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6화 (7/527)

제2장.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3)

석찬을 위해서는 다른 건물로 이동해야 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체르밀 궁 앞에 세워져 있던 두 대의 마차 중 한 대에 올랐다. 남은 한 대는 당연히 란델이나 플란츠 중에 아직 출발하지 않은 왕자를 위한 것일 터. 그러니 한 명은 이미 출발을 한 모양이었다.

'하도 넓어서 다른 건물에 어떻게 가나 했더니. 궁 내 이동 용 마차까지 있을 줄이야.'

좁은 곳에서는 못 산다는 시스파니안의 말에 하츠아라가 이런 말도 안되는 규모의 왕궁을 지었다는 기억을 떠올린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마차는 체르밀 궁을 둘러싼 긴 회랑을 지나쳐 거주 공간과 집무 공간의 경계를 이루는 분수 정원을 통과했다. 그 후 국왕의 집무를 위해 마련된 아르피아 궁, 왕실과 관련된 일을 하는 귀족들의 업무 공간인 나르실 관을 지나 조금 더 달린 뒤 멈췄다.

귀족들과의 작은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세뉴 관 앞이었는데 금박 된 기둥으로 꾸며진 하얀 대리석 건물에 석양이 비춰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왕자님. 도착했습니다."

마차 입구에 간이 계단을 놓은 얀은 칼리안이 마차에서 내릴 때 옷자락을 밟지 않도록 도왔고 세뉴 관의 시종이 마중나와 석찬이 진행될 곳으로 안내했다.

세뉴 관의 뒤에 만들어진 정원.

날이 어두워질 것을 대비한 마법 등불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간 칼리안이 시종이 빼주는 의자에 앉았다. 란델은 이미 와 있었고 칼리안이 도착한 이후에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와 앉았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정적이 한동안 흘렀다.

그러다 문득, 짙은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일 년에 단 하루만 피었다 지기 때문에 그 가치가 남다르다는 르니에리 꽃의 향이었다. 실내가 아니었음에도 손 끝이 아릴 정도로 풍겨오는 향기.

'실리케.'

칼리안은 실리케를 보거나 르니에리 향을 맡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향기를 느낀 순간 그녀가 도착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레넌 브리센 자작과 함께 걸어오는 왕비 실리케를 쳐다봤다. 실리케의 시선도 칼리안을 향했다. 그리고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서로에게서 눈을 돌렸다.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던 란델이 시선을 옮겼다.

실리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신의 것으로 마련된 자리에 가 앉았다. 플란츠의 옆 자리였다. 둘을 본 플란츠는 별다른 예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실리케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 곳에 있던 칼리안과 란델을 의식해서인지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 분 왕자님들."

레넌이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다소 낯설게 변한 칼리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레넌은 아마 이전에도 칼리안을 본 적이 있었던 듯 놀란 것 같은 표정을 한 채였다. 그가 칼리안을 향해 입을 열려 할 때 실리케의 손이 움직였다.

- 차르륵!

보라색 실크로 만들어진 부채가 펼쳐지며 다소 큰 소리를 냈다.

"흠흠!"

실리케의 불편한 심정을 눈치 챈 레넌이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곧 에피타이저를 시작으로 저녁 식사가 진행되었다. 간간히 레넌이 말을 하고 실리케가 짧게 대답하는 정도의 대화가 오가던 중, 실리케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많이 자랐구나."

자신을 향한 질문임을 곧바로 알아차린 칼리안이 실리케를 쳐다봤다. 이런 시점에 정말로 '키가 컸다'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닐 터.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담담하게 대답한 칼리안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더했다.

"앞으로 더 많이 자라겠지요."

실리케의 눈빛이 변했다.

예전의 칼리안은 결코 저런 식으로 웃지 못했다.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때 눈치 없는 레넌이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왕자님. 아직 성장기시니 키도 더 크셔야······!"

- 촤르륵!

실리케가 오가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레넌의 입을 다시 한번 막았다.

'그것 참. 너무 소문 대로라 신기할 지경이네.'

상단을 운영하려면 필요한 많은 능력이 있다.

그 중 판단력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최소한 눈치 정도는 있어야 한다. 방금 전의 한 마디로 레넌은 자신에게 그 두가지가 확실히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셈이다.

'상단 관리인이 고생 좀 하겠는데.'

실리케가 매서운 눈초리로 레넌을 보며 말했다.

"주방장이 특별히 신경을 썼다 합니다. 충분히 즐기시지요, 오라버니."

닥치고 먹으라는 노골적인 표현이다.

이제야 말을 알아 들은 것인지 아니면 눈빛에 겁을 먹은 것인지. 이번에는 실리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 레넌이 입을 닫고 스테이크에 열중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플란츠가 숨김 없이 웃음 소리를 냈다.

실리케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어차피 칼리안과의 대화가 중간에 끊어졌으니 이번에는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너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란델이 살짝 칼리안을 쳐다봤다.

플란츠로부터 얻어낸 말 레이븐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칼리안 자신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리안은 란델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하긴. 말 한 마리가 성질이 사나운 걸 신경 쓸 사람이 아니지.'

그러니 실리케가 언급한 '말'은 레이븐이 아니라 칼리안일 것이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을 뜻하는 소리이리라.

"나에게 미리 알려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플란츠가 고개를 삐딱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것과 똑같은 실리케의 연두색 눈을 쳐다본 플란츠의 비틀어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무엇을요."

무엇을 이야기했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숨죽여 살다 제 어미의 뒤를 따라 조용히 사라질 티끌이 극명하게 달라진 것. 그리하여 실리케에게 목 안의 가시처럼 거슬리고 있는 것. 이런 의미임을 플란츠도 이해했다.

"이미 다 전했을 텐데요."

다만 플란츠의 시종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실리케에게 보고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칼리안에 대한 무엇을 '더'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물론 실리케도 칼리안이 달라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진 않았다. 머리를 잘랐던 바로 그 날 이미 온 왕궁에 소문이 퍼졌다. 뿐만 아니라 식당에서의 사고와 기마 수업의 일을 포함한 그간의 상황을 낱낱히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플란츠의 반응에 실리케가 실망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완전히 네 손을 벗어났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잖니."

실리케를 마주하는 붉은 눈에 더 이상은 두려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칼리안이 달라진 것이 비단 외양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더는 플란츠가 붙들어두지 못하리라는 것을 실리케에게 알렸어야 했다.

하지만 플란츠는 그러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할 생각인지도."

"그것도 이미······."

플란츠의 입에 조소가 어렸다.

"말했을텐데요."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플란츠가 더 이야기하기 귀찮다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는 실리케가 조용히 웃었다.

곧 실리케의 웃음이 조금 다르게 변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맑은 웃음이었다. 그것은 플란츠가 얀에게 나이프를 집어던지기 직전에 보였던 것과 완전히 닮아 있었다.

"플란츠. 너는 항상 그래왔지. 허나 너무 심려하지는 마렴. 놓칠 일도, 되찾아올 일도 더는 없을 테니."

칼리안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걸렸다.

'내가 죽어서 사라지면 도망 갈 일도 없겠지.'

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러자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다."

플란츠는 마음대로 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자연스럽게 나이프를 움직이던 칼리안의 눈빛이 조금씩 서늘하게 변했다.

대체 얼마나 우습게 보았으면 본인을 앞에 두고 저런 이야기를 태연히 꺼낸다는 말인가.

란델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그리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 뒤 놀랍게도 칼리안에게 말을 건넸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먼저 가서 쉬거라."

생각지 못한 란델의 말에 플란츠까지도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란델은 그 외의 말을 더 꺼내놓지는 않았다.

이 끔찍한 식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그 한마디가 어찌나 반갑던지.

칼리안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실리케의 미간이 좁아졌으나 란델의 행동에 대해 딱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식사 즐거웠습니다."

레넌에게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틀어 실리케를 똑바로 쳐다봤다.

칼리안은 실리케에게 죽은 여자를 완전히 닮은 그 눈으로 실리케를 응시하며 생긋 웃었다. 부디 이 모습도 죽은 프레이야를 빼닮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에, 또 뵙지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실리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와 무어라 답하려 할 때 칼리안이 몸을 휙 돌려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부채를 쥔 실리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란델이 눈을 내리 뜬 채 디저트를 입으로 가져갔다. 실리케가 좋아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르니에리 꽃을 넣은 소르베였다.

르니에리 꽃 향이 란델의 입 안을 맴돌다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 * *

3주일이 더 지났다.

국왕의 탄신 기념일 축제를 앞두고 카이리스의 수도인 카이리시스 전체가 들썩였다. 자신의 영지에 머물던 귀족들이 하나 둘 카이리시스의 자택으로 모여들었다. 각국의 사신들이 찾아와 왕궁의 귀빈을 위해 마련된 루비아 관에서 여독을 풀었다. 이틀 전 카이리시스에 입성한 엘프들의 모습을 구경하려는 인파로 한동안 소란이 일기도 했다.

누군가는 손님을 맞이하고 누군가는 연회를 준비하고. 또 누군가는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모두가 성대한 축제를 앞두고 들뜬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얀의 안색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얀 뿐만 아니라 칼리안의 시중을 돕는 여섯 명의 시녀들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한 달 만에 칼리안을 다시 찾아온 의상 담당자 섀틴도 굳은 얼굴을 했다.

"왕자님. 어떻게 더 마르셨습니까?"

"그렇게 됐어."

칼리안이 걱정 가득한 섀틴의 얼굴을 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태평한 얼굴과 말투로 대답했지만 칼리안 역시 문제를 실감하고 있었다. 마력을 쓰려 할 때마다 심장이 아픈 것과 몸이 계속 나빠지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몸 속의 마나가 심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 했다.

얀은 그런 칼리안을 보며 하루가 멀다하고 치유사를 불러오겠다는 말을 했다. 결국 칼리안은 얀에게만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과 서클을 숨겨야 하는 사정을 설명했고 국왕의 탄신일 축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유도 함께 이야기했다.

물론 앨런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 부분은 적당히 감추어 말했다.

'전하의 탄신일 축제에 분명 저명한 마법사들도 올 거야.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문제를 확인해볼 테니 그 때까지만 기다려.'

마법을 익혔다면 치유사의 신력이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었으므로 얀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그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섀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복을 수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옷 이곳 저곳에 핀을 꼽아 가며 줄여야 할 곳과 그대로 두어도 될 곳을 구분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줄자를 다시 꺼내들었다.

"치수를 새로 재겠습니다, 왕자님."

옷을 모두 조각내어 줄인 뒤 다시 이어 올 생각인 것 같았다.

칼리안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되어 순순히 따랐다. 한참동안 치수를 다시 잰 섀틴이 문제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시간이 있어 다행입니다. 내일 오전까지 수선하여 다시 오겠습니다."

"예복 두 벌은 어차피 둘째, 셋째 날에 입을테니 시간이 부족하면 그것들은 조금 늦게 가져와도 괜찮아."

"네, 왕자님. 알겠습니다."

곧 칼리안이 마차를 내어 섀틴을 데려다 주도록 일렀다. 그것이 그나마 섀틴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국왕 르메인의 탄신일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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