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세계 1위의 품격
“정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별고 없으셨죠?”
“나야 별고랄 게 있겠나. 유 회장 덕분에 일이 술술 풀리고 있다네.”
오랜만에 수정각에서 정헌몽 회장을 만났다. 정원에 꽃들이 만발해 마치 나들이 나온 느낌이었다. 점점 구시대의 요정 같은 느낌은 지워지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오솔길로 이어지는 산책 코스는 한결 정갈하게 꾸며져 있다.
“구 회장님도 같이 나오시다니 더 반갑군요.”
생각지도 않은 손님 탓에 나의 첫인사가 길어졌다.
“정 회장이 이제 바깥 활동을 하니 나도 따라 나와 봤습니다. 유 회장을 만난다고 하니 오늘 회의는 모두 취소하고 나왔지요.”
구 회장의 말투가 무척 정중해졌다. 심지어 구 회장이 맥주병을 들고 나에게 술을 권한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선 이런 식으로 서열을 정하나 싶기도 하다. 나이 든 사람들이 정한 룰이니 굳이 내가 따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사의 크기별로 바뀌어서야 되겠나.
“제가 먼저 한잔 드려야죠.”
“허허, 고맙습니다.”
나는 맥주를 구 회장의 잔에 먼저 채워 주었다.
“정 회장님이 건배사 한번 하시죠.”
“좋은 날. 좋은 술.”
“좋은 날!”
“좋은 술!”
날이 한결 따뜻해져 정원 한편에서 맥주를 원샷하니 상쾌하기 이를 데 없다. 정 회장과 구 회장이 번갈아 가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시작하고 나는 옆에서 듣고만 있었다. 나이 든 양반들이 늘 하는 정치 얘기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은 나의 관심 밖이다. 이렇게 되어야 하느니 저렇게 되어야 하느니 따위의 거대 담론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얽힌 일에 정답이 어디 있겠나. 정보 수집 정도로만 참고하면 그뿐이다.
“요즘 돌아가는 시국을 보면 이렇게 우리가 평화로워도 되나 싶을 정도입니다. 미국은 대테러 전쟁을 하고 있고, 북한은 또 저 모양 저 꼴이고, 증시 상황이나 유가는 예측조차 어려우니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대외 이슈에 너무 민감합니다.”
“어쩌겠습니까. 미국이며 북한이며 늘 그래 왔잖습니까. 이번에도 파도를 넘어가야죠. 북한도 핵개발이니 IAEA 탈퇴니 하고 있지만 개성공단은 딱히 문제없는 걸로 봐서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외려 저는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게 더 이상하게 보일 뿐입니다.”
정 회장은 정말이지 최근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게 걱정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나에게 동의를 구하며 눈을 맞췄지만 나는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고 맥주만 들이켰다.
미국은 대테러 전쟁에 나서며 국채를 있는 대로 발행했고, 구식 무기를 갈아 치우니 방산 업체는 쏟아지는 돈에 환호성을 지르고, 당연히 유가는 폭등할 테니 기름 장사꾼은 선물 시장에 돈을 마구 질러 댈밖에. 그렇게 풀리는 돈은 대부분 안전 자산인 금과 부동산으로 흘러간다. 국제 정치가 한번 흔들리면 인플레가 생기기 마련이라는 생각은 돈놀이를 해 본 이들은 다 아는 얘기니까.
“유 회장, 말 좀 해 보게. 앞으로 경제 상황을 어찌 보는가?”
구 회장이 답답한지 내게 물었다. 나보다 경험치가 많은 양반이지만 현실 분석과는 별개로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썩 자신이 없나 보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미국이 돈을 풀고 있는 데다 유가가 폭등할 테니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가 일어나겠죠. 이럴 때 제조업은 인플레가 굳어지기 전에 설비 투자를 서두르고 물건을 잔뜩 팔아야 하는 타이밍입니다. 생각보다 민간에 돈이 많이 풀리거든요.”
“오호, 역시 국제 정치가 어지러울수록 경기는 외려 활성화될 거다, 그 말인가?”
“미국은 적이 없는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이런저런 핑계로 돈을 왕창 찍어 낼 테고, 방위산업체들은 물론 석유 회사들도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릴 겁니다. 자연스레 대형 유조선 발주를 필두로 조선업도 뜨게 될 거고, 조선업은 전후방 산업이 광범위하니 경기는 올해 하반기부터 확 풀릴 겁니다. 물론 저희 IT 산업도 덕 좀 보겠죠.”
“역시! 누구나 예상은 그렇게 하면서도 단언은 못 하건만 유 회장은 다르군요. 그러니 그렇게 투자도 적시에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유 회장의 담대함이 새삼 부럽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기 사이클이 확실해진다. 수요와 공급이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대칭 저울처럼 움직이기 시작해서 그렇다. 미국이 인플레를 일으키며 빚을 수출하면 중국이 그걸 먹고 자라나니 인플레가 잦아들고, 다시 미국이 인플레를 일으키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 사이클은 언젠가 바닥을 치게 된다. 그때마다 리만 사태 같은 금융 사건이 터지거나, 환율 전쟁이니 무역 분쟁이 일어나는 거다. 여하튼 지금은 인플레의 상승 국면이니 제조업 입장에선 투자의 적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신호탄은 우습게도 조선업의 수주가 급격히 늘어나는 시기와 일치한다.
“구 회장님, 이 정도 말을 했으면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도 될 것 같군요. 경기 상승세라지 않습니까?”
정 회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언제 말하나 싶었다.
“아, 그게 말일세. 유 회장, 우리가 어떤 제의를 받았냐 하면….”
“윈도우폰 말씀이신가요?”
“크흠, 알고 있었나? 먼저 말할 것은 우린 아직 계약하지 않았다는 것이네. 유 회장이 반대하면 절대 MS와는 계약하지 않을 것이네. 두 고객 중 택하라면 당연히 스마트 클라우드지.”
“하하, 사업하시는 분이 그리 말씀하시면 어쩝니까? 당연히 두 군데 모두에 팔아야죠.”
“재벌 입장에서 경쟁사 제품을 견제하는 것은 당연하네. 나중에 뭐라 하지 말고, 유 회장이 싫다고 하면 우린 안 할 걸세.”
“정 회장님이 그럴 리 없다고 저를 만나자고 하신 거죠?”
나는 구 회장의 말을 슬쩍 비껴 나가서 정 회장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맞네. 내가 유 회장이 우리가 MS에 납품하는 걸 막을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구 회장은 믿질 않더군.”
“이왕 말씀하셨으니, 제가 납품을 막지 않는 이유도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유 회장의 경영 방침은 정당한 차별이네. 정당한 경쟁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지. 외려 아버님이 하셨던 신성과의 반도체 덤핑 담합을 꺼려했지. 그때를 난 정확히 기억하네. 덤핑 같은 작전 없이도 기술로 1등 할 수 있다고 말이네.”
“굳이 말을 보탤 필요도 없겠네요. 두 분 회장님께선 이번 기회에 MS한테 빨대 꽂고 돈 좀 왕창 버세요. 걔네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할 테니까요.”
“설마 치킨게임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MS는 만만한 곳이 아니잖나.”
“치킨게임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이번 건은 다릅니다. 적들이 알아서 시장을 키우고 제풀에 윈도우폰을 떨이로 팔 겁니다. 외려 우리 제품의 잠재적인 고객이 늘어날 겁니다.”
내 말에 정 회장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구 회장은 입이 귀에 걸린다. 어찌 되었든 모바일용 디스플레이를 잔뜩 팔아먹을 수 있겠다 싶으니 말이다.
“대현은 이번 기회에 통신칩에 더 투자를 해도 되겠나?”
역시 정 회장. 내가 경제 상황을 낙관하니 그간의 정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모양이다. 다행히 그의 예측은 잘 맞아떨어질 것이다.
“그러셔야죠. 나중에 시장이 커지면 일부 라인은 스마트 클라우드를 위해 써 주셔야죠.”
“하하, 당연히 그러겠네.”
“그러면 디스플레이도 투자를 해야겠군.”
“대형 패널, 소형 패널 모두 투자하세요. 차세대 디스플레이 설비도 지금부터 준비하시고요.”
“오오, 유 회장이 다 사 주시려나 봅니다.”
“아마 내년이면 LCD는 없어서 못 팔 겁니다.”
“내 올해 들었던 말 중에 제일 반가운 말이군요. 유 회장만 믿고 내 투자하겠습니다.”
“단, MS보다 10%는 싸게 주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당연한 말씀을! LCD냐 PDP냐 하는 묵은 고민도 해결해 줬는데, 그 정도 보답은 해야지요!”
구 회장은 기분이 좋은지 술잔을 가득 채운다. 별다른 건배사도 없이 잔을 부딪치며 맥주를 즐겼다. 늙은 양반이 내 눈치 보느라 고생했으니, 이 정도 정보는 알려 줘야지 싶다. 더욱이 디스플레이는 지금 양산 캐퍼를 늘려 놔야 한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지.
“헌데 아무래도 일본 업체와 중국 업체도 윈도우폰을 시작할 것 같은데 유 회장, 괜찮겠나?”
“일본은 몰라도 중국은 제가 꽃신을 좀 신겨 놔야죠.”
“으흠, 꽃신을 신긴다고?”
“네. 윈도우폰은 저가 시장을 휘젓게 될 테니까 중국엔 미리 대비해 둬야죠.”
“……?”
정 회장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모든 것은 내가 미래를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윈도우폰이 폭망하고, 시름시름 앓던 중국의 시중쉰이 5월쯤 세상을 뜨고, 미국의 인플레로 중국 소비자들의 주머니가 갑자기 두둑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올해 말은 스마트 클라우드의 AP를 대규모로 팔아먹기에 아주 적당한 때다.
“하하하, 언제 유 회장 말이 틀린 적이 있었습니까? 올해 장사는 잘된다고 하니 걱정 말고 술이나 드십시다!”
구 회장은 벌써부터 돈 덩이가 굴러 오는 것처럼 흥분해서 맥주잔을 마구 비워 댔다. 툇마루에서 안주를 준비하고 있던 최 마담도 기분 좋게 웃는다. 오랜만에 값비싼 안주를 내놓을 만한 분위기라 그럴 것이다.
- *
스마트 클라우드 종합 연구소 디자인실.
“벌써 노트 K 시제품이 나왔나요?”
“아직 소프트웨어는 최적화가 필요하지만 하드웨어는 설계를 마쳤습니다. 신뢰도에서 큰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올해 출시품에는 더 이상 변경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 사장, 김 부사장, 조너슨 상무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반도체 및 에그박스 같은 기존 제품은 여전히 8월에 시제품이 나오지만, 스마트폰만큼은 매년 5월에 시제품이 튀어나올 태세다.
한 손으로 잡기에 약간은 부담스러운 크기지만 그래도 괜찮다. 조너슨은 한 손에 잡히는 스마트폰이라는 콘셉트를 포기하지 않았고, 김 부사장도 이 정도 화면 크기면 만족한다는 표정이다.
쓱쓱.
“터치펜 감도는 그다지 감동적이진 않군요.”
글씨를 써 보려고 했는데 터치펜이 지나가고 난 뒤에 화면에 줄이 그어지는 느낌이다. 글씨를 쓰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펜도 스마트폰 유리판 위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이 별로다.
“예, 그렇습니다. 터치와 아이콘 이동은 자유롭습니다만 손맛은 아직입니다.”
김 부사장이 손맛이라고 표현했다. 딱 적당한 단어다.
“연구소에선 펜촉의 소재에 대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손맛은 탄소를 함유한 강화 실리콘이 가장 좋지만 일반 플라스틱보다도 내구성이 떨어져서 안 되겠더군요.”
“카본 파이버(탄소 섬유)는 어떻습니까? 돈을 아낄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회장님 말씀대로 현재 카본 파이버가 가장 유력하긴 합니다. 하지만 종이 위에 글씨를 쓸 때 느껴지는 연필 특유의 느낌을 살리기엔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합니다.”
오 사장은 언젠가부터 제품의 디테일에 민감해졌다. 연구 개발을 해야 하는 연구원들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내부 고객이라 할 수 있다. 오 사장은 확실히 자기 색깔을 찾았다.
“글씨뿐 아니라 이미지 편집 기능을 강화했으면 합니다. 사진을 찍고 얼굴의 잡티를 없애거나 원하는 모양으로 자르는 기능 말입니다. 펜을 이용하기에 적당한 기능들입니다.”
“파이오니어와 협업하고 있습니다. 노트 K 전용으로 OS를 만들고 있으니 기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조너슨과 김 부사장도 소통이 잘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파이오니어 뒤에 숨겼지만 안드로이드의 전신인 애플파이도 일을 아주 잘해 주고 있는 모양이다. 까다로운 개발자의 수장인 김 부사장이 저리 말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런데 회장님.”
“말씀하세요, 김 부사장님.”
“노트 K는 확실히 경쟁력이 있는 제품입니다만, OS를 이렇게 따로 쓰면 애플이 주도하는 애플리케이션을 쓰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호환성 확보는 애플과 협의가 필요해 보입니다만.”
“부사장님은 우리가 애플과 싸울까 봐 걱정이 되나 보군요?”
“현재 스마트폰 유저들이 쓰는 애플리케이션이 100개가 넘습니다. 그걸 모두 새로운 OS로 개발하는 것은 힘들 수 있습니다.”
100개 정도니까 지금 시작을 하는 거다. 3년만 지나면 스마트폰 앱은 1만 개 이상으로 증가하고, 10년쯤 지나면 200만 개가 넘어갈 거다. 폐쇄적인 앱 정책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하는 숫자다. 오히려 윈도우폰 앱에 밀릴 수도 있다.
“용인밸리 소프트웨어 벤처들이 해결해 줄 겁니다. 믿으세요. 그리고 애플은 내가 접촉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노트 K의 완성도만 신경을 써 주세요. 보안도 현재처럼 잘 유지해 주시고.”
“그리 말씀하시니 더 드릴 말씀이 없군요.”
“기술 얘기나 더 해 보죠. 노트 K의 차별성은 조너슨 말대로 이미지에 있잖아요. CIS 카메라는 업그레이드가 좀 되었습니까?”
“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CIS 화소 자체는 1000만 화소로 변동이 없습니다. 픽셀을 1200만까지 증가시켜 봤더니 광량 부족으로 오히려 사진이 어둡게 나옵니다. 현재 화소가 최적이고 대신 렌즈를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음… 렌즈를 업그레이드 했다. 초점이 깊어지겠군요.”
“정확한 표현이십니다.”
사진 전문가들이 흔히 말하는 깊이 있는 사진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드디어 개발자들이 렌즈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보다. 렌즈 기술이 발전하면 결국 광량 문제가 해결되고 화소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거다. 기술 개발 방향을 잘 잡았다.
“좋네요. 오늘은 이쯤 할까요? 8월에는 노트 K 최종 시제품과 더불어 2003년형 스마트폰 시제품도 같이 봤으면 합니다. 그때쯤 IT 잡지에 은근슬쩍 흘릴 수 있게 말입니다. 윈도우폰만 계속 언론에 노출되면 우리가 좀 밀리는 느낌이 드니까.”
“예, 그리하겠습니다.”
“회장님,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조너슨, 무슨 문제가 있나요?”
이 정도까지 디자인이 끝났으면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을 텐데? 하면서 물었다.
“2003년형 스마트폰이야 기존 로고를 쓰겠지만 노트 K의 로고는 어찌하시렵니까? 스마트 클라우드와 애플의 로고를 동시에 넣기가 좀….”
조너슨이 노트 K 시제품의 뒷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기존에는 두 개의 로고를 나란해 배치했었다.
“당연히 우리 로고만 새겨야죠. 애플 눈치 볼 이유는 없잖아요.”
“아… 그렇군요.”
애플은 우리의 동업자일 뿐 고객이 아니다. 대가를 충분히 나눠 주고 있고,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잡스의 전략에 충실히 합을 맞춰 주고 있다. 환란 때 70억 불을 도와준 대가는 다 치러 주고 있는 셈이다.
“연초에 말씀드렸잖아요. 우린 최첨단에 서 있습니다. 적뿐 아니라 때론 동맹이 우리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요. 그땐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협상을 시도하고, 그게 안 되면 혼자서라도 먼저 가는 겁니다.”
“…….”
다들 말이 없다. 약간은 벅찬 표정으로,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우린 이미 1등이다. 아직까진 한 발짝 앞선 1등이지만 그 격차를 더욱 벌려야 한다.
- *
삐리릭.
-회장님, 중국 지사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내 곁을 지키던 이태훈 비서실장, 아니 이 상무가 이젠 한 달에 한 번 전화 통화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중국에 둔 이유가 있다. 아마도 그 때가 왔나 보다.
“오! 이 상무님,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죠?”
-회장님 덕분에 지사장 행세도 하고 살맛납니다. 오늘 전화드린 이유는 말씀하셨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중쉰 선생이 위독한가 보군요.”
-예. 아무래도 오늘 밤을 넘기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바로 출발하죠.”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윌슨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케이에게도 연락을 했고 말이다. 내가 먼저 집에 도착해서 샤워부터 하고 옷을 차려입고 있자니 케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수한 씨, 어디 있어요?”
“여기야.”
“시 선생이 위독하시다고요? 끝내 회복을 못 하셨네.”
“그 나이면 어렵지. 여하튼 케이도 옷 갈아입어야지. 심천까지는 금방이야.”
“그건 그렇고, 장례식장에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도 되는 거예요? 우리와 시 선생 일가는….”
“이제 뒤에 있을 필요가 없어. 아니, 없어지게 될 거야.”
이 또한 많이 기다렸던 일이다.
- *
홍콩 공항에 도착해 심천으로 바로 직행했다. 이미 유명을 달리했겠거니 했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임종 직전이었다.
“찾아와 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웬만한 인연은 아니지 않습니까.”
“같이 마지막을 지켜 주겠나? 부탁함세.”
굳이 이태훈 상무의 통역을 듣지 않아도 말투만으로 시진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시중쉰이 누워 있는 침실에는 중국답게 소독약 냄새 대신 향냄새가 가득했다.
시중쉰은 숨소리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눈 또한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아버님, 기다리던 사람이 왔습니다.”
“으….”
정말로 나를 기다린 건가? 죽어 가던 사람이 신음 소리를 냈다.
“의사 말로는 이미 돌아가셔야 할 분이 살아 계시는 꼴이라고 했네. 누군가를 보고 가겠다는 뜻이라고 하더군. 아마 유 회장이 아닐까 싶으이.”
“시 선생님, 제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