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8화 (9/527)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2)

르메인은 집무실의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르메인 역시 검은 머리였다.

르메인은 국왕의 덕목을 가르치던 책의 표지에서 바로 튀어나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국왕의 외형을 갖춘 남자였다. 표정은 신중했고 눈은 깊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란델을 보는 것 같군.'

광막한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짙은 푸른 빛의 눈동자와 얼굴 생김새는 물론이고 눈을 내리깐 표정이며 말 없이 사람을 짓누르는 분위기까지. 란델의 모든 것이 르메인을 닮아 있었다.

'방관하길 좋아하는 성향까지 닮았어.'

프레이야와 칼리안의 죽음을 모르는 척 했던 비정한 왕. 그것이 르메인에 대한 칼리안의 사적인 평가였고 그 생각은 아직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르메인에게 느끼는 이 본능적인 거북함은 앞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칼리안은 르메인의 앞으로 걸어가며 든 이러한 생각을 비워내기 위해 애썼다. 만에 하나라도 표정으로, 혹은 입으로 튀어나올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르메인의 곁에 도착했을 즈음 복잡한 감정을 간신히 감추는 것에 성공한 칼리안이 흠 없는 몸가짐으로 예를 올렸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르메인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 거의 다 마신 홍차 잔과 또 다른 서류 뭉치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줄곧 소파에서 일을 했던 것 같았다.

서류를 내려놓았으니 이제 칼리안을 쳐다볼까 했는데 르메인은 곧바로 다른 서류를 집어들었다.

'······ 서류를?'

칼리안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물론 르메인은 그런 칼리안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예 보지도 않았으니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칼리안의 눈이 곧 사납게 변했다.

"이리 와 앉거라."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그렇게 화가 난 와중에 웃음이 났다.

르메인의 목소리가 플란츠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말투는 당연히 달랐지만 목소리는 나이 든 플란츠를 연상시켰다.

참 골고루 나눠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칼리안이 이런 잡생각으로 애써 사념을 접어내며 르메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르메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서른 여덟 번 째 탄신일을 맞이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래. 고맙구나."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높낮이 없는 음색이 서류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감정 없는 말투로 화답한 뒤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르메인이 손을 올려 미간을 주물렀다. 꽤나 피곤한 것 같았다.

"잘 지내고 있는 것이냐."

"네."

칼리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르메인은 칼리안이 급격히 야위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칼리안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구나."

하기사.

좀 쳐다봐야 알아 차리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지내는 중에 불편한 것이 있다면 말 하거라."

칼리안의 한쪽 입꼬리가 미약하게 올라갔다.

'내가 지금 불편한 게 한 둘이 아니라서.'

그쪽의 두 아들과 함께하는 침묵 속의 조찬에 아직도 적응을 못했다고 해야 할지. 조만간 그쪽 부인이 보낸 암살자가 찾아올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병으로 점점 말라가고 있는데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내가 사실 그쪽의 아들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 그렇게 말하면 쳐다봐 주시려는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결국 칼리안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답이라기 보단 성의 없는 대꾸였다. 그럼에도 르메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야 알았다.

셋을 한꺼번에 보는 것보다 하나씩 세 번을 보는 것이 빠른 이유. 셋을 앞에 앉혀놓고는 저런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나씩 앞에 두면 일을 하면서 입만 열면 되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가.

'아들에게 단 5분을 할애하는 것도 아깝다는 말이군.'

칼리안이 냉소했다.

르메인은 여전히 미간에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 뒤로 르메인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억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정확히 5분만에 르메인을 만나고 아르피아 궁 밖으로 나온 칼리안이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차라리 '처음 뵙겠습니다' 할 걸 그랬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얀이 조용히 웃었다.

집무실의 일을 전해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르메인이 왕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출발했고 오래지 않아 체르밀 궁 앞에 세워졌다. 마차에서 내린 칼리안이 숨을 푹 내쉬며 주변을 돌아봤다.

호수에 바람이 들어 잔물결이 일고 있었다.

"10시까지 시간이 조금 있습니다. 돌아보고 오세요."

답답한 마음을 읽은 얀의 말에, 칼리안이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호수를 향해 발을 옮겼다. 그리고 호수 근처를 천천히 돌아 장미가 심겨진 정원으로 갔다.

'양산 같은데.'

잠시 뒤, 정원 한가운데 검은 색 양산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본 칼리안이 발을 멈췄다.

'이런 날 누가 정원에?"

호기심에 양산 근처로 걸어간 칼리안이 급하게 발을 멈췄다.

양산 밑에서 장미를 돌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란델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의 취미가 장미 정원을 가꾸는 것이라는 사실은 칼리안도 알고 있었다. 참으로 란델 다운 취미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란델의 모습은 취미를 즐기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굳은 표정을 한 란델의 시종이 칼리안이 두른 것과 똑같이 생긴 빨간 망토를 팔에 걸친 채 양산을 받쳐들고 있었다. 그 앞에, 정복 차림을 한 란델이 정원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장미의 곁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칼리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란델이 굳이 장미 손질이 바빠 이런 날 저런 옷으로 정원에 들어선 것은 아닐 테니까.

'참 대단한 르메인이다. 란델을 저렇게 흔들어놓다니.'

칼리안이 죽고 몇 년이 지나 본격적인 왕좌 쟁탈전이 시작된 뒤, 세렌티의 신전에 다녀오던 텐실 국왕과 왕세자가 탄 마차의 축이 부러지며 마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대형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로 신성왕국 텐실의 왕과 왕세자가 한꺼번에 명을 달리했다.

그때 남아있는 텐실의 왕족은 란델 뿐이었다. 그리고 란델은 카이리스를 떠나 텐실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르메인까지 저랬으니 카이리스에 미련이 없지.'

충분히 이해되는 선택이었다.

만약 칼리안이었다 하더라도 머뭇거리지 않고 똑같이 이 나라를 떠났을 것이다.

"칼리안 왕자님."

퍼뜩 들려온 목소리에, 칼리안이 예언 같은 회상에서 급히 빠져 나왔다. 난처한 얼굴로 칼리안을 부른 것은 란델의 시종이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란델이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과의 뜻을 전한 칼리안이 란델을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손에 낀 장갑을 벗어 시종에게 건넨 란델이 칼리안을 조용히 바라봤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과 완전히 대비되는, 깊이 가라앉은 푸른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란델은 칼리안을 나무라지 않았다. 칼리안이 이 곳에 혼자 와 있던 이유를 그 역시 모르지 않을 테니까.

"그래."

란델은 그저 그 한마디만 내려놓고 체르밀 궁으로 돌아갔다.

* * *

르메인은 공평했다.

세 아들을 모두 똑같이 취급했다.

옆에 선 플란츠에게서 풀풀 풍겨오는 술냄새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신이 아찔해진 칼리안이 플란츠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정신 나간 어린 놈이, 나도 참고 있는 술을!'

원래도 흐린 편이었던 플란츠의 눈빛이 더 흐릿해진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플란츠의 경솔한 행동을 너그럽게 이해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왕실 외부의 사람들 앞에 나서는 자리.

물론 국왕의 뒤에 서서 한 마디 하지 않고 손인사를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카이리스 왕실의 외부 행사에서 왕자가 난동을 부렸다는 세작의 정보를 받아 본 적은 없었으니 일단 놈에게 이성이 남았으리라 믿어 보기로 했다.

마치 칼리안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플란츠가 고개를 힐끗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인상이 찌푸려진 것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고, 칼리안은 그런 모습을 알아채지 못했다.

"10분 전입니다. 곧 행사가 시작됩니다."

왕실 행사 담당자가 국왕 일가를 향해 말했다.

정문 근처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있던 칼리안이 마음의 준비를 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자리겠지만 칼리안은 아니었다. 때문에 조금쯤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광장에는 더 발디딜 곳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광장 안에서 사람들의 사이에 섞인 경비대와 광장 주변을 둘러싼 카페나 레스토랑 건물에 올라 있는 왕실의 기사단 파벨의 기사들이 사람들 사이에 의심스러운 움직임이 없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곧 두 개의 대형 수정판에 불이 들어오며, 아직 비어있는 단상의 모습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행사 시작이 임박했음을 느낀 사람들의 기대감 어린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제 왕궁의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왕궁의 정문이 양쪽으로 서서히 열렸다.

정문 중앙에 크게 새겨진 카이리스의 문장이 반으로 갈라지며 문이 열리자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왕궁 내부 모습을 본 사람들이 벌써부터 환호했다.

오래지 않아 평상시 굳게 닫혀 있는 왕궁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저 문은 이제 사흘간 닫히지 않을 것이다.

"5분 전입니다."

국왕 직속 기사단 카에라의 의장 사열이 시작됐다.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오로지 국왕 한 명만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들의 사열식을 본 사람들이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진다.

칼리안을 포함한 국왕 일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얀 역시 빠르게 다가와 칼리안의 정복을 점검해주고는 멀찍이 물러났다.

"1분 전입니다."

왕궁의 정문부터 단상까지 붉은 카펫이 깔렸다.

기사들이 붉은 카펫 위를 비워두고 두 줄로 길게 늘어섰다. 그들의 사이로 국왕 일가가 지나가게 될 예정이었다. 기사들의 검이 하늘을 찌르듯 곧게 뻗어 올라갔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기사들이 들고 있는 검에 햇빛이 반사되어 날카로운 기세를 보였다.

그리고, 10시.

국왕 일가의 행차를 알리는 카에라 기사단장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르메인의 발이 움직였다. 그 뒤를 이어 실리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란델과 플란츠가 움직였다.

'이제 내 차례.'

그들의 뒤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잠시동안 눈을 감았다 떴다.

허리를 세웠다.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사람들의 눈이 있을 곳으로 시선을 내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완벽한 모습을 갖춘 카이리스의 왕자가 된 뒤.

밖으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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