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커피와 도넛
“오늘 아침은 여기서 해결하지.”
“에에. 수한 씨, 아침부터 도넛이라니요. 단거 잘 안 먹잖아요.”
“오늘은 예외야. 도넛에 커피로 하자고.”
나는 아침부터 케이를 이끌고 산호세 중심거리에 있는 도넛 가게로 왔다.
“워즈니악이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했잖아요.”
“응, 만나야지. 여기 있으면 올 거야.”
“여기로 온다고요?”
“기다리면 올 거야. 집도 모르는 데다 전화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갈 순 없잖아.”
“수한 씨가 이렇게 대책 없는 사람이었어요?”
“아주 계획적이라니까. 일단 이리 앉아. 내가 주문하고 올 테니까.”
분명 이곳은 흔하디흔한 도넛 가게지만 산호세에 출장 오는 반도체 관련인에겐 워즈 도넛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워즈니악이 아침마다 도넛과 커피를 즐기러 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하자 워즈니악은 ‘난 커피와 도넛으로 하루를 시작해. 그게 훨씬 더 즐겁거든.’ 하면서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도넛과 커피를 즐기는 것 또한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으론 부족함이 없다며 하루도 빠짐없이 행하고 있다. 그를 만나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뾰료롱. 뾰로롱.
내가 커피와 도넛을 잔뜩 사서 자리에 앉자마자 입구가 열리며 센서가 울린다. 커다란 덩치에 짧은 목, 남산만 한 배, 얼굴을 뒤덮고 있는 수염, 다듬지 않은 머리…. 그런 생김새를 가진 사람은 지구상에 몇 없다. 산호세에서 본다면 그건 바로 워즈니악이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커피 하나, 도넛 세 개.”
“언제나처럼 초코 도넛 세 개 맞으시죠?”
“그렇지. 언제나처럼.”
“어쩌죠? 오늘은 언제나처럼이 안 되겠네요. 다 팔렸거든요.”
“으익! 벌써 다 팔렸다고?”
“저기 손님이 초코 도넛을 모두 사 가셨어요. 워즈니악 씨가 오시면 같이 나눠 먹겠다고 하기에 몽땅 팔았죠.”
“으잉?”
점원이 워즈니악과 농담 따먹기를 마칠 즈음 난 도넛 한 개를 흔들어 대며 워즈니악을 불렀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치 내가 자신의 신성한 의식을 방해라도 했다는 듯 말이다.
“이보시오. 그 많은 도넛을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몽땅 사 버리면 어쩝니까? 매일 아침 이것만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데.”
“하하, 매일 이런 걸로 아침을 해결하시면 의사가 뭐라고 할 것 같은데요.”
“의사 따윈 만날 일 없으니까 상관없소이다. 사람은 삶을 맘껏 즐기다 지저스가 부르면 가면 그뿐인 거요. 다 먹지 못할 거면 내게 세 개만 되파시오.”
워즈니악이 커다란 배를 들이밀고 낯가림 없이 잘도 말한다. 나는 그에게 내 옆의 자리를 권하며 살짝 웃어 주었다.
“수한 씨, 워즈니악 씨가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정말이네요.”
“하하, 난 그리 말하지는 않았는데. 단지 자유로운 분이라고 했지.”
“그대는 누구시오? 왠지 낯이 익은데.”
“저를 아세요? 저는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케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워즈니악 씨.”
“워즈라고 부르쇼. 케이? 케이, 케이… 아! 시카고 쇼케이스에서 늘 발표하는 아리따운 연사 아니시오?”
내가 자리를 권할 땐 멀뚱히 지켜보더니 케이가 말을 걸자 의자에 털썩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여자를 좋아하는 워즈니악답다. 그는 결혼을 네 번이나 할 정도로 여성 편력이 심하다.
“시카고 쇼케이스에 참석하셨던가요?”
“후후, 재미있는 장난감이 많이 나올 때는 아주 즐겁게 참석했다오. 스마트폰인가 뭔가 하면서 잡스가 애플 컴퓨터 역사의 자랑을 늘어놓기 전만 해도 말이지. 다 내가 한 건데 자기가 만든 것인 양 떠들어 대니 올해부턴 발길을 끊었다오.”
“에에, 스티브 잡스가 애플 PC를 만든 게 아니었어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하오? 다 내가 만든 거요. 하드웨어도 그렇고 초기 OS도 그렇고 모든 걸 다 내가 한 거요. 그 인간이 없었으면 난 HP에서 컴퓨터 사업부를 만들었을 테고, 세계 최초의 PC는 HP 이름을 달고 나왔을 거요.”
사실이다. 스티브 잡스가 대학 동창인 워즈니악이 PC라는 것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사업을 제의했다. HP에 근무하고 있던 워즈니악이 PC 사업부를 만들자고 상사를 설득하는 와중에 말이다. 잡스가 꽤나 정성을 들였는지, 아니면 그 특유의 설득력이 먹혀들었는지 사업 자금도 워즈니악이 대면서 애플 PC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그 뒤로 몇 년간 승승장구하다가 워즈니악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며 2년간 휴직했을 때 애플의 사내 정치가 잡스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되고 사내 문화는 살벌한 경쟁 체제로 바뀌어 버렸다. 자신이 원했던 애플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애플 내에서 자신은 공돌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받은 워즈니악은 단박에 사표를 던져 버렸다.
순수한 공돌이에 가까웠던 워즈니악은 천재적인 사업가인 스티브 잡스에게 상대가 되질 않았다. 퇴직하고서도 벌이는 사업마다 온갖 소송으로 잡스에게 발목이 잡혔다. 잡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던진 데다 워즈니악의 협력 업체가 모두 애플의 협력 업체였기에 그랬을 거다. 오래전 일이지만 내가 이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면 누구 편을 들었을까?
“정말이에요? 전 처음 듣는 소리예요. 어째서 잡스는 그리 유명한데 당신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죠?”
케이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워즈니악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워즈의 말이 사실이야. 원래 실무를 담당한 사람이 세간에 알려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 지금 워즈도 나를 모르는 눈치잖아.”
“당신도 유명한 사람이오?”
“워즈, 제 남편을 모르세요? 세계적으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못지않게 성공한 사업가라고요.”
“에이, 설마. 그럼 내가 왜 얼굴을 모르겠소?”
워즈니악의 말에 케이는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억울해했다. 워즈니악이 나를 모른다고 하니 케이가 더 억울해하는 걸까? 여느 아내 못지않게 케이도 나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면이 없지 않다.
“설마라뇨. 우리 남편은 스마트 클라우드의 CEO인데! 한 해 매출이 500억 달러가 넘는 그룹의 CEO라고요.”
“스마트 클라우드? 어! 당신이 그 유명한 에일리언(외계인)이오?”
“외계인?”
“에일리언이 싫으면 지니어스 몬스터라 불러 드리리다. 어쨌든 반갑소이다, 수한.”
워즈니악이 솥뚜껑만 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째서 나에게 이리 호의적이지?
“반갑습니다. 별명까지 불러 주니 오래된 친구 같군요.”
“친구 맞소이다. 잡스의 적은 내 친구니까. 당신도 잡스가 내친 거 아니오? 자기 말 안 들었다고? 에이, 몹쓸 인간! 그 인간은 마케팅 능력의 100분의 1만 인간성에 써도 성자가 될 거요.”
“하하하.”
나는 웃고 말았다. 잡스에 대한 험담을 시작하면 워즈니악은 그와 잡스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하루 종일 늘어놓을 기세였으니까.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대부분이 욕일 테니 아침부터 그런 얘기를 듣기는 좀 그렇다. 나중에 술자리를 가진다면 밤새도록 들어 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죠? 제 남편이 당신을 스카우트하겠다고 달려왔는데 친구인 잡스를 그리 싫어하니.”
케이가 잡스를 나의 친구라고 한다. 역시 내 아내답게 사업과 개인사를 구별할 줄 안다. 심지어 내가 워즈니악을 어떻게 도발할지 뻔히 아는 눈치다. 나는 아내를 참 잘 얻었다.
“잡스가 친구라고? 스마트 클라우드와 애플은 갈라선 거 아니오? 신문에 대서특필했던데.”
“친구이자 경쟁자죠.”
“경쟁자는 친구가 될 수 없소이다.”
“될 수 있습니다. 동등한 힘이라면. 워즈가 잡스를 적으로 두고 있는 것은 동등한 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죠.”
“무슨 말이오?”
내가 속내를 찌르자 워즈니악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침부터 속 쓰린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이런 괴수를 데려가기 위해선 이 정도의 도발이 필요하다. 이렇게라도 찌르지 않으면 엉덩이 무거운 괴수는 산호세라는 둥지를 떠나지 않는다.
“제가 힘을 드리지요. 스마트 클라우드로 와서 원하는 시스템을 만드세요. 잡스의 올인원 패키지, 단순 미학을 뛰어넘는 당신만의 시스템 말입니다.”
“나의 시스템….”
“그걸 완성하면 당신의 명성은 잡스와 동격, 아니 나와 함께하니까 잡스 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
짝짝짝짝!
“오~ 멋져, 수한 씨! 그런 스카우트 제의는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말이야.”
옆에서 케이가 박수를 치며 좋아라 한다. 돈 얘기를 일절 꺼내지 않고도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게 너무 마음에 드나 보다.
이 괴수는 돈에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이다. 애플 주식을 공짜로 직원들에게 나눠줘 버린 양반이고, 정작 공짜 주식을 받은 애플 직원들에게는 호구 취급을 당했다. 심지어 공짜 주식을 받은 직원 중 한 명은 불우이웃 돕기 포스터 밑에 ‘워즈니악의 미래 모습’이라며 낙서를 해 놓기까지 했을 정도다. 그런 애플의 사내 문화를 이 양반이 견디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는 돈을 좇는 대기업에 다시는 입사할 생각이 없소이다.”
“우리 회사가 대기업이긴 하지만 나는 돈만 좇는 경영자가 아닙니다. 우리 회사의 모토를 혹시 아십니까?”
“내가 어찌 아오?”
“고객은 고객일 뿐, 임직원이 왕이다. 그게 내 회사의 모토입니다.”
“고객은 고객일 뿐, 임직원이 왕이다.”
“마지막엔 ‘우리는 부자가 될 거다.’라고 끝나죠.”
“우린 부자가 될 거다….”
“난 귀족이 될 거고요. 워즈도 나와 함께 귀족이 되어 보시죠. 우리 임직원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고.”
“귀족!”
“너무 멋져, 수한 씨!”
오늘따라 케이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어젯밤 공항 옆 호텔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눴더니 로맨틱한 콩깍지가 유독 두꺼워졌나 보다.
나는 정말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다. 상처받은 자존심의 회복과 귀족이라는 명예는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채찍과 당근이다. 나는 두 가지 모두를 휘두른 다음 초코 도넛과 커피를 즐겼다.
갑자기 멍해져 버린 워즈니악에게 커피를 권했다. 뚜껑을 닫아 놨기에 아직 뜨겁다. 쌉쌀하고 뜨거운 커피에다 미칠 정도로 달콤한 도넛. 채찍과 당근은 이처럼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내 여기 집을 팔고 한국으로 가리다.”
“팔지 마세요. 별장은 여기 두셔야죠. 한국 집은 제가 마련해 드리죠.”
“연봉에 포함이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괴수는 원래 둥지가 여러 개지 않습니까. 그중 한두 개는 제가 마련해 드려야죠.”
“하하하.”
“한국에서 몇 년만 애써 주시죠. 시스템이 셋업되면 버지니아에 신입사원 연수원을 만들 생각입니다. 트윈 픽스라고 경치 좋은 곳인데, 거기에도 둥지를 하나 마련해 드리죠. 당신의 가치관을 우수한 스마트 클라우드 신입 사원들과 함께 나누시죠. 즐거운 시간이 될 겁니다.”
“허허허.”
“귀족의 세컨드 라이프로는 아주 적당하죠.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 날 언제 데려가실 거요?”
워즈니악은 내 조건이 정말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의 콤플렉스는 자신이 주창했던 개발자 위주의 사내 문화가 애플에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 그런 그에게 신입 사원들 교육은 연봉 이상의 가치가 있다. 신입 사원들도 좋아할 것 같다. 연수를 해외에서, 그것도 경치와 시설이 끝내주는 곳에서 세상에 PC를 제일 먼저 내놓은 사람의 강의를 들을 수 있잖나.
“오늘 당장!”
“좋소. 내 최대한 빨리 스마트 클라우드에 합류하겠소. 한 가지만 물읍시다. 당신의 경쟁자는 잡스, 그럼 내 경쟁자는 누구요?”
“짐 켈러!”
“듣도 보도 못한 자이오만.”
“당신 못지않은 괴수죠. 원래 진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
“하하하하하하. 최근 들은 농담 중에 최고로 재미나군!”
“으음?”
“나를 능가할 괴수는 딱 한 사람. 당신뿐이오. 그 외엔 다 내 아래외다.”
“하하하하. 날 높이 평가해 주니 고맙군요.”
“나를 고용하지 않았소이까! 하하하하!”
그 뒤로 우린 도넛과 커피만으로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케이가 중간중간 끼어드니 워즈니악은 온갖 에피소드를 풀어냈다. 특히 그의 대학 시절, TV 리모컨을 개조해 미식축구를 보고 있는 기숙사생들 앞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방해전파를 쏴 대며 장난을 쳤던 에피소드에서는 케이가 자지러졌다. 뚱보 아저씨가 공학도들이 화를 내는 장면을 흉내 내니 그토록 웃길 수가 없었다.
“이곳을 정리하는 대로 한국으로 가겠소이다.”
“그러세요. 저도 미리 준비를 해 두죠.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연말은 지나야 되지 않겠소? 크리스마스는 보내고 가야지.”
“그래야죠.”
‘아,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하나. 윌슨이 왔다면 바로 계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했던 후회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단박에 넘어오리라고는 나도 생각지 못했다. 일이 아주 잘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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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K 전 세계를 강타하다. 단일 품목으로 최단 기간 수출액 20억 불 돌파」
「코스닥, 개장 이래 최대 상승폭 기록. IT 종목 70% 이상 상종가」
「2003년 경제 성장률 3.5%로 상향 조정」
「한국 경제 쌍끌이 성장. IT와 중공업 수출이 북미와 중국 시장을 모두 강타」
쇼케이스를 마친 지 채 보름이 되기 전에 온갖 신문에서는 노트 K 관련 기사가 대서특필 보도되었다. 하긴 보름 만에 대당 700불이 넘는 제품이 300만 대 이상이 팔려 나갔으니 업계가 들썩일 수밖에. 심지어 윈도우폰, 아이폰이 경쟁이 붙어 한국의 반도체는 재고가 쌓일 틈도 없이 팔려 나갔다.
“수한아, 워즈니악을 스카우트했다는 게 사실이야?”
“응. 윌슨이 여태 자리를 비운 이유가 바로 그거야. 아마 열심히 계약하고 있을걸.”
“이야, 조만간 전설적인 인물과 같이 일하겠네.”
오랜만에 재훈이와 만나 얘기를 나누니 워즈니악이 먼저 화제에 올랐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이들에게 워즈니악은 말 그대로 전설이니까.
“서버 사업과 부품 쪽을 묶어서 부사장으로 임명할 계획이야. 협업 잘해 봐.”
“부사장? 그 정도 인물이면 사장 자리를 줘야지.”
“아냐. 상무를 줄까 했는데 그나마 한 직급 높인 거야. 그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돼. 기존 임원들과 동격으로 두고 자신의 힘으로 사장 자리에 올라가야 자존감이 회복될 거야.”
“하긴, 칩거한 이유가 그거였지?”
“자세한 얘기는 워즈니악이 합류하고 나서 하고, 요즘 앱 개발은 어찌 되어 가고 있어? 안드로이드는 어떻고?”
내가 바쁜 재훈이를 불러들인 이유였다. 노트 K가 각광을 받고 있지만 애플의 아이폰도 그 못지않게 북미에서는 인기를 끌고 있다. 이번 아이폰은 잘 팔릴수록 내 반도체 부품 또한 잘 팔리는 격이지만 그게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진 않다. DRAM은 마이크론이, AP는 AMD가 차지할 게 아닌가.
우리도 앱의 개수를 미친 듯이 늘려야 하는 시기다.
“걱정 마. 앱 개발은 코스닥 상장 회사들의 목숨줄과 다름없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우리 회사로 접촉해 온다니까. 현재 기준으로 앱 개수가 3천 개를 돌파했어. 애플 스토어와 엇비슷해.”
“애플은 몇 개인데?”
“4,800개쯤 될 거야.”
100만 개가 넘는 앱 시장을 보고 온 내가 수천 개라는 숫자에 놀랄 이유는 없었다. 단지 그 성장률이 궁금하다.
“언제쯤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성장률은? 그리고 안드로이드 개발 코드는 시장에서 반응이 어때?”
“아주 좋아! 아주! 앱 수익 배분을 우리가 10%, 그리고 통신사 몫도 10%로 제한한 게 주효했어. 앱 등재 속도가 매일 갱신되고 있어서 성장률을 측정하기조차 어려워. 이런 속도로 가면 안드로이드 앱은 한 달에 2천 개 이상 등재될 거야.”
“애플이야 30% 수익 배분율을 바꾸진 않을 테고, 윈도우폰은 어때? 그쪽도 개발 코드를 풀었을 거 아니야.”
“그걸 좀 걱정했는데 안심해도 될 것 같아. 수익 배분은 우리와 똑같은데, 코드 자체가 엉망이야.”
“엉망?”
“개발자들이 학을 떼고 있어. 윈도우 코드를 풀어놓은 라이브러리가 버그투성이야. 버그 잡느라 앱 출시를 못 할 정도라니까. 이미 한국 기업은 개발 자체를 포기했어.”
윈도우폰의 악평이 드디어 시작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2~3년 정도는 시장에서 유통될 것이다. MS가 중국에 투자해 놓은 공장을 내가 꿀꺽할 수 있는 기한이 길어야 2~3년이라는 의미다.
재훈이는 윈도우폰의 몰락을 단언하며 한참 동안이나 이런저런 단점을 꼬집었다. 전문가가 보기에는 윈도우 모바일 OS가 스마트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너무나도 확연한가 보다.
“악평은 그쯤 하고 연구소로 가자. 사람들이 기다릴 거야.”
“오라고 해서 오긴 했는데, 반도체 설계 콘셉트 회의라며? 굳이 내가 필요하냐?”
“이제부터 필요해. 안드로이드와 앱 개발자들도 알아야 하는 일이지만, 그 모든 걸 네가 관장해야 하니까 참석하라고.”
“으잉?”
재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도 멀티코어 AP에 대해서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전문가들에게 숙제를 내 줬으니 연구소에서 논의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 *
스마트그룹 종합 연구소.
디자인실이 맨 꼭대기 층에 있다면 반도체 연구소는 1층에 있다. 워낙 무거운 장비들이 많아서 건물 위층에 두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설계실이 반드시 1층에 있을 필요는 없지만 같이 있는 게 시너지가 좋기에 한쪽 구석에 모여 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오 사장님.”
“쇼케이스 이후로 처음인 것 같습니다.”
“오 사장님이 쇼케이스 마무리하느라 힘들었던 거 다 압니다. 그 덕분에 내가 괴수를 영입했잖아요.”
오 사장답지 않게 보름 이상 지난 쇼케이스를 언급하기에 말을 보태 주었다. 정말 힘들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다음 날부터 내 발표까지 떠맡아야 했으니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한국인에게 영어로 발표하는 것은 아무리 연습해도 힘든 일이다.
“아, 예. 여하튼 오늘 말씀하신 대로 M 프로젝트의 콘셉트를 어느 정도 확정했습니다.”
M 프로젝트는 멀티코어 AP를 통칭하는 코드명이다. 대기업에선 의도적으로 약자를 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불량이 발생하면 불량에 번호를 붙여 번호로 부르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보안도 보안이지만 관련자들 사이에선 소통이 외려 쉬워지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멀티코어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과제’보단 ‘M 프로젝트’가 대화하기 쉽고, ‘알루미늄 증착 불량으로 회로 끊어짐 불량’은 ‘Al 2361’이란 코드명으로 부르는 게 더 쉽다.
“개발팀도 의견을 보탰나요?”
“예. 개발팀장들이 모두 의견 개진을 했습니다. 디자인 룰, 공정 불량, 신뢰성 등등 할 수 있는 한 기존 경험치를 녹여 냈습니다.”
김 부사장의 말투를 보니 연구소와 나름 이견 조율을 꽤나 했나 보다. 보름 정도로는 극히 부족한 시간일 테지만 콘셉트를 논의하고 설계를 뜯어고치고 있다 보면, 워즈니악이라는 회로 설계의 괴수가 합류할 테니 마무리는 그에게 맡기면 된다.
“워즈니악이 합류하면 전체 설계 아키텍처는 바뀐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허니 오늘은 AP에 들어가야 하는 필수 요소에 대해서 논의를 해 보죠. 파이오니아에서도 준비할 사항을 좀 알려 주고요.”
“예, 회장님. 먼저 ARM 코어를 두 개 배치하는 데 있어 갈림길에 있습니다. 그래픽 프로세서를 센터에 두고 양쪽으로 코어를 갈라서 배치할 것이냐, 아니면 코어 두 개를 센터에 두고 그래픽 프로세서를 외곽으로 뺄 것이냐, 그것부터가 문제입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요?”
“정확히 50 대 50입니다. 발열 제어와 연산 스피드의 장단점이 명확해서 설계자와 개발자 모두 의견이 갈립니다. 실제로 양쪽 시제품부터 만들어 보자는 의견도 있고요.”
“하하, 코어를 센터에 두세요. Thermal via(열이 빠져나가는 통로)를 칩 하부에 두시고요. 그리 말하는 설계자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회장님께서 설계 쪽 의견에 손을 들어 주신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오 사장이 살짝 웃었고, 김 부사장이 보이지 않게 인상을 찌푸렸다.
“김 부사장님, 패키지에서 고생 좀 하셔야겠네요.”
“예, 회장님. 걱정 마십시오.”
김 부사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말에 표정을 훅 하니 바꾼다. 말이 쉽지 반도체 패키기 설계에서 열이 빠져나가는 통로를 확보하려면 신뢰성 문제가 심각해진다. 반도체 패키지에 넓적한 금속판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주변에서 자잘한 불량이 끊이질 않거든.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AP의 전체 성능을 떨어뜨릴 수는 없지 않나. 듀얼코어는 열이 많이 난다.
“그리고 캐시 메모리를 따로 분리할 거냐, 아니면 코어에 바로 붙일 거냐도 문제입니다. 캐시 부분을 따로 빼낸다면 칩 사이즈는 10% 정도 늘어나야 합니다.”
“이건 영업 쪽에서 문제 삼았을 것 같군요. 권 부사장님.”
“예, 칩 사이즈가 10% 늘어나면 웨이퍼당 칩 개수가 15%가량 감소합니다. 원가가 15% 이상 늘어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개발자들이 뭔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설계자야 설계가 쉬워지니 따로 떼어 내고 싶을 테고, 개발자들은 어떤가요?”
“공정 측면에서는 저희도 따로 떼어 내고 싶습니다. 코어 부분과 캐시 부분은 회로 선폭 자체가 다릅니다. 칩 사이즈를 줄이겠다고 합친다면 불량률이 올라가서 결국 원가는 재차 상승합니다.”
“그걸 개발자들이 극복해야죠.”
이런 식의 의견 충돌은 끝이 날 수가 없다. 이래서 내가 콘셉트 회의를 하는 것이다.
“으음, 싸울 필요 없습니다. 이번엔 시간이 없으니까 돈이 좀 들어도 떼어 내세요. 그리고 캐시를 코어에 합치는 일은 차기 프로젝트로 미루고 연구소에서 솔루션을 만드시죠.”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영업 쪽 의견은 좀 다릅니다.”
“권 부사장님, 떼어 내야 합니다. 차기 스마트폰은 멀티코어를 반드시 적용해야 해요.”
“올해 쇼케이스에서도 경쟁사에서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멀티 CPU 전략은 윈도우 NT에서 실패를 겪었던 일입니다. 모바일에서 그렇게 급격하게 바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역시 쓴소리는 권 부사장이 제일 잘하는 편이다. 나 또한 이런 쓴소리를 기본으로 나비효과의 정도를 파악하니 서로 윈윈이라고 할 수 있다.
“데스크톱에서는 일부 실패를 했지만 스마트폰에는 배터리 사용 시간 한계라는 변수가 또 있습니다. 멀티태스킹도 데스크톱 못지않고요. 멀티코어 적용은 필수가 될 겁니다.”
나는 굳이 애플의 짐 켈러가 멀티코어 기술을 들고 나올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잡스가 짐 켈러의 영입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던 건 그가 멀티코어 AP를 개발할 줄 아무도 모를 거라 여겼기 때문이니까.
“경쟁사가 멀티코어를 들고 나온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 회사는 너무 큰 무기를 너무 앞선 시기에 내놓는 꼴입니다.”
권 부사장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 기술을 너무 이른 시기에 내놓으면 비싼 가격으로 소비자들에게 외면받기 일쑤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합시다. 스마트폰 가격이 올라가는 걸 통신사의 지원금으로 메울 수 있도록 협의해 주세요. 그게 차기 모델에서 영업의 숙제입니다.”
“굳이 오버 스펙에 통신사가 돈을 지불한다고 할 리가….”
나는 오히려 권 부사장에게 숙제를 줬다. 가격만 상승하지 않는다면 소비자가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다. 물론 통신사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파이오니어 입장에서 본다면 멀티코어는 필수예요. 절대 오버 스펙이 아닙니다.”
“으흠?”
“스마트폰 유저의 30%는 모든 스마트폰 작업을 음악을 들으면서 합니다. 그건 앱 개발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에요. 오히려 앱 개발자들을 배려해 준다면 캐시 사이즈를 늘려 주고, 메모리 컨트롤러 부분도 따로 떼어내 줘요. OS에서 컨트롤할 수 있게.”
대화에 끼어든 재훈이는 아예 한발 더 나아갔다. AP를 더 복잡하고 큰 사이즈로 만들자는 말이니까.
“사장님, 그렇게 디자인을 하면 칩 사이즈는 5%가 더 커집니다.”
“필요해요. 지금 AP에서 스피드 저하는 대부분 데이터를 메모리와 주고받을 때 발생합니다. 캐시 용량을 늘려야 실제적인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지고, 캐시 용량으로 처리 불가능한 것만 메모리 쪽으로 던져 주려면 컨트롤러가 따로 필요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보다 칩 사이즈를 더 늘리면 어쩝니까.”
“필수적이라니까요. 앱의 발전 속도는 권 부사장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입니다. 싱글코어로 오버 클럭을 시키다 보면 배터리가 몇 시간 안 갈 겁니다.”
재훈이 때문에 다시금 대화가 기술적으로 훅 하고 들어온다. 권 부사장은 입만 벌리고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앱 개발자 대표가 멀티코어가 필수적이라고 단언하니까.
짝!
“오케이. 이 자리는 콘셉트 회의입니다. 오늘 결론은 멀티코어 AP의 탑재는 필수라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연휴만 지나면 회로의 전설이 합류할 테니 그때 다시 한 번 모여서 얘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큰 화면에 AP 설계 가안이 5종이나 있었지만 하나하나 따져 볼 필요는 없을 듯했다. 모든 이들이 원하는 바가 다르니 말이다. AP 설계로 끝날 일도 아니다. 스마트폰 전체 회로를 보며 최적의 성능을 뽑아내는 것은 워즈니악이 합류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야~ 어쨌든 멀티코어가 나오면 앱 개발에 날개를 달 것 같습니다. 앱 개발자들에게 이 사실을 빨리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데요?”
“보안 유지는 필수인 거 아시죠?”
“그럼 멀티코어용 앱은 어찌 개발하나요?”
“OS에서 한꺼번에 해결하세요. 최소한 차기 모델에 한해서는. 그게 파이오니어의 숙제입니다.”
“그것 때문에 날 부른 거… 겁니까?”
나는 재훈이의 손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나는 파이오니어의 오너, 재훈이는 전문 경영인. 숙제는 누가 해야겠나? 당연히 내 친구다.
나는 개발, 연구소, 영업, 파이오니어까지 모두에게 숙제를 줬다. 워즈니악이 오기 전에 대충 사전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드디어 올해 내가 해야 할 일을 끝낸 기분이다.
- *
-징글벨~ 징글벨~
용인밸리 먹자골목 이곳저곳에서 캐럴송이 흘러나왔다. 나비효과인지 원래 역사보다 거리 분위기가 한층 활기찬 느낌이다. 하긴 올해 경제 성장률이 정부 계획보다 0.5%나 더 나왔으니 시중에 돈이 잔뜩 풀린 격이다.
이곳 용인밸리는 벌써부터 스마트그룹의 특별 보너스를 염두에 두고 가게마다 대형 회식을 유치하려는 현수막을 갖다 붙여 놓았다.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진 스마트그룹 직원들에게 뿌리는 돈이 수천억에 달하니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오늘은 가게들 입장에서는 대목이다. 크리스마스이브라 회식은 없겠지만 연인들이 잔뜩 몰리는 날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용인밸리 먹자골목은 서울 명동 못지않게 핫한 곳이다. 맛난 것도 많고, LK 멀티플렉스를 비롯해 극장도 즐비하고, 스마트 스토어와 버지니아 백화점도 가까이 있어 데이트하기엔 그만이다. 하늘에선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우와! 수한 씨, 꼭 언제 한번 와 봤던 느낌이에요. 이런 걸 데자뷔라고 하나요?”
“기억 안 나? 그날도 이렇게 눈발이 날렸어. 우리가 비디오방에 처음 들렀던 때가.”
“아! 그렇구나. 왜 난 거긴 다른 남자랑 갔다고 생각했지?”
“아이구, 그런 미국식 농담에 나 같은 한국인은 안 웃어. 화내지.”
“호호호호!”
케이는 시카고 출신답게 눈이 무척이나 반가운지 하늘로 두 팔을 뻗고 빙글빙글 돌면서 좋아라 했다. 내가 볼 때 케이의 기본 감정은 즐거움인 것 같다. 웬만해선 기분 좋은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다. 금수저의 특권일 수도 있겠지만 옆에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니 질투하기도 좀 그렇다.
나는 빙글빙글 돌며 크리스마스이브 분위기를 즐기는 케이를 자연스럽게 중앙 광장 쪽으로 몰아갔다. 원래 비디오방이 잔뜩 있던 곳인데 대부분 사라지고 게임방이나 보드게임방으로 바뀌었다. 정면으로는 LK라는 로고가 선명한 멀티플렉스가 보이고 각종 영화 예고편이 대형 디스플레이에 연이어 재생되고 있었다.
‘오케이. 여기지?’
나는 이미 앰프와 파워 케이블이 깔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케이를 멈춰 세웠다.
“케이, 오랜만에 영화나 볼까?”
“좋죠.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에 표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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