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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챕터 7 (89/104)

제5장 챕터 7

결혼식 후 일주일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곧바로 일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신성이 몰락의 수순으로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후속 작업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은 은행으로부터 유동 자금을 빌리기도 쉽지 않아 손발이 묶인 꼴이었다. 정부는 신성의 비서실과 법무팀을 해체해 로비의 근간을 흔들어 버렸고, 내친김에 대현처럼 계열사를 분리해 순환출자구조를 깨라고 압박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그룹 승계 작전은 영원히 물 건너간 것을 깨달았는지, 이수학 비서실장이 비자금을 빼돌려 외국으로 나가려다 덜미가 잡혔다. 금액이 금액인지라 여론은 더욱 불타올랐고 구속을 면할 수 없었다.

이수학이 빼돌리려던 차명 비자금 외에 총수 일가 명의의 비자금마저 수면 위로 드러나 탈세 혐의로 추징당할 처지가 되자 신성은 계열사별로 독립 채산제를 선언했고, 전문 경영인들을 전면에 배치했다. 그 와중에 진 상무는 신성 반도체를 끝끝내 지키려고 했지만 치킨게임에서 지고 투자도 제때 하지 못해 신성의 파워는 예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쪼그라들어 혁신 기업이라기보다 규모가 큰 부품 업체 정도의 위치가 되었다.

신성 게이트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쯤, 미국에선 911 테러가 일어났다. 솔직히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내 기도 따위가 그 일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세계 최강 대국인 미국의 본토가 공격당했습니다. 미국 경제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세계무역센터에 납치한 여객기를….

“오 마이 갓! 어떻게 이런 일이….”

케이는 911 테러 특별 편성 프로를 보며 참담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비행기가 빌딩을 들이받는 영상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속보에 앞서 부모님의 안부는 이미 확인한 상태다.

내가 우연을 가장해 이틀 전부터 시카고에서 미국 반도체 공장 성공 사례 발표 및 대현자동차 공장 투자 설명회를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헌몽 회장이 주관하는 설명회에 케이슨과 케이 부모님께 지원 사격을 부탁했었다. 자연스레 케이에게 우호적인 파라곤 이사들도 시카고로 날아왔기에 뉴욕에서 벌어진 테러에서 화를 당하려야 당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들 무사하시니 그나마 다행이지.”

“수한 씨가 시카고에서 투자 설명회를 개최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특히 하워드는 세계무역센터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그러게. 우연이지만 다행스러운 우연이네.”

원래 역사에서도 911 테러의 여파가 경제에 미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단기적으로 주식이 폭락하고 투자 심리가 위축되긴 했지만 채 한 달도 안 되어 모두 회복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미국 대외 정치의 기조가 바뀌었을 뿐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나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경제에 큰 영향을 줬던 대사건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리먼브라더스가 2008년 9월에 파산하니 이제 정확히 7년 남았다. 911 테러와 비슷한 수준의 주식 폭락이 있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 여파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글로벌 경제 위기로 확대되었고 후유증이 길게 갔다는 것이다. 내가 걱정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리먼 사태지 911 테러가 아니다.

“수한 씨는 정말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랬으면 좋겠네. 복권이나 사고 주식으로 떼돈이나 벌게.”

나는 진중한 표정의 케이에게 농담으로 답했다. 그녀도 ‘하긴 그렇지.’ 하며 고개를 까딱거리다 뉴스로 눈을 돌렸다.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서 말이다.

    • *

2001년 12월 31일.

“휴우, 이제 올해 한 해 일은 대충 마무리가 된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11월 시카고 쇼 케이스에서 마이크론이 NEC 인수를 공식화하지 않았습니까. 마이크론이 반도체를 10% 감산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치킨게임을 그만하자는 신호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신성의 마무리에 대해 물었는데 윌슨은 치킨게임을 얘기한다. 이제 윌슨에게 신성은 안중에도 없나 보다. 이희건 회장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지금, 윌슨의 시각이 오히려 정확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시카고 쇼 케이스가 한 달 전 얘기다.

“반도체 가격은 예상대로죠?”

“예. 한 달 사이에 완연히 회복되었습니다. DRAM은 1G당 2.2달러 근처에서, 플래시는 3.8달러 근처에서 가격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고정 거래선은 내년 2/4분기까지 계약 완료되었고, 신성의 점유율은 고작 3.4%밖에 되질 않습니다.”

NEC와 신성의 점유율을 나머지 회사들이 나눠 가진 꼴이다.

한차례 치킨게임이 끝났으니, 다음 치킨게임은 메모리 교체 사이클이 닥쳐오는 4년 뒤에나 다시 시작될 것이다. 반도체는 이제 4년 동안 안정적인 캐시카우가 된다는 의미다. 물론 누가 12인치 공장을 더 짓고, 누가 수율을 더 끌어올리는가 하는 경쟁력 확보 전쟁은 멈춰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런 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실무자들이 더 잘 챙기는 일이다.

“스마트폰 실적은 집계되었나요?”

“어제 일자로 결산 종료했습니다. 2001년 판매 대수는 총 2,578만 대로 매출로는 154억 불, 순익으로는 37억 불입니다. 순익률은 24%로 아주 아름답습니다.”

“역시 2천만 대가 넘었군요.”

2천만 대가 넘은 것도 놀랍지만 37억 불 순익이라면 환화로 4조 4천억이나 된다. 작년 K폰 치킨게임으로 휴대폰에서는 4천억밖에 못 남겼는데, 순익이 열 배 이상 뛰었다.

“회장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으니 임직원들의 기대가 큽니다. 1월에 특별 보너스가 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하하하, 당연히 드려야죠. 작년에 다들 자발적으로 고통 분담을 해서 치킨게임에서 승리한 것 아닙니까. 반도체 사업부와 무선통신 사업부는 S급으로, 나머지 사업부는 순위를 매겨서 차등 지급해 주세요.”

“이번엔 총괄영업과 소재사업부도 S급을 노리고 있던데 말입니다. 영업은 시장 점유율을 대폭 확대했고 소재는 12인치용 공정 소재를 성공적으로 개발했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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