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불꽃놀이 (88/104)

제4장 불꽃놀이

탁. 탁. 탁.

스마트폰 매출이 하루가 다르게 급증하는 만큼 내 업무도 폭주하고 있었다. 기술 전략이 아니라 인사 쪽에 비중을 두고 있다. 내년에는 대거 임원 승진을 시키려고 한다. 그동안의 업무 성과는 물론, 구성원들에게 존경받고 있는지 다양한 루트로 상호 검증해야 한다. 인사 팀장에게만 맡겨 둘 수가 없는 일이다.

스마트폰을 출시한 뒤에 하려고 했던 일인데, 생각보다 스마트폰을 빨리 출시했기에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김 실장, 권 부장, 나 부장, 조너슨이야 당연히 임원 승진을 시킨다고 해도 정밀 기계 쪽과 증권사, 심지어 문예일보까지 더 이상 임원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으리라.

무엇보다 마음이 급해진 이유는 40만 원을 뚫어 버린 주가 때문인지 스마트 클라우드의 브랜드 가치가 세계 50위권 이내에 들었다는 소식 때문이다. 인터브랜드가 글로벌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산정했는데 스마트 클라우드가 뜬금없이 48위를 기록했다. 애플도 42위를 기록하며 상승세가 돋보이는 기업이라는 찬사가 언급되어 있었다.

현재 브랜드 순위는 코카콜라가 1위, 그 뒤를 MS와 IBM이 따르고 있는 상황이다. 아마존, 애플, 구글 순으로 익숙해져 버린 나에겐 빛바랜 순위처럼 보인다.

똑. 똑. 똑.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지? 윌슨은 전환사채 조사하러 외근 중이고 케이는 폭주하는 고객 때문에 미국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갑자기 케이가 보고 싶다.

“들어와요.”

“많이 바쁘냐?”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재훈이였다.

“에? 너였어? 얼른 들어와. 낯간지럽게 무슨 노크야.”

“에이, 세상에서 제일 바쁘신 분인데 어떻게 그냥 들어오냐?”

“어이구, 예의 바른 친구분이시네. 그런데 빈손으로 왔냐?”

“후후후, 빈손은 아니지.”

재훈이는 빈손이 아니라며 손에 들고 있던 콜라 캔을 내게 휙 하니 던졌다. 안 그래도 브랜드 순위에서 코카콜라 때문에 웃고 있었는데 말이다.

“호, 내 경쟁사 제품이네.”

“뭐가?”

“이 콜라가 내 경쟁 제품이라고.”

“너 펩시도 인수할 거냐?”

“고급스러운 농담인데 친구분께서 이해를 못 하네. 코카콜라보다 스마트폰이 더 유명한 브랜드가 됐으면 한다는 의미라고요.”

“뭔, 휴대폰하고 콜라를 비교해?”

“여하튼 왜 왔어? 전화로 하든지 안 그러면 퇴근하고 맥주 한잔 하자고 하면 되지.”

재훈이는 내가 파이오니어 지분을 매집한 이후로 한국에 들어와 있다. 실질적인 오너가 한국에 있으니 월급쟁이 사장도 한국에 있어야 한다며 미국 본사를 지사처럼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 회사답다고 해야 할까.

“파이오니어 사장으로서 논의할 게 있어서 말이야. 스마트폰이 정말 혁신적인 제품이긴 한가 봐. 내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게 이렇게 빛을 볼 줄은 몰랐다니까.”

“친구분, 자화자찬은 그쯤 하고 본론부터 말해 봐.”

“아, 그게 말이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겠다는 프로그램 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어. 꺼져 가는 벤처 열풍에 한 가닥 희망처럼 여겨지고 있나 봐. 나한테 엄청 찾아온다니까.”

그러고 보니 2001년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코스닥도 폭락하는데, 내 나비효과가 한국의 IT 버블을 연착륙시킬 수도 있겠다. 개미 투자자들이 희망이라 부를 만도 하겠다.

“좋은 현상이네. 파이오니어로 찾아가는 이유도 알겠다. 이참에 애플리케이션 딜러로 확실히 자리 잡아.”

현재로선 애플과 내가 스마트폰을 팔면서 하드웨어는 내가, 마케팅과 OS는 애플이, 애플리케이션은 파이오니어가 담당하고 있다. 매출과 순익 둘 다 6:3:1로 나누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이오니어의 비중은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를 찾아온 한국 벤처들 중 상당수가 신성 출신이야. 심지어 현직에 있는 사람도 많아. 그중에 S폰 관련자들도 상당수야.”

“뭔 소리야? 신성 직원들이 앱 개발을 왜 해?”

“나도 그게 이상하긴 한데, 내가 앱 라이브러리만 오픈해 주면 바로 회사 나오겠다는데? 벤처를 해 보겠다고 워낙 열성적이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으흠….”

재훈이는 내가 신성과의 치킨게임을 시작할 때 78억 불이나 내놓은 친구다. 신성이라면 일단 조심하고 볼 수밖에 없는데, 신성 직원들이 찾아오니 당황했을 법하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때쯤 비슷한 일이 있었지. DJ 정권을 끝으로 벤처 자금 지원이 끊어질 기미가 보이자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이들이 꽤나 있었다. 하이패스도 그렇고, 중국에서 저가 MP3를 만드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IT 제품에 들어가는 파워 디바이스나 수동 소자 같은 부품을 만들어 보겠다고 회사를 박차고 나온 이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에게 스마트폰 앱은 꽤나 구미가 당기긴 하겠네.

“이참에 나도 파이오니어의 검색 엔진과 보안 프로그램은 에릭 비나에게 맡기고, 사업부를 분리해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VOD 사업만 내가 관리했으면 해. 그래서 결재받으러 온 거야.”

쉽게 말해서 신성에 애플리케이션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직접 컨트롤하겠다는 의미다. 내 친구가 점점 똑똑해지고 있다. 앱 시장이 좀 더 커질 거라는 생각이 드나 보다.

“흔쾌히 결재하지, 사장 친구. 대신 그 벤처들 사무실을 용인밸리 내로 끌어들여. 시너지도 생기고 보안 사항을 챙기기도 쉬울 거야.”

“오, 이렇게 쉽게 허락하는 거야? 회장 친구님?”

“친구님이 스스로 부자 되시겠다는데 왜 말려? 벤처들 잘 이끌어 봐.”

“고마워. 네가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이거 벌써부터 대박 친 것 같다. 여하튼 용인밸리로 들어온다면, 인터넷 블록은 새로 꾸며야 할 것 같아. 파이오니어 보안망을 이중, 삼중으로 깔고 싶어.”

“신성 인력들이 걱정되긴 하나 보구나.”

“당연하지. 끄나풀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부지는 내가 알아볼게. 물론 네 돈으로.”

“맘대로.”

재훈이는 정말 이걸 논의하러 왔는지 콜라 한 캔을 쭉 들이켜더니 손을 흔들고는 가 버렸다. 자신이 내게 돈을 빌려 준 채권자라는 생각은 별로 안 하는 것 같다. 나 때문에 번 돈이며, 내가 적기에 주식을 팔게 만들지 않았다면 건지지 못했을 돈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여하튼 좋게 생각하면 신성에도 치명타가 될 수 있겠다. 결국 IT 산업은 고급 인력 싸움이니까.

신성의 직원들마저 흔들리는 걸 보니 신성 내부에 균열이 생긴 것은 확실하다. 더욱이 내 업무도 하나 줄었다. 파이오니어 조직은 사업부 두 개로 나누고, 재훈이는 사장 자리를 유임시키고 에릭은 상무를, 아니 부사장으로 승진시키면 될 것 같다. 재훈이의 연봉은 사업부 순익에 따른 스톡옵션을 걸면 될 것 같고 말이다.

아, 소프트웨어 단지를 따로 꾸미면 파이오니어 사옥도 그쪽에 만들어야겠네. 이왕 블록 전체의 인터넷 보안망을 새로 까는 대규모 공사인데 말이야. 동쪽은 이미 공장 부지로 계획되어 있고 서쪽은 판교 쪽으로 붙어 버리니 안 되겠네. 남쪽은 정밀 기계와 소재 쪽으로 확장할 거고. 결국 북쪽밖에는 없어 보인다.

‘그쪽은 모두 야산인데, 산을 깎기는 좀 그렇고… 산 너머에 평지가 있던가? 왕회장님처럼 손이 큰 양반이면 산 너머 부지도 사 뒀을 것 같은데.’

생각난 김에 확인을 해 봐야지 싶었다. 나는 일을 미뤄 두는 성미가 아니어서 말이다.

삐리릭. 삐리릭.

-여보세요.

“최 상무님, 저 유수한입니다.”

이제 대현에서 통화할 사람은 최 상무가 유일하다. 왕회장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정헌몽 회장도 구치소에 계시니까.

-아이고, 유 회장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대현전자 월례회는 아직 며칠 남았는데 말입니다.

“대현전자 건이 아니고요, 개인적으로 여쭐 말씀이 있어서요.”

-말씀하십시오.

“혹시 왕회장님께서 용인밸리 부지 매입하실 때 북쪽 야산 쪽도 매입하셨나요?”

-예, 당연하지요. 원래 손이 크시기도 하지만 경치 좋은 곳에 연구소를 세우면 연구가 잘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30만 평에 150억밖에 안 하는 땅값도 매력적이었고요.

“하하, 연구소까지 생각하셨어요? 잘됐네요. 제가 비싸게 인수할게요.”

어찌어찌하다 보니 왕회장의 유지를 이어받는 느낌이 든다.

-아이고, 유 회장님께서 인수하신다면야 당연히 드려야죠. 그런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신성이 자꾸 그 땅이 자신들 것이라고 해서 말입니다. 연례행사처럼 지루한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신성하고 소송을 해요?”

-원래 그 땅이 해피랜드가 지주들과 계약한 땅이라는 거죠. 왕회장님께서 공시지가의 두 배로 일괄 매입했는데, 신성은 지주들과 공시지가로 가계약을 맺어 놨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5년째 접어든 일이군요.

“으음, 그 땅이 해피랜드와 닿아… 아, 가깝긴 하네요.”

-못된 신성 놈들! 매입가 좀 아껴 보겠다고 땅값을 후려쳐서 최종 계약이 안 된 건데, 대현 탓을 하고 말입니다. 여하튼 예전엔 되팔아 줄까 말까 했지만 지금은 왕회장님 원수라 대현이 소송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절대로 안 질 테니까, 올해 연말에 최종 판결 나면 땅을 인계해 드리겠습니다.

최 상무답지 않게 흥분해서 말을 마구 늘어놓았다.

잠깐, 잠깐. 최 상무의 말을 계속 듣다 보니 뭔가가 휙 하니 스쳐 간다. 원래 역사가 내 나비효과로 상당히 틀어진 느낌이다. 원래 역사에서 해피랜드의 전환사채는 1996년쯤 만들어졌다고 들었고, 전환사채를 기존 주주들이 자발적으로 포기하면서 이 회장의 후계자들이 나눠 가진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문제는 윌슨이라는 특급 로비스트가 조사를 했음에도 그 사실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전환사채가 만들어지긴 했는데, 집행이 안 된 건가?

전환사채는 원래 이자를 받는 사채인데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주식으로 전환되는 권리를 가진 증권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이라는 단서인데 해피랜드의 전환사채가 용인 근처의 부동산 매입 자금을 충당한다는 핑계로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발행 조건에 명기된 땅이 이 땅이라면? 어이없는 나비효과지만 시점을 보든 신성의 행보를 보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나조차 소송이 벌어지는 줄 몰랐을 정도로 신성이 조심스레 일을 진행하고 있었잖나.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연락을 드리지요.”

-당장 부지 인계를 못 해 드려 죄송합니다. 왕회장님께선 용인 땅은 모두 회장님께 인계하라고 명하셨는데….

“마음 쓰지 마세요. 신성하고만 잘 싸워 주시면 됩니다.”

-아유,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신성이라면 이를 갈고 있는데!

툭.

전화를 끊고도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전환사채가 주식으로 완전히 전환되지 않고 어설픈 상태로 공중에 붕 떠 있으면 아무리 윌슨이라도 꼬리를 못 잡지. 오히려 불법에 불법이 덧씌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바꾸지 못했다고, 승계 작업을 미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거, 생각보다 더 치명적인 무기가 될 것 같다.

삐리릭. 삐리릭.

나는 바로 윌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회장님.

“전환사채 조사 방향을 조금 달리해 줘요. 해피랜드의 부동산부터 조사를 했으면 합니다.”

-부동산부터 말입니까?

“맞아요, 부동산! 전환사채가 부동산 매입이라는 발행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고 불법적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서, 설마요. 아무리 한국 금융이 엉망이라지만 그런 식으로 유통을 할 리가….

“신성은 대한민국에서 초법적 존재예요. 사내 법무팀이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로펌입니다.”

-알겠습니다. 아, 예.

“바로 시작해 주세요.”

-옙!

삐이익.

전화를 끊고 나니 뭔지 모르게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인생 1회 차에는 해피랜드 전환사채라는 말만 들었지 그 내막을 몰랐지만 이번엔 확실한 꼬투리를 잡은 느낌이 든다. 재훈이 녀석이 박씨를 물어다 줬다.

    • *

똑. 똑. 똑.

“들어와요, 윌슨.”

“예, 늦어서 죄송합니다.”

비서실장이 직접 뛰어다녔을 정도로 기밀에 해당되는 일이다. 늦었다는 말부터 꺼내는 걸 보니 모든 조사를 마쳤나 보다. 꼬투리를 문 지 불과 반나절밖에 안 되는데 역시 윌슨은 대단하다.

“조사를 마쳤군요.”

“그렇습니다. 회장님의 정보 채널이 저보다 나으십니다. 대체 어디서 그 정보를 얻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우연입니다. 파이오니어 사장이 용인밸리 북쪽으로 부지를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해피랜드와 대현이 해당 부지 소유권으로 싸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대충 둘러댔다. 중요한 게 아니니까.

“하, 그렇군요. 우연이었네요. 여하튼 신성에서 첫 단추를 아주 엉뚱하게 끼우고 있더군요. 이거 한 방에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방에!”

“급히 오느라 자료 작성을 따로 못 했습니다. 이걸 보시면서 보고드리죠.”

“오!”

윌슨은 007가방을 열어 A4 한 장을 내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케이가 화이트보드에 적어 두고 보여 주길 좋아하는 포맷이었다. 핵심 단어를 배치하고 화살표를 이리저리 그어 놓은 메모 말이다. 어디서 배웠나 했는데 윌슨에게 배웠군.

윌슨은 흥분해서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설명을 이어 갔다.

“해피랜드의 전환사채는 1996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전환사채의 특성상 배당된 주주들이 포기 의사를 밝히면 제3자에게 배정할 수 있지요. 그룹 전체의 승계 작업이니만큼 대주주였던 중도일보 및 신성물산 등이 포기했고 이희건 회장의 자녀들에게 전환사채의 97%가 고스란히 넘어갔습니다.”

윌슨의 설명은 내가 대충은 알고 있던 사항이었다. 97%난 넘어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 전환사채를 해피랜드의 주식으로 전환하면 125만 주나 됩니다. 기존 해피랜드의 전체 주식이 70만 주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전환사채 중 62만 주를 인수받은 이용재 전무가 단박에 해피랜드 대주주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이용재 전무가 그룹의 후계자인 것 같습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역시 아시아라 아들 쪽이 당연한 거군요. 그 뒤로는 일사천리입니다. 그룹 조직을 선진화한다며 해피랜드가 신성모직과 합병되면서 주식을 50 대 1로 액면 분할합니다. 이때 이용재 씨의 주식 수는 3,000만 주로 뻥튀기가 되고, 곧바로 해피랜드가 신성물산으로 인수되면서 3 대 1 교환이 일어나니 결과적으로 신성물산 주식을 1,000만 주나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성물산은 순환 출자의 중심. 이용재 씨가 그룹 총수 확정이군요.”

“예. 신성물산 주식 1,000만 주면 지분의 15% 이상이니, 결국 그룹 전체를 승계하는 것이죠. 이런 일련의 작업들을 하면서 세금은 전환사채 인수 때 납부할 16억 원이 전부입니다.”

“멋진 작전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한 방에 보낸다는 거죠? 현재 법망을 완벽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작전을 짠 것 같은데요.”

나는 어서 결론을 듣고 싶었다.

“문제는 말씀하신 부동산에 있더군요. 전환사채가 발행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채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주들이 포기한 지분이 97%라고 말씀드렸지요? 포기하지 않은 3%가 한새미디어 쪽 지분이라고 하더군요. 어째서인지 신성과 각을 세우고 있어서, 전환사채 발행 조건 변경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희건 회장은 마음이 급했는지 발행 조건 변경 없이 그냥 일을 추진했고요.”

“하하, 부동산 매입만 해결되면 모든 게 끝나는데 대현과 소송을 하고 있는 거군요.”

“세상 사람들은 150억짜리 땅 소유권 분쟁이 신성그룹 승계와 관련 있음을 전혀 모를 겁니다. 그리고 그 전환사채가 시가 8천억짜리로 둔갑해 은행에 담보로 잡혀 있는 것도 모를 거고요. 하하하하하!”

“은행에 담보로 잡혀 있어요?”

“예, 은행 놈들 미쳤더군요. 담보 확인도 안 하고 신성의 이름만 믿고 8천억을 빌려 줬습니다. 회장님은 땅을 사 버리든, 전환사채가 부실채권임을 밝혀서 폭파시켜 버리든 맘대로 하시면 됩니다.”

설익은 전환사채를 담보로 맡겨? 이 회장이 미친 게 분명하다. 아니, 나와 치킨게임을 하면서 유동자금이 극도로 말랐나 보다. 계열사를 미리 팔았어야지. 한 푼이라도 더 물려주려고 했던 건가? 나처럼 아내 돈도 올인했어야지.

“이 회장이 알면 게거품 물고 쓰러지겠군요!”

“뒷목 잡고 쓰러질 겁니다. 하하하하!”

“양쪽 다 합시다. 당장 땅 사고, 은행장들 불러서 전환사채 폭파시키고!”

“오, 예!”

폭죽 한번 멋지게 쏘아 올리면 그뿐이다.

    • *

신성그룹 회장실.

연일 비상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비밀스러운 회동이어야 하는데, 목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갈 정도로 이희건 회장은 흥분한 상태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블랙베리가 부품으로 팔리고 있다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리점들이 재고 털어 내기를 하고 있습니다.”

텅! 텅!

“당장 멈추라고 해야지. 스마트그룹이 우리 돈으로 백기사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이 회장은 신문 칼럼을 보면서 힐난을 멈추지 않았다. 진 상무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잖나.

“스마트그룹이 물건을 싹쓸이하고 있습니다. 대리점은 아예 우리 본사와 접촉을 거부하고 있고 말입니다.”

“감히 대리점 주제에 우리 지시를 거부해!”

“환란 이후로 물건 밀어내기는 처음이라며, 말라 죽느니 스마트그룹에 붙어 조금이라고 건지겠다고 하더군요.”

“부품으로 팔린다면 우리가 직접 그 핸드 터미널이란 제품을 만들면 되지 않나! 대체 생각이란 걸 하고 일을 하는 건가?”

“송구합니다.”

진 상무는 라이선스가 없어 제품을 만들지 못한다고 대꾸하려다 말을 삼켰다. 이 회장도 뻔히 알고 있으면서 화가 나서 질책을 할 뿐이다. 이럴 때는 송구하다는 말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상책이다.

“어이구, 어쩌다 신성이 이런 꼴을 당해! 어쩌다.”

이 회장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토해 냈다. 요즘따라 되는 일이 없었다. 처음부터 스마트그룹을 공격하려 했던 시도 자체가 잘못이었나 하는 약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걸 입 밖으로 내지 못하니 더욱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곁눈질로 보자니 이수학 비서실장은 연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 비서실장은 더 큰 건을 말아먹었더군. 그래서 그리 잠자코 있는 건가?”

“어떻게 공항에서 잡힐 수 있는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징조는 여러 번 있었지. 비서실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 아니냐고 진 상무도 몇 번이나 따졌지만, 그때마다 당신은 그럴 리가 없다고 했지.”

“헉! 회장님, 비서실을 의심하시다니요. 보안에 목숨을 거는 조직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결과가 이 모양 이 꼬락서니야. 이면 계약서를 들고 출국하려던 이가 공항에서 현행범으로 잡힌 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나? 당신은 그게 믿어져?”

“대체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절대 비서실은 아닙니다. 분명 스마트그룹에서 미행을 붙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럼 당신이 문제겠네. 당신이 길 안내를 했구만. 차라리 밑의 애들 시키지 그랬어. 어? 보안 잘 지키는 비서실 애들 시키지 그랬냐고!”

쾅!

이 회장은 말하다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이 회장을 곁에서 봐 온 것이 20년째이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가 가장 화가 났을 때도 책상에 펜을 집어 던지는 것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송구합니다. 제 선에서 어쨌든 막아 보겠습니다. 상하이자동차 부사장이 다른 채널로 기밀을 빼 간 것이 분명하다고 선을 긋겠습니다. 아직 자동차 매각이 이루어진 것도, 기밀 유출이 일어난 것도 아니니 한 달 정도만 언론을 통제하면 잠잠해질 겁니다.”

“그래서? 잠잠해지면 돈이 생기나? 이젠 뭘 팔려고? 신성물산이라도 팔려고? 아니면 신성중공업이라도 팔 건가?”

“그, 그게… 아직 대안이….”

“닥쳐! 대안이 없으면 그냥 닥치고 있으라고! 끄으윽.”

“헉! 회장님, 주치의를 부르겠습니다.”

“다, 닥치고 약… 약….”

어찌나 화가 났던지 이 회장은 가슴을 부여잡고도 닥치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서랍을 뒤져서 황급히 안정제를 입에 들이붓자 끄윽 대던 이 회장이 축 늘어졌다. 주치의가 이 회장에게 잘 듣는 특효약을 만들어 놓았다. 흥분하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이 회장에겐 강력한 근육 이완제가 즉효 약이었다.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술 취한 사람처럼 축 늘어져 버리는 것이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었다.

“회장님, 진정하시고… 지금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당장 카운터펀치를 날리기는 곤란합니다. 일단 조용한 곳에서 진정하고 계시면,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대응책을 마련해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긴 뭘? 카운터펀치는 절박함에서 나오는 거야. 으윽, 가긴 어딜 가… 지금 당장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면….”

“회장님, 저희가 실무진과 좀 더 논의를 하고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닥쳐… 닥치고 생각해. 이 자리에서 생각해. 밑의 애들이랑 의논을 하니 정보가 다 새어 나가지, 이 멍청한 인간아. 이젠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허헉!”

이수학 비서실장은 이 회장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고스란히 질책을 듣고 있다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 회장이 직접 하겠다는 말은 새로운 사람과 같이 일을 하겠다는 의미. 이수학 비서실장에겐 해고 통지나 다름없었다. 불명예 퇴진을 안 당하려면 아이디어라도 내라는 뜻이었다. 곁에 있던 진 상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블랙베리 건으로 질책은 먼저 당했을지언정 해고 통지는 안 들었다.

결국 비서실을 전부 갈아 치울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은 비서실에서 기밀이 빠져나갔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똑. 똑. 똑.

이 판국에 누군가 밖에서 노크를 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을 부라렸다. 유일하게 마음이 통한 순간이었다. 누가 감히! 회장이 직접 기밀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지금 문을 두드리나 하고 말이다.

“누구야! 보안요원은 뭐해? 언제부터 신성의 조직이 이따위로 개판이 됐어!”

진 상무마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시답잖은 임원 나부랭이가 노크를 했다면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쳤을 것이다.

“이 회장님 뵈러 왔소이다. 안에 계시오?”

그런데 분위기가 요상했다. 보안요원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벽에 붙어서 이마를 문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 누구요? 지금 회장님께선….”

“검찰입니다. 사시 10기, 신성 장학생이죠.”

“허.”

진 상무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신성 장학생이라는 말을 대놓고 하다니, 그리고 사시 10기면 현 검찰총장 바로 밑의 기수다. 얼마나 급한 일이면 검찰의 수뇌부가 직접 온단 말인가. 누구도 진 상무를 제치고 들어가는 사내를 막지 못했다.

“누, 누구야?”

“회장님, 접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직접 왔습니다.”

“이영각 부장, 자네가 어쩐 일로….”

진 상무는 이름을 듣고 난 뒤에야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서울고등검찰청 특별부장이다. 한마디로 차기 검찰 총장이 될 양반이었다. 지금 이 판국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스마트그룹이 신성을 찍어 대고 있습니다. 민사소송으로 넘겨 버린 용인 땅도 그렇고, 은행에 맡기 전환사채도 그렇고 말입니다.”

“허헉… 전환사채를 자네가 어떻게 알아?”

용인 땅의 해결 건으로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지만 전환사채 건은 극비였다. 이수학이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검찰에까지 정보가 흘러가게 놔두진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무덤을 팔 리가 없다.

“고소장이 물밀듯이 접수되고 있습니다. 용인 땅 매수가 원천 무효라는 고소장부터,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바꾼 것, 인수 합병으로 주식을 부풀린 것까지 모두 불법이라고 원성이 대단합니다. 산업은행장도 당황하며 저에게 전화를 했더군요.”

“그, 그럴 수가…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고소를 어떻게?”

“서울대를 비롯해 전국 법대 교수 43명이 합동으로 소를 올렸습니다. 아무래도 스마트그룹이 뒤에 있는 것 같습니다. 대현이 위약금을 무는 한이 있더라도 스마트 클라우드 쪽에 땅을 전부 매각하겠다고 나선 걸 보면 배후인 게 확실합니다. 일단 수사가 진행되면 진짜로 전환사채는 원천 무효가 됩니다. 일이 커지기 전에 어서 은행에 맡긴 것부터 되찾아 오셔서 새판을 짜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헉, 새판을 짜? 그게… 말이 쉽지.”

“최악의 경우를 말씀드린 겁니다. 여하튼 8천억이 큰돈이긴 합니다만 일단은 수면 아래로 감춰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도 수사를 하는 척 덮을 수 있지요. 비상장 회사의 전환사채이니 조사가 쉽지 않다는 핑계도 가능하고.”

“이런, 이런….”

검찰청 부장은 이 회장의 속내도 모르고 정보를 늘어놓았다. 그도 다급하긴 매한가지. 용인 땅의 소송을 민사로 넘기며 어영부영 전환사채의 당위성을 확보해 준 이력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 회장은 8천억이란 유동 자금도 문제거니와 수년간 치밀하게 준비한 그룹 승계 작전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하니 숨조차 고르기 힘들었다.

다다다다다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 아래층 계단에서 마구 뛰어 올라왔다. 진 상무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법무팀장이었다. 설마 검찰청 부장에게 인사하러 뛰어오는 것은 아닐 텐데.

“비켜, 진 상무!”

“허헉!”

진 상무가 앞을 막아서니 소리부터 질러 댔다. 진 상무가 어이없어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사과 한마디 없었다. 모든 이들이 미쳐 돌아간다.

“헉헉, 제가 낄 자리가 아니지만 지금… 지금 TV를 보셔야 합니다. 어서요.”

첫마디가 어이없게도 TV를 보라는 말이었다. 이 회장이 인상을 썼다.

“뭐, 뭐라는 거야.”

“TV 보셔야 한다고요, 회장님.”

딸깍.

법무팀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리모컨을 주워서 TV를 켰다.

-이처럼 전환사채의 주인이 해피랜드를 지배하고, 해피랜드가 신성물산을 지배하고, 신성물산이 신성전자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저희가 설명드린 대로 전환사채 자체가 불법이며, 그 불법에 쓰인 종잣돈은 고작 65억이며 세금 또한 16억에 불과합니다. 얼마나 법을 우습게보면 수십 조짜리 그룹을 65억으로 지배하는 겁니까?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 아닙니까? 이게 정상적인 경제활동입니까? 이런 불법을 알고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기에 저희 교수들이 이렇게 나서게 된 것입니다.

-검찰에도 고소장을 접수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수사가 진행되기도 전에 이렇게 직접 인터뷰를 자청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검찰도 신성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 아닙니까. 신성 임원은 음주운전으로 경찰서에 끌려가도 서류 하나 남기지 않고 나올 수 있는 세상입니다. 우린 더 이상 검찰을 믿지 않습니다.

-고소장 접수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면 무고죄로 소송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질문하신 기자분도 중도일보 소속이죠? 중도일보도 전환사채를 고의로 포기한 곳이에요. 당신 회사도 불법을 저질렀단 말이오! 아시겠소!

어떻게 뉴스에서 이런 기자회견이 방송될 수 있나? 이 회장은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신성 공화국에서 신성의 허락 없이 신성의 치부를 드러내?

TV를 보던 이 회장은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 처져 있었던 몸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다들 뭣들 하는 거야! 내 돈 처먹은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어? 어떤 놈이 저런 말을 방송에서 떠들어 대! 저따위 말을 하는 놈은 당장 잡아 처넣어야지!’

그리고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몇 초나 지났을까? 뭔가 이상했다. 쩌렁쩌렁 울렸어야 할 고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곧 자신이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벙긋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웁!”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해 갔다.

쿵! 퍼억!

이 회장이 나무토막처럼 탁자 위로 쓰러졌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주변 사람들도 쓰러지는 그를 막지 못했다.

“회장님!”

“이 회장님!”

“주치의 불러! 주치의!”

“119!”

회장의 옷을 찢고 심장 마사지를 하고, 전화를 하고, 주치의와 간호사가 달려오고,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와중에 검찰청 부장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상계단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드르르륵.

“호흡은 있습니까?”

“심장은 다시 뛰는데, 의식이 없습니다. 어서 병원으로!”

“응급처치 마쳤대! 병원으로 어서!”

119 대원들은 이 회장을 들것에 싣고 우르르 빠져나갔다. 진 상무는 당연히 그들을 따라나서려 했다. 도움이야 안 되겠지만 병원에 가야지 이대로 퇴근할 수는 없잖나.

턱.

“컥!”

헌데 달려 나가려는 그의 양복 상의를 누군가가 잡아챘다. 그러곤 구석진 코너로 확 잡아당겨 벽으로 밀어붙였다.

“진 상무.”

“비서실장님, 뭐 하는 짓입니까?”

깡마른 양반한테 어떻게 이런 힘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침착… 침착하십시오.”

이수학 비서실장은 땀에 흠뻑 젖어 버린 머리를 연신 뒤로 넘기며 침착하라는 말만 해 댔다. 진 상무가 보기에 지금 제일 당황한 사람은 비서실장 같은데 말이다.

“뭐, 뭐하는 겁니까. 지금.”

“이거… 이거… 지금 이대로 가면 우리가 다 독박 쓰게 될 겁니다. 난 진실로 정보를 유출한 적도 없고, 회장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지금 이 판국에 그런 말이 무슨 소용입니까?”

진 상무는 이 비서실장을 뿌리치고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비서실장이 놓아주질 않았다.

“이대로 가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이게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지. 회장님이 저리 쓰러지셨는데 조만간 일어나시기는 힘들 거 아닙니까.”

“이 양반이 진짜 무슨 말을 그따위로!”

“처음부터 항복하자고 하고 싶었지요? 솔직히 나도 그랬습니다.”

“닥쳐요.”

“하늘이 주신 기회예요. 황태자를 모시고 항복하러 가는 겁니다. 유 회장도 신성이 망하는 걸 바라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회장님이 쓰러졌으니 복수는 일단락된 거 아니냐고.”

“……!”

“그동안 커진 일을 이제 덮으면 되는 겁니다.”

“정말 당신이라는 작자는….”

“다른 방도 있습니까? 다행히 오늘 회장님과 나눈 얘기는 당신과 나 우리 둘밖에 모르잖습니까. 우리만 입을 맞추면 황태자는 우리를 버릴 이유가 없지요. 다시 태어나는 신성에 우리가 힘을 보태야죠.”

“…….”

진 상무는 이수학 비서실장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결국 그러질 못했다. 황태자에게 이 일을 제일 먼저 전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들 둘이어야 했다.

“갑시다. 어서.”

둘은 구급대가 향하는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 *

「신성그룹, 이희건 회장 위독. 지병 악화로 인한 쇼크성 심 정지인 듯」

「신성그룹 극심한 내우외환 겪다. 불법 전환사채 특검 구성될 듯」

“으흠, 자네가 꾸민 일인가?”

“제대로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었는데, 다른 방식으로 심판을 받네요.”

정헌몽 회장을 면회하러 왔더니 첫마디가 질문이었다.

“뭐 사필귀정일 수도 있겠지. 아버님도 비슷하게 가셨는데.”

“휴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광복절 특사는 문제없을 겁니다. 방해꾼이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으니.”

“내 거취는 중요한 일이 아닐세.”

“아뇨, 중요합니다. 광복절엔 제 결혼식도 있는데, 축의금 내실 하객이 한 분이라도 줄어들면 안 되죠. 꼭 빼내 드릴 겁니다.”

“하하하, 축하하네. 드디어 장가를 가는군.”

장가야 이미 갔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드디어 치킨게임도 끝이 보이니 정 회장의 출소도 축하할 겸 결혼식에는 멋진 이벤트를 준비해야겠다. 정헌몽 회장도 즐거워할 거다.

    • *

부르릉. 끼이익.

“잠깐만요, 유 회장님. 잠시만 얘기하시지요.”

회사 정문을 지나려는데 사람들이 훅 하고 앞을 막아섰다. 며칠째 반복되고 있는 일이라 이제 운전기사도 놀라지 않는다. 오늘따라 완전히 앞을 가로막았기에 지나가지 못했을 뿐이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비키세요.”

“잠시만! 한 말씀만 나누면 됩니다. 신성의 후계자가 오셨는데 이 정도는 양해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유 회장님, 제 얼굴을 봐서라도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십시오.”

보안요원들이 제지했지만 진제대 상무가 차의 보닛에 바짝 달라붙어 버티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충성심을 증명하는 일이지만 내가 볼 땐 하찮은 짓이다. 보안요원들이 힘을 쓰니 진 상무도, 이수학 비서실장도 결국 나가떨어진다.

“신성그룹은 스마트그룹과의 치킨게임에서 완패했습니다. 더 이상 공격할 의도도, 능력도 없습니다.”

“기자회견은 신성 본사에서 하십시오. 여긴 스마트그룹 정문입니다.”

스마트그룹의 보안요원들과 총무팀 직원들이 나와서 말려 보지만 막무가내다.

“무조건적인 항복 의사를 밝히는 바입니다. 스마트그룹의 유 회장님께서는 환란의 구세주로 중소기업까지 살렸던 분 아닙니까? 더 이상 신성을 공격하시면 아무런 죄가 없는 직원들이 다칩니다. 반도체 개발실장으로서 더 이상의 치킨게임은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저희는 절박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신성은 비서실장인 저를 직무 해제하고 비서실을 해체할 겁니다. 전문 경영인 체제로 돌아설 것이며, 총수 일가의 비자금도 법적으로 실사를 받겠습니다. 공격을 멈춰 주십시오.”

신성의 진 상무와 비서실장이 마이크까지 준비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오늘은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나 보다. 기자들도 연신 셔터를 눌러 대고 있다.

“유 회장님, 분노를 이쯤에서 거두시고 신성의 직원들을 봐서라도 공격을 멈춰 주십시오.”

결국 이용재 전무가 내 차 앞에 선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직원들을 들먹인다. 또다시 나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다. 신성은 언제 스마트 클라우드 직원들 사정 봐주며 공격했나?

철컥.

나는 차에서 내렸다. 이 전무의 얼굴에 ‘드디어 협상을 하겠군.’ 하는 표정이 지나간다. 아서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회장님, 기억하십니까? 스마트 클라우드가 인트라넷 사업을 할 때 신성에서 제일 먼저 구매를 해 줬습니다. 원래 저희는 적이 아니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그 대가로 호구 짓은 충분히 했습니다. 노이즈 칩도 덮어 줬고, 환란 때는 기업 사냥이란 매국노 역할까지 해 줬죠. 무슨 빚이 남았다고 그리 당당합니까?”

“아니, 빚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제가 직접 용서를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언제나 세상일을 제멋대로 해석하는군요. 용서라니? 그게 가능합니까? 내가 용서하면 내 매국노 이미지가 사라지나요? 왕회장님이 살아서 돌아오십니까? 정 회장님 옥살이가 없던 일이 됩니까? 심지어 추징금 1조 2천억 원도 안 돌아옵니다! 모두가 헛소립니다.”

“저도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아버님을 대신해, 제가 어찌하면….”

“착각도 유분수지, 지금 자신이 신성을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어이가 없군요. 일개 전무 주제에 신성그룹 회장이라도 됩니까? 이사회 전권을 받았나요? 하다못해 신성전자의 대주주라도 되나요?”

“허헉.”

찰칵! 찰칵! 찰칵!

기자들이 셔터를 마구 눌러 댄다. 내가 신성의 황태자를 아예 협상 대표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기사를 써 댈 것이 분명하다. 여태 내가 신성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겠다면서 말이다.

저벅저벅.

나는 얼이 빠져 버린 이 전무를 제치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쇼는 이쯤 하면 될 것 같으니 정문 앞을 깔끔히 치워 버려야겠다.

결국 정부가 나서서 일을 마무리할 것이다. 반도체 치킨게임을 멈추는 호구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신성뿐 아니라 NEC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니 끝까지 원가 경쟁을 해야 한다.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업체는 스마트 클라우드, 대현, 마이크론 세 개면 족하다. 이참에 신성의 납품 라인을 뒷배로 국내 기업을 압박해 온 일본 설비 업체도 상당수 퇴출시킬 수 있을 것이다.

뚜벅뚜벅.

“오십니까, 회장님.”

사무실로 향하니 언제나처럼 윌슨이 나를 반긴다.

“오늘도 기자들이 잔뜩 모였기에 할 말을 좀 했습니다. 이제 정문 쪽은 마무리해 줘요.”

“예,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다른 일은 잘 진행되고 있죠?”

“전환사채는 특검이 꾸며질 것이고, 차명 계좌는 남김없이 털겠습니다.”

“이수학 비서실장의 계좌도 포함시키세요. 한 푼도 빼돌리지 못하게.”

“예, 명심하겠습니다.”

윌슨의 묵례를 뒤로하고 사무실로 걸어갔다.

딸깍.

“어! 회장님 오십니까!”

“나 부장님이 어쩐 일로?”

사무실에 들어왔다가 깜짝 놀랐다. 나 부장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나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째서 윌슨은 내게 알려 주지 않았던 거지?

“하하, 드디어 제가 한 건 했기에 보고드리러 왔지요.”

깜짝 뉴스를 들으라고 그런 건가? 나 부장이 한 건 했다면 드디어 12인치 라인이 완성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올해 3월에 4공장에서 초도품이 나오긴 했으니까 말이다.

“혹시 5공장과 미국 공장이 동시에 셋업되었다는 건 아니겠지요?”

“바로 그겁니다. 오늘부로 두 군데 공장 모두 양산 퀄이 완료되었습니다. 오늘 나온 초도품 수율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그만 뜸 들이고 말해 봐요, 어서!”

“하하하하하! 놀라지 마십시오. 미국 공장에선 79%! 5공장에서는 87%를 찍었습니다. 60%도 아니고 자그마치 87%! 이건 혁명이에요, 혁명!”

4공장 수율은 고작 32%밖에 못 찍더니 개발자들과 양산 기술자를 잔뜩 갈아 넣었나 보다. 역시 공장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은 값을 톡톡히 해냈다.

“우왁! 치킨게임은 이제 딴 나라 얘기군요!”

“우리를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얼쑤! 얼쑤!”

나 부장은 정말 기쁜지 내 손을 잡고 연신 막춤을 춰 댔다. 오늘만큼은 나 부장의 관광버스 댄스에 호응해 줬다.

그래, 나는 이쪽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거다. 신성 따위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신성이 이 파도를 합법적으로 넘는다면 그 신성은 내가 아는 신성이 아니리라. 신성의 새 주인이 누가 될지 궁금하긴 하지만.

    • *

8월 15일.

나름 의미 있는 날이다. 7월 말에야 귀국한 케이는 하객들을 잔뜩 끌고 와서 2주 동안 대한민국 전역으로 관광을 다녔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댄스파티를 하려면 이 정도 하객은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나름 미국식 결혼 문화인가 보다.

「7월 무역수지 50억 불 흑자. 스마트폰 및 반도체 수출 호조」

「미국 마이크론사에서 NEC 반도체를 인수할 듯. 반도체 치킨게임의 끝이 보이는가?」

「신성 게이트 어디까지인가? 불법 전환사채 및 차명 계좌 200여 개 압수」

「DJ 정부의 마지막 숙제. 신성 비서실 및 법무팀 해체, 정관계 로비 관련자 엄단」

「대기업 순환 출자 금지법 국회 상정, 여야 간 합의 임박」

「전경련 이례적으로 신성의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에 환영 의사를 밝혀」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뒤적거릴수록 내가 알고 있는 21세기가 훅 하고 당겨진 듯하다. 1990년대라면 총수 일가에 대한 기사들이 나올 법한데, 모든 경제 기사들이 회사 위주로 기술되어 있다. 회사와 총수가 분리되는 것. 그것이 21세기형 대기업으로 나아가는 첫 발자국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발을 디디는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다.

“어이구, 우리 아들 오늘 진짜로 멋지네.”

“아버지도 멋진데요? 수염이 아주 잘 어울립니다.”

“어째 목수처럼 보이나?”

“예. 평생 목수이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네 덕분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산다. 여하튼 올 사람은 다 왔나? 인사 더 안 드려도 되나?”

“아버님 친구분들은 왜 초대 안 하셨어요? 서운해하지 않으세요?”

“부담스럽다고 하더라. 내가 따로 잔치는 할 기니까 걱정 마라. 하루 종일 막걸리 마시고 해야 되는데 댄스파티는 영….”

내가 예복을 차려입고 나올 때까지도 아버지는 결혼식장 앞에서 손님맞이를 했다. 하객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약혼식을 워낙 거창하게 했기에 얼굴을 비쳐야 하는 사람들은 그때 다 참석했고, 오늘은 정말로 가족 같은 사람들만 초대했다.

내 하객으로는 정헌몽 회장 내외, 재훈이 커플, 스마트 클라우드 초대 멤버들 부부뿐이다. 특히 정헌몽 회장은 출소하자마자 첫 행사가 내 결혼식이라 당황스러웠을 법도 한데 기꺼이 참석해 주었다.

케이의 하객으론 윌슨 부부, 파라곤 이사들, 그리고 대학교 친구들이 대거 참석했다. 재훈이가 다행히 합창을 핑계로 고등학교 동창을 몇몇 데리고 왔기에 망정이지 댄스파티가 엉망이 될 뻔했다.

“자, 양가 어머님들께서는 앞으로 나오셔서 화촉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출입구 앞에서 자세를 잡자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사회는 어쩌다 보니 재훈이가 맡았으며, 주례는 박준태 전(前) 국무총리가 맡아 주었다.

짝짝짝짝!

화촉을 밝히고 양가 어머니들이 하객들을 향해 인사를 한다. 한국식임에도 로메티 여사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들리는 행복의 노래….”

곧이어 조명이 어둑어둑해지고 뮤지컬 가수가 선창을 하고 내 고교 동창생들이 합창을 해 줬다. 신랑 입장곡으로 레미제라블의 혁명가인 ‘민중의 노래’를 영어와 한국말로 번갈아 가며 부르다니 센스가 좋다. 행진곡 풍인 데다 개천에서 용 난 내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신랑 입장!”

짝짝짝짝짝!

노래 중간에 나를 부르는 재훈이. 나는 고풍스러운 조명으로 패션쇼의 런웨이처럼 꾸며진 길을 걸어가 Y 자로 합쳐지는 곳에서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주례석으로 나아갔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 신부님을 모셔 보겠습니다. 신부 입장!”

케이의 입장은 나와 다르게 호명 다음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Tonight I celebrate my love for you. 오늘 밤 나는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축하합니다.”

1980년대 팝송 같은데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선곡이다. 맑은 피아노 반주와 정상급 뮤지컬 가수들을 초청한 보람이 있다.

“오오오오!”

짝짝짝짝짝!

하객석에서 감탄사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Y 자의 런웨이 반대쪽에서 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이스 장군의 팔에 손을 얹고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 내게도 웨딩드레스의 디자인을 꽁꽁 숨기더니 정말이지 고혹적이다. 어깨를 시원스레 드러내고 그 위로 베일을 드리우니 마치 여신이 강림한 듯하다.

결혼식 두 번 하길 정말 잘했다.

“내 딸 잘 부탁하네.”

또렷한 한국말.

“예, 사랑하고 또 사랑하겠습니다.”

케이의 손을 이어 받고 주례 앞에 섰다.

“신랑 유수한 군과 신부 버지니아 케이 로메티 양은 하늘이 맺어 준 귀한 인연이며….”

주례사가 시작되었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윙윙거리는 소리로 변해 버렸고, 내 정신은 온통 케이에게 가 있었다. 베일 안에서 미소 짓고 있는 케이를 보니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어느새 결혼 서약을 묻는 질문이 들려 ‘예!’ 하고 크게 소리를 쳤다. 나도 모르게 어찌나 우렁차게 대답을 했는지 여기저기서 하객들이 킥킥댔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미 케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꽃잎이 날리고, 부케를 던지고, 사진을 찍고,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 *

피로연에선 미국식 관례대로 루이스 장군이 한참 동안 케이와 댄스를 췄다. 산만 한 덩치의 장군이 눈물을 찔끔거리니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 오늘의 하이라이트! 신랑 신부의 댄스 실력을 보겠습니다!”

“와아아아아!”

댄스파티가 무르익어 가니 내 차례가 돌아왔다.

“함께 추실까요?”

“리드 잘해 주세요.”

이미 은은한 왈츠 곡이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 눈짓에 윌슨이 걱정 말라는 듯 창을 가리고 있던 두꺼운 커튼을 모두 젖혀 버린다.

시간이 되었나 보다. 내 결혼식은 저녁 식사 무렵에 시작을 했기에 어느새 창밖은 짙은 남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윌슨이 커튼을 걷는 것을 본 몇몇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채 몇 초 지나지 않아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피이이이익~ 퍼펑!

삐이이익~ 펑! 펑! 펑!

쓔우우욱~ 펑펑펑펑펑!

“와아아아아아!”

“이야, 완전 대박! 불꽃놀이네.”

“광복절에 원래 불꽃놀이를 했었나?”

내 결혼식이 펼쳐지는 호텔 앞에서 바지선을 빌려 그 위에서 불꽃을 쏘아 올렸다. 준비한 폭죽은 모두 10만 발. 연달아 쏘아도 2시간은 족히 쏘아 올려야 한다.

나와 케이는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춤을 즐겼다. 참석한 모든 이들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는지 거의 모든 부부들이 왈츠를 췄다. 그냥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것만으로도 평생 기억에 남으리라.

“설마 수한 씨가 마련한 이벤트예요?”

“결혼기념일 날짜를 잊으면 큰일이잖아.”

“호호호, 이제 돈을 좀 쓸 줄 아시네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30분쯤 춤을 췄을까? 어느새 우리 커플을 포함해 모두들 샴페인을 들고 베란다로 나와 불꽃놀이를 즐겼다. 시원한 강바람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정헌몽 회장이 샴페인 잔을 들어 나에게 원거리 건배 제의를 했다.

‘멋진 출소식 고맙네.’ 하고 말하는 듯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기세요.’

나는 표정으로 그리 답하며 허공에서 유리잔을 맞부딪쳤다.

“와아아! 불꽃이 하트 모양이야.”

“와우! 무궁화 모양도 있어. 광복절 기념이 맞나 본데?”

“그럼 앞으로 매년 하는 건가?”

“매년 할 겁니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후원하는 거거든요.”

“오홋!”

“대박!”

윌슨의 말에 하객들이 깜짝 놀란다. 물개 박수를 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부산, 대전, 광주에서도 합니다. 광복절은 온 국민들이 즐겨야 하니까요. 아! 부산 광안리에선 스타크래프트 결승전도 같이 합니다. 광고 효과는 물론, 관광 상품으로 대박이죠.”

쑤우우우욱~ 퍼펑!

“저 불꽃이 제일 비싼 거야!”

“오홋! 수한 씨, 정말 멋져요!”

하트 모양 불꽃이 사방에서 터졌다. 가운데 ‘K’ 자가 번쩍거리는 불꽃이었다. 불꽃놀이에 글자를 새기는 기술이 있다는 건 나도 처음 알았다. 케이의 이니셜이 와중에 ‘코리아’의 K라서 정말 다행이다.

하나의 불꽃 쇼를 보면서 누군가는 광복절 축하 쇼로, 누군가는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누군가는 출소 축하로 받아들인다. 내 아내는 사랑 고백으로 받아들이고 말이다.

나는 새로운 인생을 불꽃으로 열고 싶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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