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9화 (10/527)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3)

단상에서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왕자의 역할은 그것이 전부였고 칼리안 역시 그 이상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곧 르메인이 찾아준 이들에 대한 감사를 전하며 긴 인사말을 했다. 몇몇 평민 병사에 대한 기사 작위를 수여하거나 또 몇몇의 귀족 작위를 승급하고 영지를 하사하는 등의 순서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광장의 행사가 끝나고, 칼리안은 다시 한번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왕궁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자신을 뚫어져라 보았다는 것은 알았다. 작정하고 나선 길이니 당연히 눈에 띄었으리라 생각은 했다.

- 검은 머리, 붉은 눈.

하지만 칼리안의 완벽한 모습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그의 외모에서 무엇을 찾아내 입에 담고 있는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얀이 가져온 점심을 남기지 않고 먹었다. 그렇게 하기로 얀과 약속한 뒤 아직 한번도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연회도 아닌 티 타임을 위해 준비하는 의복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단순한 디자인으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대신 메를린의 의견에 따라 장식핀 하나만 더 하는 것으로 정했다.

'대신, 제일 작은 것으로.'

그 말과 함께 칼리안이 고른 것은 셔츠의 양쪽 칼라를 서로 잇는 세 줄의 얇은 체인이 달린 핀이었는데, 가장 짧은 체인의 가운데에 검지 손톱만한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장신구들은 칼리안의 기준에서는 지나치게 화려했으므로 다른 예복을 입을 때도 그 핀만 하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다.

그 셔츠 핀의 여파가 어떻게 번질지도, 칼리안은 예상하지 못했다.

시간에 맞춰 준비를 끝낸 칼리안이 다시 체르밀 궁에서 나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말했다.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러게요. 유난히 올해는 더 바쁜 것 같네요."

얀이 평소보다 반쯤 줄어든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칼리안을 보좌하느라 얀도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었다. 그나마 오찬이라도 취소되어 다행이었다.

이제 향하는 곳은 얼마 전 브리센 자작과 석찬을 했던 세뉴 관이었다. 그 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티 타임을 가질 예정이었다. 물론 칼리안이나 왕자들은 인사를 나누고 가만히 앉아있는 역할이었으니 졸지만 않으면 되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귀족들을 생각하던 칼리안이 문득 물었다.

"얀. 네 가족도 카이리시스에 있다고 했지?"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영지에서 거주했지만 카이리스에는 영지 관리인을 두고 1년의 대부분을 수도 카이리시스에서 머무는 귀족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얀의 가족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언젠가 칼리안에게 가족들이 카이리시스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갑자기 나온 가족 이야기에, 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기억해 주시네요, 왕자님. 여동생과 아버지는 고향에 있고 나머지 가족은 카이리시스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 왕궁에 오려나?"

옛 칼리안의 것이었으니 자신이 직접 기억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색하게 웃은 칼리안이 묻자 이번에는 얀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네······ 초대장을 받았다면 올 겁니다."

두루뭉술한 대답이었다.

아무래도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카이리스의 왕궁에서 일하는 시종은 자신의 성을 밝히지 않았다. 아명이나 가명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궁에 들어올 때 내정 담당관이 실명을 확인하고 믿어도 좋을 사람인지를 엄밀히 검토하므로 그 후에는 굳이 실명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시종이나 시녀로 일하는 귀족의 상당수가 귀족의 서자 혹은 서녀이거나 이름 없는 가문의 자녀였기 때문에 출신을 언급하길 원치 않아 하는 까닭이다.

얀에게도 그러한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마차가 세뉴 관의 앞에 들어섰다.

칼리안이 얀과 함께 있느라 편안하게 바뀌었던 표정을 가다듬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다시 한번 자세를 다잡고 귀족들이 있을 연회장으로 걸어가, 문 앞에 서 있던 기사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기사가 칼리안에게 예를 보인 뒤 연회장 문을 열며 고했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 드십니다!"

국왕을 보기 위해 광장의 인파에 끼어들 필요가 없었던, 그리하여 세뉴 관에서 2시의 티 타임 시간을 기다리던 이들의 눈이 한 곳으로 쏠렸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중앙 귀족.

하나같이 영향력 있는 고위 귀족들이었다. 그만큼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빠르다는 뜻이다.

그들이 접한 소식은 두 가지였다.

플란츠가 취중에 행사장으로 왔다는 것, 그리고 모두 약속한 것처럼 한 명을 쳐다보느라 그런 플란츠를 본 이가 몇 없다는 것.

- 검은 머리, 붉은 눈.

- 시스파니안을 닮은 셋째 왕자.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전해졌을 때 귀족들은 웃었다.

그저 머리를 잘라서 눈의 색이 드러났을 뿐, 단순히 머리 색과 눈 색만 가지고 말을 지어내기 좋아하는 이들이 재미삼아 퍼뜨린 것이라고. 칼리안이 완전히 달라졌으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사의 외침과 함께 걸어 들어오는 칼리안의 모습에, 하늘이 뒤집힌 듯한 충격을 받았다. 모두가 경악한 눈으로 칼리안의 사소한 움직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직 소년의 태를 벗지 않았음에도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의 잘 생긴 얼굴과 맑게 빛나는 붉은 눈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벌써부터 왕족의 기품이 느껴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걸음 걸음마다 품격이 가득한 몸가짐에 저도 모르게 진심어린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그저 연습을 한다 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그들이 가장 잘 알았다.

'대체 언제 저렇게······.'

칼리안은 지금 보여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가 카이리스의 왕족임을 완벽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같은 색의 머리와 눈을 지닌 시스파니안을 떠올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입고 있던 옷이 또 묘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타이트한 감청색 재킷 안에 같은 색의 바지와 하얀 셔츠를 입었다. 길게 늘어진 재킷에는 단추 외의 그 어떤 장식도 없었다. 그래서 셔츠의 목을 여민 작은 장신구가 매우 눈에 띄었다.

셔츠 핀에 달린 펜던트.

그것은 지금껏 칼리안이 가려 온 두 눈과 완전히 똑같은 빛을 내는 루비였다. 본래의 칼리안이었다면 결코 고르지 않았을 색이었다.

'더는 숨어 살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것 같군.'

'그러게나 말일세.'

그들은 칼리안이 플란츠의 '피눈깔' 이라는 표현을 매우 인상깊게 들었다는 사실, 그래서 칼리안이 자신의 눈과 루비가 같은 색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칼리안이 입은 수수한 옷과 루비의 뜻을 제멋대로 파악한 귀족들이 등골이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아직 예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인사를 했다. 적당히 고개만 까닥이던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사정이야 어찌됐건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왕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나타난 칼리안이, 자신을 향해 예를 보인 귀족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그리고는 살짝 미소지으며 답례했다.

"반갑습니다."

칼리안은 그렇게만 인사를 전한 뒤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대단한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담백하게 흘러나온 짧은 말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그 한마디. 이번에는 그 짧은 말이 문제를 일으켰다.

'반갑다니? 마치 처음 보았다는 듯한 표현이 아닌가. 이것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곧 귀족들은 저들끼리 소리 없는 눈짓으로 칼리안의 인사에 담긴 숨은 뜻을 캐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아차.'

칼리안이 남모르게 자책했다.

시선이 몰릴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무 부담스러운 눈빛에, 자신이 귀족들과 구면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인사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왕자님. 별 뜻 없는 인사니까 그러려니 할 거예요!'

뒤에서 얀이 작은 목소리로 칼리안을 안심시켰다.

만약 둘 중 한 명이라도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카이리스의 루비 값이 폭등하고 500년동안 비어 있던 시스파니안의 둥지를 찾는 행렬이 미친듯이 증가하는 웃지 못할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칼리안을 지켜보던 누군가의 마음이 조급해질 일도 없었을 터였다.

* * *

지그프리드의 여름 밤.

그것은 리베른 왕국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올리브 렌치가 남긴 연주곡 중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명곡이었다. 카이리스 왕궁에 초대되었던 렌치가 지그프리드 관을 보고 느낀 감정을 표현한 곡이기도 했다.

카이리스 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 알려진 지그프리드 관은, 백금으로 도금한 기둥과 크리스털 벽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호박 모양의 대 연회장이었다. 때문에 마법 등불이 켜지는 밤이 되면 건물 전체가 영롱한 보석이 된 것 같은 환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여름 밤 화려하게 빛나는 지그프리드 관을 마주한 환희와 그 이면에 숨겨진 왕궁의 고독함을 담아내는 바이올린 선율에 많은 이들이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음악을 한다면 반드시 지그프리드 관에 가봐야 한다.'

그리하여 음악가들 사이에 이런 말까지 오고 갈 정도였다.

사실 지그프리드 관의 이름은 브리센 후작가와 함께 카이리스의 양대 기사가문으로 불리는 지그프리드 공작가에서 유래했다. 이 가문의 초대 가주이자 양신 전쟁 8인의 영웅 중 한 명인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 공작의 성을 따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퀴트로스가 한여름의 밤에 전사했기 때문에, 카이리스 왕궁보다 지그프리드 공작가에서 그 곡을 더 남다르게 여긴다는 후일담이 전해졌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유명한 곡이 바로 그 아름다운 지그프리드 관에 흐르고 있었다. 연회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말을 줄이고 음악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이 곡이 연주되다니! 이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이제 막 지그프리드 관 입구에 도착한 사내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커다란 목소리. 그를 알아본 여러 귀족이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지그프리드 공, 이제 오십니까."

카이리스에 하나 뿐인 공작가, 지그프리드 가문의 가주이며 대륙 5인의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기도 한 대단한 사내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바이올린을 켜는 시늉을 해 보였다. 모여든 사람들이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손짓을 하시니 공의 바이올린이 더 궁금해지는군요."

"휴양도 하실 겸 한번 내려오시지요. 내 기꺼이 들려드릴 테니."

"알겠습니다. 바이올린 실력을 한껏 기대하고 가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검을 못 쓰는 지그프리드는 있어도 바이올린을 못 켜는 지그프리드는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그것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입구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레이븐의 등에 오른 채 지그프리드 관으로 향하던 칼리안에게도 그 소리와 모습이 전부 전해졌다.

"참 유쾌한 사람이야. 이름이······."

기분 좋게 웃던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딱 질색하는 표정으로 같은 사람을 쳐다보던 얀이 기억을 뒤져보는 칼리안에게 대답했다.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가주인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공작입니다, 왕자님."

카이리스 남쪽에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가 있었고, 지그프리드의 영지는 그 둥지를 중심으로 굉장히 넓은 지역을 소유했다.

유일한 공작가이니만큼 지그프리드 가문에서도 충분히 왕위에 관심을 가져볼 법 했으나 이들은 오로지 시스파니안의 영토를 수호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50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베른일 적에 세작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 우직한 공작가에 대해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래. 그랬지."

그야말로 칼리안이 딱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물론 그들의 행동을 왕에 대한 충성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칼리안의 마음을 끈 것은 그 오랜 기간동안 지켜진 신념이었지 충성심이 아니었다.

"그 바이올린, 나도 듣고 싶어지네."

칼리안이 호감 가득한 눈으로 공작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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