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라이벌의 자격
‘아, 이제 유럽 법인 준공식도 마지막인가? 케이는 잘 있겠지?’
해외 법인 다섯 개를 연달아 짓는 작업은 생각보다 강행군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이곳 러시아까지. 그중에서도 영국과 러시아는 데이터 센터까지 짓는 대규모 공사이기에 온갖 매체와 정치인들을 만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출국 당시 컨디션이 안 좋다며 필요하면 나중에 합류하겠다고 했던 케이는 그냥 한국에 머물게 했다. 그동안 나 못지않게 일을 했으니 지치기도 했으리라. 굳이 내조를 위해 이런 강행군을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미 버지니아 트레이딩은 전자 상거래 업체로 변신 중이다.
“귀빈 여러분께서는 테이프 커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딴생각을 하고 있자니 드디어 행사가 마무리되려나 보다.
“하나, 둘, 셋.”
찰칵! 찰칵! 찰칵!
펑! 펑! 펑!
“오오오오!”
짝짝짝짝짝!
번쩍거리는 가위를 들고 테이프를 자르니 저 멀리서 폭발음이 들리고 갖가지 색의 연무가 피어오른다. 낮이라서 불꽃놀이 대신 각양각색의 연막탄을 쏘아 올린 모양이다.
「스마트 클라우드 러시아 법인 준공식」
러시아는 한국과 달리 발파식을 할 필요도 없다. 눈이 닿는 곳까지 언덕 하나 없는 평평한 땅이다. 그냥 롤러로 땅을 다지고, 파일을 박고, 도랑을 파서 인터넷 케이블을 지중화하면 그뿐이다.
“하하하, 스마트 클라우드가 우리를 파트너로 삼아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MTS사의 제안이 매력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솔직히 전자 정부 프로젝트를 정말로 턴키 계약으로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MTS는 러시아에서 시장 점유율 1위의 통신 회사다. 대한민국의 SJ인 셈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러시아 정부와 끈끈한 사이라 이 회사와 계약을 하면서 ‘e-Russia Project’라고 명명된 국책 사업을 스마트 클라우드가 따낼 수 있었다.
크게 인터넷 인프라, 전자정부, 전자교육이라는 세 가지 영역에서 2010년까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다. 초기 1년간 타당성 조사와 시범사업(Pilot Project)에서 8억 불 매출을 올릴 수 있으며, 본과제가 진행되는 5년 동안 총 32억 불이라는 매출이 기대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물론 이런 대박 장사를 거저 줄 리는 없고, MTS가 스마트 클라우드 러시아 법인 지분의 49%를 가져가는 조건이었다. 내게 매출 실적과 경영권은 주겠지만 순익의 절반은 자국의 회사가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국책 사업의 관례나 다름없으니 거부할 이유는 없다.
“러시아 정부가 턴키 계약을 한 것은 당연합니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러시아를 인터넷 허브로 만들어 주신다는데 말입니다.”
“코르냐 사장님의 지원 발표 덕분이지요. 데이터 센터를 아주 잘 설명해 주셔서 말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하하하”
MTS사 CEO인 알렉세이 코르냐는 연신 하늘을 나는 기분인 모양이다. 하긴 누가 생각해도 대박 프로젝트를 따냈으니까. 이런 인프라를 한번 깔아 놓으면 연간 4억 불이라는 순익이 발생되는 데다 동유럽을 포함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등등 기존 소련 연방에 속했던 나라에서까지 인터넷 사업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름 통신사 CEO이기에 데이터 센터 설립이 갖는 의미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와 합작 회사가 되기 위해 러시아 고위층에 뿌린 뇌물만도 만만찮을 것이다.
나에게도 러시아 데이터 센터는 필수적이다. 영국에 세운 데이터 센터는 대서양을 건너오는 해저 케이블과 연결되어 손쉽게 서유럽의 인터넷 허브가 될 수 있다. 그에 반해 이곳 러시아의 데이터 센터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동유럽 인터넷 인프라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유튜브를 성공시키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다.
“VIP분들께서는 이쪽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행사 진행요원이 우리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던지 잠시 말이 끊어진 틈에 끼어들었다. 또 지겨운 식사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식사를 하기도, 그렇다고 얘기만 하기도 애매해 결국 와인과 샴페인으로 배를 채우는 자리다.
물론 그런 식사 자리를 통해 유럽의 경제 상황을 한눈에 살펴보는 기회가 되기는 했다. 현재 유럽 전역은 1999년부터 모바일 시장이 100%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1998년 이후 지속되는 고유가 기조가 소비 촉진으로 이어진 결과일 것이다. 특히 러시아에선 국영 기업이던 에너지 관련 기업의 사유화로 인해 신흥 부유층, 일명 노브이 루스키가 등장해 동서 유럽 간 무역이 활발해진 것도 경제 활황의 이유 중 하나다.
여기서 나로 인한 나비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통신사 CEO들의 말을 빌리자면 몇 년 전 내가 퓨처폰을 출시했을 때 전 세계 이동전화 단말기가 단박에 공급 과잉으로 치달았다고 한다. 당연히 기존 이동전화 단말기 값이 수십 불 수준으로 급락했고 이동전화 고객이 일거에 수천만 명씩 늘어나게 되었다는 거다.
일단 휴대폰을 한번 가지게 된 소비자는 절대 유선 전화로 못 돌아가며 더욱 고기능 단말기를 찾기 마련이다. 그런 현상은 스마트폰 출시로 인해 더욱더 극심해져서 올해 들어서는 기존 폰을 갈아 치우는 소비자가 각 국가별로 최소 천만 명은 될 거라고 하니 가히 시장은 이곳저곳에서 폭발하고 있다.
“유수한 CEO님, 어서 가시죠. New K폰, 노트 K폰 물량 공급을 어찌 하실지 대충이라도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봐라, 벌써부터 코르냐 사장이 물량 타령부터 하잖나. 이제 며칠 동안 주야장천 러시아 통신사 CEO들이 나를 찾을 것이다. 물량 이야기는 저 멀리 권 부사장에게 넘겨 버려야겠다.
나는 지금껏 정부와 언론을 상대로 충분히 진을 뺐다. 전용기로 휙 하니 먼저 귀국해야겠다. 아, 권 부사장에게 귀국길에 중국도 들르라고 해야겠다.
- *
비슷한 시각, 미국 MS본사.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함께 자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앙숙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들끼리는 서로 제대로 된 경쟁자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빌 게이츠의 거취에 대해 이곳저곳에서 말이 나오는 데다 정중하게 MS 본사를 방문해 달라는 빌 게이츠의 전화에 잡스는 단숨에 이곳으로 날아왔다.
“정말 은퇴를 결심했습니까?”
“결심한 게 아니라 결심을 당한 거지요. 세계 부자 순위 1위라는 타이틀이 있을 때 자리를 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빌, 아직 만회할 기회는 있습니다. 적자라고 해 봐야 기껏 2억 달러지 않습니까.”
“스티브, 현 상황을 알지 않습니까. 작년부터 IT 업계는 슈퍼 사이클에 접어들었습니다. 나와 같은 필드에 있는 인텔이 작년에 매출 신기록을 세웠단 말입니다. 당연히 MS 윈도우도 많이 팔렸겠지요. 그런데 최종 성적은 2억 달러 적자예요. 실제 윈도우폰 사업에서 발생한 적자 규모는 입에 담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빌 게이츠는 정말이지 생각하기 싫다는 듯 이맛살을 구겼다. 윈도우폰을 스마트폰보다 낮은 가격으로 출시하겠다고 보조금을 지원한 게 문제였다. 대당 100달러로 시작한 보조금이 마케팅 비용과 더불어 150달러까지 육박하자 손실은 가히 천문학적으로 치솟았다.
“그래도 은퇴는 아닙니다. 올해 모바일 판매 대수는 2억 대에 육박할 것이고 아무리 스마트 클라우드라고 해도 전체 물량을 커버할 수는 없습니다. 기회는 있습니다.”
“스티브, 스마트 클라우드는 처음부터 독점할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난 그리 느껴져요.”
“무슨 말입니까?”
“마치 스마트 클라우드가 윈도우폰을 이용해 시장 확대를 꾀하는 작전에 내가 놀아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빌, 그런 생각을 왜….”
“들어 봐요.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돈이 되는 북미와 일본 시장은 스마트 클라우드와 애플이 나눠 가진 꼴이 되었습니다. 윈도우폰은 유럽이든 중국이든 별로 돈이 안 되는 시장에 풀리면서 잠재적인 고객만 늘려 준 격입니다. 특히 중국의 행보는 엉뚱하기까지 합니다. 윈도우폰을 안드로이드폰으로 갈아 치우다니… 실제로 모바일 부품과 안드로이드를 제공하는 스마트 클라우드에 돈을 갖다 바친 꼴입니다.”
빌 게이츠의 말에 스티브 잡스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럽 진출이 예상보다 한참 늦었지 않나. 그러다 갑자기 최근 한 달 새 법인을 다섯 군데나 짓고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시장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렸나 보다.
“으흠, 그럼 스마트 클라우드가 이제야 유럽 법인을 세우는 게….”
“그렇죠. 내 생각에 MS는 시장을 폭발시킬 심지 노릇이나 한 겁니다. 나는 까맣게 타 버리고 화려한 불꽃은 유수한이 즐기는 거죠. 하하.”
빌 게이츠는 ‘정말 유수한은 대단한 사업가야’라고 생각하며 헛웃음을 흘려 댔다.
“…….”
잡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빌 게이츠가 말끝에 서류를 탁자 위로 올려놨기 때문이다.
“중국 공장 지분 계약서입니다. 애플에서 인수하세요.”
“빌….”
“MS 진영에서 반발하지는 않을 겁니다. 노키아는 자체 모델을 만들겠다고 일부 공장은 따로 가져갔고, 소니 에릭슨은 일본 공장에서 생산하겠다고 하고, HTC는 벌써 안드로이드 진영에 가담했으니까요. 애플도 용인밸리를 벗어날 생각은 하고 있었잖습니까.”
“이런 딜이 언론에 알려지면 윈도우폰은 정말 어려워집니다.”
“그거야 노키아와 차기 윈도우 모바일 OS를 맡을 사람의 몫이지요. 내가 해 줄 것은 내 친구가 생산 공장을 인수할 때까지 자리를 쥐고 있는 게 전부입니다.”
빌 게이츠는 잡스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었다. 잡스도 딱히 인상을 달리하지는 않았다.
“굳이 이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필요까진 없습니다.”
“애플 CEO가 MS 이사회를 왜 걱정합니까? 내가 빠지면 최정상끼리 제대로 한판 붙을 것 아닙니까. 최소한 생산 능력에선 뒤지면 안 되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잡스는 스마트 스토어와도 업무 계약을 끊고 애플 스토어로 독립했으며 아이폰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확고히 다졌다. 생산지도 용인밸리를 벗어나는 게 수순이긴 했다. 메모리 반도체야 신성과 마이크론이라는 대안도 있고 말이다. AP도 올해부터는 TSMC로 돌아서기로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좋습니다. 이왕 그리 마음을 먹었다면 6개월은 버티세요. 중국 공장과 해당 인력을 아이폰에 맞추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합니다.”
“6개월 정도면 나에게도 적당한 시간이군요. 가을은 은퇴하기 좋은 계절이니까.”
“은퇴하면 뭘 할 생각입니까?”
“아내와 함께 자선사업을 해 볼 생각입니다.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악마가 자선사업이라니… 세상 많이 변했군요.”
“하하, 스티브가 날 친구로 대해 주기까지 하는데 나도 변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하하.”
잡스는 빌 게이츠의 말에 웃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무뎌진다더니 정말로 그 말이 사실이었다. 애플로 다시 돌아와 에그박스, 아이팟, 아이폰 등등 하는 사업마다 잘되니 예전에 분노에 차 있던 잡스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도 빌 게이츠처럼 친구이자 경쟁자인 것이 확실했다. 빌 게이츠가 경쟁자에서 친구로 변한 것과는 방향이 반대지만 말이다.
“농담은 이쯤 하고, 실리콘밸리의 악마라는 타이틀답게 내 생각을 좀 말해 주고자 합니다.”
“들어 보죠. 자선사업을 계획 중인 악마님.”
“지금 유수한은 안드로이드 OS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죠. 그걸 공략해야 합니다.”
“공략하고 말고가 있습니까? 오픈소스인걸요.”
“내가 스티브, 아니 정확히는 스티브 당신이 떠난 애플을 공격했던 작전 기억합니까?”
“어찌 잊겠어요? 그건 빌이 실리콘밸리의 악마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계기인데 말입니다.”
“그럼 잘 생각해 봐요. 안드로이드 OS도 똑같으니까.”
빌 게이츠는 중국 공장 지분증을 잡스 쪽으로 훅 밀어 버리고 빙그레 웃었다. 오늘 내내 이어지는 잡스와의 대화 중 유일하게 기분 좋게 웃는 웃음이었다.
잡스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떠올리기 싫었던 옛날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 보았다. 그러다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매킨토시 GUI 특허권!”
“정답이에요, 스티브!”
기억해 내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일이었다. 빌 게이츠는 애플에 GUI 특허 사용권을 받아 윈도우 1.0을 탄생시켰고 완성도와는 별개로 해당 OS를 IBM PC를 매개로 전 세계에 뿌려 버렸다. 이미 마우스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매킨토시 OS를 베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윈도우 OS를 출시한 것이다.
그 일은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퇴출당하고 후속 CEO인 존 스컬리가 단기적인 경영 성과를 바라고 있을 때 시작되었다. 빌 게이츠는 존 스컬리에게 애플향 저가 소프트웨어 개발을 해 주겠다며 GUI 특허 사용권을 받아 왔던 것이다.
빌 게이츠가 받아 온 라이선스는 애플향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 그 후 1년 안에 만료가 되는 것이 당연했는데, 해당 라이선스의 만료일이 기입되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MS 윈도우 OS를 만드는 데 가져다 쓴 것이다. 애플 측은 해당 라이선스가 1회용임을 주장했지만, 빌 게이츠는 만료일이 기입되지 않았으므로 영구적인 라이선스를 넘겨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MS 윈도우 OS는 법정 소송이 붙었고, 애플은 자신의 기술을 증명하기 위해 제록스로부터 마우스를 이용한 GUI 및 GUI용 기술들에 대한 사용권을 구매했으며, 자신들이 직접 개발한 GUI 요소에 대한 특허 이력을 모조리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애플의 자승자박이 되어 버렸는데, 그 전까지 제록스는 매킨토시 OS의 GUI 원천 특허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자 MS의 변호사들이 제록스에 엄청난 거금을 안기며 로비를 해 댔다. 결국 애플 고유의 GUI 특허 또한 제록스의 원천 GUI 특허 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인정되어 애플의 GUI 특허를 무효화시켜 버린 것이다.
“안드로이드의 앱 라이선스를 무력화시키라는 말이군요.”
안드로이드가 오픈소스이긴 하지만 앱 개발사는 라이선스를 얻어야만 판매를 할 수 있다. 달리 앱 판매액의 10%를 스마트 클라우드, 아니 파이오니어가 가져가겠나. 여하튼 그 앱 회사는 라이선스를 한 번 득했다면 아이폰에도 복제품이나 다름없는 앱을 팔아도 된다는 말이다. 단박에 아이폰 앱이 두세 배로 늘어날 수 있는 거다. 엄청난 마케팅 포인트다.
“그렇죠. 신성의 AP가 결국 스마트 클라우드 AP였기에 우리는 안드로이드 앱에 대한 코딩 구조를 상당 부분 이해하고 있잖습니까. 앱 라이선스도 오픈소스답게 만료 기간이나 대상 특정이 없지요. 그럼 여태 개발된 안드로이드 앱에 대해선 복제품이나 마찬가지인 아이폰용 앱을 만들어도 딱히 소송을 당할 염려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스마트 클라우드는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미 애플과 MS 간 소송에 대한 미국 법원의 판례가 존재하니 문제없지요. ‘만료일 기재가 없는 것은 1회성이 아니라 라이선스를 영구히 넘겼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부주의한 계약에 따른 기업의 손실은 소송 대상이 될 수 없다’가 해당 판례의 최종 판결문이었잖아요.”
“악마답게 기억력도 좋군요.”
“자선사업을 계획 중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 주십시오. 하하하.”
“하하하.”
잡스도 따라 웃었다. 조직 검사를 하느라 절개했던 흉부 아래가 살짝 찌릿했지만 상관없었다. 췌장암이라는 검사 결과를 받은 후로 이처럼 크게 웃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올해 아이폰에서 드러낼 미려한 외관, 윈도우폰의 항복, 중국 공장, 심지어 실리콘밸리가 자랑하는 악마의 조언까지… 유수한 회장과 정상에서 다투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빌은 은퇴하고… 그래, 유수한이라면 나와 겨룰 만한 인물이지. 즐겁군, 정말 즐거워.’
잡스는 인생의 마지막까지 멋진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즐거웠다. 아이폰이 마냥 성공해 세계 1위 부자로 올라섰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 *
“수한 씨~”
“어이구, 마중까지 나오셨어?”
“보고 싶었어요, 수한 씨. 고생 많았죠?”
공항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오니 케이가 마구 손을 흔들고 있다.
“고생은 무슨. 전용기도 있고 대접받는 출장인데 편했지.”
“그래도 일인데 힘들죠. 오늘 맛난 거 했으니까 출근할 생각 하지 말고 내일까지 푹 쉬어요.”
“그럴까? 여하튼 어서 집으로 가자고. 우리 집이 정말 그리웠어.”
“나 말고 집이 더 그리웠다는 거예요?”
“케이, 당신이 있는 집이 그리웠다는 거지.”
툭.
“아앗!”
언제나처럼 내 팔짱을 낄 줄 알고 팔을 굽혔더니 케이가 깜짝 놀라며 물러선다. 옆에 있던 케이의 비서가 더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분위기가 묘하다. 길거리 키스도 아니고, 이 정도의 애정 행각이 놀랄 일은 아니잖나.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수한 씨가 깜짝 놀랄 일이 생겼어요. 아무래도 지금 말해 줘야겠네요.”
“뭔데?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혹시….”
“그 혹시가 그 혹시가 맞을 거예요.”
케이가 요상한 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케이답지 않게 품이 넉넉한 바지를 입었다.
“오!”
놀람과 설렘과 걱정이 뒤섞여 말이 나오질 않았다.
“네, 맞아요. 벌써 7주래요. 위가 안 좋아서 엑스레이 촬영하러 갔다가 알았어요.”
“어엇! 엑스레이를 찍었어?”
“걱정할 일은 아니고요. 아이가 운이 좋은 것 같아요. 금식해야 하는 걸 깜박하고 아침에 물 한 컵 마셨다고 다른 검사를 먼저 했거든요.”
“드디어 케이가 엄마가 되는군.”
“수한 씨도 이제 아빠가 되는 거고요.”
“하하하! 우리 케이 님을 내가 잘 모셔야겠네.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되지. 자, 자! 천천히 걸어, 천천히.”
“아직 괜찮아요. 호호호.”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아이는 하늘이 주는 축복이며 인간이 어쩐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나. 한편으로 이전 생의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시려 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애써 이번 생에서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문득문득 생각이 날 때면 한참을 우울감에 젖곤 했다. 희연과 잘 이어진다 해도 그 아이들이 다시 내 아이들로 태어날 리 없건만 실오라기 같은 희망에 이끌려 바보같이 희연을 찾아가기도 했었다. 결국 인연은 인간의 몫이 아님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과일 종류는 미리 미리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둬야지.”
“과일 말고 수한 씨가 해 주는 요리가 먹고 싶은데요? 안 돼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그런데 내가 할 줄 아는 요리가 김치볶음밥이랑 라면밖에 없는데.”
“아주 좋은 조합인데요? 호호호.”
“오케이. 내가 오늘 특급 김치볶음밥을 해야겠다.”
“특급?”
“햄 대신 채끝 등심을 넣으면 특급이지. 임산부니까 몸에 좋은 걸로.”
“비싼 소고기 망치는 거 아니에요? 맛있을까요?”
“맛이야 내가 보장하지! 날 믿어 봐.”
“호호호.”
“아, 음악을 틀어야지. 태교에 음악보다 좋은 게 어디 있어.”
“호호호.”
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 스마트폰으로 클래식을 틀었고, 집 근처의 백화점 식품관에 들러 먹을거리로 트렁크를 가득 채웠다. 라면 끓이고 볶음밥을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이젠 케이와 나 사이에도 풍성한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집안이 조금 시끄러워지기도 할 것이고.
여독 따윈 어느새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 *
「애플 스토어, 콘텐츠 파워 대약진! 픽사와 유니버설 픽처스 합병」
「아이폰 애플리케이션 급성장세. 연내 안드로이드 진영 압도할 듯」
「윈도우폰, 메이커별 차별화 전략으로 탈출구 모색」
“하하하….”
여독을 핑계로 꼬박 이틀을 케이와 뒹굴거리다가 회사로 출근하니 심각한 보고서가 줄줄이 올라와 있었다. 픽사와 유니버설 픽처스의 합병이라니, 잡스의 공세도 만만찮다. 그런데 이상하게 웃음만 나온다.
“수한아, 이거 그리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아. 안드로이드 앱 개발사가 상당수 빠져나갔어. 분명 애플에 앱 복제품을 판 것 같은데, 라이선스 위반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 있다니까.”
재훈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하하. 애플에 앱을 판 증거 있어?”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버그가 발생할 때 튀어나오는 에러 코드가 안드로이드 버전과 똑같아. iOS 탈출 버전을 그냥 애플에 판 게 확실하다니까. 이거 소송감이야. 라이선스 계약 위반이라고. 양다리 걸치면서 돈 벌라고 우리가 개발 코드를 준 게 아니란 말이야.”
“어찌 보면 잘된 일인데 왜 열을 내고 그래?”
“잘된 일이라고?”
“그럼, 잘된 일이지. 이번 기회로 어느 업체가 의리를 지켰는지 아닌지 가려낼 수 있잖아.”
“……!”
스마트 클라우드와의 관계를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앱 업체는 별것 아니게 대접해 주면 된다. OS 버그 패치를 제공하지 않는다거나, 차후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면 OS 업그레이드 버전에 대하서 라이선스를 갱신해 주지 않는 등 대접해 줄 방법은 충분하다. ‘양다리 걸치다 결국 애플 쪽에 줄을 서면 되겠지’라고 생각한 앱 업체는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다.
“여태 참은 김에 끝까지 참아. 소송은 생각도 하지 말고.”
“뭔 소리야?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게 확인되면 소송으로 복수해야지. 의리를 지킨 업체들만 바보 되는 거라고.”
“아니야. 분명 애플에 줄을 댄 업체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은 거야. 라이선스 계약에 뭔가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 게 틀림없어. 윌슨, 버지니아 로직스와 같이 검토해 줘요. 파이오니어가 계약에서 뭘 실수했는지.”
“안드로이드가 오픈소스라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을 겁니다. 살펴보겠지만 기존 라이선스 계약에 제한을 둔다면 안드로이드는 오픈소스라는 이미지에 타격이 될 겁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진영에 계약서의 대가 윌슨과 케이가 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원천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리네.
“윌슨,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빠져나간 구멍을 이미 알고 있나 보네요?”
“자세한 것은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예상은 됩니다. 혹시 마우스 소송 또는 제록스 소송이라고 이름 붙었던 재판을 아십니까?”
“어? 그거 MS 윈도우 재판 아닙니까? 잡스, 아니 애플이 크게 뒤통수 한 방 맞았던 소송이잖아요.”
“그 재판이 안드로이드의 애플리케이션 라이선스 전략과 일맥상통합니다. 만기일을 적지 않은 개발용 라이선스를 한번 주면 로열티는 해당 프로젝트에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재생성된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로열티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게 판례입니다. 애플리케이션은 당연히 그 판례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
“으흠, 애플이 자신들이 당했던 일을 고스란히 알려 준 것이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걸 드러내면 더 많은 이들이 탈출하겠네요.”
“솔직히 그리 보입니다.”
이제야 알겠다. 그래서 원래 역사에서 구글이 앱 제작 업체가 아니라 안드로이드 메이커에 기기당 로열티 75센트를 받는 걸로 퉁쳤구나.
“안 되겠네. 재훈아, 이번 일은 그냥 역으로 엎어. 애플 고객들도 안드로이드 앱이 주는 자유를 맛볼 수 있어 기쁘다고 발표해. 그리고 신의를 지킨 앱 개발사들에만 태블릿 PC용 라이선스를 주자고.”
“배신 때린 앱 업체는 응징하지 말라는 거야?”
“우리가 응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야. 라이선스 전략을 좀 바꿔서 모바일 메이커들에 파이오니어 앱 스토어 라이선스를 팔자. 대당 75센트 정도로.”
“파이오니어 앱 스토어? 아! 접속 권한!”
“오, 그런 멋진 전략이! 파이오니어에 접속을 해야 보안 앱을 깔든 뭐든 할 테니까요.”
윌슨이 박수를 친다.
“파이오니어 앱 스토어가 해킹당할 일은 없지?”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지.”
“그럼 OS 프레임은 아예 인터넷에 공개해 버리고, 이메일, 맵 정보, 뮤직 플레이어 같은 개발용 라이브러리는 B2B 사이트를 따로 만들어서 올려 버려. 이리저리 따질 것 없이 신의를 저버린 업체는 접속 못 하게 막아 버리면 딱히 소송 따윌 할 필요도 없지. 기존 업체는 필요한 라이브러리를 알아서 유료로 사 가면 되고, 매번 버전 업별로 계약을 갱신할 필요도 없으니 서로 편하고.”
“코호! 너 천재구나!”
난 천재가 아니고 기억력이 좀 좋을 뿐이다. 원래 구글이 이런 식으로 매 분기별로 1억 불 이상의 순익을 올렸다. 솔직히 미디어 사업이나 주식 놀음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앱 시장은 이 정도로 처리해도 무방하다. 결국 목적은 안드로이드 OS의 시장을 폭발시켜 디지털 광고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구글 매출의 80% 이상이 유튜브 광고 수익이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20년 마일스톤을 잘 보면 안드로이드 사업이 나아갈 바를 알 수 있지만, 아직 재훈이는 안드로이드 OS의 미래가 광고 수익이라는 사실은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다. 하긴, 월가에서 잘나갔던 윌슨조차 모르고 있으니 당연한가 싶기도 하다.
“재훈아, 파이오니어 CEO라면 안드로이드 사업의 실체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냐?”
“앱 사업은 수억 불짜리, 크게 키워 봐야 수십억 불짜리 사업이잖아. 그걸로 회사를 더 키우기는 힘들지. 맥도날드 CEO가 그랬다잖아. 맥도날드는 햄버거 사업이 아니라 부동산 사업이라고.”
“맥도날드가… 부동산 업체라고?”
“매출 비중을 따지면 나름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해. 파이오니어도 그런 식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는 거지. 이건 친구로서가 아니라 그룹 회장으로서 자회사 사장에게 하는 조언이야. 기분 나빠도 할 수 없어.”
“기분 나쁘지는 않는데… 일단,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겠어. 고민해 볼게. 프로그램 사업의 이면을 말이야.”
재훈이의 좋은 점이 이것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호의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국으로 유학 가란다고 정말 가는 친구가 어디 흔한가? 잘나가는 파이오니어 주식을 팔라고 했을 때도 하룻밤 만에 설득이 가능했다.
소중한 친구이긴 하지만, 재훈이가 안드로이드의 미래를 조만간 깨닫지 못한다면 유튜브 사업은 다른 이를 내세워서라도 내가 선점해야 할 것이다. 잡스가 픽사와 유니버설 픽처스를 합병했다니,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원래 역사에선 내년에 유튜브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미 실리콘밸리에서는 얘기가 나오고 있을 터, 이번 역사에서 잡스의 눈에 띄면 바로 발탁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
재훈이를 돌려보내고 나는 바로 연구소로 향했다. 워즈니악이 열정을 퍼붓고 있는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이때쯤 나에게 먼저 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올해 쇼케이스도 이제 석 달 남짓 남았을 뿐인지라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내가 미래에서 보고 온 마지막 작품이나 다름없지 않나. 롤러블 OLED라는 첨단 디스플레이도 있고, 하이브리드 자동차도 있지만 그건 내 비즈니스가 아니다.
웅성웅성.
“블루투스 기능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오. 키보드도 예외가 될 수 없소이다.”
“태블릿 PC 전략 자체가 키보드를 없애는 건데, 굳이 블루투스 키보드를 액세서리로 만들어야 합니까?”
“유저의 자유도는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지 않소. 할 수 있는 한 액세서리의 호환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 또한 꼭 해야 하하오. 우린 애플처럼 독단적이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태블릿 사이즈는 꼭 결정해야 합니다. 9.5인치와 7.5인치 중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만큼은 참으로 어렵군요.”
우연찮게 워즈니악과 김 부사장이 같이 있다. 엔지니어 십수 명이 같이 탁자를 빙 둘러 싸고 대화를 나누고 있어 내가 LAB 안으로 들어서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자유로운 토론을 좋아하는 워즈니악의 성격상 LAB은 온갖 물건들로 가득하다. 모여 있는 탁자 말고도 다양한 부품을 차례대로 늘어놓은 탁자가 대여섯 개는 족히 되어 보인다.
“이야, 사이즈만 결정하면 되는 단계입니까?”
“허, 회장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요. 오… 근사한 시제품이 두 가지나 있군요.”
“부품과 액세서리는 모두 신뢰성 검증 직전까지 왔습니다. 이제 최종 품질 검증을 하려면 출시 제품을 정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군요.”
IT 제품의 신뢰성 검증은 매우 힘든 일이다. 대략 3년이라는 교체 주기가 있긴 하지만 더러는 오래 쓰는 사람도 있기에 5~6년까지는 문제가 없도록 신뢰성을 확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검증 시간이 필요하다. 가혹한 환경에 노출시키고 기계로 물리적 충격을 지속적으로 가하는 방식으로 가속 검증을 한다고는 하지만 신뢰성 검증 시간만 꼬박 두 달 이상 걸린다.
한번 삐끗하면 제품을 재검증해야 하기에 출시일이 석 달밖에 안 남은 시점에 엔지니어들은 초긴장 상태다. 신제품 두 가지를 모두 출시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백발백중 초짜 엔지니어다.
“상품 기획에 참여한 영업 쪽 의견을 따르지 그래요? 고객 성향을 분석했을 거 아닙니까?”
“제품 기능에 대해서는 영업 의견을 모두 수용했습니다. 그런데 도통 사이즈에 대해서는 영업도 결정을 못 하더군요. 크면 클수록 좋은 건 데스크톱 모니터이고, 태블릿은 들고 다녀야 하는 것이라 적정 사이즈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내가 결정해 주죠. 7.5인치로 하세요.”
“…….”
내가 불쑥 결정을 내리자 워즈니악이 깜짝 놀란다. 내심 10.5인치를 출시하려고 했나 보다. 그건 너무 크다. 워즈니악은 들고 다닐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크면 클수록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겠지만, 태블릿은 업무용이라기보단 장난감에 가깝다. 누군가 옆에서 내가 뭘 보고 있는지 힐끗 쳐다보는 게 부담스럽다는 뜻이다.
“한 손에 들고 책처럼 다루기엔 7.5인치가 적당합니다. 이름도 ‘K-Book’이라고 지었다면서요?”
“역시 회장님이시라면 7.5인치를 채택하실 줄 알았습니다.”
옆에서 김 부사장이 한껏 웃어 댄다. 그의 의견을 채택한 게 아니라 나는 7.5인치 태블릿이 더 잘 팔린다는 미래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 보면 김 부사장은 노트 K도 발굴하고 태블릿 사이즈도 제대로 짚어 냈고, 확실히 무슨 제품을 출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감각이 탁월하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 모바일 사업부장이 PC 사업부 LAB에 있는 겁니까?”
난 김 부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K북은 노트 K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잖습니까? 액세서리 전략과 두 제품 간 차별화를 협의하려고 왔습니다.”
김 부사장이 매번 걸음을 해 줬나 보다. 하긴 어설프게 제품이 출시되면 노트 K를 화면만 키워서 내놓았다는 혹평을 들을 게 뻔하다. 그러면 노트 K 매출도 박살 나지. 역시 김 부사장은 생각이 깊다.
“내가 적당한 때에 온 것 같군요. 양쪽 사업부가 협업을 했다면 기능은 문제없을 거고, 온 김에 VOD나 한번 봅시다. 기본 스피커로 말입니다.”
“이거 의도치 않게 시제품 발표회가 되어 버렸군요.”
“자신 없으신가요, 워즈니악?”
“오우, 그럴 리가요. K북의 진가를 보여 줄 영상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 기대됩니다.”
K북의 미디어 폴더를 열더니 대번에 동영상 하나를 틀었다. 정말이지 동영상을 잘 골랐다. 색감, 색 번짐, 음향, GPU 속도 등등 모든 것을 시험하기에 아주 적당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영화였으니까.
“‘니모를 찾아서’라는 영화입니다.”
“하하, 저도 알아요. 작년에 대히트한 픽사 작품 아닙니까.”
“잡스의 ‘토이 스토리’ 못지않은 명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픽사 영화는 정말이지 우리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 주지 않습니까?”
“동의해요.”
“이것뿐이 아닙니다. 더 설명을 드리면….”
그 뒤로 e-book 읽어 주기 기능, 무선 이어폰을 이용한 전화 통화 등등 온갖 기능이 시연되었지만 나는 ‘니모를 찾아서’라는 영화의 첫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콘텐츠 사업을 더 이상 미루기엔 잡스의 잠재력이 너무 신경이 쓰였다. 태블릿이 이 정도까지 완성된 걸 보니 마음이 더 급해진다.
“안 되겠다. 유튜브를 시작해야겠다.”
“예에?”
“아, 혼잣말이에요.”
일단 내가 시작해야겠다. 적당한 사람을 찾는 것은 나중 일이다.
- *
“드디어 쇼케이스 계절이 돌아왔군요. 1년이 얼마나 빠른지.”
“그래도 11월에 하는 게 어딥니까? 1월에 했다손 쳐 보세요. 연말 송년회를 계속 저당 잡힐 것 아닙니까.”
“하하,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올해도 예전처럼 내가 첫날 인트로만 하고, 스마트폰과 노트 K3는 김 부사장님이, 쿼드코어 AP를 포함한 반도체 쪽은 오 사장님이, 태블릿 PC는 워즈니악 상무님이 맡아 주십시오. 아, 핸드 터미널과 디지털 카메라는 서브타이틀로 묶어서 송 상무에게 맡기도록 합시다.”
“회장님, 올해도 참석하시나요? 사모님 곁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하,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집사람이 워낙 건강한 데다 곁에 봐 주는 사람도 많으니까.”
케이는 양가 모두에 여왕님처럼 대접을 받고 있기에 걱정할 게 별로 없다. 하루 종일 미래의 할머니들과 아이를 어찌 키워야 할까 하는 주제를 두고 수다를 떨기에 바쁘다. 아마 이번 주는 대학 생활까지 이야기가 진전이 되었을 거다. 곁에서 듣고 있자면 나는 저런 기대를 안고 태어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다행입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쇼케이스 일정을 짜서 주최 측에 공지하겠습니다.”
쇼케이스의 주관사 역할을 했던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자리를 물러나서 올해부터는 원래 역사대로 미국 소비자기술협회에서 행사를 주관하기로 했다.
조금 웃긴 건 소비자가전전시회(Consumer Electronics Show)라는 의미로 CES라 불렸던 전자제품 전시회가 ‘Chicago Electronics Showcase’의 약자로 CES라 불린다는 거다. 내가 알고 있던 일들이 나비효과와 뭉뚱그려져서 세계 전자제품박람회가 시카고에서 열리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언제부턴가 매 사건을 인생 1회 차와 비교하는 것도 그만둬 버렸다.
“파이오니어에선 아직 발표 안건을 안 가지고 왔나요?”
“예, 아직입니다. 안드로이드 OS 업그레이드 계획과 애플리케이션 풀 확대는 당연한데 그것 말고도 뭔가 다른 것을 기획하나 봅니다.”
내가 파이오니어의 미래를 생각해 보라고 했더니 재훈이가 생각이 깊어졌나 보다. 재훈이답지 않게 소식이 늦다.
“타사 정보는 좀 어떻습니까?”
“일단 윈도우폰은 부스 자체가 확 줄어든 모양새입니다. 빌 게이츠 회장이 연사로 나오긴 하는데 은퇴는 이미 기정사실이라 기조연설 정도를 할 것 같고, 노키아에서 TSMC 듀얼코어로 보급형 스마트폰을 출시하는 것과 소니에서 2천만 화소짜리 카메라폰을 출시하는 정도입니다. 애플의 정보는 딱히 입수된 것이 없습니다.”
역시 애플은 정보 관리를 잘한다. 발표 일주일 전에 은근슬쩍 흘릴 것이 분명하다.
“중국 업체들은 어떻습니까?”
“중국 업체도 대거 참석합니다. 안드로이드 모바일 업체가 자그마치 여섯 곳이나 됩니다. HTC를 제외하곤 기술 세미나를 통해 OEM을 따낼 생각인가 봅니다. 저희가 완벽히 커버 못 하는 중국 내수, 동남아, 중남미 등 저가 시장을 공략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입니다.”
“OEM까지 우리가 다 먹을 순 없으니 할 수 없군요.”
“파이오니어의 안드로이드 라이선스를 모니터링 하면 저희가 들어가야 할 타이밍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업 쪽에서 추이를 살펴 차후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리 해 주세요. 여하튼 전반적으로 올해 쇼케이스에선 딱히 우리 라인업을 위협할 것은 없어 보이는군요.”
“예. 태블릿 PC가 공개되는 즉시 쇼케이스의 주인공은 스마트 클라우드가 될 겁니다.”
“자신만만하군요.”
“모바일 쪽이 아니라 디지털 TV 쪽 승부가 박빙일 것 같습니다. LK, 신성, 소니, 파나소닉 등 유명 TV업체들이 저마다 100인치 이상 되는 TV를 선보인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PDP와 LCD TV중 어느 것이 시장을 석권할지 큰 관심사입니다.”
권 부사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확실히 지금이 2004년이 맞긴 하다. 오래된 TV의 대명사인 PDP TV를 아직 LCD TV의 대항마로 보다니 말이다.
신성은 스마트 클라우드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아예 사업 방향을 틀어 버렸다. AP 사업은 완전히 접어 버리고 메모리에 올인하면서, 미래 전략을 디스플레이와 가전 쪽으로 잡은 꼴이다. 나보단 LK와 경쟁하는 것이 한결 쉽다고 여기나 보다.
“재미있군요. 그럼 오늘은 이쯤 할까요?”
“예. 발표 초안은 내일모레쯤 보고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실적도 될 수 있으면 같이 주세요. 발표 때 은근슬쩍 알려 줘야 하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쇼케이스는 광고의 목적도 있지만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역할도 병행하고 있다. 신제품 발표에다 탄탄한 흑자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메시지가 함께하며 투자자들에겐 아주 멋진 쇼가 되는 거다. 물론 우리 직원들은 또 특별 보너스가 지급될 것을 확신하며 환호성을 지르겠지.
태블릿 PC가 시장에 나오는 내년쯤엔 스마트 클라우드의 브랜드 가치가 세계 10위권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이미 매출 실적은 애플과 인텔을 가볍게 눌러 버리지 않았나. 가슴속에서 뿌듯함이 차오른다. 이런 뿌듯함은 나에게 특별 보너스 같은 것이다.
권 부사장도 사무실을 나갔으니, 혼자 자축할 겸 코냑을 한 잔… 아니다. 일단 재훈이부터 만나 봐야겠다. 녀석 같은 모범생이 아직 발표 안건도 결정하지 못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지 않나.
- *
스르릉. 삑삑!
“협조 감사합니다, 회장님.”
“사장실 위치 그대로죠?”
“예, 8층 좌측 방향입니다.”
“고마워요.”
오랜만에 파이오니어 본사에 들렀더니 빌딩 입구가 매우 세련되게 바뀌었다. 소프트웨어 회사라 USB 같은 저장 매체를 탐지하기 위해서인지 보안 게이트를 삼중으로 만들어 놨다. 스마트폰과 시계까지 풀고서도 탐지봉으로 검색을 한다. 역시 보안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회사답다.
똑. 똑.
“들어오세요.”
“바쁘냐?”
“에? 네가 웬일이냐? 친히 여기까지 납시다니.”
“박카스 한 잔 하러 왔다.”
나는 박카스 병을 흔들어 보이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보안 게이트에서 삑삑 소리가 나게 했던 주범이다.
“박카스 좋지. 던져.”
휙. 끼리릭.
박카스 병을 던지자 단박에 뚜껑을 따서 입에 털어 넣는 재훈이다. 직접 와서 보니 고민하는 표정이 아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녀석이 피식 웃어 버린다.
“왜 그렇게 보냐? 네가 준 수수께끼 푸느라 막 괴로워하고 있을 줄 알았어?”
내가 생각해 보라고 한 걸 수수께끼라고 표현한다. 재훈이다운 표현이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벌써 풀었다는 게 신기해서. 좀 오래 걸릴 줄 알았더니.”
“어, 내가 푼 걸 어찌 알았냐?”
“표정 보고 알았지. 지금 네 표정은 내가 못 푼 수학올림피아드 문제 풀었을 때 짓는 표정이잖아.”
“하하하하.”
“어떻게 풀었어. 털어놔 봐. 파이오니어의 미래가 뭐더냐?”
나는 재훈이의 입에서 ‘미디어 사업’이라는 단어가 나오길 기대하며 물었다. 나는 최근 한두 달 새 비서실을 움직여 VOD 스트리밍 기술을 가지고 있는 벤처란 벤처는 모두 사들이는 중이다.
재훈이가 그걸 맡아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는 하드웨어로 귀족이 되고, 내 친구는 소프트웨어로 귀족이 되고 말이다. 나는 내 친구를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다. 솔직히 너무 덩치가 큰일이며 내 전문 분야도 아니니까.
“0.5 버전 정도는 보여 주려고 작업 중이었는데 할 수 없이 말로 해야겠네.”
“벌써 작업을 시작했어?”
“응. 내가 철학자는 아니지만 파이오니어의 핵심 사업이 뭔지 파악을 하니까 답이 나오더라.”
“궁금해 죽겠다. 그래서 핵심 사업이 뭐라고 판명이 났어? 맥도날드처럼 부동산업은 아닐 테고.”
“힌트가 되긴 했어. 우리 사업의 키워드는 부동산 중개업자의 그것과 비슷하니까.”
“으흠?”
“파이오니어의 키워드는 ‘안전한 소통’이야. 앱 라이선스도 그렇고, 전자 결제도 그렇고 심지어 검색 엔진에서 성인용 콘텐츠를 걸러 내는 것까지도 마찬가지야. 일방향 소통이 아닌 다수 대 다수의 소통이지. 파이오니어의 미래 비즈니스 모델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이미 형성된 소통 시장에 플랫폼만 끼워 넣으면 된다고.”
뭐라는 거야? 미디어나 광고 얘기가 나올 줄 알았더니 SNS 얘기를 하고 있다. 하긴 벌써 깨톡이 있으니 재훈이 입장에서는 SNS를 상상하는 게 더 쉬웠을 수 있겠다.
“깨톡 같은 메신저 비즈니스를 말하는 거냐?”
“아, 깨톡? 그건 매우 협소한 네트워킹이지. 전 세계적인 광고를 넣기엔 부족하지. 파이오니어의 그린보드는 다수 대 다수의 네트워킹이야.”
“그린보드? 벌써 이름도 지었어?”
“응. 우리 안드로이드 마스코트가 그린보이잖아. 알림판은 당연히 그린보드지.”
“하하하!”
“웃었지? 두고 봐. 몇 년만 지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린보드로 서로 소통할 테니까.”
“비웃는 게 아니야. 감탄하는 거지. 정말 멋진 사업이 될 거야.”
“이야, 인정하는 거야? 좋아!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작업을 보여 주지. 며칠만 더 밤샘하면 쇼케이스에서 오픈할 수도 있을 거야.”
“오오!”
재훈이는 나를 직접 개발자용 컴퓨터 앞에 데려가서 데모를 보여 주었다. 원래 역사의 페이스북을 미리 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진 앨범, 전자 결제, 파일 공유까지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재훈이의 설명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카테고리 중 카메라 아이콘을 클릭하니 컴퓨터에 동영상이 주르륵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이스북을 보고 있다고 여겼는데, 유튜브 화면까지 펼쳐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 바둑판같이 펼쳐진 동영상의 대부분이 재훈이가 찍은 셀프 동영상이었으니까.
“이게 그린보드의 핵심이다. 감성적인 이들이야 사진을 찍고 글도 쓰고 하겠지만, 나 같은 공돌이는 그냥 동영상에 말을 하면서 그린보드에 올려놓을 것 같아.”
“셀프 동영상이네. 이걸 어떻게 생각해 낸 거냐?”
“네가 작년에 발표한 화상 통화를 보고 생각해 냈지. 스마트폰을 캠코더로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그래서 난 생각했지. 만약 사람들이 동영상을 찍으면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기엔 메모리 때문에 고민이 될 거 아니야. 그럼 당연히 컴퓨터에 저장해 둘 테지. 그런데 내 컴퓨터에 저장해 두면 남에게 자랑하기 불편하잖아. 동영상이나 사진은 결국 자랑하려고 찍는 건데 말이지. 그렇다면 결국 여기 그린보드처럼 안전한 저장소가 필요하다 이거지!”
“UCC 서버랑 비슷하구나.”
“하하, 그래. 그리 볼 수도 있는데 내가 중개업자가 되면 이 모든 게 돈이 될 수 있다는 거지.”
“광고 끼워 넣기?”
“오! 역시 넌 내 친구야. 설명할 필요도 없네.”
“당연히 유저의 성향대로 동영상 검색 순위를 조정해 줄 거고.”
“당연! 천재셔!”
“광고비용의 일부를 동영상 제작자에게 돌려주면서 사업을 키울 거고!”
“맞아! 그게 핵심이야. 그린보드는 개인 프로필과 연계되어 있기에 UCC에서 문제가 되었던 불법 동영상이나 혐오물이 올라올 가능성이 매우 적어. 게다가 양질의 개인 동영상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자정작용이 일어날 거야.”
“오오오!”
나는 재훈이의 감각에 감탄했다. 자연스레 그린보드의 프로필과 연계해서 동영상의 출처를 명확히 하는 거다. 설령 제작 동영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확실히 자정 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이 플랫폼은 파이오니어의 미래야. 사진, 그림, 글, 심지어 동영상까지 모든 창의적 행동이 돈이 된다는 확신을 심어 주겠어. 네가 기획하고 있는 데이터 센터의 최대 소비자는 통신사가 아니라 파이오니어가 될 것 같다.”
“축하해. 축하한다, 친구야.”
“하하하.”
나는 벌써부터 축하를 해 줬다. 숙제를 냈더니 100점짜리가 아니라 200점짜리 해답지를 가져왔다. 내가 엄청 신나 하니 재훈이는 외려 당황스럽게 웃었다. 내가 너무 확신하니까 그러겠지만, 솔직히 이것보다 더 나은 플랫폼은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는 없다.
메신저는 당연하고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합친 플랫폼인데 그 누가 감당하겠나? 내가 SNS를 먼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진입 장벽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튜브는 다르지. 고만고만한 데이터 센터로는 시작하기조차 힘든 데다 처음부터 천문학적인 광고비가 오가는 비즈니스이지 않나. 벤처가 나서기엔 엄두가 나지 않는 사업이다.
“다른 건 네 하고 싶은 대로 해. 데이터 센터도 지어 달라는 대로 지어 주마. 대신 이 사업 이름만 좀 바꾸자.”
“으잉?”
“그린보드는 너무 정적이야. 동영상도 포함하는 사업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아. 스마트튜브라고 하자.”
“스마트튜브? 스마트튜브? 어, 좋은데? 입에 착착 붙네.”
“완벽하게 출시하려고 하지 말고 데모 버전도 좋으니까 이번 쇼케이스에 출품하자.”
“동영상까진 아직 멀었는데. 이거 1.0도 안 되는 0.5버전이야.”
“안 돼. 무조건 이번 쇼케이스에 출품해야 해.”
내년이면 유튜브 콘셉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괜히 아이디어 도용이니 뭐니 하는 소릴 들어서 좋을 게 없다.
“회장 친구가 시키니까 하긴 해야겠네.”
“꼭 해. 올해 쇼케이스의 최대 화제는 태블릿 PC와 스마트튜브가 될 거야.”
“이야, 내 작품을 태블릿과 동격으로 생각해 주는 거냐?”
“태블릿 PC로 내 사업이 만개한다면, 네 사업은 스마트튜브로 만개할 거야.”
“오… 그 정도까지?”
눈이 동그래지는 재훈이를 나는 와락 안아 주었다. 자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솔직히 유튜브, 아니 스마트튜브의 사장으로 누굴 데려와야 하나 엄청 고민했는데 말이다.
“자, 자! 어서 작업해라. 그리고 광고주 걱정은 하지 마라. 내가 동영상 제작자들에게 줄 광고비는 현금으로 2조 풀 테니까.”
“허헉!”
“유명 뮤직비디오란 뮤직 비디오는 판권을 싹쓸이해 오마. 메인 화면에 뿌려 버려. 대신 음원이 유출되면 안 된다.”
“허허헉.”
나는 스마트튜브의 사장이 정해졌기에 숙제를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재훈이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일이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다면 집에 가서 케이의 무릎에 누워서 뒹굴거려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