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미래를 안다는 것
「히딩크호, 2002 한일월드컵 16강 진출 자신하다」
「태극 전사들 A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팀을 상대로 승리할 것인가?」
「중국발 IT 호황, 세계 증시를 구원하다」
「차기 중국 공산당 지도부, IT 투자 규제 철폐를 공언. 글로벌 업체 중국 진출 가속화」
2002년 6월.
대한민국은 월드컵의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있기에 경제면에 실린 기사에 좀 더 관심이 갔지만 말이다.
“회장님, 말씀하신 대로 정밀 기계 쪽의 매출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권재욱 부사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나에게 자료를 내밀었다. 정말이지 매출 그래프가 수직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올해부터 정밀 기계는 순익다운 순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3년만 이런 추세를 유지한다면 일본 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로 5년째 정밀 기계 쪽에 투자를 해 온 나로서는 기쁘기 그지없다. 환란 때 인수한 기하정밀이 일류 회사로 거듭난다는 의미니까.
“고객은 그쪽이겠지요?”
“예. MS와 노키아가 연합해서 중국 공장을 세운다고 합니다. 중국 법인의 말로는 깜짝 놀랄 정도라고 하더군요. 공장 설립 인가가 단 사흘 만에 모두 끝났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 공장도 세우면 되겠네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일단 연 천만 개 생산 기준으로 공장을 세우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결국 10년쯤 지나면 철수해야 하는 공장이다. 중국 진출이라는 상징성이 중요하니 굳이 생산 캐퍼를 천만 대 이상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국 법인을 통해 설비 셋업 엔지니어도 파견하고, 신규 공장의 구매 담당자들에게 핸드 터미널도 대폭 할인해서 공급하세요.”
“아… 예. 그런데 정말 그리해도 됩니까? 경쟁사 공장 셋업을 적극 도와주는 셈인데.”
“하하, 걱정 마세요. 결국 윈도우폰은 폭망하고 그 공장들은 중국 로컬 업체로 둔갑할 것이며 모두 우리 반도체 고객이 될 테니까요.”
“그건 수차례 말씀하셨기에 머리로는 이해를 합니다만, 그래도 중국 로컬 업체도 우리의 경쟁사가 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단순히 스마트폰 제조업체라면 위험한 도박이겠죠. 하지만 우리 반도체도 팔고, 결국 OS도 팔게 될 겁니다. 스마트폰이 촉발시킬 중국의 전자상거래도 우리 것이 될 거고요.”
이제 노트 K를 기반으로 안드로이드가 OS의 한 축으로 떠오르기만 한다면 내 그림은 예측이 아니라 사실이 될 것이다. 문제는 MS의 윈도우 모바일이 그다지 성공적인 OS가 아님이 증명되어야 한다.
“회장님, OS라고 하시면 애플파이의 안드로이드 OS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그, 그건 오픈소스로 개발하는 것 아닙니까. 유료 소프트웨어가 아닙니다만.”
“권 부사장님, IT 업계에서는 직접 파는 것만이 매출이 아닙니다. 공짜 OS를 팔아도 애플리케이션이며 스마트폰이며 모든 것이 하나의 생태계로 묶입니다.”
“회장님, 계속 부정적인 말씀을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그런 전략을 진짜로 실행하시면 애플과의 동맹이 유지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스마트폰 시장은 애플의 OS로 통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통합되고 있기에 하 빨리 빠져나와야죠. 꽃밭이 아니라 수렁입니다. 처음 시작을 같이했을 뿐, 이제는 애플도 우리도 독자 노선을 걸어야 하는 겁니다.”
“안드로이드 OS를 애플 OS에 견줄 수 있을까요? 개발자가 불과 서른 명밖에 안 되는데.”
“서른 명이 아니에요. 수만, 수십만이에요. 오픈소스잖아요.”
“허헉!”
“여하튼 애플과 얘기를 할 타이밍이긴 합니다. 월드컵 끝나고 시제품을 언론에 노출시키세요. 그때 잡스와 얘기를 나눌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권 부사장은 그제야 나에게 묵례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회사의 리더들은 내 말에 무조건 예스를 하지 않는다. 이처럼 끝까지 묻고 답을 얻기 전에는 말이다. 권 부사장이 알겠다고 했으니 사안의 당위성을 상호 검증한 것이다.
팔랑팔랑.
일어서는 권 부사장의 발밑으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A4 용지를 반으로 찢은 종이였다. 주워 주려다 피식 웃고 말았다.
「대한민국:폴란드, 1:0, 10만 원」
그러고 보니 오늘 대한민국과 폴란드의 경기가 있다. 권 부사장은 한국이 1:0으로 승리한다에 10만 원을 걸었군.
“아니, 부사장님, 10만 원이 뭡니까? 대스마트그룹의 부사장님이신데.”
“앗. 하하, 제가 너무 많이 걸면 직원들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2 대 0은 돼야지. 1 대 0이 뭡니까?”
“폴란드가 유럽의 강호라….”
“뭔 강호예요. 이제 우리나라 축구도 한 끗발 하는데.”
권 부사장이 언제 한 끗발 했냐는 표정을 짓는다. 아, 미래에서는 한 끗발 한다고요.
“나도 걸죠. 2 대 0에 200만 원.”
“오홋! 200만 원씩이나요?”
권 부사장은 내가 회식비 보태려고 작정을 했군, 하고 짐작한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오늘 맥주 한잔 하면서 보시죠. 총괄 영업팀도 모두 같이요.”
“오, 그러시겠습니까?”
오랜만에 축배를 들고 좋지 않나. 사람들은 태극 전사의 승리에 환호하고, 나는 스마트 클라우드가 드디어 세계무대로 나가는 것을 축하하고 말이다.
- *
2002년 6월 18일, 월드컵 16강 대한민국 대 이탈리아전.
다시 봐도 역대 최고의 명승부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기 직전 설기현 선수가 동점골을 뽑아냈고, 이제 안정환 선수가 반지에 키스를 할 차례다. 내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다. 설마 이런 명승부에 나비효과가 있지는 않겠지 하면서 말이다.
-이영표 크로스 올립니다.
-어어, 안정환 헤딩. 어어어어헉! 골입니다. 헤딩골입니다.
-아아아아악! 안정환 선수의 헤딩골이 골대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한국이 이겼습니다. 태극전사들이 아주리 군단을 물리치고 8강에 진출합니다.
-8강입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월드컵의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국민 여러분 기뻐합시오. 8강입니다.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빠바빵! 빵빵!
앵커와 해설자마저 흥분해서 마이크가 터져라 소리를 쳤다. 용인밸리 운동장도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나는 오늘 그룹 전체를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고 사내 운동장에 대형 프로젝트 TV를 설치해 응원할 사람은 응원하라고 했다. 설비를 멈출 수 없는 반도체 라인에서는 사내 방송으로 틀어 대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전체가 오늘 밤은 잠들지 못할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둥둥둥둥둥.
“대~한민국!”
짜짜짝-짝짝!
어디선가 커다란 북을 울리고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쳤다.
“대~한민국!”
짜짜짝-짝짝!
“와아아아아!”
대한민국을 외치고,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고, 그러다가 또 환호성을 지르고, 맥주를 머리 위로 샴페인처럼 쏟아붓고, 온통 난장판이다.
“수한 씨! 이거 엄청난 드라마예요!”
“축구 정말 재밌지! 이게 바로 대한민국의 축구라니까!”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대한민국과 이탈리아의 16강 대전은 케이조차 감격할 정도로 역대 최고의 명승부다. 지금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케이와 얘기를 하는 것도 고함을 질러야 겨우 들릴 정도다. 16강 예선이었던 폴란드전을 회사 사람들과 즐겼다고 케이에게 아주 혼쭐이 났기에 이 경기만큼은 같이 응원을 왔다.
“케이, 여기 있을 게 아니야. 거리로 달려가야 해.”
“거리로요?”
“그럼! 오늘은 광란의 밤이라고. 평생 딱 한 번뿐인 파티란 말이야.”
나는 케이의 손을 잡고 호프집이 밀집한 골목길로 마구 달려갔다. 먹자골목 근처로 오니 벌써부터 난리 법석이다.
“따라 해 봐, 케이! 대~한민국!”
“대~한민국!”
짜짜짝-짝짝!
빠바빵-빵빵!
“하하! 어때?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오지? 하하하하!”
사람들이 호프집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축제의 시작이다. 48년 만에 월드컵 첫 승을 신고한 태극전사들이 16강을 돌파하는 기적을 쓰고 있잖나. 평생 2002년 월드컵 같은 환희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시 겪어도 짜릿하기 이를 데 없다. 이처럼 온 국민이 열광하는 스포츠가 또 있을까.
“대~한민국!”
짜짜짝-짝짝!
여기저기서 붉은 악마의 구호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고 우리는 열심히 따라 했다.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딱 두 개 남아 있는 맥주 캔을 사 들고 나왔다.
“케이, 건배!”
“대한민국 파이팅!”
“와하하하하!”
케이와 건배를 하며 맥주를 입으로 쏟아 넣었다. 맥주가 입으로 들어가는 양보다 입 밖으로 흘러넘치는 양이 더 많다. 무슨 상관인가? 원래 거리 파티에서는 맥주를 흘리며 먹는 게 기본 예의다.
-아아아아악! 안정환 선수 헤딩골이 골대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한국이 이겼습니다. 태극전사들이 아주리 군단을 물리치고 8강에 진출합니다.
-8강입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월드컵의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안정환 선수의 골든 골 장면이 끊임없이 TV에 재방송되고 있었다.
나는 2002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서구 열강에 대한 열등감을 씻어 버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시아의 맹주는 대한민국이라는 확신을 온 국민이 공감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선수들의 표정부터 다르다. 1990년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감격에 겨워 울었다면, 21세기 축구 국가대표들은 환하게 웃으며 승리의 기쁨을 한껏 즐기고 있잖나.
부다다다다다다!
“으아아아아아~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짜짜짝-짝짝!
빠바빵-빵빵!
누군가 태극기를 든 채 오토바이를 타고 차도를 질주한다. 오픈카처럼 선루프를 열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차도 부지기수다. 트럭도 있다. 질주하는 사람들 때문에 멈춘 차들도 짜증을 내기는커녕 박자에 맞춰 경적을 마구 울려 댄다.
“오오오오! 파티예요! 거리 전체가 파티! 와우우우!”
“평생 딱 한 번뿐인 파티야! 이런 날엔 집에 일찍 들어가면 안 되는 거야!”
나는 케이와 함께 새벽녘까지 거리의 파티를 즐겼다. 거리엔 경찰관도 있었지만 눈앞의 난장판에 호루라기를 불기는커녕 ‘오늘 같은 날엔….’ 하는 표정으로 파티를 같이 즐겼을 정도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정서는 ‘한’이 아니라 ‘흥’이다.
1990년대라는 시대가 월드컵을 기점으로 완전히 접혔다.
- *
삐리릭.
“여보세요.”
-유 회장, 날세.
“예, 정 회장님.”
-드디어 오늘 MS에 반도체 부품을 납품했다네. DRAM, 플래시만 1억 불어치를 납품하고 구동칩은 시제품을 보냈다네.
“오! 축하드립니다. 구동칩을 벌써 만들어 내신 겁니까?”
-석 달간 엔지니어들이 밤잠을 설치며 힘써 준 덕분이지. 여하튼 그것 때문을 전화를 했네. 구동칩 샘플을 보내 줄까 해서 말일세.
“그러시면 MS와 계약 위반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동맹이라고 해도 고객과의 약속을 어기시면 어쩝니까?”
-역시, 유 회장이군. 내가 자네를 좋아하는 이유일세.
정 회장은 내가 이럴 거라고 믿고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으니 전화는 한 것이리라. 정 회장조차 나를 동격 이상으로 대해 주고 있다.
“하하, 이왕 중국으로 수출하는 거 중국 로컬 업체도 뚫어 놓으십시오.”
-MS가 중국으로 물건으로 보내라고 하는 것도 알고 있었나?
“당연하죠. 제 메인 경쟁자가 중국 공장을 세우는 걸 모르면 어쩝니까? 사실 스마트그룹에서 만든 설비를 가져다가 셋업하고 있답니다. 하하!”
-하하하! 그랬나? 이것 참 MS는 정말 고마운 고객이구만. 다방면으로 돈을 써 주니 말일세.
“이번 기회는 중국 진출의 교두보가 될 터이니 대현도 반도체 영업 법인을 중국에다 세우십시오. 저가 자투리 반도체는 개성공단을 이용하면 어느 정도 물량을 확보할 수 있잖습니까.”
-오, 중국 로컬 업체까지! 무슨 뜻인지 알겠네. 내 유 회장에게 전화를 할 때마다 돈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 같으이. 내 꼭 보답을 하겠네.
“대형 TV 있는 곳에서 맥주나 한턱 쏘십시오. 월드컵 보면서 공짜 술이나 마시게 말입니다.”
-하하, 그것도 좋지. 수정각에 TV 좀 걸어 놓으라고 해야겠군. 이번 8강전은 우리에겐 마지막 결승전이나 다름없으니 LK 구 회장도 불러서 같이 즐기세.
“에이, 8강전이 마지막이라니요. 4강까지 갈지 누가 압니까. 이번 국가대표는 기존과 차원이 다르잖아요.”
-4강? 월드컵 첫 승에 기뻐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4강까지. 하하, 정말 그리된다면 평생 잊지 못할 월드컵이 되겠구만.
“월드컵도 그렇고 나라 전체가 한 단계 올라간 느낌입니다. 회장님도 이번 MS 건으로 하늘 한번 날아 보십시오.”
-고맙네. 모두 자네 덕분이네. 그럼 나는 8강전을 같이 보고, 개성공단에나 좀 다녀오겠네. 간 김에 자네 반도체 조립 공장에 오더를 넣어도 되겠나? 요즘 스마트 클라우드는 12인치 웨이퍼로 돌아서서 개성 공장 설비가 놀고 있지 않나?
“8인치도 일부 있으니 마냥 놀고 있지는 않을 테지만, 비어 있는 캐퍼는 있을 겁니다. 대현이 채워 주시면 고맙죠.”
정헌몽 회장도 장사꾼이긴 매한가지다. 돈 되는 사업 아이템이 나오면 방향 설정에다 실행 방안까지 주르륵 생각해 낸다. 그러고 보니 개성공단에 세운 반도체 조립 공장은 앞으로 대현이 사용하는 빈도가 훨씬 높아질 것 같다. 나야 8인치를 12인치로 계속 바꿔 가고 있으니, 내후년 정도에는 정말 개성의 공장을 대현에 팔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이 잘되니 너무 좋군. 한데 그럴수록 왠지 기분이 묘해지는군.
“왜 그러십니까?”
-아…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호사다마라고 일이 이 정도로 잘되면 큰 일이 한 번씩 벌어지지 않았나. 유 회장, 정말 MS를 이길 만한 무기는 있는가?
“아이고, 기우일 뿐입니다. 11월 신제품 출시할 때만 기다리고 있는걸요.”
-다행이군. 그럼 8강전은 수정각에서 같이 봅세. 아, 부부끼리 같이 오면 더욱 좋고.
“회장님도 사모님께 한 소리 들으셨나 보군요. 남자들끼리만 봤다고 말입니다.”
“하하하하하! 역시 유 회장은 족집게야, 족집게!”
“하하하하하!”
그렇게 농담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일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다. 호사다마라니, 신성을 저 멀리 보내 버린 뒤로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내 나비효과도 MS나 노키아엔 그다지 크지 않으니 윈도우폰이 쓰레기를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호사다마라. 이때쯤 무슨 일이 있었더라? 월드컵 4강으로 전국이 축제 분위기였는데 별다른 일은… 어, 그러고 보니 3, 4위전은 묵념으로 시작을 했었지. 왜 그랬지? 아! 4강전 당일 날….’
머릿속에 갑자기 ‘연평해전’이라는 단어가 번쩍하고 떠올랐다. 다른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그것만큼은 뚜렷했다. 3, 4위전에서 국가대표와 관중 모두 묵념을 하고 난 뒤에 경기를 시작했으니까.
톡. 톡. 톡. 톡톡톡톡톡.
‘이걸 어쩌지? 어떻게 막아야 하나? 꽃 같은 청춘이 개죽음당하는 꼴인데. 게다가 이건 두고두고 대한민국 정부의 오점으로 남는 일이잖나. 그런데 어떻게 막지?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고 대통령한테 말할 수도 없고… 이건 내가 나서기엔 너무 큰일인데….’
나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릴 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이 경우엔 해당되지 않는다. 이 사건은 북한이 의도적으로 행한 일이기에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복권 당첨처럼 사건 발단 자체가 우연인 경우는 역사가 달라질 수 있지만, 이건 그게 아니다.
‘꽂게잡이 어선을 서해 위쪽으로 대거 올려 보내? 아니야, 내가 꽃게 사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의도를 의심받을 수 있어.’
톡. 톡. 톡.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미쳤나? 김정일이 내 경고를 듣고 알겠다고 할 건 아니잖아.’
톡. 톡. 톡.
‘장인어른한테 도움을? 아니야, 내가 그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알릴 수가 없잖아.’
톡. 톡.
‘잠깐만. 정보의 출처를 밝힐 수 없는 곳에서 알아냈다고 하면….’
무슨 생각이 번쩍하고 들었지만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일을 진짜로 해야 하는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다.
쾅!
“그래, 결과야 어찌 되든 정보는 흘리고 보자. 되면 좋고 아니면… 으으윽.”
나는 결심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 *
나는 장인인 루이스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20분째 설명을 하고 있다.
-자네, 지금 그 말이 사실인가?
“예. 출처를 밝힐 수는 없지만 북한이 도발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제가 대한민국 정부에 바로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북한이 월드컵이라는 국제적 축제에 찬물을 끼얹으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싶어 한다고 설명해 줬다. 실제와 다르지 않은 정보다.
-하긴 그런 극비를 알고 있다고 하면 간첩으로 오인받기 딱이지.
“오해 안 하셨으면 합니다. 중국 고위층과 거래를 하다 보니 우연찮게 알게 된 정보입니다. 모른 체하기가 어렵더군요. 그렇다고 저를 드러낼 수도 없고.”
-내 사위가 곤란하다니 내 도와줘야지. 주한미군이 알아낸 정보라고 하면 한국 정부도 달리 보겠지.
“장인어른께서 적당히 정보를 흘려 주십시오. 저는 좀 숨겨 주시고.”
-문제없네. 대신 이번 여름휴가는 시카고에서 보내는 게 어떤가?
“그리하겠습니다.”
-자네도 일만 하지 말고, 그 뭐… 아이도 얻고 해야지. 케이가 평생 젊은 것도 아니고.
“아, 예….”
이런 심각한 얘기 도중에 우리 부부 얘기를 하다니, 루이스 장군답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루이스 장군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주한미군에 한국의 서해 쪽에서 해상 테러 방지 기동 합동 훈련을 제의해 보라고 해야겠군. 비상 경계령을 내릴 수밖에 없으니 섣불리 도발을 하지는 못할 거야. 한일 월드컵은 세계적 이슈이니 명분이야 괜찮을 걸세.
미군은 911 테러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대테러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루이스 장군의 말처럼 명분은 충분해 보인다.
“대규모 훈련보다는 그냥 남북 충돌이 없게끔만 해 주십시오.”
-원래 계획만 발표하면 해당 지역의 군인들은 군기가 바짝 들게 되어 있네. 적이 도발할 거라는 정보만 있으면 대한민국 해군이 북한에 당할 군사력이 아니야. 원천 봉쇄가 가능하니 걱정하지 말게.
미국인이 대한민국 해군을 치켜세우니 내가 다 무안할 지경이다. 아예 DJ한테 직접 말할 걸 그랬나? 아니다. 이 방법이 맞다. 이런 일에 나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장인어른께서 알아서 하실 거라 믿습니다.”
-군사 압박은 언제나 경제 압박과 동반되어야 효과가 있는 법이네. 자네도 할 일을 하게.
“제가… 어떻게?”
-북한에 공장을 세웠다고 하지 않았나? 여차하면 공장 불 꺼 버리겠다고 협박하게.
생각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괜히 일만 키우는 꼴이지 않을까?
“…….”
-돈을 주는 사람이 피해를 입으면 안 되는 거네. 그걸 확실히 인식시키게. 북한 애들은 그걸 착각하는 애들이라 여태 저 모양 저 꼴인 것 아닌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장인어른은 한때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지라 남북 관계를 쭉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알겠습니다. 경고는 해야겠군요. 군사적 도발이 있을 시 개성공단은 그날로 끝이라고 말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고 보니 8강전을 마치고 정헌몽 회장이 개성공단을 방문한다고 했지. 왕회장님의 후계자라면 김정일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미래를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책임이 무겁다.
이 일만 무사히 넘기고 중국 시장과 안드로이드에 집중하자.
- *
월드컵 4강이 열리던 날,
나는 아침 일찍부터 개성공단 출입국 사무소에서 정헌몽 회장을 기다렸다. 분명 어제 복귀를 했어야 하는 양반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발도 비밀리에 했던 양반이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물을 수행원들도 없었다.
삐이익. 철컥철컥.
출입국 사무소 너머로 바리케이드가 걷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낯익은 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도 반가워서 나는 그 앞으로 뛰어가 소리를 질렀다.
“정 회장님!”
“어이? 유 회장, 무슨 일인가?”
정 회장이 깜짝 놀라 차에서 내리더니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긴요, 어제 복귀하셨어야 할 분이 안 돌아오니 걱정이 되어서 나왔죠.”
“아이고, 난 또 큰일이 생긴 줄 알았네. 무슨 80년대도 아니고 내가 북한에 납치라도 당할까 봐 이리 나온 건가?”
솔직히 나는 정 회장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원래 오늘이 연평해전이 터지는 날이고, 정헌몽 회장은 개성공단에 투자를 좀 더 하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가 안정되어야 하고 특히 군사적 도발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의사 표명을 하러 간 거니까.
“뭐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제가 어제 꼭 돌아오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하하, 면담이 길어져서 걱정을 끼쳤군. 분위기는 괜찮았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를 불러서 밤새도록 얘기를 나눴을 정도니까.”
“네에? 김정일을 만났다고요? 그것도 밤새도록 얘기를?”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토록 내가 의도만 전달하고 곧바로 복귀하라고 했건만. 개성공단 최고 위원을 통해 의사 전달을 할 것이지 김정일을 직접 만났다니. 어찌 되었든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일단 차에 타시게. 내 차로 돌아가면서 얘기하세나.”
“어어….”
정 회장이 차 안으로 내 등을 떠밀었고 그답지 않게 무용담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솔직히 김정일도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더군. 개성공단에 투자하려면 남북 화해 무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일세.”
“그 사람이 상황을 인식하고 있음을 내비쳤다고요?”
“확연히 그랬네. 개성공단이 그 양반 생각 이상으로 돈이 되고 있지 않나. 벌써 올해 매출도 14억 불을 넘어섰네. 심지어 반도체를 조립해도 미국이 딴죽을 걸지 못하는 유일한 장소가 아닌가. 클린턴 행정부가 운영을 합의한 곳이니 북한에서는 재차 만들어지기 불가능한 자유무역지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게지. 자네가 우려했던 것처럼 군사적 도발 징후는 보이지 않았네.”
나는 정헌몽 회장의 말에서 벌써부터 역사의 흐름이 달라졌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김정일이 정헌몽 회장을 직접 만난 것부터가 원역사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니까.
“다행이군요. 김정일이 개성공단의 가치를 인식했다면 우리 공장들은 좀 더 안전해지겠어요.”
“인식한 정도가 아니더군. 대한민국이 웨이퍼를 제공하고, 개성공단에서 저가 반도체를 조립해 중국으로 수출하는 글로벌 체인 구상은 현실성이 있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다네.”
“허… 그래서요?”
“현실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그리하고 있다고 말했지. 게다가 유 회장의 구상에 따르면 향후 반도체 시장 자체가 수백억 달러 규모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해 줬네.”
정 회장답지 않게 큰소리를 뻥뻥 쳐 댔다는 것부터, 약하게 알코올 냄새가 느껴지는 걸로 봐서 어제 밤새 술을 마셨다는 소리가 사실인가 보다. 김정일도 이 사업이 얼마나 큰지 감을 잡고 있나 보다. 중국에서 정보를 얻고 있을 테니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얘기를 아주 잘하셨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허면 군사적 도발에 대해선 말이 나왔습니까?”
“하하, 내가 술이 들어가서 간이 좀 커진 모양이야. 유 회장이 알려 준 것을 곧이곧대로 말했지. 미사일을 쏘든 TV에서 막말을 하든 그런 도발이야 늘 있어 왔던 일이니 상관없지만 절대 인명 피해가 있으면 안 된다고 말일세.”
“허헉! 정 회장님!”
정 회장이 왕회장을 넘어선 담력을 보여 줬다. 공단 설립 당시 내가 김정일과 한판 뜰 때 왕회장조차 얼어붙었는데 말이다.
“하하, 왜 그리 놀라나. 얘기해도 살아 돌아올 분위기니까 했지 않겠나. 여하튼 김정일은 개성공단에 8인치 반도체 조립 공장이 증설될 때까지는 군사적 도발은 일절 없을 거라고 하더군. 제대로 돌아가면 당연히 없을 것이라고도 말했어. 하하하.”
“……!”
“서해에서 한미 합동 훈련을 하는 것도 이슈화하지 않겠다고 하더군. 월드컵이라는 축제를 하니 당연한 조치인 것 같다고 말일세.”
“그 인간이 정말 그리 말했습니까!”
“하하, 그 인간이라고?”
김정일은 마치 서해 도발을 계획한 적도 없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겼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 월드컵이 끝나기 전까진 안전하다는 말이잖나. 월드컵이 끝나면 서해에서 군사적 도발을 해도 국제적인 이목을 끌기는 힘들다. 남는 장사가 아니니 시도할 명분 자체가 떨어진다.
짝! 짝! 짝!
나는 박수를 마구 쳤고 정 회장은 내가 자신의 무용담에 호응한다고 생각했는지 마구 웃어 댔다. 정 회장은 자신이 얼마나 큰 담판을 짓고 왔는지 인식을 못할 뿐이다.
여하튼 한미 합동 훈련이라는, 아니… 정확히는 훈련 계획 발표라는 군사적 압박과 개성공단의 8인치 반도체 조립 공장 증설이 역사의 방향을 살짝 틀어 놓았다. 8인치 설비야 유휴 설비로 잔뜩 쏟아질 테니 따로 투자비를 책정할 필요도 없다.
좀 더 생각해 보니 이미 정 회장이 방문하기 전부터 나비효과가 있었던 느낌이 강하게 든다. 설마 김정일은 정말 남북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전략을 바꾼 건가? 상관없다. 어찌 되었든 장인어른의 도움을 받아 군사적 압박을 했고, 정 회장을 메신저로 보내 당근까지 제시했으니 내 할 일은 다한 거다. 다행히도 고집불통 망아지가 머리를 돌린 것 같다.
- *
“월드컵 4강의 신화, 대한민국 대 터키전이 3:2로 끝이 납니다.”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월드컵 3위라니요! 우리 태극 전사들은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충분히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관중들도 기립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상대팀도 같이 응원해 주는 관중이라니, 이 또한 월드컵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일 겁니다. 경기에 진 터키 선수들도 같이 환호를 해 주고 있습니다.”
“축제입니다. 월드컵은 세계인의 축제지요.”
TV 화면에서는 연신 관중의 환호성 때문에 앵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경기가 끝나고 태극기와 터키 국기를 같이 휘날리는 관중석이 클로즈업되었다. 나는 4강전을 비롯해 3, 4위 결정전까지 무사히 지나가니 그리 기쁠 수가 없었다. 아무 일 없이 축제를 축제답게 보낼 수 있는 게 원래 역사를 비껴간 일이라는 걸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신문을 아무리 뒤져 봐도 별다른 기사가 없었다. 심지어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다. 내가 연평해전의 날짜만 기억하고, 탱크 압사 사건은 시간과 장소를 기억해 내지 못해 기도만 했던 일인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두 가지 일이 모두 일어나지 않았다.
좋게 생각해 보면 개성공단의 매출이 하늘을 날고 있기에 북한의 도발은 오래전부터 계획이 취소되었고, 외려 미군에 비상이 걸려 압사 사건 또한 시발점이 사라진 게 아닐까 싶다. 아무렴 어떤가? 나 혼자 좋아하면 되는 일이고 칭찬을 바란 것도 아닌데.
그러고 보니 3, 4위전에서 우리가 터키에 승리한 것도 달라졌다. 대체 나비효과가 어떻게 축구에까지 영향을 줬는지 알 수가 없다.
“너무 아쉬워요, 수한 씨.”
“뭐가 아쉬워? 월드컵 3위잖아.”
“그게 아니고요. 이제 이런 응원전 다신 없을 거잖아요.”
“아쉬워도 할 수 없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축구 시합 때마다 광화문에 모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잖아. 월드컵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나와 케이는 용인밸리를 벗어나 광화문에서 응원전에 참석했다. 직접 경기장에 가는 것보다 길거리 응원이 훨씬 더 강렬하고 재미나다. 무엇보다 묵념으로 경기를 시작하지 않아 기쁘고 말이다.
“어서 먹자골목으로 가요. 거기서 파티 해야죠.”
“좋지! 2차전 가야지.”
케이와 나는 광화문 거리를 벗어나 먹자골목 쪽으로 들어섰다. 벌써부터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빙글빙글 돌고 있다. 이런 모임에 맥주 한 박스 돌리고 끼어들면 오늘 밤은 또 광란의 파티가 될 거다.
그렇게 나는 축제를 즐겼다.
『재벌을 넘어서 귀족으로』 11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