슬레이만이 알지 못할 일이면 괜히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꺼낸 말을 집어넣을 순 없었으니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레아는 잘 지내요?"
"잘 지낸다. 이번에 같이 오겠다는 걸 떼어 놓느라 힘들었지."
드미레아, 얀의 여동생이자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소가주였다. 검도 잘 다룰 뿐더러 영특한 아이였다.
슬레이만이 무릎에 올려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굳은살이 빼곡하게 박힌 자신의 손바닥과 얀의 손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물었다.
"그래서 넌. 여기는 좀 살 만 하냐?"
"아버지가 볼 땐 어때 보여요?"
"묵은 똥 싼 것 같다."
말을 해도 꼭.
저러니까 어머니가 집에 안내려가지.
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슬레이만이 고개를 휘적휘적 움직이더니,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기서 꼬맹이 시중 드는 것보단 도련님 소리 들으며 사는 게 낫겠다 싶으면, 언제든지 내려오거라. 그렇게 하기 싫다는 소가주 자리도 이제는 레아가 가져가 줬으니."
잠시 동생을 생각하던 얀이 칼리안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레아랑 나이가 같으세요."
"그렇지."
"처음에 아버지랑 궁에 와서 뵈었을 때에는 꼭 바짝 마른 나뭇가지 같으셨어요. 레아는 이제 막 돋아나서 반짝반짝하는 잎 같았는데."
정원 사이사이를 구불구불 흐르는 인공 시냇물에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가 누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그래서였는데 어느 순간 안쓰러워졌고, 그러다 보호하게 됐고. 지금은 그냥 지켜보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되고 나니까 이제는 살 만 해요."
"그래. 그럼 됐다."
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슬레이만이 묵은 똥 싼 얼굴로 웃었다.
문득 편안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던 칼리안과 얀의 모습이 생각났다. 기세 등등하던 칼리안의 첫 걸음도 떠올랐다.
"그 꼬맹이. 지켜보다 보면 재밌는 일이 많을 것 같긴 하다."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이냐는 얼굴에 슬레이만이 덧붙여 말했다.
"그런 게 있다. 모르면 말아. 아무튼 난 내일 내려가니 한동안 못보지 싶다."
"못보기는요. 3개월 후에 볼 텐데요."
"정말 그만 둘 생각이냐?"
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제 곧 열 다섯이 되시니까요."
"아, 그래. 벌써 그렇게 됐지.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얀이 머리를 다시 단정히 묶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인 슬레이만과 대화를 마쳤으니 정문 근처에서 칼리안을 기다릴 심산이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어느새 칼리안의 시종으로 되돌아온 얀이 정중히 예를 보였다.
슬레이만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빨리 가라는 듯 손을 휘적휘적했다. 얀이 웃으며 돌아나갔다.
* * *
한산했다.
아직 왕궁에서는 연회가 한참일 시간이었으나 광장의 행사는 이미 모두 끝이 났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인근의 술집으로 모여들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하루 종일 많은 이들로 북적이던 광장에는 어느새 분수대를 비추는 마법 등불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적막함에 잠겨 있던 광장에 때 아닌 말 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의 시작점은 왕궁에서 나온 두 필의 말이었는데, 처음에는 왕도를 따라 내려가는 듯 하더니 어느새 방향을 바꾸어 하츠아라 광장을 가로질렀다.
바로 앨런 마나실과 칼리안의 말이었다.
앨런을 쫓고 있는 칼리안이야 당연한 일이었고 앨런 역시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중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말을 멈출 생각은 없었기에 묵묵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따르는 말과 거리가 가까운데도 상대방이 자신을 무어라 불러 세우질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계속 뒤로 따라붙는 상대방의 행동에 호기심이 생겨버렸다.
슬쩍 뒤를 쳐다 본 앨런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지?'
언뜻 보인 것은 하얀 색의 망토였다. 수비대원들은 저런 화려한 망토를 하지 않는다.
그제야 뒤로 따라 붙은 이가 단순한 기사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앨런이 말의 속도를 줄이며 멈추어 섰다. 따라오던 말의 발굽 소리도 잦아들었다.
어느새 광장의 중앙까지 오게 된 탓에 분수대의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뒤로 고개를 돌린 앨런은 그제야 상대방의 차림새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한 바와 같이 그것은 결코 수비대원의 것이 아니었다.
언뜻 보아도 귀족, 혹은 왕족이다.
곧 상대방이 말에서 내려와 천천히 걸어오더니 불빛 아래 선 채 앨런을 바라봤다.
검은 머리. 그리고 붉은 눈.
앨런도 오늘 아침에 광장에서 국왕 일가를 보았었다. 딱 지금 이 자리에 세워져 있던 수정판에서 보여주었던 그 얼굴의 셋째 왕자가 지금 앨런의 앞에 서 있었다.
'저 곱상한 왕자님이 무슨 일일까.'
앨런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