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화 (2/527)

제1장.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1)

시녀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두꺼운 커튼이 열리고 아스라이 밝아오는 새벽 하늘이 침실을 비췄다. 곧 왕자의 전속 시종이 들어와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이 잠든 침대의 옆에 섰다.

왕족을 깨울 때 손을 대선 안 된다.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때문에 시종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항상 문 열리는 소리에 경기를 일으키듯 일어나 앉던 소년이었다. 헌데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곤하셨나?'

이런 생각에, 시종은 뒤에 서 있던 시녀로부터 작은 종을 건네받았다. 곧 이른 아침을 알리는 은은한 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딸랑, 딸랑.

그제야 소년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소년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는 듯 하더니 와락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던 시종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왕자님. 이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리고는 준비한 모닝 티를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언제나 차의 강한 향기로 정신을 먼저 깨운 뒤 세수를 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아침 차를 마셨다고?'

소년. 아니 베른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찻잔을 집어들려 손을 뻗었다. 그러다 손의 생김새가 굉장히 낯설다는 것을 보게 됐다.

가득했던 상처와 굳은살은 온데 간데 없는 하얀 손과 가늘고 긴 손가락. 그 모습이 불러온 이질감에, 베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왼팔을 쳐다봤다.

깡마른 팔뚝에는 작은 흉터조차 없다.

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왼팔이 보이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팔이 잘렸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베른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앳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까. 혹시 악몽을 꾸셨습니까?"

악몽.

세크리티아의 멸망, 그보다 더한 악몽이 또 있을까!

시종의 말에 대꾸 할 틈이 없었다.

잘린 팔이 어째서 다시 붙었는지는 나중의 일이다. 당장 확인해야 할 것은 그의 형이자 국왕인 체이스의 생사였다.

"형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다급한 표정의 베른을 본 시종은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두 분 모두 아직 방에 계십니다."

"······ 둘?"

이번에는 베른의 얼굴에 시종과 같은 표정이 생겼다. 그의 형은 단 한 명, 오로지 체이스 뿐이었으니까.

"란델 왕자님께서는 이미 의복을 갖추셨을 겁니다. 플란츠 왕자님께서도 마찬가지시고요."

란델, 그리고 플란츠.

낯설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름.

특히 그 중 한 명의 이름은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는 이의 것이 아니던가.

'카이리스.'

카이리스의 왕, 플란츠.

당장 죽여 없애도 시원치 않은 이름을 들은 베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런 베른을 보던 시종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왕자님, 어서 준비부터 하셔야죠."

그가 여전히 잠에서 깨지 못한 것이리라 여긴 시종이 뒤에서 세숫물을 들고 있던 시녀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베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얀."

"네, 왕자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시종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다시 생겨난 팔과 처음 보는 시종.

그리고 카이리스.

베른은 더 말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생각을 시작했다.

오늘 저 시종을 처음 보았다.

주신 세렌티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알았다.

그 뿐인가?

베른은 지금 함께 있는 시녀들의 이름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베른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모르는 채, 시종은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세숫물을 내려놨다.

'악몽이다.'

얀이라 불렸던 시종의 말을 떠올린 베른이 대야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우습게도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외에는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베른이 반짝이는 은 대야에 얼굴을 가져갔다.

아무리 끔찍한 현실이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엉뚱한 상상 속으로 도망치다니.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물에 비친 모습을 본 베른은 다시 한 번 손을 멈춰야 했다.

물에 비친 붉은 눈. 그것은 베른의 것이 아니었다.

베른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거울을."

"거울 말씀이십니까?"

베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 때문에 저도 모르게 되묻는 실수를 저지른 얀이 빠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등 뒤로 손을 넘겨 시녀들을 향해 손짓했다. 거울을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왕자의 방에는 거울이 없었다.

때문에 얀의 뒤에 서 있던 시녀 중 한 명이 서둘러 밖으로 달려나가 거울 하나를 가져왔다.

그것을 받아 든 얀이 베른의 얼굴을 비췄고, 베른은 고맙다는 말을 전할 새도 없이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

거울 속에는 흑발의 어린 소년이 있었다.

긴 앞머리 사이로 루비 빛의 두 눈이 베른을 노려보고 있었다.

베른이 고개를 들었다.

시종의 옷자락에 새겨진 문장. 그것은 분명 카이리스의 것이었다. 그것을 본 뒤에야 시종이 자신을 왕제가 아닌 왕자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칼리안 왕자님."

얀이 말도 없이 거울을 보며 앉아있는 베른을 불렀다.

'아니야. 나는 왕제 베른이다.'

베른은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자 그에 반발하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은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야. 내 이름은,'

그리고 외워놓지 않았던 긴 이름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카이리스의 3왕자 칼리안.

베른이 아니라, 그것이 내 이름이다.

베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얀에게 물었다.

"내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지?"

베른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는지, 얀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칼리안 왕자님이십니다. 참고로 저는 왕자님을 지금 당장 조찬 자리로 모셔야 하는 왕자님의 시종 얀이고요."

그러자 얀의 이 대답을 기다린 것처럼 생소한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흘러들어왔다.

카이리스의 왕궁, 예법, 날씨, 일정, 기마, 화원, 마법, 왕비, 국왕. 그리고 두 명의 형.

얀의 말이 맞다. 조찬에 늦으면 안 된다.

그의 기억은 그리 외치고 있었다. 당장 일어나라고. 다른 두 왕자보다 늦으면 안된다고.

이제는 칼리안이라는 이름이 되어버린 그가 조용히 물었다.

"오늘 날짜는?"

"4월 28일이지요.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왕자님."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 곳을 보아도 세크리티아와 전쟁을 치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다시 물었다.

"몇 년인지도."

"522년입니다."

칼리안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카이리스력 522년이라면 세크리티아력 525년이다. 그가 눈을 감았던 그 날이 아니었다.

'10년 전이다.'

10년 전. 그리고 카이리스의 3왕자.

빨리 준비하고 나가기를 종용하는 듯 계속 떠오르는 다른 두 왕자에 대한 기억들.

생각에 잠긴 칼리안이 움직이지 않자, 더 기다리지 못한 얀이 팔을 뻗었다. 옷 소매라도 잡아 일으켜 세울 셈이었다.

- 타악!

그러자 칼리안의 손이 반사적으로 얀의 팔을 쳐냈다. 얇은 손바닥에 맞은 팔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평소 이런 식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칼리안의 팔도 아릿하게 아파왔다.

얀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러십니까."

"아.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실수하였네."

칼리안의 말투가 확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놀란 얀이 빠르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왕자님. 그보다 어서 일어나셔야 합니다. 안 그러시면 제가······!"

칼리안은 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고개를 휘휘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형님들'보다 늦으면 안된다며 머릿속을 울려대는 기억 때문에 우선은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일단은 저 얀이라는 시종을 좀 떼어놓고 생각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기도 했고.

곧 칼리안은 물에 머리를 박다시피하며 세수를 마쳤다. 정신을 차리려 양 볼까지 탁탁 때린 칼리안이 말했다.

"준비하겠네."

- 말투가 이상해.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또 한 번 기억이 밀려들어왔다. 때문에 칼리안은 잠시 숨을 들이키듯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말했다.

"아니. 준비할게. 미안해."

"오늘 따라 안 하시던 사과까지 계속 하시고······. 우선은 의복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얀이 또 다른 두 명의 시녀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곧 양 손 가득 옷가지를 든 시녀들이 와서 칼리안에게 옷을 입혔다. 그 후에는 또 다른 시녀가 다가와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

새까만 머리가 두 눈을 치렁치렁 가리는 것이 보였다.

본래 그는 청은색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길 좋아했기에, 눈을 가린 검은 머리가 답답했다. 머리카락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기억 속에서 그 이유가 떠올랐다.

- 플란츠 형님께서 싫어하시니까.

그의 형인 두 명의 왕자.

그 중 플란츠는 이 붉은 눈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이렇게 머리카락을 내려 눈을 가렸다.

형이 무서워서 눈을 가리다니.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혀를 쯧 찼다.

'적당히 들은 적 있었지만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실소하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플란츠 따위가 이 눈을 싫어했다라.'

원수 중의 원수. 미친 왕 플란츠.

그는 카이리스의 왕이었다. 아니, 10년 전이라 하니 지금은 왕자일 터.

그가 바로, 세크리티아를 공격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플란츠······. 나는 네가 숨을 쉰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증오 가득한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이 곳은 카이리스의 왕궁이다.

아직도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튼 자신은 지금 카이리스의 3왕자인 칼리안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마음 속으로 같은 말을 몇 십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혹시 놈을 보더라도 지금은 죽이면 안 돼. 참아야 한다.'

만약 꿈이 아니라면.

말도 안되지만 정말로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면.

섣부르게 움직이다가 칼리안의 목이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면 안됐다.

칼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을 시녀들이 옷매무새를 다듬고 마지막 정리를 해주고 있었다. 과연 아침을 먹으러 가는 사람의 준비가 맞을까 싶을 만큼 철저한 손길이다.

옷차림으로 인해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났다.

칼리안이 문 앞에서 살짝 심호흡을 한 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낯설게 익숙한 중앙 계단을 내려가 오른쪽 끝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아무리 나이를 떠올리려 해도 기억이 상기되지 않았다. 나이조차 세지 않고 살았던 것일까. 결국 칼리안은 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얀."

"네, 왕자님."

"내가 몇 살이지?"

얀으로서는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아침부터 참 별스러운 질문들을 한다는 생각을 한 얀이 답했다.

"14세이시지요. 성인이 되시려면 아직 네 달이 남았으니까요."

"그래. 그랬었군."

어쩐지 어린 것 같더라니.

이런 생각을 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칼리안을 향해 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왕자님. 혹시 지난 밤에 기사가 나오는 소설이라도 보셨습니까?"

말투가 평소와 달랐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본래의 칼리안은 말에 오르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런데 내일 말을 타야 하는 기마 수업이 있었다. 때문에 수업에 따라가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기사가 나오는 소설이라도 보고 따라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신경쓰지. 아니, 신경 쓸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은 곧 식당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시종들만 있었지 왕자로 보이는 인물들은 없었다. 칼리안의 시선이 잠시 얀에게 닿았다.

'둘이 당장 출발할 것처럼 그렇게 호들갑을 떨더니.'

아마 칼리안이 조찬에 늦지 않도록 지레 닥달하느라 한 거짓말일 터였다.

커다란 창가에 놓인 동그랗고 큰 식탁이 보였다. 국왕 르메인의 권유로 매일 세 명의 왕자들이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곳이었다. 옛 칼리안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장소이기도 했다.

식당의 시종 중 한 명이 한쪽 자리의 의자를 빼주는 것이 보였다. 그 곳이 자신의 자리임을 알게 된 칼리안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창 밖의 낯선 풍경을 바라봤다.

'듣던대로 정말 대단한 규모구나.'

시스테라 대륙의 4개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카이리스의 왕궁은 그 거대한 크기로도 유명했다. 하나의 큰 건물과 두 개의 별관으로 이루어진 세크리티아 왕궁과 달랐다.

왕족이 거주하여 '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건물의 수만 무려 6개였다. 그 외의 용도로 사용되는 건물들과 수많은 정원, 인공호수 등이 모두 카이리스 왕궁 안에 있었다.

지금 칼리안이 있는, 왕자들이 머무는 체르밀 궁은 왕궁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 앞의 인공호수와 그 뒤로 이어진 정원이 상당히 넓었다.

물에 비친 햇살이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상념에 빠진 채로 10여분을 기다리니 1왕자 란델이 왔고, 30여분이 지나자 2왕자 플란츠가 도착했다.

말 없이 뚜벅뚜벅 걸어와 자리에 풀썩 앉은 플란츠를 본 칼리안의 눈이 벌어졌다.

'대체 저것이······.'

저게 대체 무슨 꼬락서니란 말인가?

상상도 못할 모습을 본 칼리안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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