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7화 (8/527)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1)

카이리스 왕궁의 정문은 카이리시스를 통과하는 왕도와 곧바로 이어졌다.

왕궁의 앞에는 왕도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 두 개의 광장이 있었다. 동쪽의 하츠아라 광장, 서쪽의 시스파니안 광장이 그것이었다.

하츠아라 광장의 분수대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시스파니안이, 시스파니안 광장의 분수대에는 하츠아라가 멀리 떨어진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본래 두 조각상은 왕궁을 향해 선 형태로 만들어졌으나 하츠아라 사후 드래곤의 모습으로 찾아온 시스파니안이 두 조각상을 서로 바라보게끔 돌려놓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러다보니 이 두 개의 광장은 평상시에도 연인이나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카이리스의 대표적인 명소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광장을 찾은 사람들이 두 유명한 분수대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고 가능한 왕궁과 가까운 곳에 설 수 있도록 자리 경쟁을 벌였다.

오늘이 바로 국왕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이른 새벽.

왕궁 정문을 뒤로한 왕도의 위에 르메인이 서게 될 화려한 단상이 세워졌다. 단상이 보이지 않을 이들을 위해 두 분수대 앞에 얇고 커다란 수정 판도 세워졌다. 국왕 일가의 모습을 수정 판에 투영시켜 뒤에서도 잘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마법 장치였다.

카이리시스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가 광장 곳곳에 서서 혹시라도 발생할 지 모를 사고에 대비했다. 뿐만 아니라 왕궁에서 사람들이 나와 단상 위를 청소하고 기념 선물을 쌓아놓는 등 정신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왕궁 안에서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후우."

칼리안이 긴장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새삼 실감했기 때문이다. 축제 기간 동안은 조찬도 없었다. 그만큼 모두 바쁘게 축제를 준비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섀틴이 딱 맞추어 찾아왔다. 아직 칼리안이 외부인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탓에 침실 커튼을 내린 얀이 섀틴을 방 안으로 들였다.

덕분에 칼리안 쪽에서만 섀틴을 볼 수 있었는데, 섀틴은 옷을 줄이느라 그대로 밤을 새웠는지 하룻밤 새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칼리안이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다시 한번 마차를 보내주었다.

"준비하시는 동안 오늘의 일정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섀틴이 나간 뒤 커튼을 걷은 얀이 말했다.

긴장 때문에 굳은 찰흙처럼 딱딱해 보이는 얀을 본 칼리안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9시에 전하께 축하 인사 올리시고, 10시에는 광장에서 치뤄지는 행사에 참석하시게 됩니다. 12시부터 국왕 전하, 왕비님과 함께 하는 오찬이 있고,"

"오후 2시 중앙 귀족들과 모임, 5시 지방 귀족들과 모임, 8시 연회, 11시 끝. 다 외웠어."

칼리안이 얀의 말을 가로채자 그 동안 일정을 얼마나 많이 얘기해줬었는지 깨달은 얀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내일은 사절들과 만남도 있으니 귀족들의 대화를 잘 들어 두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칼리안이 기대하는 것은 오로지 연회가 시작된 이후였다. 앨런이 연회가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덧붙이자면 칼리안은 각국 사절과의 만남, 정확히는 세크리티아에서 오는 사절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사절단에 체이스가 포함된 것도 아니었고 사절단으로 오는 세크리티아 귀족 중 칼리안이 보고 싶어 할 만한 인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아는 사람이 온다고 해도, 요즘 체이스 왕자님 잘 지내시는지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니.'

사실 지금 시점의 베른은 세크리티아 귀족들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

후궁의 아들인 체이스에게 왕세자의 위를 양보하겠다는 베른의 의견에 너나 할 것 없이 반대들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왕비의 아들인 베른이 세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른은 체이스에게 기사 서임을 받았다.

'형님한테 충성 서약 할 때 놈들 표정이 볼 만 했지.'

오랜만에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실소하는 칼리안의 귀에 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주의사항이었다.

물론 이미 지겹도록 들은 것이었다.

"귀족들과 인사하실 때에는 제가 뒤에서 이름을 일러드릴 겁니다. 그 외에는 따로 말씀을 나누실 일이 없을 거예요. 그래도 만약 그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상대방 이름을 잊어버렸으면 얀을 쳐다봅니다. 유능한 상급 시종 얀이 다시 말해줄 겁니다. 인사는 내가 먼저 해도 되지만 내 이름은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왕족이니까요."

걱정 가득한 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과거에서 벗어나와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 눈에 그려졌다.

"왕자님. 말씀 낮춰주세요."

깜짝 놀란 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데 내 이름 모를 사람이 있나? 다들 나를 좀 특별하게 부르는 것 같던데. 아, '그' 칼리안! 하고."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꺼내놓는 말이었으나 당연히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때문에 얀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쓴 표정을 지으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무튼 그것도 오늘이 지나면 달라질테니 너도 걱정 그만해. 실수 안 할 거니까."

왕자 노릇을 너무 오래 했다.

뿐만인가? 왕제 겸 기사 생활까지. 사람들 앞에서 완벽한 왕자로 탈바꿈하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칼리안이었다.

'암살자는 어차피 올 테니 이 기회에 실리케 속을 실컷 뒤집어 놓는 게 낫겠지.'

그러다보니 축제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눈에 띄게 행동하든 눈에 보이지 않게 행동하든.

실리케는 그런 것과 상관 없이 그냥 칼리안의 존재 자체가 싫은 여자다. 그러니 아예 눈에 띄어 버릴 생각이었다. 눈에 들어간 고양이 털처럼 완전히 거슬려 버리겠다고 작정을 했다.

그런 생각을 모를 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칼리안을 한참 쳐다봤다.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 얀의 진지한 목소리가 칼리안의 장난스런 웃음을 붙들었다.

"왕자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왕자님의 건강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오늘 일정을 모두 참석하시기 어려울 것 같다면 참지 마시고 제게 바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꼭이요."

칼리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덧붙이는 말이었다.

얀에게 이야기해야 무엇이 달라지겠나 싶다가도 얀이라면 정말 어떻게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걱정하지 말아."

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숙여 입은 옷을 살폈다.

왕자의 정복을 입은 모습이 낯설다.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금색 단추가 두 줄로 박힌 검은색의 타이트한 재킷을 입었다. 목을 반쯤 가리는 넥칼라가 달린, 허리 아래까지 오는 길이의 재킷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붉은 색 망토를 둘렀다. 망토를 재킷에 고정한 시녀들이 두 줄의 금색 끈과 태슬이 달린 망토 이음 장식이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살폈다.

마지막으로 칼리안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옷 매무새를 점검한 시녀 메를린이 만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왕자님.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것이 조금 흠이기는 했지만 메를린의 말처럼 왕자의 정복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 비춰졌다.

재킷 상의에 황금색으로 새겨진 오망성과 드래곤의 모습을 형상화 한 카이리스의 문장이 보였다. 실제로 이 문장이 수놓아진 옷을 입은 것은 처음이었던 탓에 거울 속 모습에서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카이리스 문장이 낯설지 않다는 게 이상하네.'

오히려 세크리티아의 문장이 낯설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거울을 쳐다보는 칼리안이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자 얀의 눈에 불안함이 어렸다. 이제는 그러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 거울을 또 깨뜨릴까봐서였다.

"왕자님.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부분이 있습니까?"

조심스러운 얀의 질문을 받은 뒤에야 칼리안의 눈이 거울에서 떨어졌다. 다행히 칼리안은 얀이 걱정하던 우울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벌써부터 너무 잘생겨서."

얀의 표정이 재미있게 변했다.

칼리안이 그런 얀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자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칼리안의 태도에 멍한 표정을 짓던 얀이 재빨리 따라나섰다.

* * *

작은 마차가 체르밀 궁 앞에 세워져 있었다.

마차가 한 대 뿐인 것을 보니 웬일로 란델과 플란츠 둘 모두 이미 출발한 모양이었다.

'란델은 그렇다 치고. 플란츠까지?'

의외의 상황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칼리안이 늦은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과 얀이 탄 것을 확인한 마부가 느린 속도로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궁을 찾은 손님들이 많아서인지 왕궁 내를 오가는 마차들이 굉장히 많았다.

곧 마차가 르메인이 있는 아르피아 궁에 도착했다.

본래는 국왕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이 아니라 국왕이 거주하는 카밀리아 궁에서 진행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일이 너무 많다는 관계로 형식은 다 없애고 집무실에서 간단히 인사만 전하게 되었다.

칼리안은 매우 좋아했다.

가장 어려울 것 같은 일정이 가장 간단한 것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좋은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두 형님들은 이미 와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

칼리안이 난처한 얼굴로 얀에게 물었다.

분명히 이미 와 있어야 할 란델과 플란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칼리안이 싱긋 웃었다.

"그래. 너도 모르는 게 있어야지."

얀이 당혹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국왕 르메인의 시종장인 이였다.

하얀 머리에 중후한 인상을 한 시종장이 칼리안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칼리안 왕자님."

"형님들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은 칼리안이 묻자, 칼리안을 지그시 쳐다보던 시종장이 대답했다.

"이미 체르밀 궁으로 되돌아 가셨습니다. 오늘 전하께서 급히 진행하셔야 할 업무가 있다 하시어 잠시 간단한 인사만 올리는 것으로 일정이 변경되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오늘 오찬 역시 취소되었습니다. 미리 언질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형님들께서 전하를 따로이 만나 뵈었다는 말인가?"

"네, 왕자님. 그렇습니다."

뒤에서 얀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얼굴을 보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왕자님께 전하를 독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일러드리지 못했는데!'

국왕 르메인과의 독대.

그것을 신경 쓰는 것이리라. 예절 교육을 따로 받는데도 저렇게 신경을 쓴다.

"한꺼번에 만나시기에 시간이 부족하여 따로 보시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누가 생각해도 한꺼번에 셋을 보는 것이 시간이 더 짧을 테니까.

시종장은 대답하지 않았고 칼리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무엇이건 국왕이 변덕을 부렸다 하니 따라야지 별 수 있겠는가.

"알겠네."

'독대라. 정말 처음인데.'

옛 칼리안의 아버지를 처음 만나는 자리.

그런 첫 만남이 이렇게 어려운 자리일 줄은, 또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살다 살다 란델과 플란츠가 보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풀어졌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던 칼리안이 티나지 않도록 심호흡했다.

옛 칼리안도 르메인을 독대한 기억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베른일 적에도 아버지인 국왕과 사이가 좋지 않아 단 둘이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독대했던 국왕은 형인 체이스가 유일했다. 그리고 체이스와의 독대는 그저 형제 간의 만남이었지 결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도 지금 들어가면 되겠나?"

"네, 왕자님. 바로 드시지요."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마음 속은 체르밀 궁의 호숫가를 다섯 바퀴는 달린 것처럼 숨가빴다. 르메인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수십 가지의 인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호수 위를 헤엄치는 백조가 된 기분이다.

칼리안이 진중한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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