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화 (6/527)

제2장.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2)

차의 향기로 잠을 깨고 완벽한 준비 후 아침을 먹고 각종 수업을 들어가며 정신 없이 일주일을 보냈다.

그 사이 플란츠와 세 번을 더 붙었다.

검술 수업 중 또 프레이야를 들먹거리기에 실수인 척 죽여버릴 뻔 한 뒤로는 어느 정도 조용해졌다.

정말 의외였던 것은 플란츠의 검 실력이었다.

물론 칼리안의 근력이 형편없었다고는 하지만 플란츠 역시 공격을 꽤 훌륭히 막아냈던 것이다.

'기사 가문이라는 이름이 괜한 것은 아니었나보지.'

어찌됐건 그 후 플란츠는 칼리안을 볼 때마다 비웃는 듯한 눈을 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입을 여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칼리안은 일단 만족했다.

조찬에 가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아 시녀들이 머리를 빗기는 것을 멍하게 보고 있으려니 얀이 다가와 하루 일정을 얘기해주었다.

"······ 마지막으로 왕비님 및 브리센 자작과 석찬이 있습니다."

"아."

레넌 브리센 자작.

실리케 왕비의 오빠이며 브리센 후작의 차남인 자였다. 유서 깊은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소질이 없어 일찌감치 검에서 손을 놓은 뒤 카이리스에서 가장 큰 상단인 브리센 상단을 이끌고 있었다.

'상단을 운영할 수 있을 재목도 아니어서, 거금 주고 고용한 상단 관리인에게 전권을 맡기다시피 했다고 했지. 하긴······ 그럴 돈이 있는 것도 능력은 능력이지.'

"다른 귀족 없이 브리센 자작만 참석하는거야?"

"네. 전하의 탄신 기념일 축제 마지막 날의 축하 공연을 준비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생겨 다른 곳에서 대신 진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일로 전하께 사과 드리려 왕궁에 들었다가 온 김에 왕자님들을 뵙고 가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플란츠만 가도 될 텐데."

직접 플란츠의 이름을 언급하는 모습에 얀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 얀의 입장에서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으므로 칼리안이 금방 다시 말했다.

"아무튼 알았어."

그러자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정 외에 다른 이야기가 남은 것 같았다.

"그리고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얀이 잠시 주저하는 듯 하다 말했다.

"왕자님 금고를 잠시 열어야 하는데 이번에도 제가 할까요?"

'금고? 나 그런 것도 있었어?'

뭣도 없는 왕자인 줄 알았는데 돈은 있었던 모양이다.

칼리안이 재빨리 기억을 뒤졌다. 그리고 침실 구석에 있던 용도 모를 은색의 화려한 가구가 바로 금고였음을 알게 되었다.

"금고는 왜?"

"그것이······."

웬일로 얀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럴 때 이유는 딱 하나다. 프레이야와 관련된 일인 것이다. 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휘트린 영지의 관리인이 수익금을 올려보냈습니다."

'모친 이름이 프레이야 휘트린이었지. 그럼 프레이야의 영지인가보네.'

아마도 프레이야를 후궁에 올린 르메인이 영지를 하사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그녀 사후에 다른 귀족에게로 넘어가지 않고 칼리안의 소유로 상속된 것 같았다. 생각지 못했던 소득을 확인한 칼리안이 말했다.

"이따 같이 해. 얼마나 모였는지 궁금하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해 줄 말이 또 있다는 뉘앙스에 조찬에 갈 준비를 마친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아시겠지만 왕자님께서 15세가 되시면 시종을 두 명 더 들이실 수 있지 않습니까?"

몰랐다.

"올해 왕자님의 탄신일이 지나면 15세가 되시기 때문에 내정 담당관이 시종 두 명을 어떻게 구하실 요량인지 물어왔습니다. 정확히 탄신일이 지나지 않더라도 두 세 달 정도 앞당겨서 데려오실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만약 염두에 두신 인사가 없다면 담당관이 직접 배정해 줄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에 대해 대답할 내용을 정리하는데 얀의 말이 이어졌다.

"두 분 왕자님처럼 호위를 쓰시는 것은 어떨까요?"

란델과 플란츠의 뒤에 항상 붙어다니던 시종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검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냥 시종인 줄로만 알았던 칼리안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호위였구나. 어쩐지 덩치들이 좋더라니."

카이리스는 세자가 아닌 왕자들에게 따로 개인 호위 기사를 붙이지 않았다. 재밌는 사실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혈전은 왕세자가 아닌 왕자들끼리 치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왕자들은 개인적으로 호위 기사를 고용했는데 이것이 또 카이리스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일, 즉 불법이었다. 그래서 호위를 시종으로 위장하여 동행하는 것이 관습이 된 상태였다. 물론 검을 지닌 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암기를 사용하는 이들이 주로 고용되었다.

이 부분은 칼리안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15세가 되어야 시종 셋을 둘 수 있다는 것만 몰랐을 뿐.

'그럼 본래의 칼리안도 호위를 두었을까?'

얀이 이렇게 먼저 얘기했고 호위 기사를 고용할 돈도 있었다면 고용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도 쓸 줄 알고 호위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살을 당했다는 건데. 허면 적어도 3서클의 마법사를 제압할 실력의 암살자였다는 소리인가.'

이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심장 부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니지. 자살로 위장했다면 주변이 깨끗했을 것이다. 마법사였다면 공격이든 방어든 흔적이 남았을 터. 그러니 옛 칼리안도 나처럼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칼리안은 생일을 맞이하기 두세 달 전에 죽었고 호위는 생일 두세 달 전부터 구할 수 있다 한다.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생긴다.

'호위가 그 암살자를 막지 못했거나 막지 않았거나. 혹은 호위가 암살자였거나.'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다.

무엇이 정답이든간에 칼리안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고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생각해 둔 사람도 있고."

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의 인간관계를 뻔히 알고 있을테니까. 하지만 칼리안은 그에 대해 더 설명하지 않았다.

물론 칼리안이 염두에 둔 이는 일전에 데려오겠노라 생각했던 그 아이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평민일거야. 괜찮겠어?"

얀도 엄연한 귀족이었다. 그러니 칼리안의 말은 곧, 귀족인 얀이 평민과 동등한 입장으로 일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얀은 대체 그런걸 왜 묻느냐는 얼굴이 되었다.

항상 느끼지만 얀은 얼굴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호위로 올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호위를 해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니까요. 당장 달려나가 모셔와도 모자랄 판에 신분이 중요하겠습니까."

"그래."

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의 호위니 왕자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되는 일이죠. 굳이 귀족만 왕자님의 시종을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기사로서 필요한 인재라면 우선 시종의 신분으로 두시고 기회를 보아 기사 작위를 직접 내리셔도 되고요."

"그렇게 해도 괜찮겠네."

칼리안이 아무리 왕족이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작위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공이 있지 않은 이상 함부로 신분을 올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시종으로 데리고 다니다 때를 보아 작위를 내리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당장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 내정 담당에게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전해."

당장 데려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아야 했다. 카이리스의 수도인 이곳 카이리시스에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럼 끝?"

"아뇨.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다시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얘기인 듯, 얀이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운동이요, 왕자님. 일주일 전부터 하시는 체력 단련은 계속 하셔야 합니까?"

"단련이라 하기도 어렵지. 궁 앞의 인공호수 주변을 서너 바퀴 달리는 정도인데."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힘에 벅차 하시지 않습니까. 힘들어 보이셔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간 지나치게 운동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운동을 하기 전보다 오히려 더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고 살도 더 빠져버리는 바람에 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계속 하려고. 꾸준히 하면 괜찮아 지겠지."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얀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요리사에게 얘기해서 특별히 식단에 신경쓰도록 하였습니다. 조찬은 어쩔 수 없어도 점심과 저녁 식사는 남기지 말고 모두 드셔야 합니다."

"알았어. 고마워."

이제 칼리안의 고맙다는 말이 조금 익숙해진 얀이 살짝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한 손을 내밀어 밖으로 나가는 문을 정중히 가리켰다. 조찬에 가자는 제스처였다.

으으. 가기 싫어.

* * *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침묵 속의 식사를 마친 칼리안은 14년간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인 영지 수익금의 엄청난 금액에 화들짝 놀란 뒤 조금 가벼운 차림으로 밖에 나왔다.

오전에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운동을 할 생각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런 식으로 운동을 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고 대체로 얀이 함께했다.

다만 가끔 얀이 시종들간의 회의에 가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간과 겹치면 얀을 대신해 메를린이라는 이름의 시녀가 칼리안을 따라왔다. 칼리안의 거울을 가져오고 미용사를 불러왔던 바로 그 시녀였다. 놀랍게도 메를린은 호수 주변 서너 바퀴 쯤은 숨도 한번 몰아쉬지 않고 달렸다.

지금도 메를린이 칼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프릴 많이'를 주문했던 것이 바로 메를린이었음을 상기한 칼리안이 얼른 자세를 잡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앞으로 달려나가도 뒤를 돌아보면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달려오는 메를린이 있었다. 칼리안이 울상을 지었다.

'무섭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메를린은 카이리시스 외성을 수비하는 수도 기사단 단장의 둘째 딸이었다. 검을 배운 적은 없어도 어려서부터 단장과 함께 카이리시스 외곽의 타룬 산을 매일 뛰어다녔다고. 그러니 이 정도 쯤이야.

결국 세 바퀴 반 만에 완전히 지친 칼리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땀이 비오듯이 흘렀고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메를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땀 흘리는 모습이 보기 싫다는 이유는 당연히 아니었다.

칼리안이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에는 네 바퀴 반을 달렸고 사흘째가 되던 날에는 네 바퀴를 뛰었다. 그리고 이제는 세 바퀴 반.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왕자님."

"응?"

일반적인 시종과 시녀들은 왕자에게 직접 말을 하지 못하고 상급 시종 혹은 상급 시녀를 통해야 했다. 때문에 메를린도 칼리안에게 할 말이 있다면 얀을 거쳐 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칼리안의 시녀들은 이전에 예복을 맞추는 과정에서 한번씩 칼리안과 얘기를 나눈 이후로 가끔 말을 걸어오곤 했다. 칼리안이야 당연히 그것을 기분 나빠 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고 오히려 대화할 사람이 많아졌다며 좋아했다.

"치유사를 부르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치유사라."

칼리안이 손을 다쳤을 때 얀이 부르려다 말았던 텐실에서 온 신관. 그런 치유사를 왜 부르라는 것인지 칼리안도 물론 알고 있었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문제 때문이리라.

하지만 치유사를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서클이 바로 들통나겠지.'

옛 칼리안이 해왔던 온갖 답답하고 멍청한 행동 중 유일하게 잘 했다고 여기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마법사임을 숨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얀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얀에게야 알려도 좋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누군가를 믿을 만큼의 여유조차 없던 처지였으니 이해가 되었다.

만약 칼리안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면 베른이 칼리안의 몸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죽었을 것이다. 함부로 다루지 못할 만큼 힘을 키우기 전에 없애려 했을 테니까.

같은 이유에서 지금의 칼리안 역시 당장은 서클을 숨겨야 했다. 마나 운용을 못하는 상황이니 더더욱 그리해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이 조금 늦어진 대답을 전했다.

"아니야. 괜찮아."

메를린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기어코 한 바퀴를 더 달린 뒤 방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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