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0화 (11/527)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4)

흰 셔츠와 옅은 베이지 색 바지.

금사로 테두리를 그려낸, 종아리를 덮을 만큼 긴 길이의 붉은 재킷. 그리고 금색 태슬과 자수로 장식된 하얀 망토.

왕자의 정복이나 티 타임 때 입었던 수수한 의상과는 확연히 다른 화려한 예복의 칼리안이 들어서자 일순간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또 루비 펜던트.'

화려한 의복에 시선을 돌렸던 이들의 눈에 이전에 착용했던 루비 펜던트가 다시 보였다.

'같은 것을 했어. 역시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는 소리인데.'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칼리안.

그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엄청난 의미를 가진 것처럼 여겨지는 이러한 반응들을 보건대, 과연 이것이 르메인을 위한 연회인지 칼리안을 위한 르메인의 연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곧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 뚜벅, 뚜벅.

작은 구두 소리가 연회장을 울린다.

입구에 서 있던 지그프리드 공작부터 얼마 전 함께 석찬을 나눈 브리센 자작, 오늘 티 타임 때 만난 귀족들을 거쳐 연회장 가장 안쪽에 위치한 왕족의 자리에 도착하기까지. 가능한 많은 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보였다. 엄숙한 표정을 한 얀이 그런 칼리안의 뒤를 소리 없이 따라 걸어갔다.

르메인이나 다른 왕자들이 도착하기 전이었으니 아직 연회가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모두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던 탓이다.

이유 없이 사람의 이목을 끌어들이는 모습에, 다시 한 번 속삭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고작 열 넷이라는데. 앞으로를 기대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는군."

"맞아요. 저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물론 이런 반응을 보이는 대다수의 귀족들과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칼리안이 좌중을 압도하고 있는 이유를 짐작한 공작 슬레이만의 청회색 눈에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 꼬맹이 기세 한번 훌륭하다! 비리비리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것이 칼 근처도 못 가봤을 상인데 사방으로 서슬을 뿜어대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기사로군.'

그런 슬레이만의 시선을 먼저 느낀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얀이었다. 얀이 잠시동안 슬레이만을 쳐다보다 그 얼굴에 확연히 새겨진 표정을 읽고는 칼리안에게 전했다.

"지그프리드 공작이 왕자님께 관심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싱긋 웃었다.

슬레이만이 왜 관심을 보이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드마스터라 했으니.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것 만으로 다른 의심을 가질 수는 없을 테니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칼리안이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아직은 일러. 우선은 모르는 척 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같은 생각을 한 얀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칼리안은 슬레이만이 짐작한 것, 바로 좌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신나게 뿜어대던 기세를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 둘 칼리안에게서 눈을 돌렸고 그들 중 몇몇이 다시 슬레이만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되니 슬레이만 역시 칼리안에게 보내던 관심을 일단 접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곧 두 왕자들이, 그리고 조금 뒤 국왕 부부가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며 입장했다.

르메인의 감사 인사와 함께 연회가 시작되자 칼리안은 정확히 30분간 자리를 지킨 뒤 정원에 나가는 척 빠져나왔다. 칼리안을 함께 따라나온 얀이 레이븐의 고삐를 쥐고 다가왔다.

같이 걸어가겠다 했으나 하얗게 바래지는 얼굴을 걱정한 얀 때문에, 칼리안은 결국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얌전히 칼리안을 태우는 레이븐을 보며 얀이 말했다.

"신기하네요. 왕자님 앞에서는 순한 양인 것이."

칼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레이븐의 갈기를 헝클어뜨렸다.

"레이븐. 얼마나 착한데."

"속지 마세요. 왕자님 안 계실 때는······ 어우."

칼리안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얀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왕궁의 정문이 잘 보이면서도 적당히 떨어진 곳으로 간 칼리안이 눈을 부릅뜨고 정문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옆에 선 얀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자세한 설명은 원하던 것을 얻은 뒤 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칼리안이 얻고자 하는 것.

바로 앨런 마나실이었다.

"왕자님, 안녕하십니까."

눈에 확 띄는 하얀 망토 탓에 그 주변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 있었음에도 지나가는 왕궁 수비대원들이 칼리안을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얀은 연회에 함께 참석하느라 평소 입던 시종의 제복이 아닌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덕에 어둠 속에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잠시 후회했다.

'까만 것을 오늘 입을걸.'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칼리안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여기서 뭐하시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플란츠 때문이었다. 성질머리가 하도 나빠서 그런 것을 물었다가는 난리를 쳐 댔다.

'란델은 그런 것을 물어보기엔 너무 무섭게 생겼고.'

그러므로 저 정문을 나가려고 하거나 실리케가 머무는 헤이시아 궁에 침입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또 다른 수비대원이었다. 아마 이 근방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는 듯 했다. 그렇게 총 여섯 번의 인사를 받고 난 뒤,

- 다각, 다각.

멀리서부터 왕궁의 정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말 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세우며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을 본 얀도 덩달아 긴장하여 귀를 기울였다.

"누굴 기다리셨던 거군요."

칼리안이 작게 '그래' 라고 대답한 뒤 검지 손가락을 펼쳐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얀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 발굽 소리가 조금씩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문 쪽에 서 있던 네 명의 왕궁 수비대원이 재빨리 움직였다. 둘은 정문을 막고 둘은 다가오는 말을 세웠다. 수비대원의 뒷모습과 말의 머리는 보였으나 방문객의 모습은 정문의 두꺼운 기둥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정문으로 바로 가볼까 하던 칼리안은 우선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앨런이 아니라면 수비대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비대원의 정중한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잠시 말에서 내려주시겠습니까."

기사 특유의 높낮이 없는, 그렇지만 정중한 목소리였다.

조금 뒤에 '탁' 하고 바닥에 발이 닿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수비대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카이리스 국왕 전하의 탄신일 축제라 하여 왔네만."

드디어 방문객의 목소리가 울렸다.

칼리안이 알기로 앨런 마나실의 나이는 5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들려온 목소리는 그보다 훨씬 더 젊게 느껴졌다.

앨런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실망하던 찰나.

"나는 앨런 마나실이라 하네. 마법사일세."

맞다.

칼리안이 어깨를 움찔하며 긴장했다.

- 다각.

놀랍게도 레이븐이 한 발을 내딛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칼리안의 의도를 이해한 것처럼 매우 느린 속도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우연히 산책하다 상황을 보고 다가온 것처럼.'

근처에서 기다리다 갑자기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앨런은 7서클의 마법사였고 인근에 누가 움직이는지 정도는 모두 파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소리는 들리지만 가능한 먼 곳에서부터 빙 둘러 정문을 향해 가고자 했다.

- 다각.

레이븐은 칼리안의 생각을 눈치채고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녀석이 독심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어디론가 가고자 하는 칼리안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구분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리안이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건드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레이븐, 똑똑하네."

칭찬을 알아들은 레이븐이 목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정문 쪽에서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앨런 마나실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 보지 못한 눈치였다.

초대장을 찾는 시늉을 하는 것인지 몰라도 한동안 소리가 없었다. 그러다 난처해하는 듯한 앨런의 말이 들렸다.

"이를 어쩌나. 초대장을 잃어버린 것 같네."

칼리안이 알고 있는 내용과 같았다.

앨런은 초대장을 내어 놓지 않았다. 수비대원이 살짝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내 이름도 말하였고. 한번 다른 곳에 확인이라도 해 주면 안되겠나? 아주 멀리서 왔다네."

수비대원에게는 참석자 명단이 있고 사람들에게는 신분 증명서가 있다. 그러니 초대장이 없어도 명확한 신분이 확인된다면 왕궁에 들어올 수 있다. 사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라면 애초에 초대장조차 필요치 않을 인물이다.

그 순간, 그들에게 다가가던 칼리안이 낭패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수비대원이 앨런의 차림새를 슬쩍 훑어봤다.

참석자 명단을 확인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초대장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 외양으로 격을 가르는구나."

허름한 차림.

거기에 더해 초대장을 손에 들지 않은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앨런은 뭘 확인하려 했던 것인지 몰라도 굳이 꼬투리 잡을 일을 만들어냈다. 카이리스에 오지 않을 이유를 찾고 싶던 것처럼, 핑계거리 만들듯이 억지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 넘어가 상대방의 차림새만 보고 사람 가린 대원도 완전히 잘한 것은 아니었으나 앨런이라 해서 목소리 높일 일은 아니었다.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나라에 발 들이기 싫어하는 저 앨런을 잡아야 했다.

"그래. 내, 돌아가지."

말에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레이븐의 것이 아닌 다른 발굽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직 정문까지 조금 더 가야 했는데 생각보다 앨런의 포기가 너무 빨랐다.

칼리안이 레이븐의 고삐를 다잡으며 말했다.

"얀. 무슨 수를 쓰든 수비대원들 막고 있어."

얀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네?"

"못 쫓아오게 해줘."

"왕자님, 설마······ 나가시려는 것은 아니죠?"

칼리안이 대답 없이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레이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하얀 망토를 두르고 흑마를 탄 채 달려오는 소년이 누구인지를 단박에 알아본 수비대원들이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

"왕자님, 말을 멈추어 주십시오! 지금은 외출이 불가합니다!"

알아!

레이븐의 배를 박찰 필요도 없었다. 레이븐은 알아서 속도를 높였고 수비대원들의 사이를 유연하게 피해 가며 왕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비대원들이 황망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평소 훈련을 시켜둔 것인지, 두 필의 말이 그들의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들을 향해 뛰어가는 얀의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수든 쓰라 했지만 칼리안은 지금의 일에 대해 책임 질 힘이 없었다. 귀족들에게 간신히 좋은 인상을 만들어놨는데 남은 기간 동안 근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모두 허사가 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책임져 줄 수 있을 행동을 해야 했다.

곧 얀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주먹을 한번 쥐었다 폈다. 그 뒤 시종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단정히 묶고 있던 블론즈 색 곱슬머리를 푼 뒤 적당히 흐트러뜨렸다. 시종의 제복을 입지 않아 다행이었다.

"멈춰라."

얀이 눈에 힘을 주며 수비대원들을 불러세웠다.

수비대원들의 눈이 일제히 얀을 향했다.

그리고 얀의 청회색 눈도 수비대원들을 향했다.

같은 색의 눈을 가지고 무도회를 즐기고 있을 이를 잠깐 생각한 얀이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장남 시로이안 지그프리드다."

지그프리드!

곧바로 수비대원들이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모자를 옆구리에 끼고 오른쪽 주먹을 가슴에 올려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카이리스 병사들의 인사법이었다.

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를 받은 뒤 말했다.

"지그프리드 공작께서 칼리안 왕자님의 외출을 보증하셨다."

칼리안 때문에 잊고 살던 이름을 칼리안 때문에 꺼내든 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광장 쪽을 쳐다봤다.

새하얀 망토가 펄럭이는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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