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한 걸음 더(2) (101/104)

“절 마중 나오신 건가요?”

“이례적으로 1월 2일에 전략 회의를 하시다니, 뭔가 중대 결정을 하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눈치가 그다지 빠르지 않은 오 사장마저 중대 결정이라는 단어를 쓴다. 하긴, 오늘 전략 회의에 스마트 클라우드의 핵심 인원을 모두 소집했으니 이례적이긴 하지.

“날씨가 춥네요. 올라가시죠. 올해 감기는 아주 독하다고 합니다.”

“올라가시죠.”

오 사장을 지나쳐 앞장서니 윌슨이 척 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얼마나 모였나요?”

“핵심 인재라 판단되는 이들을 모두 모았더니 50명쯤 됩니다. 회사의 미래 전략 토론회임을 알려 줬으며, 보안 이슈는 없도록 차후 모니터링하겠습니다.”

“윌슨도 참석하세요.”

“예.”

    • *

웅성. 웅성.

뚝.

내가 대회의장으로 들어서니 웅성거리던 소리가 뚝 끊어졌다. 원래는 대회의실과 그 옆에 비서실이 붙어 있었는데 벽을 뚫어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 즉흥적인 공사였지만 무대가 있는 컨벤션 홀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나름 괜찮아 보였다.

짝짝짝.

별다른 멘트도 없이 내가 단상에 오르자 사람들이 얼떨결에 박수를 치는 격이었다. 자신들이 왜 여기 있나 하고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전략 회의에 참석하라고 해서 왔는데 토론할 자료도 없고, 모인 이들이 다들 최상위 고과자인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참여하고… 뭔가 아리송한 분위기일 것이다.

“다들 새해 소망은 비셨나요? 아니면, 너무 바빠 업무 외에는 생각할 틈도 없으신가요?”

“하하하하.”

“올해로 스마트 클라우드가 설립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그 10년 동안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세 번 이상 성공했고, 소그룹 파트장으로 동료들에게 두루 신임을 받았으며, 관련 부서의 평가도 평균 이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휴가는 꼭 챙겼던 분들입니다. 한마디로 일할 땐 일하고, 쉴 때 쉬는 분들이죠. 그런 분들만 모았습니다.”

“…….”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정말 그런 사람들만 모였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정된 프로젝트를 기한보다 빨리 끝내 버리고 보상 휴가를 떠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 모두 있었다. 심지어 휴가 보장은 스마트 클라우드의 사규라며 상사와 싸워 팀을 옮긴 사람도 몇몇 있을 정도였다.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도 스마트 클라우드의 개발 문화를 잘 이해하며 사랑하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스마트 클라우드 리더의 모습에 근접하신 겁니다.”

“회장님, 저희 특진하는 겁니까?”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한다. 이런 분위기에 주눅 들지 않고 자기 할 말부터 하다니 역시 특출한 사람이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문화는 차별적 문화, 자기 것을 잘 챙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물에서 숭늉 찾으면 안 되죠. 하지만 이 시험을 통과하면 합당한 보상은 있을 겁니다. 전근대적인 충성 시험 따위는 아니고, 우리의 미래를 같이 그려 보는 데 머리를 보태 주세요. 자료는 따로 필요 없습니다. 여기 이 서버엔 우리 그룹의 모든 데이터가 들어오며, 말만 하면 여기 비서진이 화면으로 띄워 줄 겁니다. 이제 자유 토론을 해 볼까요?”

“총괄 영업에서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권 부사장님.”

자유 토론만큼 어려운 회의가 없는데, 권 부사장이 먼저 나서 준다. 역시 차기 사장감이다.

“비서실장님, 2004년 매출 예상 자료가 있을 겁니다. 그걸 띄워 주십시오.”

“잠시만요.”

파이오니어의 검색 기능은 회사 기밀 서버에서도 작동을 잘한다. 매출 예상 자료라고 하니 몇 개의 자료가 검색되었고 그중 하나를 권 부사장이 선택했다. 발표 자료는 아니지만 깔끔하게 테이블로 정리된 자료였다.

“올해 스마트폰과 노트 K의 매출 목표는 650억 불로서 작년 420억 불 대비 54% 상향했습니다. 북미는 물론 유럽 시장에 드디어 스마트폰이 안착하는 시그널이 보이고 있으며….”

권 부사장이 자료를 설명했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럴 때는 내가 끊어 주는 것이 좋겠다.

짝.

“감사합니다. 첫 테이프를 끊어 주셨네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모인 토론회의 안건이라기보다는 기본 자료라고 해야겠네요. 오늘은 이런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리의 미래를 예측해 보고 우리가 갈 길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저도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개발팀 한성욱 책임입니다.”

“물론입니다.”

오늘 모인 이들의 성향은 자유분방함과 추진력이 기본이다. 뒤에 앉아 불평만 해 대는 사람은 없었다.

“핸드 터미널 역대 매출 추이를 띄워 주세요. 그리고 파이오니어 매출 추이도 있나요?”

“문제없습니다. 잠시만요.”

윌슨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췄고, 다른 비서들도 비슷했다. 각종 자료가 대화면에 수십 개씩 올라왔다. 한 책임이 몇 개의 자료를 선택해 화면 이곳저곳에 배치를 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핸드 터미널은 오늘의 스마트 클라우드가 있게 한 효자 상품이죠. 개발, 매출 폭발, 업그레이드, 그리고 이제는 RIM사에 사업을 넘기며 부품을 팔고 있죠. 관련 매출 추이는 y는 루트 x 그래프를 닮았습니다. 아쉽지만 이제 성장세가 많이 둔화된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스마트폰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회장님?”

“스마트폰은 조금 다를 거 같군요. 10년은 족히 성장할 겁니다. 포화 상태로 접어들어도 매년 2~3%는 성장할 것 같군요. 내 예상입니다.”

“오오오.”

내 대답에 사방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내 예견은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으니까.

“특별 보너스가 10년은 확정이라, 좋은데요? 여하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기 파이오니어 매출은 그런 형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매출이라고 해 봐야 현재 40억 불 정도에 불과하지만 루트 x 그래프가 아니라 x제곱 그래프죠. 게다가 이것과 비슷한 그래프를 가진 사업이 또 있습니다. 다름 아닌 서버 사업이죠. 반도체 매출에 합산되어 있어 개별 매출 집계가 어렵지만, 이 또한 성장세가 가파릅니다. 저는 회장님께서 어째서 소프트웨어 사업을 등한시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재훈이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왜 내가 직접 파이오니어를 경영하지 않고 재훈이에게 맡기냐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좋은 시각이에요. 하지만 소프트웨어 사업은 MS라는 괴물이 존재하기에 기술적 차별성 없이는 섣불리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파이오니어가 있지 않습니까?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시장은 이런 추세라면 연간 100억 불 매출은 시간문제이며, 반도체와 서버 사업을 이끌고 나가는 원동력이 될 겁니다. 자사의 반도체 매출은 스마트폰 못지않게 크지 않습니까.”

“그 또한 정확한 지적이에요. 하지만 우린 실패 사례를 이미 알고 있어요. 윌슨, 소니의 매출 실적 그래프가 있나요?”

“예, 있습니다.”

윌슨은 즉각 소니의 매출 그래프를 화면에 띄워 줬다. 199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래프다. 2015년쯤 되어야 이미지 센서로 재차 반등하겠지만 말이다.

“저기 급락한 포인트에 대해서 누가 말씀하실 분 있나요?”

“소니가 컬럼비아 픽처스를 인수한 시기입니다. 깔끔하게 말아먹는 중이고요.”

유명한 얘기니까 누군가의 입에서 대뜸 정답이 나왔다.

“다들 아시는 것 같군요. 그럼 소니 픽처스가 죽 쑤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간단하게 소니라는 제조업체가 콘텐츠 사업에 직접 뛰어든 것은 IT 업체로서의 자신의 장점을 버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꿈과 현실을 혼동한 거죠. 아니면 독점욕이 너무 강했거나. 스마트 클라우드는 제조업체예요.”

“회장님, 스마트폰 앱은 다른 얘기가 아닐까요? 콘텐츠가 아니지 않습니까?”

“앱이 지금은 스마트폰의 구동 프로그램 정도이기에 아직 우리 영역에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조만간 앱은 창의성을 팔아먹는 콘텐츠의 범주로 들어갈 겁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점은 그거예요. 앱 자체가 아니라 앱이 생성시킬 새로운 시장. 그 시장에 필요한 플랫폼이 무엇이냐가 관건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보다 신민구 책임이 더 잘 대답해 줄 것 같습니다.”

한 책임이 호명을 하자 신 책임도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온다.

한성욱 책임과 신민구 책임은 서로 아는 사이인가 보다. 하긴 여기 모여 있는 이들은 개인의 성향이 뚜렷한 이들이다. 한 번쯤은 서로 업무를 두고 티격태격 했을 법하다.

“신민구 책임입니다. 회장님 말씀 잘 들었고요. 제가 부탁할 자료는 VOD와 UCC 시장 동향 자료입니다. 찾아 주실 수 있나요?”

“아마 있을 겁니다.”

윌슨이 이번 것을 찾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한참 만에 영어로 작성된 보고서를 띄웠다. 시카고 쇼케이스에서 어느 벤처 사업가가 발표한 동향 자료다.

“다들 스마트폰으로 즐기지만 딱히 돈이 되지 않는 시장이 있습니다. VOD 사업이죠. 파이오니어 매출과 수익률에서 5%도 채 안 됩니다. 하지만 소비 동향은 전혀 반대죠.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폭발적으로 콘텐츠의 소비가 늘고 있습니다. 다양한 취미의 VOD들이 다양한 편집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이 될까요?”

“돈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UCC 서버는 포털 업체에서도 돈은 안 되고 불법 동영상으로 피곤한 일만 발생하거든요.”

“하하, 잘 알고 있네요. 그럼 말하고자 하는 게 뭔가요?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나는 은근슬쩍 유도신문을 해 보았다.

“유저 동영상 시장은 자발적인 확대 재생산이 강점이고, 자발적인 정화 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이 단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답은 뻔하죠. 관리를 스마트 클라우드가 하는 겁니다. 광고비를 지불하는 조건이라면 불법 동영상은 근절할 수 있죠.”

“최종 목적이 뭐죠? 신 책임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나요? VOD 사업 자체는 돈이 안 된다고.”

“우리는 서버를 팔아야죠. 물론 파이오니어는 광고주를 끌어들이고, 불법 동영상 모니터링 시스템을 만들어야죠. 아,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도 팔았으면 합니다.”

신 책임이 농담 같은 진담을 했다. 내게 올렸던 보고서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아주 간단하게 요약했다고 할 것이다.

“신 책임, 파이오니어로 와요. 개발팀 하나 꾸밉시다!”

“죄송합니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연봉이 좋아서.”

“하하하하!”

옆에서 재훈이가 자지러진다.

“모바일향으로 양 방향 서버를 개발 중입니다. 한 번 채용해 볼 만할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 시장을 보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군가 의견을 낸다. 아마 서버 개발자가 아닌가 싶다.

“스마트폰과 서버만으로 플랫폼을 완성시킬 수는 없어 보입니다. 좀 더 큰 화면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 책임, TV 말인가요?”

“아뇨, 구 책임. 누가 인터넷을 TV로 보겠어요?”

“그럼 일전에 말한 작은 노트북을 말하는 겁니까?”

“키보드가 없으니 노트북도 아니고,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모바일 컴퓨터, 키보드리스 컴퓨터? 그 정도의 이름이 적합하지 않을까요?”

드디어 토론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의견이 오가고 있다. 유튜브의 초기 아이디어와 더불어 태블릿 얘기까지 나오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유튜브는 내년에 세상에 나오고,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재조명을 받기 시작하는데 이번 생에서는 선후가 바뀌었다. 1~2년 정도는 적자를 보겠지만 스마트 클라우드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 두 책임님들, 무대로 올라가서 발표해 주세요. 다들 설명을 들어 봤으면 하네요.”

대리를 갓 벗어난 것 같은 두 책임연구원이 무대로 올라섰다. 대뜸 윌슨에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영화를 다운로드받아 달라고 하더니 마구 스캔을 해 댔다. 1968년에 만들어진 영화라 디지털 복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질이 엉망이다.

“아! 거기 멈춰 주세요.”

“오오오!”

다들 구 책임이 가리킨 곳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노트 K를 키운 듯한 물건을 가지고 책을 보고 다른 이들과 영상통화를 하는 장면이었다. 1968년에야 SF 영화에 등장하는 물건이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저리 만들기만 하면 되겠네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정도 사이즈는 돼야 스타크래프트 결승전을 보는 맛이 있지 않을까요? 소파에 누워서 말입니다.”

“스타뿐인가요? 해외여행을 가서 풀장에서 영화도 보고 밀린 드라마도 볼 수 있죠.”

“베젤(Bezel: 가장자리) 줄일 생각이나 해 봐요. 목업 디자인이 엉망이던데.”

“개발팀 디자인 룰이 개판이라서 그렇죠. 내가 그래서 때려치웠잖아요. 쪽팔려서 조너슨 팀장님께 말씀도 못 드렸다니까.”

“하하하!”

윌슨이 뭐라고 검색을 했는지 몰라도 화면에 목업 샘플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시커먼 테두리가 3센티는 될 법한 태블릿이다. 조너슨에게 보여 줬더라면 당연히 퇴짜를 맞았을 디자인이다. 개발자들도 다들 같은 생각인지 마구 웃어 댔다. 아직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감을 못 잡고 있는 거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이거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컴퓨터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주 참신한 디바이스예요.”

알아보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워즈니악이 눈이 동그래져서 서둘러 무대 위로 올라왔다.

“오! 회장님, 저거 대박인데요?”

“그쵸? 권 부사장님, 제가 원한 게 이런 토론회였거든요. 끝장 토론을 해 봅시다. 우리 스마트 클라우드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말입니다.”

워즈니악과 더불어 권 부사장 또한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개발자보다는 영업 쪽이 소비자의 반응 예측에 대해서는 촉이 좋다. 정작 개발자들은 자신들이 뭘 고안했는지 파급력을 따지는 데 서툴다.

“이참에 그룹 전체의 마케팅 전략도 논했으면 합니다.”

“그래야죠. 설마 스포츠 마케팅을 하자는 말은 아니겠죠?”

“으, 그게….”

워즈니악은 태블릿에 빠져 토론을 이어 갔고, 내 옆의 권 부사장도 마케팅에 대해 하고픈 말이 산더미인 것 같다. 이 토론회는 하루 이틀 만에 끝나지 않으리라.

    • *

토론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일단 퇴근하고 내일 다시 보자고 했더니 다들 너무 할 얘기가 많다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밤 11시가 넘었다. 유튜브와 태블릿 PC가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어떻게 이름을 달고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정교한 플랫폼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태껏 태블릿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이처럼 강렬한 이미지를 상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모세의 태블릿을 실제로 봤어도 이런 느낌이 아닐 겁니다.”

영어로는 모세의 십계명을 적은 석판도 태블릿이라 부른다는 것을 워즈니악의 말로 처음 알았다. 여하튼 애플 PC를 세계 최초로 만들고도 유명해지지 못했던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런지, 워즈니악은 태블릿 PC라는 단어를 생각해 내고는 장장 몇 시간 동안 엄청난 열정을 보이며 토론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결국 내일은 파이오니어 엔지니어도 합류시키겠다는 비서실의 말이 떨어지고서야 겨우 오늘의 토론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자, 오늘 토론회는 이쯤 하죠. 밤이 늦었으니 이제는 진짜 퇴근합시다.”

“회장님, 맥주 한잔 사셔야죠. 이대로 헤어지면 너무 아쉽습니다.”

“하하, 그러면 딱 한 잔만 할까요?”

누군가 맥주 얘기를 해서 그러자고 했다. 추운 겨울밤엔 따끈한 소주 한 잔에 어묵탕이 제격이지만 소주로 시작하면 밤을 새울 기세라 맥주 한 잔으로 때워야겠다. 20년짜리 마일스톤을 만드는 데 보너스 일당은 줘야 하지 않겠나.

“비서실에서 구름집을 예약해 두겠습니다. 그쪽으로 가십시오.”

“우와아아! 가시죠!”

비서실에서 누군가 바람을 잡자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꽤나 넓은 곳이지만 하루 종일 있었더니 땀 냄새가 장난 아니다.

「스마트 클라우드 20년 마일스톤」

나는 대회의장을 빠져나오면 한쪽 벽면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글자와 그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누군가 스마트 클라우드의 마일스톤을 그려 보자고 제안했고, 한두 사람이 적기 시작했는데 보통의 화이트보드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결국 한쪽 벽면을 칠판 삼아 온갖 키워드와 아이디어를 그려 냈다.

2~3년 내의 핵심적인 차별화 전략으로는 미디어 플랫폼과 태블릿 PC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모양새다. 그 밑으로는 반도체와 부품, 그리고 장비와 소재 기술에 있어 도전해야 할 과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꼴이다. 토론을 하다가 수정하고 자리를 옮기기를 반복했기에 온갖 화살표와 말풍선이 끼어들어 있지만 내가 볼 땐 여태 봐 왔던 것 중 최고의 전략 보고서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플래시메모리를 이용한 SSD, 고집적 스마트폰향 메모리인 MCP는 물론, 그래픽 DRAM과 GPU 칩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TSV처럼 10년 뒤에나 그 개념이 등장하는 디바이스에 대해서도 나름 표현이 되어 있다. 우리 엔지니어들이 매년 시카고 쇼케이스에 참여하면 온갖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에 따라 정보 수집의 양이 월등하다는 뜻이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회장님.”

나만 마일스톤을 보며 감탄하는 게 아니다. 오 사장도 직원들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했는지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이제야 극찬을 하고 있다.

“우리 회사 엔지니어들이 정말 대단하군요.”

“회장님이 보시는 미래와도 일치하는 건가요?”

“비슷하군요. 아니, 그보다 너 나은 것 같습니다.”

진심이다. 내가 보고 온 미래 대비 빠르게는 5년, 대부분 2년은 앞서는 기술들로 꽉 차 있었으니까.

“모두 회장님이 인력에 투자하신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오 사장님, 그건 듣기에 따라 아첨일 수 있어요. 이 마일스톤은 내 덕분에 나온 게 아니고, 우리 직원들 대다수가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내 말을 믿고 내부 경쟁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갈아 왔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일을 성공시킬 사람에게 줄 보상이에요.”

스마트 클라우드는 완벽하진 않지만 그나마 완벽에 가깝다. 팀원까지 내려가면 차별과 경쟁을 대놓고 말하는 회사 분위기 탓에 온갖 어려움이 있을 거다. 특히 오늘 참석한 중간 리더들이 위아래로 찍히면서도 윤활제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여태 추진한 프로젝트의 절반은 실패했으리라. 회귀를 해도 대한민국에, 그것도 1990년대에 회귀했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말실수를 했습니다.”

“언젠가 부회장님이 되실 분인데, 시험을 잘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오 사장이 내 말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다. 이런 시그널을 주는 게 좋겠다. 회사에서 모든 일의 결과를 리더의 덕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린 초일류가 되어야 하며, 그건 일단 일본 대기업을 본뜬 1990년대 대한민국의 재벌 구조를 탈피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나도 그렇고, 오 사장도 그렇고 미래를 보는 눈이 사라지고 특권 의식이 강해진다면 경영에서 손 떼고 벌어 놓은 돈으로 해외여행이나 다녀야 한다.

“회장님, 마일스톤에 영업 전략이 빠진 게 아쉽습니다.”

권 부사장이 가던 길을 돌아와 대화에 끼었다.

“영업 전략은 내일 첨언을 해 보기로 했잖습니까.”

“아까 하신 말씀이 마음에 걸려서요. 솔직히 영업 총괄에서는 스포츠 마케팅이 절실합니다. 특히 전략적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유럽에서는 축구 클럽 후원만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효과적인 것도 없고 말입니다.”

권 부사장은 정말 미련이 남나 보다. 오늘 토론 주제에서 권 부사장이 나서서 마케팅 전략을 빼 버린 이유가 다름 아니었다. 내가 스포츠 마케팅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기에 나부터 설득하고 나서 토론을 하려 했던 모양이다

“해외 축구 클럽에 투자하는 것은 좀 오버인 것 같습니다. 국가대표 스폰서로 나서거나, 유명 결승전에 스마트폰 CF를 밀어 넣는 것까지는 동의하지만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십니까? 유럽 정상급 축구팀 유니폼에 우리 회사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대중적 인지도 증대, 고급화 전략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 노출 효과는 대단하지요. 해당 유니폼을 구매한 팬들은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이키나 아디다스가 생각할 일이겠지요. 한번 둘러보세요. 애플과 MS의 마케팅 포인트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스포츠 마케팅을 한다고 해도 월드컵이나 올림픽 스폰처럼 이벤트성이에요.”

“애플과 MS는 미국 회사라 축구를 등한시하고 있지만….”

“나이키도 대충 미국 회사죠. 그리고 미국 IT업계는 미국 슈퍼볼에서도 CF만 할 뿐 스폰싱을 하지 않잖아요.”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드릴 말씀이 없군요. 해외도 그렇지만, 국내 스포츠 마케팅도 이슈가 많습니다. 신성이 사세가 기울어 프로 구단을 모두 팔고 있어서 말이지요.”

“으흠, 그래요?”

권 부사장이 이토록 끈질기게 얘기한 이유가 있었다. 결국 스포츠 마케팅이라고 하지만 우리 치킨게임으로 국내 프로 구단이 사라지고 있어, 국내 스포츠팬들에겐 스마트 클라우드의 이미지가 안 좋아지고 있나 보다.

“신성이 야구팀을 제외하곤 올해 모든 프로 구단을 정리한다고 합니다.”

“그런 의도였으면 정확하게 말씀을 하셨어야죠. 우리 임직원을 위해서 이참에 프로 구단도 몇 개 사 버리세요. 일단 프로 리그가 있는 종목이 축구, 배구, 농구죠? 리그가 없는 비인기 종목도 스폰하세요. 유소년팀도 지원하시고 낙후 지역엔 체육관도 지어 주시죠.”

“정말 그래도 됩니까?”

“당연하죠. 국내 프로 구단 지원이야 마케팅이 아니라 사회적 책무에 가깝잖아요. 임직원들 사기 진작도 되니 적극적으로 하세요. 대신 해외 마케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자면 실제로 고객에게 도움이 되는 이벤트를 했으면 합니다. 도난 방지 앱을 무료로 배포한다든지, 해당 국가의 경사가 있으면 이벤트 모델을 출시한다든지 말입니다.”

우리 회사 모토는 임직원이 왕이고, 그담엔 고객이다. 임직원들이 기술 개발로 시장 점유율을 높여 주면 자연스레 브랜드 파워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영업팀 내에서도 왈가왈부하던 의견이 깔끔하게 정리되는군요.”

“더 격하게 브랜드 마케팅을 하고 싶으시면 유럽에선 노키아와 경쟁 구도를 만드시고, 북미에선 애플과 경쟁 구도를 가져가세요. 그게 더 효과적이니까.”

“……!”

“이러다 늦겠습니다. 맥주 한 잔 하면서 마무리하시지요.”

오 사장이 여태 참고 있다가 슬쩍 끼어든다.

“아이고, 얼른 갑시다.”

나는 두 양반과 함께 후다닥 밖으로 향했다. 나 대신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이들인데, 오늘따라 유독 쓴소리를 많이 했다. 서로 도긴개긴이다. 내가 이런 토론회를 마련한 이유도 이들이 쓴소리 가득한 보고서를 내 책상에 올렸기 때문 아닌가.

    • *

「스마트 클라우드 대대적인 조직 혁신 발표, 버지니아 트레이딩과 결별」

「스마트 클라우드 증자. 증권 시장 초대형 호재」

「스마트 클라우드 유럽 진출 가속화, 유럽 현지 법인 동시에 3곳 설립」

「스마트 클라우드, 임원 인사 발표. 역대 최다 인원 임원 승격」

「유수한 회장, 포보스 발표 세계 부자 순위 24위에 등재」

「스마트 클라우드, 시스템 사업 본격 가동. PC 사업부와 서버 사업부 분리」

3월 말이 되자 온갖 매체에서 스마트 클라우드 관련 기사를 떠들어 댔다. 1월에 실시한 토론회의 후속 조치로 워즈니악을 사업부장으로 하는 PC 사업부를 만든 것조차 기사가 되었다. 그 덕에 태블릿 PC 정보가 숨겨지니 고맙긴 하다. 버지니아 트레이딩과 업무 분장을 한 건데 결별했다는 기사를 써서 케이를 서글프게 만들긴 했지만 말이다. 케이는 특히나 결별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읽으며 안타까워했다.

임원으로 승진한 이들도 자신의 이름이 신문 기사에 떴으니 당황했을 것이다. 어느새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임원이 되는 것은 뭇 직장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긴 2004년에 연봉을 2억 가까이 받으면 대박이긴 하지.

여하튼 증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마트 클라우드의 주식이 연속 상한가를 치고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자본금이 탄탄해졌기에 주가가 오르는 건 당연하지만, 연속 상한가라니.

「1/4분기 마이크로 소프트 어닝 쇼크. 한국 IT 기업에 호재인가, 악재인가?」

앞선 신문 기사들을 한 번 읽고 말았던 것에 비하면, 이 기사는 지금 세 번째 반복해서 읽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기자를 불러서 정보의 원천을 알고 싶을 정도다. 기사에는 윈도우폰으로 분기 적자가 2억 불에 달해 빌 게이츠의 거취가 불분명하다고 되어 있다.

분기별 적자가 2억 불 정도면 MS로서는 감당할 만한 금액이지만 주주들은 매우 안 좋은 시그널로 받아들일 것이다. 발표 직후 MS의 주가가 8%나 급락했다는 문구도 있다.

찰칵.

“윌슨, 시간 좀 되나요?”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인터폰을 연결하고 목을 풀고 있자니 스르륵하고 윌슨이 나타난다. 오라고 했으니 노크를 안 했겠지만 정말 움직임이 귀신같다.

“부르셨습니까?”

“요즘 신문 기사에서 특이한 걸 발견해서요.”

“그럴 리가요. 우리의 보안은 아주 완벽합니다. 제품 전략 마일스톤이 빠져나갈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아, 그게 아니고요. 마이크로 소프트 관련해서요.”

“빌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맞아요. 빌 게이츠의 거취를 논하던데, 그 기사가 사실입니까?”

“일단 월가에서 빌 게이츠의 은퇴를 요구하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윈도우폰을 통해 모바일 OS를 팔아먹는 전략이 완전히 깨졌으니까요. 중국 업체들이 윈도우폰 반제품을 빼돌려 안드로이드폰으로 갈아 치우고 있습니다. 노키아가 중국에서 대규모 소송전을 준비하고 있지만 패소할 것은 뻔해 보입니다. 노키아가 아주 강력하게 빌 게이츠의 퇴진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노키아가요?”

“예. 노키아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12%나 줄었습니다. 이번 분기에 적자 또한 3억 달러에 육박합니다.”

MS와 노키아가 생각보다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원래 역사에서 윈도우폰은 5년은 버텼는데 말이다. MS는 몰라도 노키아가 분기당 3억 불이나 적자를 볼 때는 아닌데 말이다. 유럽에서 저가 피처폰이 꾸준하게 팔리고 있을 텐데.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나요? 노키아의 분기 적자가 3억 불이나 되다니요.”

“신규 윈도우폰으로 찍은 사진이라며 광고에 쓴 사진들이 실제로는 저희 K-포토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네티즌이 밝혀내면서 윈도우폰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노키아의 충성 고객들이 대거 떨어져 나갔습니다. 노키아가 빌 게이츠를 강력하게 비난하는 이유입니다. 광고를 MS에서 제작했다는 거죠.”

“호.”

MS가 네티즌 수사대를 얕봤네. DSLR 전문가들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얼마나 저급하게 보는데, DSLR 사진을 가져다 쓰다니.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과는 이미지 왜곡과 색감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순한 루머로 끝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빌 게이츠를 대신해 최고 경영자로 스티브 발머가 언급되고 있고, 소프트웨어 설계 쪽은 크레이그 오지가, 윈도우폰 사업은 스티븐 엘롭이 전문 경영자로 입에 오르고 있습니다. 너무 구체적입니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시기만 빼고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 정확히 일치한다. 원래 빌 게이츠는 2008년에 은퇴하는데, 자그마치 4년이나 빠르다. 하긴 원래 역사에서도 구글과의 경쟁이 심해지고 모바일 OS 실패가 주된 이유였으니 지금 벌어지는 일이 아주 엉뚱한 것은 아니다.

미국은 아무리 MS가 대기업이고 빌 게이츠가 최고 부자라고 하지만, 기업의 주인은 주주들이라는 개념이 확실하기에 이사회가 빌 게이츠를 불신임하면 자연스레 은퇴하는 거다. 오히려 빌 게이츠 본인이 불신임을 받을 바엔 자진해서 물러날 것이 분명하다.

“유럽 현지 법인을 두 개 더 세웁시다.”

“두 개씩이나요?”

“빌 게이츠가 아무리 실수를 했다고 해도 MS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물러나면 윈도우폰은 더 나락으로 떨어질 겁니다.”

“아….”

“중국 공장 매입 관련한 협상도 시작해야겠어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태블릿 PC에 대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빌은 결심을 굳힐 겁니다.”

“……!”

스마트폰 이후로 스마트 클라우드는 IT 업계에서는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공식적인 오픈은 11월 쇼케이스지만 그 전에 태블릿 PC 개발 정보가 새어 나갈 수밖에 없다. 딴 사람은 몰라도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는 알아챌 거다. 빌은 안드로이드 OS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테고, 잡스는 SSD를 비롯한 부품 개발로부터 눈치를 챌 거다. PC 사업부가 그냥 PC 사업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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