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화 (5/527)

제2장.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1)

카이리스의 왕족은 용의 후손이다.

정확히는, 양신전쟁에서 악신을 봉인한 8인의 영웅에 속했던 하츠아라와 시스파니안의 후손이었다.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

태초를 함께했다 알려진 태고의 고룡인 시스파니안은 '유희'의 맥락이 아니라 천고를 살아온 그 생애의 일부로서 하츠아라와 결혼했다. 즉 하츠아라가 시스파니안을 왕비로 맞은 것이 아니라 시스파니안이 하츠아라를 용의 반려로 선택했다는 뜻이다.

시스파니안은 하츠아라와 자신의 자손이 아주 조금 특별하길 바랐다. 때문에 카이리스의 왕과 그 직계 자녀에 한해 주어지는 핏줄의 힘을 선물했다.

치유의 힘과 마법적인 재능.

'시스파니안의 축복' 이 그것이다.

"상처가 그대로고."

축복의 힘을 가진 칼리안의 상처는 이미 거의 나았어야 했다.

하지만 플란츠가 집어던진 나이프에 다친 손이 저녁이 다 되도록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혹시라도 칼리안이 르메인의 친자가 아닌 것인지를 의심하니, 과거에는 정상적으로 상처가 아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 이것은 갑작스레 생긴 증상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칼리안······ 마법사였어?"

베른은 기사였다.

그것도 대륙을 통틀어 고작 6명 뿐인 소드 마스터 중 한명이었다. 반면 옛 칼리안은 운동과는 담 쌓았을 마른 몸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몸으로도 오러를 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마나에 집중해보았고 그제야 자신의 심장 부근에 세 개의 마나 서클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에 대한 생소하고도 방대한 지식이 물밀듯 흘러들어왔다.

옛 칼리안이 마법사였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이틀이 지나서야 깨달은 것에 실소하며 마나를 운용하려는데 심장의 통증이 느껴졌다.

"마나를 쓰려 할 때 심장이 아팠는데······."

사실 플란츠가 집어던진 나이프를 잡았을 때도 가슴 통증을 느꼈었다. 날붙이를 잡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에 오러를 두르려 했을 때의 일이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어 그 무딘 날에도 이렇게 상처가 생긴 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마나를 운용했다.

어김 없이 심장이 아팠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낫지 않는 상처와 심장의 통증.

없어야 할 두 가지를 마주한 칼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답답한 점은 이런 증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베른이 칼리안의 몸으로 들어온 이후 혹은 최근에 생긴 문제인 듯 했다.

"큰일이네. 이래서는 오러든 마법이든 사용할 수가 없는데."

곤란하다. 아니, 매우 위험하다.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이 상황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필요했다.

당연하겠지만 카이리스 왕궁 내에 칼리안에게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신중하게 기억을 되짚으며 그에게 도움이 될 이가 없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 우웅!

어느새 물이 식었는지 온도 조절을 위한 마법 장치가 물을 데우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듣던 칼리안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마법사······. 그래, 마법사."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목욕 물을 한 번 튕겼다. 찰박,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앨런 마나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

현재의 앨런은 3인의 7서클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젊고 실력이 뛰어나 마법사 대부분의 우상이나 다름 없는 자였다.

베른의 기준으로 10년 전, 그러니까 지금.

국왕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 축제에 초대된 앨런이 카이리스를 방문했었다. 모종의 일로 왕궁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한 앨런은 그 길로 리베른 왕국에 돌아갔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뒤, 앨런은 대륙 유일의 8서클 대마법사가 되었다.

"마나에 대한 지식으로는 대륙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다 하였지."

칼리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분명 이 문제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이 기회에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두면 더 좋겠는데."

능력 있는 마법사에 대한 마법사들의 지지는 기사의 충성과 맞먹는다. 따라서 앨런이 칼리안과 함께 한다면 그 순간 카이리스의 모든 마법사가 칼리안의 편에 서게 될 터였다.

"그리 되면 소리 없이 개죽음 당할 위험은 줄겠네."

그 누구도 2왕자 플란츠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는 것은 왕비 실리케가 가진 기사 세력의 힘 때문이었다. 1왕자 란델은 또 어떤가. 병으로 죽은 카이리스의 전 왕비이자 란델의 모친인 아이샤는 신성국가 텐실의 공주였다. 따라서 텐실의 왕족이기도 한 란델의 목숨 역시 함부로 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칼리안은 가지지 못한 세력의 힘.

앨런을 끌어들이면 칼리안에게도 그런 힘이 생기게 될 것이다.

물론 앨런이 불러올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었다.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왕위 계승 후보에 내 이름이 추가될테고."

카이리스는 용의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사에 대한 처우가 매우 나쁜 곳이었다. 기사 가문을 손에 쥔 실리케의 영향이었다. 때문에 마법사들은 이 상황을 벗어나게 해 줄 왕세자를 원했다.

앨런을 손에 넣으면 그런 마법사들이 칼리안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칼리안이 그 어떤 가문을 등에 업더라도 그만큼 큰 세력을 얻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마나를 운용해보았다.

욱씬, 명확한 통증이 심장을 찔러왔다.

"일단 앨런 마나실부터 만나야 되겠군."

그래야 다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리안이 생각한 다음은, 아이 한 명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앨런이 칼리안을 구해줄 수 있을 이라면 그 아이는 칼리안이 구해줘야 할 사람이었다. 구해내어 그의 '검'으로 만들어야 했다.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까지 한 달.

칼리안의 사망 예정일도 빠르다면 그 즈음.

시간이 재미있게 겹친다.

- 찰박.

칼리안이 다시 한번 물을 튕겼다.

* * *

- 툭!

칼리안을 본 의상 담당자 섀틴 슬레이크의 손에 들린 줄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섀틴이 깜짝 놀라며 떨어뜨린 것을 치우더니 새로운 줄자를 꺼냈다. 바닥에 닿은 것을 왕족의 몸에 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다시 쳐다본 섀틴이 잠시 먼 곳을 회상하는 눈을 하다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되돌렸다.

어쩐지 얀이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사이 섀틴의 입이 열렸다.

"왕자님을 뵈니 프레이야 후궁님이 생각나서,"

"슬레이크."

불안해 하던 얀이 곧바로 섀틴의 말을 막았다. 그제야 말 실수를 깨달은 듯, 화들짝 놀란 섀틴이 칼리안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칼리안은 당연히 더 놀랐다. 얀을 쳐다보니 얀도 어느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곧바로 다른 사람을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칼리안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그들이 사과하는 이유를 몰랐다.

심한 답답함을 느낀 칼리안이 서둘러 예전 기억을 뒤졌다.

'이 기억은 왜 굳이 생각하려 해야 떠오르는지!'

오래지 않아 이 일과 관련되었을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림 가득한 책을 읽어나가는 기분으로 빠르게 기억을 훑은 칼리안이 침음을 흘렸다.

"아······."

옛 칼리안은 프레이야를 닮았다는 이야기에 치를 떨었다. 거울로 제 얼굴을 보는 것도 질색했다. 태어나 본 적도 없는 이를 닮았다며 그 오랜 기간 동안 시달려야 했던 까닭이다.

칼리안의 몸에 처음 들어와 거울을 달라 했을 때 시녀가 밖에 나가서 거울을 구해온 이유와 얀이 그렇게 당황했던 이유도 이제야 이해되었다.

제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았는데 갑자기 그 난리를 피웠으니.

'안 들킨 게 신기하네.'

짧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입 속으로 말을 골랐다.

물론 지금이야 프레이야에 대한 감정이 없지만 그 정도의 트라우마를 하루 아침에 극복했다 하면 의심을 살 수 있을 테니 예전보다는 나아졌으나 여전히 꺼리는 정도의 반응을 보여야 했다.

곧 적당한 답을 찾은 칼리안이 섀틴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려던 것 계속 해. 하려던 말은 굳이 안해도 돼. '어머니'를 닮은 건 나도 잘 알아."

"네, 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둘 다 놀란 얼굴이 되었으나 의심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쫓겨날 뻔 했던 섀틴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고는 조심스럽게 칼리안의 신체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함께 온 듯한 하인이 섀틴이 불러주는 치수를 바쁘게 받아 적었다.

잠시 후, 치수를 모두 잰 섀틴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더 많이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왕자님. 너무 왜소하셔서 걱정이 됩니다."

칼리안이 웃었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 왜소하다는 말을 기분 나쁘게 들을 이유가 없었다.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으나 마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래."

치수를 재는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기 때문에 이제 조금 쉬었다 저녁을 먹으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인이 두꺼운 책들을 가지고 왔다. 섀틴은 그것을 건네 받은 뒤 테이블 위에 놓고 하나씩 펼쳐놓기 시작했다.

"······ 뭐야?"

한 권은 여러 모양의 예복 그림을 모아둔 것이었고 또 한 권은 소재와 색이 모두 다른 천의 샘플을 묶은 것이었다. 각종 레이스 묶음, 그리고 온갖 장신구 그림이 그려진 책이 추가로 올라왔다. 전부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 수많은 단추가 주렁주렁 매달린 책도 있었고 수백 켤레의 구두가 그려진 책도 눈에 들어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인 쪽을 쳐다보니 또 다른 책 두 권을 들고 오고 있었다.

저게 다 뭐냐는 얼굴로 멀뚱멀뚱 쳐다보니 섀틴은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 말했다.

"이제 디자인을 정해야 합니다, 왕자님. 총 네 벌을 정해주시면 됩니다."

"몇 벌?"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기억 속에서 답이 나왔다.

준비 해야 하는 옷은 총 다섯 벌이었다. 또 한 벌은 왕자의 정복이었기 때문에 고를 필요가 없을 뿐이다.

칼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것을 다 골라야 한다고?'

베른의 생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베른의 어머니였던 왕비가 대신 했던 일이었고 기사가 된 뒤에는 무조건 기사의 제복만 입었으니 옷을 고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세크리티아에는 한 번에 다섯 벌의 옷을 준비해야 하는 큰 행사도 없었다. 어떤 행사도 이렇게까지 성대하게 치르지는 않았으니까.

아무튼 이제는 옷을 대신 골라줄 사람도 없고 제복도 없었다. 때문에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옆에서 얀이 말했다.

"요즘 왕자님께서 많이 달라지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 달은 행사 준비 때문에 귀족들과의 일정도 없습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 이렇게 변화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앞에 처음으로 나서게 되는 자리가 바로 국왕 전하의 탄신일 행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잘 꾸며입고 나가서 바뀐 첫인상을 제대로 심어 주라는 소리인 건 알아."

"네. 맞습니다, 왕자님."

"그래. 이해는 되는데······."

칼리안이 테이블을 빼곡하게 채운 책자를 쳐다봤다. 보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느낌이 든다. 마나 하나 못 쓰는 몸뚱이를 가지게 될 판에 옷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난 저걸 뒤적거릴 자신이 없어. 아니면 너희가 골라."

'너희'라는 것은 얀과 시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포기하라고 한 말이었는데 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칼리안이 소파로 가 앉았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그들이 매우 불타올랐다.

이틀 동안 칼리안의 앞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따라다니던 시녀들이었는데 어떻게든 칼리안을 돋보이게 해주려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듣게 된 칼리안이 간간히 자신의 의견을 냈다.

"왕 리본 안돼. 작은 리본도 안돼."

잠깐 실망한 분위기가 돌더니 다른 아이디어가 나왔다.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프릴 많이 안돼."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레이스는 될 것 같아?"

대체 뭘 만들려는 거야? 방울 뭐야?

결국 칼리안도 그들 사이에 들어가 같이 말싸움을 시작했다.

마나고 나발이고 일단 '프릴 많이'는 막아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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