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최상위 포식자
미국 뉴욕에서는 이례적인 미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서 와요, 잡스.”
“빌, 우리가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수한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간 여러 오해가 있었겠지만 잊어 주시지요.”
“그래야죠. 비즈니스에 적과 아군이 어디 있겠습니까?”
빌 게이츠가 스티브 잡스를 아주 정중하게 자리로 안내했다. 기술 회의가 아닌지라 빌 게이츠는 뉴욕항이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별장에 모두를 초대했다.
“인사하십시오. 여긴….”
“신성반도체의 CEO시죠. 알고 있습니다.”
“처음 뵙습니다. 진제대입니다.”
진 사장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잡스에게 굳이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진 사장은 동격이 아니라 이곳에 협력 업체로 와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런 자리가 외부에 어떻게 알려질지 예상하기란 쉽지 않기에 잡스에게만큼은 굳이 납품업체로서 형식을 갖추는 것이다. 진 사장이 명함을 교환하자 모두들 비슷한 인사를 시작했다.
“노키아의 요르마 올릴라입니다.”
“쇼케이스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HTC의 왕쉐홍입니다. HTC가 MS에 합류했다고 하더니 정말이군요.”
“HTC를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윈도우폰의 메인 OEM을 담당하시는데 모르면 이상하죠.”
참석자 중 유일한 여성 CEO인 왕쉐홍은 잡스의 말에 놀라면서도 적잖이 감동했다.
“소니의 미국 지사장 히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정확하게는 소니 에릭슨이겠지요?”
잡스는 HTC는 물론 일본의 소니와 스웨덴의 에릭슨이 각자의 휴대전화 사업부를 분리 합작하여 소니에릭슨을 세웠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잡스의 연이은 인사말에 빌 게이츠의 표정이 달라졌다. MS 진영의 정보를 거의 꿰차고 있군,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듀얼코어 AP의 개발이 지지부진한 것은 당연히 알고 있겠군.’
빌 게이츠가 탁자에 와인을 놓자 사람들은 다들 푹신한 소파에 둘러앉았다. 편하게 앉은 듯 보였지만 눈과 귀는 빌 게이츠와 잡스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잡스, 인사말을 들으니 내가 빙 둘러 말할 필요가 없겠군요.”
“듀얼코어 AP 개발을 도와 달라는 말인가요? 경쟁자를 도와 달라는 말은 쉽게 할 말이 아닐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주고받을 것이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빌 게이츠의 말에 잡스는 ‘그건 그렇지.’ 하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신성반도체가 참석하지 않았다면 내가 오지 않았겠지요.”
“나 또한 그것 때문이라도 잡스가 참석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빌 게이츠와 잡스의 눈이 동시에 진 사장에게 향했다.
진제대 사장은 두 명의 거대 CEO에게 주목받는 것을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지금은 윈도우폰으로 라인을 적당히 채우고 있는 와중인데, 더 먹겠다고 하다가 블랙베리 꼴이 나지 않을지 두려움부터 앞섰다. 신성은 최근 몇 년 새 도박이란 도박은 모두 실패했었다. 그중에서도 스마트 클라우드를 적으로 돌린 도박이 최악이었다.
“두 분 말씀을 듣기 전에 저희 신성은 제품 개발은 하지 않습니다. 제품 지분에 투자할 여력도 되지 않고요.”
“블랙베리 비즈니스 모델을 염두에 둔 것 같군요.”
빌 게이츠의 말에 진제대 사장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옛 기억을 억지로 눌렀다. MS야 RIM사에 책임을 떠넘기고 발을 뺐지만, 신성은 블랙베리 300만 대라는 악성 재고로 그룹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물론 블랙베리가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신성의 유동 자금을 말라 버리게 한 제일 큰 원흉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떠올리기조차 싫군요. 그와 비슷한 비즈니스라면 신성은 절대 합류하지 않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엔 악성 재고가 쌓이지는 않을 테니까.”
“…….”
“게다가 투자비용도 애플에서 보태 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잡스?”
“으흠. 빌, 그런 히든카드를 당신이 내보이면 어쩝니까?”
진 사장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자신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재고가 발생하지 않고 투자까지 해결해 주는 비즈니스를 하겠다지 않나. 결국 듀얼코어 AP를 신성에 오더 줄 것 같은데 말이다. 설마 물량의 100%를 안겨 줄 생각은 아니겠지? 자칫 잘못하면 정말이지 신성반도체는 공중분해가 되어 버릴 것이다.
“설마 듀얼코어 AP 비즈니스를 저희에게 전량 수주한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왜 아닙니까? 바로 그 얘기입니다. 현재 AP의 대부분은 한국의 스마트 클라우드와 신성, 그리고 대만의 TSMC에서 제작을 하지요. 스마트 클라우드는 이젠 우리 경쟁자이니 듀얼코어 AP는 당연히 신성과 TSMC에 주문을 넣어야지요. 그런데 인텔 CPU 물량 때문에 TSMC가 더 이상 오더를 받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잡스도 그리 회신을 받았지요?”
“하하, 요즘 컴퓨터가 잘 팔리나 봅니다?”
“자고로 인터넷 시대니까요. 덕분에 윈도우도 잘 팔립니다. 휴대폰 만든다고 기존 캐시카우를 죽일 순 없으니 다른 반도체 업체를 찾아야죠.”
잡스가 빌 게이츠의 초대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스마트 클라우드와는 기존 AP를 마지막으로 거래를 끊겠다고 공언한 마당에 새로 칩 제작을 해 줄 TSMC가 막판에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내년에 공장 증설을 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회신을 받고서는 그 자리서 공문을 찢어 버렸다. 빌 게이츠와 인텔이 또 작전을 펼쳤나 싶긴 하지만 물증이 없었다.
결국 듀얼코어 AP를 생산할 곳은 신성반도체밖에 남지 않았다. 대현 반도체도 있지만 스마트 클라우드의 자회사처럼 느껴지다 보니 도통 내키지 않았다. 나머지 반도체 업체는 통신칩조차 제작해 본 경험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듀얼코어 AP 제품을 출시하려면 MS 진영과 어느 정도 교집합을 가지는 수밖에.
“애플의 제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듀얼코어 AP를 한 개당 200불 미만으로 제작해 준다면 MS가 선지불하는 금액과 똑같이 내놓겠습니다.”
잡스가 대뜸 제의를 하고 나왔다. 진 사장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거 남는 장사가 되기엔 극히 힘든 일이 분명했다. 칩 제작을 주문할 때는 웨이퍼당 가격을 측정해서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대뜸 개당 가격을 들고 나온 걸로 봐서 수율 확보가 만만찮은 게 틀림없었다.
“MS는 5억 불을 선발주하겠습니다. 대신 애플에서 같이 마케팅을 했으면 합니다. 출고가를 800불대로 같이 맞추고, 애플의 애플리케이션을 흉내 내더라도 소송을 걸지 않는 조건입니다.”
AP를 같이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빌 게이츠였다. 같은 AP를 쓰니 저작권 분쟁만 없다면 비슷한 앱을 제작해도 버그는 극단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인텔과 TSMC를 CPU로 한데 묶어 협상한 이유였다. MS는 듀얼코어를 자체 개발하려면 1년 이상의 연구 기간이 필요하며 애플은 이미 양산할 수 있는 설계도가 있었으니까.
“HTC도 2억 불을 선발주하겠습니다. 저희는 스펙 한계에 걸리는 제품도 상관없으니 개당 150불 정도로 납품받았으면 합니다.”
“소니 에릭슨도 3억 불을 선발주하고자 합니다. 가격은 MS와 동일했으면 합니다.”
진 사장은 상황 파악이 쉽지 않았다. TSMC가 아무리 MS의 압박을 받았건, 수율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했건 간에 총 15억 불이라는 선발주 물량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몰랐다는 게 더욱 이상했다.
‘뭔가 있어. TSMC는 이 비즈니스가 실패할 거라고 여기는 게 분명해. 그게 뭘까? 그걸 알아내서 딜을 해야 해.’
이성적으론 본사로 돌아가서 신중하게 판단하고 회신을 하겠다고 말하는 게 맞을 텐데, 그런 뜨뜻미지근한 말만 듣고 자신을 보내 줄 것 같지 않다. 결국 기존 AP와 메모리 물량을 끊어 버리겠다고 협박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럴 바에는 외려 치고 나가서 딜을 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TSMC가 왜 이런 사업을 거절했을까요? 그걸 오픈하지 않으면 저는 수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진 사장은 일단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읊어 댔다. 빌 게이츠를 포함해 기존 MS 진영은 인상이 찌푸려졌고, 잡스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오히려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신성의 실력을 의심했을 것이다.
“글쎄요. 우리가 반도체업자가 아니라서 TSMC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정말 인텔의 물량이 넘친다면 AMD 물량도 받지 말아야 하는데 그건 또 아니더군요. 나도 의문입니다. 제조비용 얘기만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1년 뒤 얘기는 왜 자꾸 하는지, 원.”
‘제조비용? 개당 200불이면 충분한 가격처럼 보이는데…. 그리고 가격 협상이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1년 뒤 얘기는 왜?’
진 사장은 의문에 의문을 더했고, 어느 순간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혹시 12인치?’
그러자 번쩍하고 모든 것이 환하게 보였다. AP는 워낙 공정이 복잡한 데다 칩 사이즈가 커서 기존 8인치 웨이퍼로는 도저히 가격을 맞추지 못했던 거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이미 12인치 라인이 셋업되어 있기에 가격과 성능을 모두 맞출 수 있다. 윈도우폰이 중국 조립 공장까지 가동하면서도 가격에서 경쟁이 되지 않았던 이유가 아니던가. 빌 게이츠야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진 사장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알려 드리죠. 모든 것은 반도체 회사들이 12인치 라인을 셋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듀얼코어 AP는 칩 사이즈가 커서 공정과 제조비용을 감안하면 12인치 라인이 필수적인 거죠. 현재로선 스마트 클라우드만이 듀얼코어 AP를 생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어째서 TSMC는 그걸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았던 거죠?”
“글쎄요. CPU 물량마저 스마트 클라우드에 뺏길까 봐 그랬겠죠. 스마트 클라우드에 주문하면 가격이 훨씬 저렴해질 거라는 걸 알려 주는 격이니까.”
“……!”
“신성에서 제안을 드리죠. 설비 투자까지 지급해 주신다면 올해 말까지 듀얼코어 AP를 원하는 수량으로 뽑아 드리지요.”
진 사장은 이게 회사를 살릴 기회라고 생각했다. 12인치 라인 셋업을 경험한 협력 업체는 용인밸리에 즐비할 것이고, 이미 셋업되어 돌아가고 있는 라인이 있으니 설비 종류도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투자 여력을 잃은 신성반도체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절호의 기회였다.
“으흠, 일이 그리된 거군요. 이제 퍼즐이 끼워 맞춰지네요.”
“하! 그래서 스마트폰이 그렇게 저렴했군!”
“HTC에 연 물량 천만 개를 개런티해 주세요. 2억 불을 투자하겠습니다. 선발주 금액과는 별도입니다.”
“소니 에릭슨은 연물량 1,500만 개 기준으로 3억 불을 투자하겠습니다.”
“잡스?”
“빌부터.”
“좋습니다. MS는 설비 투자 5억 불, 선발주 5억 불, 연 물량 2,500만 개, 첫 달 물량 500만 개 납품 조건입니다.”
“애플도 일단 MS와 같은 조건으로 하지요. 내후년 물량은 내년 중반에 재조정하는 조건입니다.”
CEO들이 한마디 할 때마다 수천억짜리 투자금이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진 사장은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이들이 조건을 붙이고 있으니 자신도 조건을 붙이기에는 아주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치킨게임만 피할 수 있다면 이 계약은 정말 대박이 될 것이다.
“신성도 조건이 있습니다. 납품하는 제품은 꼭 고정가가 되어야 합니다.”
“하하, 치킨게임은 하고 싶지 않다. 그 말씀이시군요.”
“신성은 정해진 가격에 정해진 품질로 납품만 할 뿐, 제품 소유권은 고객분들에게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진 사장은 고정가 거래로 몰아가 치킨게임이라는 가능성 자체를 지워 버린 자신의 꼼꼼함에 스스로 감탄했다. 잡스를 포함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역시 스마트 클라우드가 듀얼코어 AP를 탑재한 K1인지 New K1인지 하는 걸 출시했으니, 눈앞의 CEO들은 마음이 급한 거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돈을 갈퀴로 쓸어 가는 걸 보면서 그 돈이 원래는 자기들 것이 될 수 있었다고 여기는 거다.
“투자금이 도착하는 순간부터 6개월 후에 납품하는 조건입니다. 연말까지 납품받으시려면 서두르셔야겠습니다.”
진 사장은 내친김에 한 번 더 질렀다. 투자금을 빨리 받아야 유동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나.
“그래야겠군요. 역시 한국의 스피드는 대단합니다.”
“한국인들의 부지런함이야 감탄할 지경이죠.”
진 사장은 CEO들의 칭찬 따위엔 별로 관심도 없었다. 눈앞엔 숫자만 어른거렸다. 총합계 30억 불짜리 초대형 계약, 그것도 6개월 안에 승부를 보는 비즈니스가 아니던가. 투자금이 찔끔찔끔 들어오는 계약이 아니었다. 단박에 신성의 사세가 회복될 거라 확신했다.
진 사장은 ‘유수한 회장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끝없이 웃어 댔다. 이렇게 완벽한 계약을 따내다니, 신성을 수렁에서 건져 낸 영웅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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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전자 세계 유수 모바일 업체들과 초대형 계약 체결」
「신성전자, 결국 반도체 사업부로 회생하나? 12인치 설비 투자로 재도약 다짐」
「신성전자 AP 수주 계약, 30억 불 수준 단일 계약으로 업계 사상 최고액」
“이야! 신성이 한 건 했네.”
대다수 신문의 경제면에 신성전자가 헤드라인을 장식하다니 이례적이다. 내가 신문을 보며 감탄하자 눈앞에서 기다리던 윌슨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회장님, 신성이 다시 살아날지 모르는데 감탄을 하시다니요.”
“내 발목을 잡은 것도 아니고 공정한 경쟁에서 나름 살길을 찾았는데 뭐라고 하겠습니까. 축하해 줘야죠.”
“그래도 최소 4개 사가 AP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살길을 찾은 정도가 아니라 스마트 클라우드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 같습니다.”
“듀얼코어가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그걸 성공하면 진심으로 축하를 해 줘야죠.”
“추, 축하라고 하셨습니까?”
“신성이 어떤 조건으로 계약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될지 흥미진진하군요. 우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읍시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윌슨을 안심시켰다. 지금 IT 업계가 전반적으로 착각하는 것이 있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쉽게 만들어 내니 자신들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내가 만들고 있는 스마트폰은 원래 역사 대비 5년이나 빠른 기술이다. 듀얼코어 AP도 6~7년은 앞선 기술이고 말이다.
원래 역사에서도 최첨단이었는데 지금은 더더욱 기술적 난제가 수두룩한 것은 당연하다. 터치스크린 기술이야 흉내는 냈다고 해도 듀얼코어 AP를 단박에 만들어 낸다고? 그것도 12인치 반도체 라인으로? 극히 어려운 일이다. 스마트 클라우드마저 4공장을 통째로 말아먹으면서 전방위 DOE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말씀은 신성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인가요?”
“그게 쉬웠다면 내가 대현에 먼저 하라고 했겠죠. 대현도 12인치 라인을 아직 셋업하지 못했잖아요. 신성은 기존 공장에서 설비 정도를 갈아 끼울 요량인가 본데, 어설픈 생각이에요. 처음부터 공장을 새로 짓고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수율이 40%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우리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오, 그렇군요. 그럼 타사들은 듀얼코어 AP를 납품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시군요. 하하, 올해 말에 멋진 일들이 벌어지겠는걸요.”
“타사도 적당히 살려는 줘야죠. 시장 확대를 해 나가는 시점에서 독점은 그다지 좋지 않아요. 우리가 소프트웨어 사업도 아니고.”
소프트웨어처럼 물리적인 제품이 없는 경우에는 처음부터 독점을 꿈꾸는 게 옳다. 하지만 제조업의 경우에는 섣불리 독점을 꿈꾸다간 해당 비즈니스 전체가 죽어 버린다. 내가 일일이 하청 업체와 관련 제조업을 먹여 살릴 게 아니잖나. 내가 1등으로 대규모 흑자라는 달콤한 알맹이를 쏙 빼 먹고, 나머지 경쟁사들은 흑자와 적자를 오가며 해당 업계를 먹여 살려야 하는 거다.
“그럼 오픈마켓용 듀얼코어 AP를 따로 만들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당연하죠. 우리가 2+1의 구조의 AP라면 순수한 듀얼코어 AP를 생산해서 올해 연말부터 오픈마켓에 뿌립시다. 저급 사양을 팔면서 떼돈을 벌겠군요.”
“스마트 클라우드 이름으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제조는 우리가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일부러 저급 사양을 시장에 뿌렸다고 항의를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괜한 잡음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퀄컴의 브랜드로 나가면 어떨지요? 이제 자회사나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증자에 참여했기에 회장님의 지분이 25%가 넘었습니다.”
이번 역사에서 퀄컴은 무선 통신칩을 만들 뿐 AP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내가 먼저 시장을 점해 버렸으며 내가 가장 큰 고객이잖나. 그렇다고 퀄컴의 이름을 빌린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괜히 빌미를 줬다가 내 우산 밖으로 나가는 일이 발생하면 큰일이다. 윌슨은 퀄컴의 잠재력을 모른다.
“아뇨. 파이오니어에서 브랜드를 하나 만들라고 하세요. 그게 좋겠습니다. 안드로이드와 같이 묶어서 판촉 좀 하라고 해야죠.”
“……!”
윌슨은 내 말에 그게 정답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007 가방을 휙 열어서 쓸 만한 계약서가 있는지 확인까지 한다.
“내가 개발자들에게 직접 오픈마켓용 듀얼코어를 만들라고 할 테니, 나머지는 윌슨이 알아서 처리해 줘요.”
“옙, 회장님.”
“오늘 다른 스케줄은 없죠?”
“없습니다. 하반기 공채 결과는 서면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몇 명이나 뽑았는지, 숫자만 알았으면 하네요.”
“그룹 전체로는 1만 8천 명, 스마트 클라우드에 한해서는 1만 명입니다.”
“오오.”
신입 사원이 한 해 1만 8천 명이란다. 인사팀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온갖 군데에서 아우성을 치니 그렇게나 뽑겠지. 확실히 우리 그룹이 상승세를 탔구나.
내년에도 올해 못지않게 사람을 뽑을 것 같다. 7, 8공장도 바로 세워야 하니까. 신성의 반도체 경력 사원들도 넘어오는 거 아냐? 정말 그럴 수도 있다.
- *
9월로 접어들자 시그널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일 IT 매체들에 뿌려지던 신성 관련 뉴스가 뚝 끊어진 것이다.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설비를 입고시키는 트럭은 줄줄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때쯤 튀어나와야 할 초도 샘플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요즘 신성이 조용하네요. 나 부사장님 예견처럼 된 건가요?”
“하하, 거 보십시오. 제가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자고로 12인치 라인을 가동하려면 공장 하나 정도는 말아먹어야 제대로 셋업한다니까요. 설비만 갈아 끼운다고 될 것 같으면 제가 그리 고생했겠습니까?”
오랜만에 자리한 나 부사장이 박카스를 입에 털어 넣고는 껄껄 웃어 댔다. 하긴 12인치 라인은 개발 품질과 양산 품질이 극명하게 차이 나는 첫 번째 사례였다. 자동화를 해야만 반복적인 레시피를 겨우 같은 품질로 수행할 수 있었으니까. 워낙 웨이퍼가 커서 웨이퍼 평판 위의 균일한 공정을 구현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소재와 설비의 개선은 물론이고 하나의 공정을 두세 개로 쪼개서 반복적으로 실행해야만 품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각을 예로 들면 완성해야 할 조각품은 너무 큰데 각 부분은 여태껏 했던 것보다 훨씬 섬세해서 단번에 깎아 나갈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섬세한 부분을 먼저 깎아 두면 다른 곳을 깎을 때 발생하는 충격에 부러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전체를 지루하리만큼 반복해서 조금씩 깎아 나가야 한다. 듣고 나면 매우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로 반도체 공정 엔지니어들이 그걸 깨닫기는 쉽지 않다.
“신성에 설비는 우리와 동일하게 들어간 게 맞습니까?”
“예, 그럼요. 12인치 설비야 이 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대충은 알지요. 신성 애들도 만만찮아서 우리 설비와 거의 동일한 설비로 채워 넣었습니다. 설비만 본다면 90%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가 빈다는 것은 자동화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네요?”
“예, 정확합니다. 12인치 라인의 자동화는 그냥 자동화가 아닙니다. 자동화 관리라고 해야 적당합니다. 반복되는 공정을 진행할 때는 대기 시간 관리가 수율과 직결되지요. 12인치 라인이 캐퍼 대비 늘 여분의 설비를 운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대기 시간이 10분만 달라도 수율은 1%씩 나가떨어집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에선 자동화 물류가 끊기면 안 된다는 핑계로 대기 시간의 중요성을 감추고 있기에 노하우가 밖으로 새어 나갈 가능성이 매우 적다. 협력 업체가 설비 수리를 위해 방문한다고 해도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동화에 엄청 신경 쓰나 보다라고 지레짐작할 뿐이다. 외려 수율의 노하우가 철저한 보안 속에 있는 레시피와 소재에 있을 거라고 여길 것이 분명하다. 그 또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니 경쟁사에서 아무리 우리를 벤치마킹해도 수율의 비밀을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케이, 알겠습니다. 그럼 최종 결재를 하죠. 6공장, 7공장 동시 셋업 하십시오. 언제나처럼 올해 11월엔 초도품 나오게 하시고, 내년 3월까지는 모두 셋업하시기 바랍니다.”
“맡겨 주십시오. 12인치 라인 셋업만 벌써 세 번째입니다.”
“6, 7공장은 디자인 룰에서 0.10㎛ 벽을 깰 라인입니다. 포토 공정 개발자의 의견은 100% 반영해 주세요.”
“아이구, 걱정 마십시오. 스마트 클라우드 양산 기술자들은 개발자들하고 절대 각 안 세웁니다. 외려 같이 실험하고 개선 아이디어도 같이 내고 논문도 씁니다.”
대기업에서 학력 차별이 없을 순 없겠지만 스마트 클라우드는 학력 차별이 그다지 심하지 않다. 오성재 사장을 제외하면 경영진 중에 박사라고 학벌을 자랑할 만한 이들이 없잖나. 모두 필드에서 잔뼈가 굵은 양반들이다. 스마트 클라우드에선 석박사 학위를 가진 이들조차 양산 기술에 지원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며, 고졸 출신이 논문을 작성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회장님, 이번 공장은 좀 비싸게 지으라고 하셔야지요.”
내가 공장 설립 기안서에 서명을 하는데 옆에서 윌슨이 한마디 거든다. 매우 중요한 일인데 깜빡했다.
“아, 그렇군요. 부사장님, 이번 FAB 공장은 역대 최고로 크게 지어 보세요. 각 공장별로 3조까지 쓰셔도 됩니다.”
“허헉! 3조씩이나요?”
“예, 3조.”
“그럼 FAB가 두 개니까 총 6조를 써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더 쓰셔도 됩니다. 돈 더 써서 기존 8인치 라인도 12인치로 개조하세요. 우리 그만한 실력 되죠?”
“어이구, 실력도 되고… 하라면 하는 건데… 얼마나 캐퍼를 키우시려고요.”
“하하, 최대한 크게요. 윌슨의 말로는 내년에 슈퍼 사이클이 돌아온다고 하는군요.”
“슈퍼 사이클요?”
나 부사장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윌슨이 보고서를 척 하니 건네준다. 나도 어제 읽은 따끈따끈한 보고서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2003년 하반기부터 슈퍼 사이클이 왔던 것 같았다.
“올 4/4분기 수주량을 보면 DRAM 시장만 작년 대비 23.4% 증가했습니다. 업계 분위기가 장난 아닙니다. MS도 내년부터 Windows 95 및 98 OS의 공급과 서비스를 중지할 거라고 발표했고, 인텔도 생산량을 60% 이상 증가시키겠다고 대주주들에게 공지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PC는 평균 사용 기간 38개월을 감안한 교체 주기와 스마트폰 수요까지 폭발하고 있어서 말이죠. 아마도 내년에는 우리 회사가 역대 최고의 매출을 기록할 것 같습니다.”
“허헉!”
“물론 나 부사장님께서 공장을 제대로 셋업한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윌슨의 말에 나 부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입이 슬쩍 귀에 걸린다.
“우하하하, 신성 애들 죽을 맛이겠네! 물량은 터지는데 12인치 공장 문제로 완전 아작 나겠는데요?”
“하하, 그거야 뭐 우리 알 바 아니죠. 참, 8인치 설비는 대현에 넘기세요.”
“아, 예. 문제없습니다. 정 회장님도 돈 좀 짭짤하게 버시겠네요.”
나 부사장이 손가락을 비비며 장난스럽게 돈 세는 흉내를 낸다.
“한턱내라고 하죠, 뭐. 하하.”
“저도 끼워 주십시오.”
올해 순익이 20조가 넘어가니 이런 큰 결정을 하면서도 여유가 넘친다. 바야흐로 스마트 클라우드는 선순환에 완전히 들어섰다.
- *
비슷한 시각.
신성반도체 대회의실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상석에는 분명 진제대 사장이 앉아 있지만 양쪽으로 DRAM 사업부와 LSI 사업부가 나뉘어서 대치하는 꼴이었다. 진 사장 주관 회의에 권현오 사장이 LSI 임원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도 매우 이례적이었다.
“대체 수율이 안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신성의 최고 인재들을 모두 쏟아부었는데도 아직 초도품조차 만들어 내지 못하다니요.”
반도체는 수율이 10%만 확보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다. 설계 검증과 공정의 뼈대는 완성되었다는 뜻이니 10% 수율을 낸 레시피를 기준으로 온갖 파라미터를 흔들어 수율을 올리면 되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웨이퍼 열 장을 집어넣으면 수천 개의 칩 중 정상 칩이 한두 개 될까 말까다.
“이건 분명 공정을 담당한 DRAM 개발자들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리가요. 저희는 전 세계에서 D13 디자인 룰을 두 번째로 뚫어 낸 실력이 있습니다. 용인 애들과 기술력은 두 달밖에 차이 나지 않아요. 그런 우리가 최선을 다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제대로 된 굿 다이(good die: 정상칩)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대체 LSI에선 설계 검증과 마스크 검증을 하기는 한 겁니까?”
진 사장의 말에 LSI 임원과 DRAM 임원이 서로 직격탄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여태 웨이퍼를 1,000장 이상 집어넣는 대규모 실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신통찮으니 둘 다 죽을 맛이었다.
“무슨 소리를 그리 하십니까? LSI LAB에서 굿 다이를 열 개나 뽑아냈고 설계 검증을 완료했다고 환호했던 거 기억 못 하십니까? 지금쯤이면 양산에 근접해야 하는데, 공정 셋업을 어찌 하기에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이 모양 이 꼴이라뇨? 말 가려서 하세요! 1.5X 마스크(설계 검증을 위해 패턴을 키운 마스크)로 굿 다이 뽑으라면 수만 개라도 뽑아 드리죠. 우리가 하는 일은 양산 준비란 말입니다. DRAM 엔지니어들이 한 달 반 동안 죽어라 설비 셋업 했고, 저기 용인에 있는 타사 못지않은 라인을 만들었다고 같이 축하했던 건 기억 못 하십니까? 공정은 그들과 다르려야 다를 수가 없어요. 다른 것은 결국 설계와 마스크뿐입니다.”
“애플한테 그리 말씀해 보시죠. 설계가 개판이라고, 이건 만들 수 없는 거라고 말입니다. 용인 애들은 잘만 만들고 있잖습니까!”
“뭔가 다르겠지요. 스마트 클라우드가 제조의 신이라도 된답니까? 이런 설계로는 걔네들도 절대 수율 확보 못 합니다.”
용인 애들이라고 나름 둘러말하다가 결국 스마트 클라우드라는 금기어까지 들먹이며 싸워 댔다.
“그만들 하세요. 싸우려고 함께 자리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분석된 자료를 보고 함께 해결책을 찾읍시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원인은 수차례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코어 쪽 패턴이 모두 뭉그러졌고, 코어 쪽 패턴을 살리려 하면 GPU 패턴이 형성되지 않으며, 아예 마스킹을 따로 해서 두 회로를 개별적으로 공정 진행하면 이젠 메모리 IO 쪽의 패턴이 망가집니다. 싱글코어 AP에선 디자인 룰이 어느 정도 동일했는데 이건 설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도체 공정의 신이 와도 이거 최적화 안 됩니다.”
“공정 마진이 아예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LSI 쪽에서 애플의 설계를 공정에 맞게 고칠 수는 없겠습니까? 휴우.”
진 사장이 마치 간사처럼 중간에 끼어 양측 개발팀장을 조율하는 꼴이 되었다. 원래 사장이 이리 나서지는 않는데, 두 개발팀장은 자신의 목이 걸렸다고 여겼는지 서로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진 사장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개발팀장을 해고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반도체 사업부는 물론, 신성전자 전체가 흔들흔들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장님, 듀얼코어는 그렇게밖에 설계가 안 됩니다. 코어는 속도가 생명이니 커패시터가 극히 작아야 하고, 두 개의 코어에 전력 공급을 하기 위해서는 IO 회로는 굵어야 합니다. GPU는 코어 두 개와 동시 연산을 하니 기존보다 커질 수밖에 없고요. 시뮬레이션 결과나 설계 검증 결과, 아니 실제로 스마트 클라우드 AP를 벤치마킹해 보면 그렇습니다.”
“벤치마킹할 능력이 되긴 합니까? 코어가 세 개 있는 것 같다는 되도 않는 말만 했잖습니까!”
“되도 않는 말이라니요.”
또 싸운다. 진 사장도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벌써 긴급회의만 세 번째인데 사안이 풀려 나가긴커녕 개발팀장들이 상대를 공격할 증거 자료만 들고 오는 꼴이다.
“아아! 그만하세요. 그만!”
“쯔쯧, 이거 섣불리 계약한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듀얼 AP 개발 건은 처음부터 LSI가 주도를 했어야 하는데. 쯔쯧.”
어디선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 사장과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권현오 사장이었다. 진 사장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권 사장님, 지금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니요. 이건 계약을 잘못하신 거라고요. 기술 검증을 하고 난 뒤에 계약을 하셨어야지, 덥석 미끼부터 물어 버렸으니 이런 사달이 난 거 아닙니까.”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30억 불 계약을 따왔다고 알렸을 때 제일 환호했던 양반이 누구더라? 그것도 AP 계약이라고 내역을 밝혔더니 ‘역시 LSI가 신성의 희망입니다.’라며 눈물까지 글썽이지 않았던가. 그게 다 황태자 앞이라 쇼를 했던 건가?
“미끼를 물다니요. 권 사장님, 앞으로 닥쳐올 슈퍼 사이클을 눈으로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12인치 라인 투자는 우리의 생명줄이에요. 그 투자를 남의 돈으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단 말입니다.”
“그럼 은행에서 대출을 내서 하면 되지, 굳이 미끼를 왜 뭅니까?”
“어느 은행이! 어느 은행이!”
진 사장은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스마트 클라우드나 대현이라면 돈을 빌려 줄까 신성은 아니었다. 전환사채 불법 담보로 간주되어 악성 부채만 8천억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허참! 문제 해결을 하려면 시인부터 하셔야지. 설비 투자금도 대 주고, 선발주에 고정가 거래면 함정이라는 생각 안 들었습니까? TSMC가 바보입니까? 그들도 1년 뒤에나 수주를 받는다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애플한테 달려가서 시간을 더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쾅!
“지금이 9월입니다, 9월! 우린 지금 최종 시제품을 주고 11월엔 양산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제 와서 시간을 달라고 하면 선발주비는 당연하고 설비 투자비마저 토해 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칫하면 위약금까지 물겠죠. 그럼 신성은 끝장입니다.”
“진 사장님이 일을 그렇게 만든 겁니다.”
쾅!
“권 사장!”
진 사장은 화를 참을 수 없어 책상을 몇 번이나 내리쳤고 권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로서는 선전포고는 이쯤 하면 충분했다. 양측으로 나눠 앉아 있던 개발팀 임직원들은 안색이 파래졌다. 사장들이 공식석상에서 각을 세울 정도니 이 일은 이미 실무진의 손을 떠났다.
“이 건은 오너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애플의 바짓가랑이를 잡든, 계약을 해지하든 알아서 하십시오.”
“정말 그렇게 나오신단 말입니까? 똘똘 뭉쳐 문제를 해결해야 할 판에 편 가르기를 하는 겁니까!”
“편 가르기가 아니라, 이건 기술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계약 자체가 문제란 말입니다.”
“닥치고! 겁나면 손 떼요. 우리 DRAM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러시든지.”
저벅저벅. 쾅!
외려 권 사장은 잘됐다는 표정을 짓더니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진 사장이 노려보고 있자 LSI 개발팀 임원과 부장급들도 엉거주춤 망설이다가 회의실을 나갔다.
“으익. 결국 우리끼리 할 수밖에 없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김 팀장?”
지목당한 DRAM 개발팀장은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진 사장이 분노를 못 이겨 부들부들 떨며 말하고 있으니 눈앞이 깜깜했다. 기술적으로 해결이 요원한 데다 설령 어찌어찌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공정 쪽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LSI 쪽의 주장을 증명해 주는 꼴이었다.
“차라리 저를 직위 해제해 주십시오.”
쾅!
“지금 와서 그따위 소리를 해! 그럴 거면 처음부터 안 된다고 했어야지!”
“으윽.”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필요 없어! 당신들이 스마트 클라우드의 열정을 절반만 닮았어도 이런 일 없어! 나가! 나가라고! 꼴도 보기 싫어!”
진 사장이 여태 회사 생활을 15년 넘게 하면서 이처럼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텅 빈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자니, 이희건 회장이 아무리 큰일이 닥쳐도 끝내 자신과 이수학 비서실장을 붙잡아 둔 채 말을 이어 갔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회의실 컴퓨터에는 불량 사진을 포함해 수십 장이나 되는 분석 자료가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30억 불. 그중 선발주금 15억 불은 돌려준다고 해도 나머지는… 위약금을… 아….’
진 사장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시카고 쇼케이스까진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휴우.”
진 사장은 담배 한 모금이 이토록 간절할 때가 없었다. 회사 생활을 최소 20년은 채우고 싶었는데 말이다. 사장 자리에 올라 고작 2년도 못 견디고 물러나게 생겼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있는 재산까지 탈탈 털리고 길바닥에 나앉을 판이다.
“그래, 스마트 클라우드라면… 이 정도는 문제없이 해결하겠지. 잡스는 오더를 못 주겠지만 나는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그렇다고 가만있을 순 없었다. 황태자와 같이 가자고 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유 회장은 황태자가 정문에서 침묵시위를 해도 결국 독대하지 않았다. 진 사장 혼자 가는 것이 외려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길로 회사를 나온 진제대 사장은 차를 몰고 가다가 편의점이 보이자 담배를 한 갑 사서 줄담배부터 피워 댔다. 이 좋은 걸 왜 끊었나 싶었다. 용인까지는 겨우 1시간 거리인데 오늘따라 그리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마치 신성과 스마트 클라우드의 격차를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 *
똑똑.
“예, 들어오세요.”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윌슨이 퇴근 무렵에 찾아오다니, 흔치 않은 일이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좀 더 가까이 오더니 속삭이듯 말을 한다.
“신성의 진제대 사장이 뵙자고 합니다.”
“혼자 왔습니까?”
“예.”
“볼 일 없다고 하세요.”
회사가 흔들흔들하는데 오너가 아니고 월급 사장이 오나? 그것도 혼자 오다니, 아직까지 그리 급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 달 정도만 더 있으면 신성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될 거다. 그때 가서 내가 애플과 MS를 만나면 그뿐이다.
“그게 아니고, 정말 다급한 것 같습니다. 빚을 지우기엔 적당한 때일 것 같습니다.”
“신성과 은혜 장사는 안 합니다.”
“진 사장은 늘 변수가 되었던 인물이니 만나 보시는 게 어떨까요? 지금이라면 회장님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까요?”
“내 의도대로 움직인다고요? 로비스트의 감인가요?”
“사업도 로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발목을 잡을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은 굳이 내칠 필요가 없잖습니까. 적당히 협상하고,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고, 필요에 따라선 빚을 지우고… 로비스트가 커 나가는 과정이지요. 신성의 사장이라면 적극적으로 움직이셔도 되지 않을까요.”
“적극적으로 움직이라니, 망할 게 뻔한 신성에 살아날 빌미라도 주라는 말입니까?”
잘나가는 가게는 굳이 망해 가는 가게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 결국 매물로 나오게 되고 그때 인수하면 그뿐이다. 직원들이야 그런 과정에서 알아서 넘어오게 될 것이다. 양재족발이 좋은 예이지 않나. 잘나가는 족발집은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여러 족발집을 깡그리 인수해 골목 전체를 분점으로 채워 버릴 수 있다. 소비자는 결국 맛, 가격, 서비스, 가게 주인까지 모든 것을 비교해 최선의 소비를 하기 마련이다.
“아뇨, 아뇨. 절대 아닙니다. 단지 지금쯤 애플과 MS 진영에 신성의 실상이 알려져야 그들이 우리 AP를 쓰지 않겠습니까. 너무 늦게 알게 되면 회장님이 원하시는 경쟁 구도가 깨져 버리고 시장도 주춤하게 될 테니까요. 오픈마켓용 AP를 시장에 내놓을 명분도 필요하고요.”
“그러니까요. 그 속내를 숨겨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다 죽어 가는 신성이 뭘 들고 왔는지 한번 보기나 할까요. 미국에서 신제품을 내려면 지금쯤 퀄 샘플 정도는 받아야 할 테고 우리도 슈퍼 사이클에 발맞추긴 해야 하니까요.”
제품 메이커는 최종 버전의 부품을 석 달 전, 최소 한두 달 전에는 받아야 제품 품질을 검증하고 자잘한 불량은 고칠 수 있다. 물론 IT 제품들은 매년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특성이 있어 그런 시간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유독 IT 제품들이 제품 출시 이후에 대형 불량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은 게 이 때문이다.
“회장님의 그림대로라면 아이폰과 윈도우폰 메이커가 지금 주저앉으면 무척 곤란하지요. 결국 우리 진영으로 넘어올 업체들이 줄줄이 딸려 있는데 말입니다.”
“으흠, 맞는 말이군요. 좋아요. 만나 볼 테니 윌슨도 함께하세요.”
“오랜만에 몬타베가 어떨까요? 오늘 횟감이 아주 좋은 게 들어왔다고 메시지가 와서요.”
“하하, 몬타베에서 기다리라고 하세요.”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나는 안 그래도 그룹 전체의 매출을 살펴보고 있었다. 스마트그룹 전체 매출에서 반도체의 비중이 27%, 정보통신 쪽이 48%나 차지하고 있다. 벌써부터 매출 비중이 반도체에서 정보통신 쪽으로 넘어가는 모양새다. 정보통신에 스마트폰, 서버, 통신 사업이 모두 포함되긴 하지만 이상적인 비율은 아니다. 반도체의 비중이 최소한 35%는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역시 요즘 내가 너무 스마트폰에만 집중한 면이 없지 않다.
“윌슨은 이 슈퍼 사이클을 놓치기 싫었던 거겠지. 나도 그렇고….”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내년에는 소비자들이 기존의 휴대폰과 컴퓨터를 바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가장 좋은 마케팅은 대형 메이커들이 너도나도 가격 경쟁과 성능 경쟁을 하는 것이다. 소비자에겐 강 건너 불구경하는 축제 같은 경쟁인데 내가 불을 끄면 안 되지.
나보다 더 시세를 잘 읽는 비서라니. 눈치가 매우 빠른 이 비서도 그랬고, 케이도 그렇고, 이번 생에 나는 인복이 있는 것 같다.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 *
딸랑딸랑.
“오랜만에 오시네요, 회장님.”
“반년은 족히 된 것 같네요. 장사는 여전히 잘되시죠?”
“그럼요. 이리로… 손님은 매화방에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드르륵.
“어서 오십시오, 유 회장님.”
“고맙습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진 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중하게 자리를 권하기에 그와 마주 앉았고, 자연스레 윌슨이 문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았다.
“아직 시원한 맥주가 맛있을 때죠? 한 잔 하시겠습니까?”
“제가 먼저 드리겠습니다.”
진 사장이 내 잔과 윌슨의 잔을 채워 주었고, 내가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별것 아닌 것에 진 사장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느껴진다. 초장부터 김칫국을 들이켜는 꼴이다. 벌써부터 지겨워진다. 얼른 본론 꺼내라. 그만 자리 끝내게.
“어떻게 혼자 오셨습니까? 저든 진 사장님이든 편한 자리는 아닌데 말입니다.”
“영웅에서 호구로 내몰리는 것은 한순간이더군요.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예전에 받았던 사과와 달리 나름 진심이 느껴지지만 쓰잘데기없다. 왜 오너를 안 데려왔냐고 물었건만, 여전히 자기 할 말만 하고 있다.
“진 사장님이 호구로 몰리다니요.”
“지금의 신성은 예전의 신성이 아닙니다. 분위기도 사람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협업과 열정 대신 시답잖은 파벌 싸움과 책임 회피가 있을 뿐입니다. 어쩌다 이리 됐는지….”
“자업자득입니다. 신성은 새로 태어날 기회를 놓쳤어요.”
“그 말씀의 의미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유 회장님의 명예는 회복시켰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신성의 직원들에게 경영진이 나서 책임 회피를 어찌 하는지 가르쳐 준 격이죠. 휴우.”
진 사장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다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라이터를 내려놓는다. 이 양반, 여기가 어딘지도 까먹을 정도로 대화에 집중했나 보다.
“피우세요. 여기 환풍기 틀면 됩니다.”
“아닙니다.”
찰칵.
“피우세요. 스트레스가 심하신 모양인데 피우셔야죠.”
나는 라이터를 집어 들고 불을 붙여 주었다. 윌슨의 말대로 나오길 잘했다. 진 사장은 완전히 코너로 몰려 있다. 내 행동이 호의적인지 단순히 몰아가는 건지 구별도 못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유 회장님.”
“거절합니다.”
“헉.”
콜록콜록.
내가 단박에 거절해 버리자 진 사장은 깜짝 놀랐다. 한참이나 기침을 해 댔을 정도다. 눈빛으로 ‘제의를 듣지도 않고 거절부터 합니까?’라고 묻고 있었다.
“제 제의부터 들어 보십시오. 서로 남는 장사가 될 겁니다.”
“설마 사업 얘긴가 싶었는데 여지없군요. 거절합니다.”
“그저 그런 사업이 아닙니다. 도와만 주신다면 서로 15억 불짜리 장사를 할 수 있습니다.”
“좀 어려워졌다고 경쟁사 오너에게 달려오시다니. 내가 어지간히 쉽게 보이긴 했나 봅니다. 기분이 더 나빠지는군요.”
“회, 회장님! 살려 주십시오. 이대로라면 신성반도체는 끝장입니다.”
“그렇겠죠. 여태껏 들어간 개발비도 만만찮았을 테고. 위약금은 상상도 하기 싫을 테니까.”
“회장님, 살려 주십시오. 15억 불짜리 ODM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같이 사는 겁니다.”
“뭐하러 같이 살죠? 같이 살기엔 이 시장이 너무 좁다고 공격했던 게 신성 아닌가요? 아, 진두지휘했던 양반은 병원에 있다고 우기는 건가요? 어이가 없군요.”
진 사장이 가져온 제의는 ODM이었나 보다. ODM은 우리 말로는 ‘생산자 개발 위탁 생산’으로, 일반적인 ‘주문자 위탁 생산’을 뜻하는 OEM과는 생산자의 책임 범위부터가 다르다. ODM은 말 그대로 생산자가 주문자의 스펙만 맞춘다면 디자인, 설비, 소재, 공정까지 모두 알아서 하는 것이다. 즉, 주문자는 만들어진 물건에 자기 상표만 붙여 가져가는 꼴이니, 나보고 AP 시장을 독식하라는 의미다. ODM 좋지. 하지만 내가 신성을 중간에 왜 끼우나?
“회장님, 수만 명의 직원들 목이 걸린 일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나를 붙잡고 늘어진다.
툭.
“아직 갈 길이 머시네.”
나는 진 사장의 손을 툭 밀어젖히곤 자리를 빠져나왔다. 윌슨이 일어서서 나에게 묵례를 한다. 자리 정리하고 가겠다는 듯 말이다. 역시 손발이 척척 맞는다.
드르륵.
윌슨은 내가 자리를 뜨자 아예 문을 닫아 버렸다.
쪼르륵.
윌슨은 얼이 빠져 버린 진 사장에게 술잔부터 채워 주었다.
“진 사장님, 지금 바로 ODM을 시작한다고 해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렇게 얘기를 듣지도 않으시고… 휴….”
“15억 불짜리 ODM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스마트 클라우드에 유동자금은 차고 넘치는데요.”
“얼마를 더 얹어 드려야 거래가 성사되겠습니까? 이 정도가 제 선에서는 최선입니다.”
“그리 생각하시면 진 사장님 선에서는 얘기가 안 되겠네요.”
“……!”
그 말을 끝으로 윌슨마저 자리를 떠나 버렸다. 진 사장은 그제야 유수한 회장과 윌슨이 왜 이 자리까지 나와서 거절 의사를 밝혔는지 이해가 되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AP ODM은 이미 준비를 넘어 양산 단계까지 완벽히 끝난 거다. 자신의 선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지 않나.
진 사장은 부랴부랴 양복 재킷을 걸쳐 입고 가게를 빠져나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
띵똥. 띵똥.
이용재 전무는 야밤에 느닷없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관리인은 대체 뭘 하기에 초인종이 계속 울리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건가?
거실로 나가 보니 이미 관리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CCTV를 보자 문은 열려 있음에도 문 앞에 선 사람은 연신 초인종을 눌러 대고 있었다.
‘진제대 사장?’
CCTV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사람은 진 사장이었다. 술이 취한 것 같지 않은데, 그리고 술이 취했더라도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다들 물러나세요. 내가 나갈 테니까.”
“예.”
이 전무가 정원으로 나오자 진 사장은 거침없이 다가왔다. 정원에 있는 벤치는 이슬에 젖어 있었지만 진 사장은 비싼 양복을 벗어 쓱쓱 닦아 대며 자리부터 권했다. 할 말이 길다는 뜻이었다.
“진 사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일이 있다면 내일 본사에서 논의하면 될 것을.”
“전무님, 제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잠을 자겠습니까? 오늘 권 사장이 찾아와서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휴우, 심각하더군요. 고객 클레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하니… 정녕 기술적으로 해결책이 없습니까?”
이렇게 나약하게 말하니 진 사장은 더욱 답답해졌다. 이희건 회장은 고함이라도 쳤으며, 관련자를 모아 아이디어를 내놓기 전까지는 회의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 편 가르기가 시작되면 특유의 카리스마로 모두를 제압했다. 한데 그의 아들은 오히려 권 사장에게 휘둘리고 있다. 기분이 더러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벌어진 일을 수습해야 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신성의 투자 여력을 회복하는 데 AP가 그 첫 단추를 끼워 줄 줄 알았건만 LSI 쪽의 실력이 그만큼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DRAM 공정 엔지니어들도 해결 방안이 없다고 하니….”
“그래서 어쩌자는 얘기입니까? 대안은 있어야죠!”
이 전무가 화를 내자 외려 마음이 편해졌다.
“스마트 클라우드에 매달려야 합니다. 제가 찔러보고 왔는데 잘만 하면 듀얼코어 AP에 대해 ODM을 받아 줄 것 같습니다.”
“유 회장이요? 우릴 원수 보듯 하는데? 오히려 이참에 수렁에 빠뜨리는 것 아닙니까?”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우린 이미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도 깊숙이. ODM 계약 없이는 위약금만으로 3조 이상을 물어내야 합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계약을 하는 게 옳습니다.”
“이이… 논의부터 하고….”
“전무님, 내일 LSI까지 불러 모으면 또 싸우기밖에 더합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오너의 결심뿐입니다. 결심만 하시면 가서 비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진 사장, 대체 계약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사달이 난 겁니까?”
“옷을 벗으라면 벗겠습니다. 제 거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계약을 해결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 수밖에 없습니다.”
“계약 하나 삐끗한다고 설마 대신성이 망하기야 하겠습니까?”
“물건 제대로 만들어도 어음 하나 부도나서 넘어가는 중소기업이 부지기수입니다. 신성이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애플과 MS를 상대로 배라도 째시겠습니까?”
급한 마음에 이용재를 상대로 험한 말이 마구 튀어 나왔다.
“그 계약을 한 당사자가 진 사장님 아닙니까?”
“지금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잖습니까! 옷을 벗겠다고요. 자칫 신성의 상황을 고객이 눈치채고 스마트 클라우드에 먼저 접촉하면 이 수도 못 씁니다. 신성전자는 위약금 물어내고 나자빠지는 겁니다. 그러다 클레임이라도 걸리면 다른 계열사도 온전치는 못하단 말입니다.”
“……!”
정말이지 진 사장은 애가 달았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신성이라는 이름만은 유지하자고 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황태자는 천하태평이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건만.
그의 말에 이용재 전무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제야 좀 사태 파악이 되나 보다.
“대가는 뭘로?”
“15억 불 ODM은 거절했습니다. 뭔가 더 필요합니다.”
“3억 불 더 얹어 보세요. 위약금 30억 불보단 싸니까.”
진 사장은 울화가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차마 ‘돈은 그쪽이 우리보다 훨씬 많습니다. 원하는 건 지분이에요. 우리 직원들이고! 그걸 모르십니까!’라고 소리칠 수가 없었다.
“제가 다시 가서 협상을 해 보겠습니다.”
“수고해 주세요. 잘 부탁합니다.”
‘부탁하긴 뭘 부탁해! 후딱 거절당하고 오는 게 빠르니까 하는 것뿐이야!’
진 사장은 고개를 숙였다. 온실 속의 화초가 느끼는 위기는 고작 이 정도인가.
진 사장은 서둘러 집을 빠져나갔다.
- *
딸깍.
“회장님, 진 사장이 또 찾아와서 엎어졌습니다.”
“조건은요?”
“5억 불에 3천억짜리 빌딩입니다.”
“참나, 거절하세요.”
“예, 회장님.”
“몇 번째 거절이죠?”
“세 번째입니다.”
윌슨도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진 사장이 이렇게 빌러 온 지도 벌써 일주일째인데 신성의 제의가 아주 가관이다. 처음에 3억 불, 그다음엔 5억 불, 오늘은 5억 불에 3천억짜리 빌딩까지 얹어서 왔다.
“진 사장은 눈치가 빤할 텐데 말이죠. 에휴, 모르면 말라지.”
“이왕 참아 주셨는데 다음 한 번만 더 기다려 주시죠. 시간이 갈수록 급해지는 건 저쪽이니 다음에는 지분을 들고 올 겁니다.”
“지분도 지분이지만, 기흥 말고 화성 쪽에 지은 공장을 받아야 합니다. 그 정도는 받아야 30억 불 가치는 하는 겁니다.”
“다음 한 번까지 참아 주고 안 되면 오픈마켓에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신성 따위에 신경 쓰느니 안드로이드 진영을 키우는 게 훨씬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