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챕터 7(2) (90/104)

“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요. 총괄 영업은 A급, 소재 부문은 개발팀에 S급을 주죠.”

“영업팀은 왜 A급을….”

윌슨이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흐린다. 미국인답게 마케팅과 영업을 중시하는 것이리라.

“스마트 클라우드의 원칙입니다. 간접 부서는 최대치가 A급이에요. 개발, 연구, 양산 부문만이 S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마트그룹의 근간은 제조업입니다.”

간접 부서가 자세를 잡기 시작하면 결국 실무팀이 고생하게 된다. 보너스를 핑계로 이런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주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자, 그럼 퇴근 시간도 다 됐으니 최종 명단을 볼까요?”

윌슨이 퇴근 시간이 다 된 지금 나를 찾아온 이유는 내일 아침 스마트그룹 임원 발표가 있기 때문이다. 사내 인트라넷으로 오전 7시 정각에 모두에게 오픈할 거다. 비서실은 내일 아침 임원 의전을 행해야 하니 지금 내 승인이 필요한 거다.

“이것이 최종 수정본입니다. 대주주들도 별다른 이견이 없었습니다.”

사실 주주들은 인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회장인 내가 바뀌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1. 사장 승진

-오성재 사장: 스마트 클라우드 반도체 부문 사장 겸 종합 연구소 소장

2. 부사장 승진

-김근업 부사장: 무선통신 부문 부사장

-나운영 부사장: 스마트 클라우드 반도체 부문 부사장

-권재욱 부사장: 총괄영업 부문 부사장 겸 스마트 클라우드 북미 법인장

3. 상무 승진

-조너슨 아이브 상무: 총괄 제품디자인 부문장

-이태훈 상무: 스마트 클라우드 중국 법인장

-송기주 상무: 스마트 반도체개발 실장

-김성준 상무: 스마트 정밀기계 부문장

-정성태 상무: 스마트 증권금융 부문장

4. 기타 자회사

-미야자키 사장(유임): 스마트그룹 소재 부문 사장

-이재훈 사장(유임): 파이오니어 소프트웨어 사업 부문 사장

-에릭 비나 부사장(승진): 파이오니어 인터넷 사업부문 부사장

명단에 이름이 있는 양반들은 머지않아 갑부의 반열에 오를 거다. 지금도 버지니아 트레이딩 주식을 1%나 가진 사람도 있고, 재훈이는 이미 갑부이지만 10년만 지나면 부의 차원이 달라질 거다.

“좋네요. 공지하시기 바랍니다. 아, 차량은 뭐로 결정했나요?”

“사장은 벤틀리 미들, 부사장 이하는 벤츠 E 시리즈와 다이너스티 풀옵션 중에 선택하는 것으로 지원할 예정입니다.”

“잘 준비했네요. 내일 아침 다들 깜짝 놀라겠어요.”

“승진자들 연락처는 여기 있습니다.”

“전화번호는 왜?”

윌슨이 각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셔야죠. 혹시나 하면서 기대하고 있을 텐데.”

“하하하! 오늘 자정이 지나자마자 전화해 줘야겠군요.”

“오, 좋은 생각이신데요? 아주 멋진 이벤트입니다.”

오늘은 12월 31일, 즉 2001년의 마지막 밤이다. 새해 첫날 첫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승진 축하 전화라면 기쁨이 배가 되지 않겠나.

나는 연락처 쪽지를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고는 퇴근했다. 나야 승진자 명단에 없으니, 새해 첫 이벤트는 케이와 타종 소리를 같이 듣고 따끈한 어묵 국물을 먹는 것이다.

    • *

「스마트그룹 사장단 인사 발표, 무선통신 부문 사업부 분리」

「스마트 클라우드 반도체 감산 동참 않기로. 인위적인 공급 조절 거부 원칙 재확인」

「2001년 무역수지 흑자 200억 불 돌파. IT 관련 수출이 무역 흑자 주도」

2002년으로 접어드니 언론부터 스마트 클라우드에 매우 호의적으로 변했다. 신성과 마구 싸워 대도 결국 나라 전체로 봐서는 별 탈이 없는 데다 외려 치킨게임이 끝나고 반도체 활황이 돌아와 우리 회사가 마구 돈을 벌어들이니 그럴 것이다. 결국 모든 게임은 이기고 봐야 한다.

창가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으로 신문 기사를 보다가 문득 창밖을 내다보자 검은색 세단이 빌딩 앞에 멈춰 선다. 오성재 사장, 나운영 부사장, 조너슨 상무가 나란히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올해 첫 전략 회의인 데다 승진한 티를 내려는지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었다. 우연찮게 눈이 내리는 날 검은색 승용차에서 내리니 자세가 나오긴 한다. 나와 같은 건물을 쓰고 있는 김 부사장과 권 부사장이 부러워하겠네. 저렇게 등장하고 싶을 텐데.

“회장님, 회의 준비 끝났습니다.”

“갑시다.”

“예.”

뚜벅뚜벅.

딸칵.

“어서 오십시오.”

윌슨을 앞세우고 회의실로 들어서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긴다. 오 사장이 대표로 인사말을 건넨다. 여태까지와 달리 한층 여유 있고 자신감에 넘치는 표정들이다. 역시 직장인에게는 승진이 최고의 명예이자 선물이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찬사와 부러움, 심지어 협력 업체에서도 대하는 격이 확연히 달라질 테니 말이다.

“앉으시죠. 시작합시다.”

“회장님, 정밀기계와 금융이 빠지긴 했지만 명실 공히 첫 번째 사장단 회의인데 덕담 한마디 하셔야죠.”

간사를 맡은 윌슨이 분위기를 띄운다. 그러고 보니 덕담은 아니고 하고픈 말이 있긴 하네.

“일단 여러분의 승진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덕담이랄 것까진 없습니다만, 이제 각 부문의 리더가 되신 분들을 앞에 두니 문득 작년 911 테러가 떠오릅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 스마트그룹도 세계 시장에서 선두로 나서게 되면 사방에서 뜻하지 않는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모쪼록 각 부문의 리더분들께선 전략을 운용할 때 뜻하지 않는 위험 요소는 없는지 경쟁사 동향을 면밀히 관찰하셔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오 사장이 대표로 화답했고, 나머지 이들도 얼굴 표정으로 동의를 표했다.

“제가 연초부터 너무 딱딱한 말을 한 것 같군요. 전략 회의 시작하죠.”

“예. 일단 권재욱 부사장이 2002년 매출 계획을 발표하겠습니다.”

1월에 매출 계획 발표라니 자료 준비하느라고 아주 힘들었겠다. 여태 전략 회의에서 선보였던 자료와는 격을 달리했다. 그룹 전체의 매출 계획에서 스마트 클라우드 매출 계획으로 이어지는 큰 그림을 잘도 그려 왔다.

“2001년 그룹 전체의 매출은 56.9조에 순익은 9.9조로 순익률 17%를 달성하였습니다. 2000년 대비 매출은 50%, 순익은 370% 증가한 역대 최고의 한 해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승진하셨지 않습니까. 하하.”

“아, 예. 그렇습니다. 계속하겠습니다. 올해는 치킨게임이 마무리되어 반도체의 수익률이 30%를 회복할 것으로 예상되기에 그룹 총매출은 70조, 순익은 15조를 목표로 잡았습니다.”

“사업부 전체의 평균 수익률은 어찌 되나요?”

“평균 수익률 목표는 21%입니다.”

“17% 정도로 하향 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만 아는 미래를 감안해 다른 의견을 말했다.

“굳이 그렇게 정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올해 경기 전망은 미국 정치라는 변수는 있어도 스마트폰의 매출은 급격히 상승하리라 보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매출 목표는 10조를 더 올리고요.”

“예에? 10조를 더?”

“권 부사장님 말씀대로 스마트폰 시장이 급격히 커질 겁니다. 우리는 많이 벌고 많이 투자할 겁니다. 순익의 많은 부분을 재투자할 테니 순익률은 좀 내려갈 수밖에 없겠죠.”

스마트폰 매출은 향후 3년간 매해 두 배씩 증가한다. 그 뒤로 5년간은 수십 , 그 뒤론 약간의 정체기가 오긴 하지만 그래도 10 내외로 꾸준하게 성장할 정도로 노다지 중의 노다지 사업이다.

그 증가 속도를 받쳐 주는 것이 인터넷 속도다. 인터넷 속도 개선을 위한 설비 투자와 서버 개선에 꾸준히 재투자를 해야만 그 증가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

“회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올해부터 3세대 통신인 Wideband CDMA 기술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입합니다. 그동안 GSM이 우세하던 유럽도 WCDMA는 적극 채용키로 하였으니 매출 상승이 두 배는 당연하고, 설비와 서버 시장도 동반 성장할 것입니다. 물론 기술 개발에 엄청난 돈을 투자해야겠지요.”

권재욱 부사장은 20% 성장이라는 보수적인 계산을 했지만, 김근업 부사장은 무선통신 부문장답게 두 배 성장을 확신한다.

내세운 근거도 내 생각과 똑같이 3G 통신이라 아주 만족스럽다. 이번 역사에서는 WCDMA의 수명이 몇 년은 더 길어질 것 같다. 3G 기술이야 이미 기존 학계에서 연구 결과가 있지만 4G LTE는 아예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좋네요. SJ와 KT와도 3G 프로젝트는 같이 해야 합니다. 워낙 덩치가 크고 세계 표준도 만들어야 하는 일이니 스마트 통신이 독식하려 들면 득보다 실이 클 겁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매출 계획은 수정해서 차기 회의에서 다시 보도록 하고, 기술 전략으로 넘어가 볼까요? 아… 권 부사장님, 그런 표정 짓지 마시고요. 수고하신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아, 아닙니다. 다시 수정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권 부사장은 내가 자료를 반려하니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 일주일 넘게 밤샘을 했을 텐데 내가 다 안타까울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보고는 받아야 한다. 그래야 임직원들이 매출 계획에 정확성을 더하기 위해서라도 부문 간 억지로라도 소통을 하게 되고, 개발자와 영업맨들이 한 해 장사의 감을 잡는다.

“그럼 김근업 부사장의 무선통신 사업부 전략을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윌슨이 부드럽게 회의를 속개했다.

“올해 스마트폰의 개발 전략은 방금 말씀드린 WCDMA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좀 더 빠른 인터넷 속도는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할 수밖에 없습니다. 디자인은 조너슨 상무의 전략이 있겠지만, 저희 사업부가 요청드릴 것은 화면 크기를 좀 더 키웠으면 합니다. LK디스플레이와도 협업이 필요한 사항인데….”

김근업 부사장의 발표 자료도 하루 이틀 밤샘한 자료가 아니었다. 마치 스티브 잡스의 한국인 버전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화면 크기별로 라인업을 구축하는 전략은 정말이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딱 들어맞았다.

승진시키길 아주 잘했다. 바야흐로 스마트폰 전쟁이 벌어지겠구만. 블랙베리야 망했지만, MS와 노키아는 여전히 살아 있지 않나. 애플과도 이해관계가 영원히 일치한다고 확신할 수 없고.

“단순히 화면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디자인은 언제나 제품의 미적감각과 차별성에 주안점을 둬야 합니다.”

김근업 부사장의 발표에 조너슨이 말을 보탰다.

“엔지니어 관점에서는 좀 더 화면이 커도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없고, 인터넷을 즐기거나 동영상을 볼 때 만족감이 크다는 사항에 주목했습니다. 애플과 OS 최적화 협업만 잘한다면 좀 더 큰 화면에서도 터치 정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합니다.”

“만족도 측면에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괜히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화면을 키우면 좋을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디자인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디자인 변경의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고객도 스마트 클라우드 제품을 타사와 차별하게 됩니다.”

김 부사장과 조너슨 상무가 서로 의견이 부딪친다. 나는 둘 다 옳다고 생각한다. 또한 화면을 키우면서도 스마트 클라우드 제품군의 디자인 콘셉트를 벗어나지 않는 방법도 알고 있다.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아직 1월이고, 시제품은 8월에야 나올 테니까 말이다.

“무선통신과 총괄디자인 또한 협의를 거친 후 다음 회의에서 다시 논해 보죠. 오늘은 더 이상 논해 봐야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군요.”

“그럼 마지막 안건으로 나운영 부사장의 양산 관련 전략을 듣겠습니다.”

“크흠, 제가 이렇게 발표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꽤나 멋쩍군요.”

나운영 부사장이 설명에 앞서 너스레를 떤다. 언제나 ‘그까짓 거 양산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라는 말로 대부분의 의사 표현을 해 왔는데, 오늘은 자신이 직접 전략 발표를 하니 생소하긴 할 거다.

“이제 양산도 투자 계획을 가지고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작년처럼 공장 하나 말아먹으면서 셋업할 수는 없잖습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양산 투자에 대해 큰 줄거리를 가져왔습니다.”

“봅시다.”

“크흠, 일단 양산 전략을 설명드리기 전에 일례부터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번 제5공장에서 초도 수율이 대박을 찍은 것은 개발자들의 공정 최적화와 양산 기술자들의 설비 기술이 시너지를 냈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겠죠.”

내 말에 나 부사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했다.

“예, 당연하긴 당연한데 기술 백서를 만들려고 양산 QA와 조사를 하다 보니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사실이라고요?”

“여태 개발은 품질 퀄만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공정 퀄을 따로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자동화가 된 장비로 엔지니어의 수동 공정 없이 실시했습니다. 4공장에서 검증된 물류 프로세스를 그대로 두고서 말이지요.”

“자동화!”

“예, 바로 그겁니다. 설비 사이에 작업자를 두는 수동 물류가 수율 확보에 가장 큰 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거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양산은 앞으로 수율 대신 공장의 자동화율을 수치로 관리하겠습니다. 자동화 투자도 지속적으로 늘려 가야 합니다.”

“오오오!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하셨군요.”

나운영 부사장의 자료만 유일하게 반려되지 않았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항이었다. 그러고 보니 반도체의 후공정까지 포함해 공장 자동화는 2010년쯤 되어야 비로소 이루어지는데 10년은 앞서 가는 생각이다. 12인치 라인을 셋업하면서 중요한 경험치를 얻었다.

    • *

똑. 똑.

나운영 부사장의 발표를 마지막으로 회의를 마쳤는데, 김근업 부사장이 곧바로 내 사무실을 찾았다.

“더 할 말이 남았나요? 회의 시간에 하지 않고요.”

“아, 따로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앉아서 편히 얘기하세요.”

“예.”

옷이 날개는 날개인 모양이다. 개발자답게 편한 셔츠와 청바지를 즐겨 입던 양반이 정장을 차려입으니 꽤나 잘 어울린다. 워낙 호리호리한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따로 할 말이라니요.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랄 것까진 아닙니다. 이걸 좀 보시겠습니까?”

김 부사장은 안주머니에서 최신 스마트폰과 작은 막대기를 꺼내 놓았다. 김 부사장이야 어렵사리 설명부터 하려고 하지만 21세기 인간인 나는 그게 뭔지 바로 알아보았다. 이 양반이 큰 화면의 스마트폰을 얘기한 이유가 여기 있었군. 그런데 스타일러스, 일명 터치펜이 벌써 시중에 나왔나? 어디서 구했지?

“작은 연필처럼 생겼군요. 기능이 뭐죠?”

“스타일러스라고 부르는 터치펜입니다. 손가락을 대신해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톡. 톡.

그림을 그리지는 않고, 단순히 아이콘을 찍고 이러 저리 옮기는 시연을 보여 주었다. 신기한 척 표정을 짓느라 힘들었다.

“오, 아이콘이 움직이는군요. 적당한 앱을 개발하면 PC의 그림판을 그대로 옮겨 올 수 있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수첩에 글을 적듯 메모도 가능하며, 찍은 사진 위에 덧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름 차별성이 있는 기술이군요. 그래서 큰 화면을 요청했군요. 칠판은 일단 크고 봐야 하니까.”

“역시 회장님이시군요.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 걸 보니.”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죠. 벌써 시중에 나왔는지는 몰랐지만.”

“그게 문제라서 이렇게 따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으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 고개를 갸우뚱하자니 김 부사장이 말을 이어 나갔다.

“이 펜을 개발한 곳은 ‘매직펜’이라는 벤처입니다. 용인밸리에 입주하고 있는데, 저에게 샘플을 가져왔더군요. 차기 제품에 적용코자 협력 업체로 등재하려고 이력을 살폈더니, 신성에서 퇴사한 엔지니어들이 설립한 회사더군요.”

“아하, 알겠어요. 신성 기술을 빼낸 회사와 같이 사업을 한다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거군요.”

“예. 매직펜 사장과 직원들은 신성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이라고 하는데, 괜히 협업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나는 김 부사장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내버려 두었다간 세부 기술까지 설명할 태세다.

“부사장님.”

“예, 회장님.”

“신성이 무서워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면 어쩝니까?”

“…….”

내가 김근업 개발실장을 부사장으로 승진시킨 것은 그 정도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리스크를 나와 나눠야 한다. 이 정도 사안을 나에게 의논하는 것은 리소스 낭비에 가깝다.

“우리의 모토는 실제로 일하는 임직원이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 회사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만 판단하면 됩니다. 이제 신성은 인력 유출이니 뭐니 하며 우리를 타박할 위치가 못 되니 신경 끄세요. 정 불안하면 그 매직펜이라는 벤처를 안으로 들이세요. 물론 그쪽 사람들이 동의하면 말이에요.”

“안으로 들이라 하시면 개발팀원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이신가요?”

“파트 조직 하나 만들어 버리세요. 부문 부사장이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무선통신 부문의 인사와 투자를 총괄하잖아요. 나와는 전략만 공유하면 됩니다.”

“아, 제가 너무 시시콜콜한 것까지 말씀드렸나 봅니다.”

“아닙니다. 책임과 권한에 대해선 눈높이를 계속 맞춰야죠.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찾아와도 되고요.”

“이 협업 건은 제가 조정을 해 보겠습니다. 그럼 터치펜을 적용하는 전략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저는 첨단 제품이라고 여기지만, 회장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난 좋아 보입니다. 외려 제품 전략을 확정하려면 조너슨을 설득해야 할 것 같군요. 조너슨은 디자인의 일관성을 매우 중요시하잖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차후 전략 회의에서 어떻게 보고드려야 할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요. 다음 회의에서 뵙죠.”

“예.”

김 부사장이 돌아가고 난 뒤에 문득 재훈이가 신성 직원들이 탈주하고 있다고 알려 줬던 게 기억이 났다. 신성이 블랙베리를 포기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터치스크린 개발도 지지부진한가 보다. 터치펜을 만들었다 함은 터치스크린에 대해서도 전문성이 있다는 말인데, 핵심 인력에 대한 관리를 못 했다는 뜻이잖나. 결국 우수 인력들은 스마트 클라우드로 합류하겠군.

삐리릭.

-예, 회장님.

“윌슨, 잠시 나와 얘기 좀 할까요?”

-네엡!

전화를 끊자 윌슨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천천히 걷는 것 같은데 바람처럼 빠르다. 007가방에서 온갖 것을 꺼내는 것처럼 저 걸음걸이 또한 윌슨의 특기다. 전직 첩보요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루이스 장군이 인정하는 것도 그렇고.

“혹시 신성에서 구조조정을 하고 있나요?”

“구조조정이라고 할 수는 없고, 자발적인 탈주가 이루어졌습니다. 작년 말 마지막 벤처 지원 기금이 풀릴 때가 피크였죠.”

“대체 엔지니어가 몇 명이나 탈주한 겁니까?”

“작년 말까지 대략 600명입니다. 입사 5년 차 이하의 젊은 직원들이 대부분입니다.”

“헉! 600명요?”

엔지니어 600명이면 어마어마한 인력이다. 그것도 한창 물이 오른 5년 차 이하라고 한다. 탐이 난다. 개중에는 블랙베리만 아니었으면 신성의 스마트폰 개발에서 핵심을 담당했을 인력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 벤처를 차려서 용인밸리로 입주했는데 딱히 코스닥 상장에 성공한 회사는 아직 없습니다.”

“음, 600명이라니 보석들이 많겠어요. 인사팀에 연락해서 올해 공채에는 경력직 티오 제한을 없애 주세요. 각 사업부문장이 필요하다고 하면 벤처 인수도 모색도록 해야겠네요. 버지니아 로직스에 업무 협조를 구해 주세요.”

“오, 경력자들이 탐이 나시나 보네요.”

“600명이나 나왔으면 경쟁이 아주 치열할 것 같은데요? 그런 척박한 벤처 시장에서 굴러 본 사람이라니 더욱더 탐이 납니다.”

“안 그래도 말씀드려야 하나 싶었습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선 이직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회사는 충성의 대상이 아닌데 말입니다.”

윌슨의 말은 지극히 진심일 것이다. 윌슨이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이유가 뭐겠나? 연봉이 많아서일까? 파라곤의 이사 승진을 앞뒀던 양반인데 그럴 리 없다. 아마도 내 회사가 글로벌 Top 10 정도에 들어서면 자기 자리를 하나 만들 거다. 내가 몇 번이나 기안을 반려했음에도 이번 승진 인사에서는 기어코 자기 이름을 뺐던 양반 아닌가.

“점점 바뀌겠죠. 대기업들이 스마트 클라우드 때문이라도 핵심 인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될 테니까. 임직원이 왕인데 말입니다.”

“그걸 농담으로 아는 직원들도 있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길 바랄 수야 없지요. 차차 나아지겠죠.”

“여하튼 경력직 흡수에 잡음이 없도록 사전 조치를 해 두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네요. 고마워요.”

“넵.”

이번 인생에서는 대한민국의 인재란 인재는 내가 다 먹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002년은 국운도 융성한 한 해다. 모든 일이 월드컵 축구처럼 술술 잘 풀릴 것 같다.

    • *

다다다다다, 벌컥!

“수한아! 자리에 있냐?”

재훈이 녀석이 저번에는 노크도 잘하더니 이번엔 그냥 들이닥쳤다. 뻔히 나를 보면서도 자리에 있냐고 묻는다.

“하하, 뭔 일이야?”

삐리릭. 삐리릭.

“그 전화 받지 마! 내 얘기 먼저 들어!”

“으잉?”

나는 연신 울어 대는 전화를 받으려다 말고 재훈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게 직접 전화할 사람은 기껏해야 케이와 정헌몽 회장 정도인데 말이다. 왜 받지 말라는 거지?

“항의 전화야. 스티브 잡스가 항의 전화 한 거라고.”

“에에? 잡스가?”

“전화부터 돌려 놔. 얼른!”

삐리릭. 삐리릭. 뚝.

전화를 받지 않자 몇 번 더 울리더니 끊겨 버렸다.

삐리릭.

-예, 회장님.

“전화 또 오면 당겨서 받아 주세요. 내가 잠시 자리 비웠다고 해 주시고요. 휴대폰도 안 가지고 나갔다고 하시고요.”

-넵.

내가 윌슨에게 전화를 돌리자 재훈이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설명해 봐. 무슨 일이야? 항의 전화라니?”

“내가 일전에 말한 거 있지. 스마트폰 앱을 개발하겠다고 말이야.”

“응, 그랬지.”

“내가 각종 앱을 만들어서 잡스에게 샘플을 보내 줬거든. OS 최적화 같이 하자고.”

“잘했네. 그런데 왜?”

“그래, 나 잘했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잡스가 불같이 화를 내더라.”

“으잉? 왜?”

“앱 개발은 애플이 해야 하고, 협력 업체가 한다고 해도 애플이 라이선스를 주는 식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 파이오니어는 스마트폰의 보안이나 더 신경 쓰라면서 말이야.”

“잡스가 왜 그러지? 기본 앱은 세 회사가 공동으로 만들었고, 계약서에도 앱에 대해서는 세 회사 모두 개발권이 있다고 명기했잖아.”

나는 재훈이가 인수한 구글을 염두에 두고 앱에 대해선 각자의 권리를 명확히 했었다. 아직 구글이 안드로이드나 앱을 개발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테고 말이다.

“개발권이 있다는 걸 나와 다르게 보더라고. 내가 만든 앱이 자신의 수익 권리를 침해한다고 하더라. 나처럼 앱 벤처를 키워서 지분을 얻거나 수익을 나눠 가지는 비즈니스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래. 아니,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고 화를 내더라.”

“재훈이 네가 발굴한 벤처의 지분을 원하는 거야?”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래. 일례로 깨톡이라는 벤처가 같은 이름의 메신저 앱을 만들었는데 그런 건 절대 배포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애플이 주도하는 생태계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앱이라고 말이야.”

어라, 깨톡이 벌써 나와? 한국에서 스마트폰을 처음 만들었더니 폭발력이 대단하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시작하는 사업은 모두 대박이라는 인식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지금 중요한 건 깨톡이 아니라 잡스다.

“애플이 주도하는 생태계?”

“응. 애플이 우리에게 OS 라이브러리를 오픈한 것은 무료 앱을 허용한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거야. 기본적으로 앱이 연결시키는 인터넷 사이트, 광고, 전자상거래 수수료 등등 수익 모델은 모두 애플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거지. 스마트 클라우드는 자신과 동격으로 추후 협상할 수 있지만 나는 대상이 아니래. 난 보안 앱에나 신경 쓰래. 나 참.”

나는 재훈이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애플 컴퓨터가 IBM 컴퓨터에 밀리고, OS가 MS 윈도우에 밀린 이유가 그런 폐쇄성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원래 역사에선 앱 개발을 이렇게 통제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안드로이드 OS가 곧바로 경쟁자로 올라서서 그랬던 것 같다.

“으흠, 시장에 오픈할 건 오픈해야 스마트폰 시장이 확대되지.”

“맞아, 내 말이 그 말이야. 애플이 다 먹으면 누가 개발을 하려고 하겠어? 애플에 일일이 하청받아서 개발할 것도 아니고.”

“알았어. 내가 얘기해 볼게.”

“깨톡 건도 꼭 얘기해 줘. 그거 아주 대박이야. 블랙베리 메신저는 저리 가라다. 너도 한번 써 보면 푹 빠질 거다.”

“어, 알았어.”

나는 하마터면 ‘알고 있어.’라고 대답할 뻔했다. 여하튼 잡스는 천재답게 메신저 비즈니스가 SNS로 발전할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나 보다. 생태계 운운했던 걸로 봐서 말이다.

하지만 욕심이 과하다. 그걸 다 먹으려고 하면 어쩌나. 그리고 SNS 기업체들은 10년쯤 지나면 스마트 클라우드의 반도체를 미친 듯이 사 주실 고마운 분들인데.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좋은 거다. 잡스를 설득해야겠다.

    • *

삐리릭. 삐리릭.

스티브 잡스와 컨퍼런스 콜을 연결했다.

-수한?

“잡스, 전화했다면서요? 잘 지내요?”

-잘 지냅니다. 혹시 파이오니어에서 연락받았나요?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자세한 얘기는 당신에게 직접 듣겠다고 했죠.”

-하아, 순간 예전 생각이 나서 필요 이상으로 격하게 반응했습니다.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사과는 직접 하세요. 아무리 동맹이라 해도 업무에 이견은 있을 수 있으니 이재훈 사장도 이해할 겁니다.”

-그렇군요. 여하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대해서는 속마음을 좀 얘기해 봐야겠습니다. 서로 입장이 달라서 말이지요.

“방금 전 예전 생각이 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야기가 쉽겠군요. 저도 매킨토시 컴퓨터를 예로 들고 싶었습니다.”

애플 컴퓨터가 망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는 일반 소비자가 사기에는 너무 비싸고, 일체형이라 부품 업그레이드도 쉽지 않았으며, 소프트웨어 풀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결국 조립형 PC라고 불리는 IBM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는 시장 지배력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그 와중에 MS의 윈도우가 등장하면서 치명타를 맞았다. 마우스 기반으로 그래픽 작업이 편리하던 매킨토시만의 차별화 포인트마저 윈도우로 대체 가능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알겠지만 매킨토시의 시장 점유율이 바닥을 치게 된 것은 MS와 인텔을 견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IBM 퍼스널 컴퓨터가 등장한 것이 먼저이지 않나요?”

나는 뒤에 나올 말을 알고서도 일단은 질문해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이면이 있을지도 모르잖나.

-IBM은 그다지 강력한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DOS 지원 프로그램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고, 바이러스에 취약한 데다 프린트도 연결하기 힘들었기에 돈이 되는 B2B 사무 자동화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으니까요.

“결국 윈도우의 탄생이 핵심이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기술적으로 더 들어가면 윈도우를 구동시켜 준 인텔 CPU가 애플의 가장 큰 적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풀어 준다면 하드웨어까지 경쟁자가 나타날 거라는 말씀이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크게 우려하는 겁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다 보면 기본적으로 하드웨어 구동에 대해 이해력이 높아집니다. 결국 벤처들 중에 MS 같은 회사가 나타나면 인텔 같은 부품 회사도 만들어지고 그렇게 되면 IBM, 컴팩, HP, Dell이 등장했던 것처럼 스마트폰 메이커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애플리케이션 개발은 스마트 클라우드나 애플 내부에서 라이선스를 주면서 개발해야 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생각에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스마트폰 메이커가 등장하는 것은 결국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경쟁자가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시장 확대와 기술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하는데, 잡스는 폐쇄적인 OS로 시장 진입 문턱을 높이자는 말을 하고 있다. 시장 점유율을 지키는 전략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지키는 것은 공격하는 것보다 배는 힘들다. 결국 지키지 못할 성이라면 성을 지을 돈으로 시장에 우리 점포를 우수수 만드는 게 낫다.

“파이오니어도 우리의 동맹입니다. 보안 기술은 세계 최고이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앱 개발은 매우 당연한 권리입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라이선스를 주면서 개발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른 플랫폼에 유사한 기능의 애플리케이션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단서는 필수죠. 개인적으론 파이오니어는 애플리케이션을 배포하는 딜러이지 개발자가 아닙니다.

“잡스, OS나 스마트폰이라는 플랫폼은 어찌 되었든 변형품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터치스크린 기술도 내년 말이면 비슷하게나마 흉내를 낼 겁니다. 우린 다양한 애플리케이션과 터치스크린에 최적화된 OS로 승부를 걸어야죠. 다양한 앱 개발은 필수입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초기 스마트폰에는 감압식 터치스크린 기술이 많이 쓰였다. 차후 모든 메이커가 정전식 터치스크린으로 넘어오긴 하지만 말이다.

-1등을 유지하는 데는 돈, 시간, 인력이 후발 주자들에 비해 지극히 많이 들어갑니다. 카피 캣을 방치하는 전략은 결국 우리를 스스로 함정에 빠뜨리는 행위입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잡스의 생각은 아주 단호하다. 예전 매킨토시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잡스, 매킨토시를 떠올려 보세요. MS와 인텔의 공격으로 무너졌을까요? 내가 볼 때 부품 전략에서 실패했던 겁니다. 애플은 모토롤라라는 어이없는 회사에 CPU를 100% 의존했기 때문이에요. 반도체보다 휴대폰 사업에 무게를 실어 가던 모토롤라를 믿었던 것이 패착이었단 말입니다.”

-으흠, 그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한데….

매킨토시가 가격이 비싼 만큼 성능에서 절대 우위를 보였다면 그리 무너지지 않았을 거다. 모토롤라는 애플이 닦달하자 CPU 개발에 더 투자하기보단 아예 CPU 사업을 접어 버렸다.

“하드웨어를 담당하는 스마트 클라우드는 부품 회사이자 스마트폰 회사예요. 기술 개발에 혼신의 힘을 다할 수밖에 없는 회사라는 거죠. 카피 캣의 등장은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외려 오리지널 회사만의 기술 차별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입니다.”

-수한, 아닙니다. 막아야 합니다. 특히 노키아와 MS는 강력한 적입니다. 우리의 아이디어를 도용한다면 대규모 소송을 해서라도 막아야죠. 그 전에 애플리케이션 독자 개발이라는 사소한 빌미를 줘서는 안 됩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잡스는 벌써 벌어진 일처럼 말한다. 관점이 달라서 그렇지 미래를 보는 눈은 미래에서 온 나 못지않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알지. 스티브 잡스가 주도했던 특허 소송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미국에서는 일부 승소하지만, 유럽을 비롯해 다른 나라에서는 연이어 패소를 한다. 터치스크린 원천 특허는 20여 년 전에 이미 나왔고, 정전식 터치스크린조차 연구 논문이 수십 편이나 나와 있다. 소송을 진행할수록 노하우성 기술까지 오픈해야 하는 부담으로 애플조차 소송을 포기해 버렸다

이왕 완벽히 이기지 못할 소송이라면 처음부터 로열티를 받으며 정면 대결을 하는 게 낫다. 어차피 노키아와 MS는 쓰레기 같은 제품을 만드니까 말이다. 오히려 우리 제품에 대한 고객의 충성심만 강하게 만들어 줄 거다.

“잡스, 얘기는 이 정도로 하죠. 잡스의 생각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런 방식은 어떨까요? 애플 OS에서 개발자용 코드를 오픈하여 중소기업의 앱 개발은 막지 않는 대신 앱을 파이오니어 웹 라이브러리에 등재할 때 로열티를 받는 방식이 좋겠습니다.”

-수한, 그건 결국 허용하겠다는 말인데. 내 말을 어찌 들은 겁니까?

“대신 대기업에서 아이디어를 도용한다면 그 대응은 애플에 일임하죠. 대규모 소송을 벌이든 정계 로비를 하든 당신 의견에 따르지요.”

-으흠….

“그러면 되겠죠?”

-좋습니다. 벤처 기업을 압박하는 것은 나도 그다지 내키진 않았으니.

그래, 자신도 한때 벤처로 시작한 청년 사업가였으니까. 이 정도면 될 줄 알았다.

“생각보다 길게 통화를 했네요. 이제 들어가시죠.”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전화하죠.

뚝. 삐이익.

나는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잡스의 행보가 원래 역사를 쫓아간다면 스마트폰에서 애플만의 영역을 구축하려고 부단히 애를 쓸 것이다. 결국 OS를 무기로 독자적인 모델을 내겠으니 하드웨어를 공급해 달라고 할 테고 말이다. 나로선 거절하긴 힘든 제안이기도 하고.

‘스마트폰이 너무 일찍 나오긴 했어.’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것이었다. 안드로이드가 나오려면 2007년까지는 기다려야 하는데 말이다. 구글이 본격적으로 사업에 성공하며 안드로이드사를 인수하는 게 아마 2005년인가 그랬다. 그 회사에서 2년 동안 블랙베리 플랫폼을 타깃으로 OS를 만들다가 아이폰이 나오면서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급선회를 하지.

애플에 대항해 구글, HTC, 노키아, 소니, 에릭슨, 도시바, 델, 인텔, 심지어 신성도 안드로이드 진영에 합류한다. 오픈형 표준 OS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컨소시움을 구성했다. 공짜인 리눅스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만들었기에 제조업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콘텐츠 업체도 아무런 제한 없이 쓰게 된다.

“하아… 나도 OS 독립을 하긴 해야겠네. 나중엔 애플에 질질 끌려갈지도 모르겠어.”

나도 모르게 입에서 독립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나와 잡스가 서로에게 호의적이긴 하지만 냉정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호의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잖나.

창업도 하지 않은 안드로이드를 어디서 찾나. 그게 문제다.

    • *

같은 시각 MS 본사.

빌 게이츠는 노키아 CEO인 요르마 올릴라를 앞에 두고 있었다. 솔직히 성공을 자신했던 블랙베리를 이처럼 빠르게 포기하고 노키아를 파트너로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요르마, 모바일 운영체제로는 윈도우 모바일이 적합합니다. 자그마치 버전 업이 2.1까지 되어 있거든요.”

“버전이 2.1이라면 두 번 정도 메인 업그레이드를 한 거군요. 우리 심비안 OS는 버전이 자그마치 4.3입니다.”

“그야 심비안이 피처폰 OS이기 때문이지요. 스마트폰, 아니 다른 말은 없나? 여하튼 4.3버전이라고 한들 우리의 폰에서 쓰기엔 이미 구형 OS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OS 독점에 협조할 수 없습니다. 내가 빌 게이츠 당신을 만나고 있는 것은 스마트 클라우드와 애플이라는 연합을 혼자서는 깨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에게 OS라는 족쇄를 채울 요량이라면 난 돌아가지요.”

요르마의 말에 빌 게이츠는 살짝 이맛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심비안 OS 자체가 마이크로소프트를 견제하기 위해 1998년에 단말기 업체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사이온(Psion)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거다. 모토로라, 노키아, 파나소닉, 소니, 에릭슨, 지멘스가 공동으로 출자를 했다. 결국 빌 게이츠도 심비안을 견제하기 위해 모바일 OS에 대해선 독점권을 그다지 내세우지 않았고 말이다. 이젠 피처 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기에 허튼 경쟁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아아, 그러시면 안 되죠. OS야 우리 윈도우 모바일을 쓰건 심비안을 쓰건 상관없습니다. 단지 스마트폰을 견제할 우리의 윈도우폰… 아, 이거 적당한 말이 없어서…. 심비안폰이 되든 뭐든 하드웨어 전략은 공동으로 수립하자는 겁니다.”

“이제야 말씀을 제대로 하시는군요. 모바일 CPU는 어디와 협력하실 겁니까? 퀄컴은 당연히 아닐 테고, TI? TSMC? 어딥니까?”

“솔직히 저도 TI를 선택하고 싶습니다만, 신성전자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처럼 퀄컴 및 ARM사의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회사거든요.”

“오오, 그래요? 신성은 DRAM과 플래시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노키아는 신성에 DRAM과 플래시를 납품받고 있었다. 최근엔 스마트 클라우드의 반도체 가격과 성능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그쪽으로 공급선을 바꿨지만 말이다.

“요르마 님이 한국 회사의 내막을 잘 몰라서 그런 겁니다. 최근까지 신성전자는 스마트 클라우드와 치킨게임을 벌일 정도로 꽤나 잘나가는 회사였습니다. 치킨게임으로 박살 나 버렸지만 말입니다.”

“으흠, 그러고 보니 저도 그리 들은 것 같습니다. 여하튼 신성전자를 끌어들이는 게 맞다면 어째서 지금 같이 자리를 하지 않은 겁니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치킨게임에서 완전 박살이 나 버렸다고. 이제 독자적으로 개발에 나서지 못할 테니, 우리가 우리 OS에 최적화된 모바일 CPU를 만들라고 하청을 줘야 할 겁니다. 솔직히 퀄컴 기술은 몰라도 ARM사의 저전력 코어 기술은 대안이 없으니까 신성을 이용하는 게 답입니다. 3년만 쓰고 버리죠. 그때쯤이면 대안이 생길 테니.”

“모바일 CPU에 들어가는 GPU 코어 기술도 대안이 없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어쩌실 겁니까? 스마트 클라우드가 대주주인 엔비디아가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건 인텔이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아예 인텔이 모바일 CPU를 만들면 안 됩니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퀄컴과 ARM사의 라이선스를 가진 곳은 현재로선 스마트 클라우드와 신성밖에 없다고요. 인텔이라는 경쟁사에 퀄컴과 ARM사가 해당 라이선스를 줄 이유가 없지요.”

“그렇군요.”

이 모든 게 뜬금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스마트폰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반도체 거인이라는 인텔마저 라이선스가 없어 모바일 CPU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라니 말이다.

“그럼 신성전자에 하청을 주기로 하고 노키아에서도 엔지니어를 파견해 주십시오. 한국의 용인밸리에 MS 지부가 있으니 그쪽으로 합류시키겠습니다.”

“용인밸리?”

“한국에도 실리콘밸리와 같은 곳이 있습니다. 내 회사에 X-박스를 납품하고 있는 곳입니다. 신성전자와 협업하기 적당한 곳이죠. 보안도 철저하고.”

“모든 작전을 짜 놓으셨군요.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죠. 터치스크린 기술은 어쩌실 겁니까? 솔직히 심비안도 블랙베리의 쿼티 자판에 최적화시켜 놓은 OS라 터치스크린 기술은 일천합니다. 특허도 없고요.”

“일단 감압식 터치스크린 기술로 윈도우폰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정전식 터치스크린은 최소 2년 정도는 연구해야 스마트 클라우드의 특허를 회피할 수 있을 겁니다.”

“감압식이라….”

“화면에 가해지는 압력을 센싱하는 방식이죠. 스마트폰은 손가락으로, 우린 손톱으로 좀 더 정교하게 컨트롤하신다고 보면 됩니다.”

“여전히 특허 소송의 리스크는 있다고 보이는군요.”

“후후, 잡스가 난리 법석을 떨겠죠. 특허 소송이야 질질 끌다 보면 결국 합의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저에게 맡기세요.”

“믿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렴요. 노키아의 모토가 ‘통신과 함께 살거나 죽는다!’ 아닙니까. 이대로 물러서면 노키아의 미래는 없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마찬가지죠.”

“하드웨어의 오너십은 노키아에 주십시오. 그럼 동맹을 맺겠습니다.”

“그럼 OS는 윈도우에 주십시오. 어떻습니까?”

척.

노키아 CEO인 요르마 올릴라는 대답 대신 손을 척 내밀었다.

“하하하하! 좋군요! 정말 멋진 결정을 내리신 겁니다.”

“애플을 이겼던 실력을 이번에도 보여 주시죠.”

“하하하하! 문제없습니다. 당연히 문제없지요. 윈도우폰이 스마트폰을 압도할 겁니다.”

“믿겠습니다.”

빌 게이츠는 요르마와 악수를 하며 크게 웃어 댔다. 역시 CEO끼리 만나야 큰 거래가 성사되는 거다. 실무진끼리 사전 접촉을 시켜서 이런 CEO 담판까지 오려면 몇 개월은 더 허비했을 것이다. 지금이 1월이니 올해 안에 윈도우폰을 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윈도우폰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요르마가 뭐라고 하지 않지 않나. 이름마저 원하던 대로 되었다. 희대의 명품이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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