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모든 것은 내 뜻대로 (85/104)

제1장 모든 것은 내 뜻대로

빵! 빵!

미국 뉴욕에서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런 복잡한 거리를 윌슨이 대신 운전해 주니 참으로 고맙게 느껴진다. 함께 오길 잘했군 싶다.

맨해튼의 복잡한 거리를 어찌어찌 벗어나자 갑자기 뻥 뚫린 곳이 나온다. 뉴욕대 캠퍼스다. 뉴욕대는 맨해튼에 위치한, 미 동부를 대표하는 명문 대학이지만 그 유명세는 의학, 예술, 금융과 마케팅 학과에 해당할 뿐 공과 대학은 아예 메인 캠퍼스에서 벗어나 한쪽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수준이다.

워낙 부자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라 전 세계에서 졸업장을 딸 때까지 돈이 정말 많이 드는 대학 중 하나다. 공대생에겐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눈앞에 드러나는 연구소는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철컥.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수고하셨어요.”

“어머, 뉴욕 대에 이런 건물이 있었나요? 페인트칠은 좀 하지.”

옆에 같이 나서는 케이마저 건물 외관을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다. 외관은 허름할지 몰라도 이곳엔 세계를 뒤흔들 개발자가 있다. 나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스마트 클라우드 회장님이십니까?”

“한재식 박사이신가요?”

그런데 연구소 입구에서 누군가 훅 하고 튀어나오더니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다. 박사 과정을 밟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생각보다 나이가 있다.

“아직 박사는 아닙니다.”

“여하튼 마중 나와 줘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제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LAB에 시연 준비를 해 뒀습니다. 들어가시죠.”

말투가 딱딱하고 제시간에 딱 맞춰 마중을 나온 걸 보면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할 사람이다. 게다가 나를 만나는 것은 분명 큰 기회가 될 수 있는데, 섣부른 기대감을 표시하지도 않는 걸 보니 성격도 침착한 것 같다.

첫인상이 너무 마음에 들어 시연은 볼 필요도 없이 바로 차에 태워서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다. 스마트폰만 출시된다면 세계 최고의 고액 연봉자로 만들어 줄 자신이 있으니까.

    • *

연구소 한쪽 구석에 한 박사의 공간이 있었다. 모니터 네 대를 격자로 배치하고 그 앞에 커다란 유리판이 놓여 있었다. 유리판에 테이프와 전선을 덕지덕지 이어 붙여 놨는데 과연 어떤 시연을 보일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제가 연구하고 있는 테마입니다.”

“LK 민상준 박사에게 듣기로는 미래지향적인 디스플레이 컨트롤러라고 하던데 이게 그겁니까?”

“민 선배가 그리 칭찬했을 것 같진 않네요. 여하튼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연을 할 수 있는 단계인가요?”

“간단한 모션 정도는 가능합니다.”

한재식 박사는 간단한 모션만 가능하다며 살짝 당황했다. 내 기대가 너무 커서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연구는 가능성이 중요하죠. 간단한 모션만으로도 충분히 증명 가능합니다.”

“그럼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 박사가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유리판에서 찌잉~ 하는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유리판 전면에 전압이 일정하지 않다는 의미다. 정말 초보적인 단계인 것 같다.

“제 연구 테마는 디스플레이 전면에 유전체를 도포하고 그 유전체를 위치 센서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손으로 터치할 때 센서에 발생하는 위치 신호를 이용해 디스플레이를 제어하고자 하는 것이죠.”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어떤 기술이 들어갔나요?”

나는 한 박사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좀 더 기술적인 용어로 브리핑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애써 말을 골랐다.

“일반적인 터치 기술은 터치할 때 패널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변화를 전류 신호로 바꾸지만, 저는 유전체를 이용하니 전압 신호로 디스플레이를 제어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구현만 된다면 훨씬 안정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군요. 기본 개념보다는 구현 방식을 설명해 줬으면 합니다.”

“으음, 유 회장님은 이게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실현 가능성이 없을 리 없잖아요. 한 박사가 인생을 걸고 있는데.”

“…….”

한 박사는 내가 아예 기본 개념이 실현 가능하다고 단정해 버린 채 구현 방식을 설명해 달라고 하니 적잖이 당황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한 박사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보였다. 윌슨이 연락했으니 당연히 연구소에 자금 지원을 하겠다고 제의했을 텐데, 연구소장은커녕 한 박사의 지도교수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한 박사의 연구 테마를 들으면 지원금을 내놓을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LAB에선 지도교수에게 한번 찍히면 인생이 고달파진다. 나조차 원래 역사를 몰랐다면 이 양반이 5년 뒤에 터치스크린 기술을 개발할 거라고는 믿지 못했을 거다.

“계속하겠습니다. 현재로선 다소 어설프지만 상하 좌우로 화면을 이동시킬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오오오!”

“으흠.”

“에에?”

나는 감탄했고 윌슨은 고개를 갸우뚱했으며 케이는 이게 뭐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그럴 수도 있다. 한 박사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격자로 배치되어 있던 유리판 뒤쪽의 모니터 화면이 번갈아 켜지고 꺼지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기본 개념이 완성되어 있지 않나. 이걸 미려하게 바꾸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투입하고, 유리판을 LCD 화면과 일체형으로 만들기만 하면 될 것이다.

“여러분께서 실망스러우신 건 당연합니다. 기본 개념을 구현하는 수준에 불과하니까요.”

“한 박사님, 이 양반들은 개발자가 아니니 모를 수밖에요.”

나는 한 박사를 추켜세워 줬으며, 윌슨과 케이에겐 표정으로 ‘왜 그런 반응이야?’ 하고 타박을 줬다. 나는 정말이지 감탄했다. 혼자서 고군분투 중인데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디스플레이 모션을 어떻게 구현하나? 그런 프로그램을 혼자서 코딩하려면 몇 년은 족히 걸린다.

“미안해요, 한 박사님.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단지 생각과 조금 달라서…. 좀 더 화려할 줄 알았거든요.”

케이가 솔직하게 사과를 했다. 한 박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받았다.

“케이,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만족하는데? 스마트 클라우드의 개발자들이 봤다면 나보다 더 큰 환호성을 질렀을 거야.”

“엔지니어가 보면 다른가 보네요.”

“당연하지. 기술은 개념이 중요해. 화려한 시연은 쇼 케이스에서나 하는 거지.”

내가 유리판을 가리키며 기대했던 모습 그대로라고 하니 케이의 눈이 반짝거린다. 내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게 아님을 눈치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 분은 유 회장님이 처음입니다. 지도교수마저 모니터를 복잡하게 껐다 켜는 기술에는 관심 없다고 했는데… 리모컨은 현재도 존재한다고 말이죠.”

지도교수가 혹평을 했군.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리모컨이든 지시봉이든 센서를 장착한 물체를 사용하면 현재도 디스플레이 모션 플레이를 할 수 있다. 지도교수는 손가락으로 컨트롤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를 뿐이다. 공학에 그다지 투자하지 않는 뉴욕 대이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여하튼 이런 혹평을 받고 있으니, 한 박사의 연구는 정보 유출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세 삼창을 하고 싶을 정도다.

“그 사람이야 혹평을 하든 말든 상관없지요. 솔직히 한 박사에겐 다른 사람보다 내게 인정받는 게 훨씬 중요한 거 아닙니까? 나는 필드에 있는 사람이니까요.”

“솔직히… 기분은 좋습니다. 첨단 기업의 총수님이신데.”

한 박사가 피식 웃으며 감정을 표시했다.

“여하튼 기술 초기 단계이니 문제점이 없을 수는 없겠죠?”

나는 화제를 돌렸다. 문제점을 알아야 해결할 수 있고, 그걸 집중적으로 특허를 걸어 놔야 한다. 그래야 타사가 대놓고 카피를 못 하니까.

“일단 유리 기판에 형성시킨 유전체에서 발생되는 센싱값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XY좌표 센서는 어디에 있는 거죠? 그것부터 알아야 할 거 같은데요.”

“아, 유리 기판 후면에 코팅한 백금 박막이 X좌표 센서이며, 기판 전면에 코팅한 박막이 Y좌표 센서입니다.”

“오, 도전성 박막 자체가 센서군요. 위치별로 전압 차가 발생하니 센서라 할 수 있겠어요. 앞뒤로 붙여 둔 케이블로 시그널이 빠져나가겠군요.”

“정확합니다.”

나는 유리 기판에 덕지덕지 붙여 둔 전선 케이블을 가리켰고 한 박사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아마도 나처럼 바로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손가락 터치스크린이 구현 가능한 기술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이해하는 거다.

“시그널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이 관건이겠군요. 손가락은 바늘이 아니니까.”

“그 또한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델타-시그마 변조를 생각하고 계시겠군요. 혼자서 ADC를 만들 수도 없고 무척 난감했겠어요.”

“헉! 제가 드릴 말씀이 없네요.”

델타-시그마 변조(Delta-sigma Modulation) 기술은 신호의 값을 대강 예측하여 오차를 구한 다음, 누적된 오차를 이용해 오차를 보정해 나가는 기술이다. 손가락 터치처럼 어설픈 아날로그 신호를 전자 제품에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잖나. 손가락의 중심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는지 특정 짓는 디지털 신호로 바꿔 주는 부품이 필요하다. 전용 컨버터 칩이 필요하고 신호 해석을 위한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일례로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의 아이콘 근처를 대충 짚으면 아이콘이 활성화되는 기능을 구현하려면 말이다.

일단 문제점 하나는 확인했고, 이것만으로도 한 박사는 스마트 클라우드로 오고 싶을 거다. 원하는 칩을 모두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문제가 그것 하나뿐이었다면 지도교수가 그리 혹평을 하진 않았을 것 같군요.”

“이 방식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유리 기판에 손가락을 터치해 보시죠.”

뭔가 위험한 것에 손을 대는 것처럼 말한다. 왜 그러지? 하면서 내가 집게손가락을 대 보았다.

찌릿!

“엇!”

“왜 그래요, 수한 씨? 아앗! 정전기!”

케이도 유리판에 손가락을 대다가 몸을 움찔했다. 겨울철 간혹 겪는 찌릿찌릿한 정전기 못지않다. 찌릿함을 무릅쓰고 손가락을 여러 차례 갖다 댔는데 그때마다 정전기가 흘렀다. 한 박사의 지도교수가 쓴소리를 했을 법하다.

“화면 옮기는 데 고통이 따르는군요. 하하.”

“유리판 자체가 일종의 유전체라 전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LCD에 너무 가까이 가져가면 화면 왜곡이 일어나는 데다 손가락으로도 전류가 흐릅니다. 솔직히 근본적인 문제라 해결이 매우 어렵습니다.”

“아까 센서로 사용하는 박막이 금속 박막이라 이런 문제가 나오는 것 같네요. 다른 물질로 코팅하면 안 됩니까? 산화물 박막은 어떻습니까?”

“산화물 박막은 기본적으로 부도체입니다. 유리 기판을 유전체로 이용하려면 어찌 되었든 최외각은 도전체로 코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유전율이 높은 유리 기판을 사용하거나 유전율 높은 물질을 코팅하면 이렇게 정전기가 튈 정도로 전압을 크게 걸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그 또한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투명한 유전 물질을 찾기가 매우 힘들더군요. 그리고 백금 박막에서 일렉트로마이그레이션(Electromigration: 전류 이동으로 인한 금속 이온 위치 이동 현상)도 일어나기에 유전율을 너무 높일 수도 없습니다.”

한 박사는 내 질문에 아주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 아이디어의 근본 개념이 틀려먹어서 제품으로 나올 수 없다고 제 입으로 고백하는 듯 말이다. 솔직도 하셔라. 이런 상황에서 5년간 연구를 이어 온 것이 용하다.

“그 정도가 이 기술의 문제점의 전부인가요?”

“예, 현재까지는.”

“좋네요. 해결 가능하겠어요.”

“예에? 해결 가능하다고요?”

“스마트 클라우드의 연구소라면 말이죠.”

나는 비로소 터치스크린의 개발이 왜 이리 늦었는지 알게 되었다. 한 박사마저 백금 박막을 대체할 수 있는 인듐주석산화물(Indium Tin Oxide: ITO)의 존재를 모르고 있고, 유전율을 보상해 줄 감압 접착제 (Pressure sensitive adhesive: PSA)의 존재도 알지 못하고 있다. 내가 확실히 21세기에서 넘어오긴 했구나.

디스플레이가 반도체 기술과 정말 많은 부분에서 닿아 있는 듯하다. 특히 인듐주석산화물은 기본적으로 투명한 데다 두께와 조성에 따라 전도성과 절연성을 조절할 수 있는 물질이다. 산화물이라 일렉트로마이그레이션 현상도 없기에 내구성도 무척 뛰어나다.

그걸 쓰면 손가락에 정전기가 튈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터치스크린 기술의 핵심 소재가 분명했다. 바로 특허를 내야겠다. 물론 한 박사로부터 얻은 아이디어이니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 줘야겠다.

“저, 저를 스카우트하시는 겁니까? 이런 기술이 상용화될 수 있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당연하죠. 연봉은 과장급으로 책정하겠습니다. 나 때문에 박사 학위 못 받게 생겼으니까.”

“…예?”

“여기 때려치우고, 하던 작업도 모두 폐기하고 한국으로 갑시다.”

“헉!”

“연구원 30명을 붙여 주죠.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면 차장급으로 대우하겠습니다.”

“헉!”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바로 부장급으로 대우하겠습니다.”

“헉!”

말이 진행될수록 한 박사의 눈은 커져 갔고, 윌슨은 내가 제안을 하나씩 얹을 때마다 007가방에서 서류를 한 개씩 더 꺼냈다. 종이에 적힌 연봉을 보고 한 박사는 까무러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회사 연봉은 미국 실리콘밸리 못지않거든.

“내가 조금 바빠서 내일모레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내일까지 서류 검토하고 확답을 줬으면 합니다. 연락은 여기 윌슨에게 하시면 됩니다.”

“어… 저를 정말 스카우트….”

“이 전화번호로 연락 주십시오.”

쇠뿔도 단 김에 빼라고 했다. 윌슨이 한 박사에게 명함을 쥐여 준다. 내일까지도 가지 않을 거다. 오늘 저녁에는 연락이 올 것이다. 비자 문제가 없으면 비행기에 바로 태워서 데려가리라.

이 양반과 스마트 클라우드의 연구원들이 합쳐지면 2005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겠다. 스마트폰을 언제 출시하느냐는 오로지 내 결정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우리 세 명은 즉각 뒤돌아서서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수한 씨, 스마트 클라우드 부장급이면 타사 임원급이잖아요. 정말 그리 대단한 기술이에요? 손가락만 아픈 기술이던데요.”

“대단한 기술 맞아.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든 말든 그건 한 박사 결정이고, 나는 그 정도 대접은 해 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오, 그 정도라면… 이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인 것 같은데. 맞아요?”

“하하, 어떻게 알았어?”

“호호호! 난 기술은 몰라도 촉은 누구보다 좋잖아요.”

“이야, 역시 케이야.”

“쇼핑 가요, 쇼핑! 기분이 너무 좋아요.”

아, 길어질 것 같다. 산책으로 때우고 싶다. 운이나 떼 보자.

“일단 조금만 걸을까? 날씨도 좋잖아.”

“좋아요.”

차로 향하던 케이가 내 팔짱을 끼더니 발길을 돌린다. 뉴욕대의 캠퍼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다. 연구소 근처는 마치 숲속 오솔길처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내 칭찬에 기분 좋아진 케이가 산책하기엔 딱이었다. 정장 차림의 윌슨도 007가방을 들고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 *

“으음, 공기가 아주 달콤해요. 꼭 우리 분당 집 정원 같아요.”

“솔직히 여기가 더 좋은 것 같은데. 여긴 거의 숲이잖아.”

“호호호!”

아직 한여름은 아니지만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로만 걸어가니 상쾌하기 그지없다. 나무가 뿜어 대는 산소에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느낌이다. 주변에 사람도 없기에 모든 것을 우리끼리 독차지한 느낌이 든다.

때앵, 때앵.

“으음?”

“어디서 종소리가 나지?”

언덕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넘어가니 아늑하게 보이는 잔디밭이 펼쳐졌고 그 한가운데 작은 교회가 있었다. 대학 캠퍼스에 교회가 왜 있나 싶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와아아아!”

“결혼 축하해!”

“고마워, 다들 고마워!”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갓 결혼한 커플에게 꽃잎을 마구 뿌려 주고 있었다. 교회 입구에선 주례를 봤는지 목사가 환한 웃음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화동들은 케이크로 달려가 접시를 내밀기에 바쁘다.

어쩌다 보니 우리도 하객인 양 박수를 쳐 줬고, 누군가 작게 자른 케이크까지 갖다 주었다. 케이는 커플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축하객들에게 환송을 받으며 웨딩카가 출발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주인공들이 떠나니 자연스레 분위기도 정리되기 시작했다.

주인공들이야 신혼여행으로 바쁘니 자리를 떴지만 하객들은 잔디밭 주변으로 흩어져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평화로운 분위기였지만, 왠지 케이가 케이크를 한 스푼 두 스푼 뜨는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다. 남의 결혼식 케이크로 점심을 때우긴 좀 그렇잖나.

“케이.”

“네?”

“같이 갈까?”

“쇼핑요?”

“아니. 결혼식 하러.”

“예?”

“화려한 결혼식은 나중에 한국에서 하고, 둘만의 결혼식도 괜찮잖아? 주례를 봐 줄 목사님이 있고 윌슨이라는 증인도 있고 말이야.”

“예?”

“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결혼식을 해 보고 싶었어.”

“수한 씨.”

“너무 즉흥적이라서 싫어?”

“아뇨, 아뇨!”

케이는 내가 내민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우리 둘은 마치 신랑 신부처럼 교회로 걸어 들어갔다. 목사가 무슨 일이지? 하며 우리를 쳐다봤다. 반면 윌슨은 마치 때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007가방을 열었다.

“케이슨 님께서 결혼식은 아주 즉흥적으로 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예상이 맞았군요. 결혼 선물은 미리 저에게 맡겨 놓으셨습니다.”

“결혼 선물은 마음만 받겠습니다.”

“안 받으시면 서운해하실 것 같은데요.”

“으흠?”

“케이 님의 부친은 전용기를 선물하셨습니다. 봄바디어 9000 모델로, 디자인이 멋져서 선택했는데 회장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친은 버지니아에 있는 2000에이커짜리 트윈 픽스 목장을 선물하셨습니다. 두 개의 산을 끼고 있어 휴가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외조부님께선 시카고 호수 근처의 별장을 선물하셨습니다. 시카고에 올 때마다 편하게 사용하시라고 말이지요.”

“안 받을 수 없겠네요. 의도가 너무 명확하군요.”

나를 위한 결혼 선물이 아니다. 케이를 한 번이라도 더 보여 달라는 말이다. 여름휴가, 겨울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곳을 선물하며 오가기 힘들다는 핑계도 못 대도록 비행기까지 선물하니 말이다. 굳이 거절해서 오해를 받을 필요는 없다. 솔직히 다른 것은 몰라도 목장은 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다.

가히 거부 집안에서 주는 선물답다. 물론 파라곤답게 당연히 공동 명의일 것이다.

“그리고 약소하지만 저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회장님께서 반지를 준비하실 시간이 없으실 것 같아서 말이지요. 취향껏 고르시면 됩니다.”

윌슨이 007가방을 열자 오른쪽에는 한 개의 반지가, 왼쪽 귀퉁이에는 세 개의 반지가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른쪽 반지는 내 것인지 단순한 장식의 다이아 반지였지만 케이 것으로 보이는 반지는 각각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로 장식되어 있었다.

왜 세 개를 준비했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윌슨이 살짝 윙크를 하고는 얼굴이 가렵다는 듯 눈 주변을 슬슬 긁어 댄다. 이유를 알 것 같다.

“으흠, 장식 보석으로 사파이어를 고르려고 했는데 잘됐군요. 케이의 푸른 눈동자엔 사파이어가 어울리죠.”

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을 했다. 결혼식은 평생 단 한 번인데 이 정도 멘트는 해 줘야 하지 않겠나.

“어머, 수한 씨가 그런 로맨틱한 말을 하다니! 감동!”

내가 사파이어 반지를 고르자 케이가 두 손을 모으고 감격에 겨워한다. 외려 우리를 앞에 두고 있는 목사가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 못한다.

“대체 어떤 분들이기에 즉흥 결혼식에 이런 선물이 오가는 거죠?”

“하하, 신랑은 아시아 최고 부자가 되실 분이고, 신부는 미국 금융계의 넘버원이 되실 분이죠. 오늘 목사님은 아주 희귀한 경험을 하시는 겁니다.”

윌슨이 목사에게 나와 케이의 이름이 적힌 종이와 수표를 건네는 것 같았다. 사람 좋게 생긴 목사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기분 좋은 듯 너털웃음을 지어 댔다.

“허허, 이리 오십시오. 하루에 두 번 주례를 보다니 영광이군요.”

목사는 우리를 단상 앞에 서게 하고 주례를 했다. 원래는 찬송가부터 부르는 게 클래식한 식순이지만 딱히 노래를 부를 이들이 없다. 목사는 잠시 숨을 고르며 축복을 시작했다.

서로 사랑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 크게 번성할 것이며, 땅과 바다의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받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거라는 축복이었다. 기독교인이었다면 성경의 창세기를 그대로 읊어 줬을 텐데,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닌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성경 구절 몇 개를 더 읽으며 평범한 축복을 했으며 이렇다 할 주례사는 없었다.

윌슨은 멀찌감치 떨어져 K-포토로 동영상을 찍어 대고 있었다. 대체 윌슨의 007가방에는 무슨 물건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다지 커 보이지도 않는데 필요한 물건은 뭐든 나온다.

“신랑은 신부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결혼 서약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그리 믿는다. 회귀해서 케이를 만났으니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조물주든 내게 행운을 준 게 틀림없다.

“신부는 신랑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케이도 다소곳이 대답을 했다.

목사는 양손을 뻗어 우리를 서로 마주 보게 하며 결혼 서약을 하라고 했다. 미국 영화에서 익히 봤던 일이기에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외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케이를 보고 있자니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나 유수한은 당신 케이를 아내로 맞습니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당신에게 진실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는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겁니다.”

“나 버지니아 케이 로메티는 당신 수한을 남편으로 맞아 이날로부터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당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순종할 것을 하느님의 신성한 명에 따라 당신에게 나의 진실을 드립니다.”

케이가 나의 서약을 받아 화답했다.

“신랑이 신부에게 반지를 끼워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케이에게 반지를 끼워 줬고 목사의 성혼사는 계속 이어졌다.

“당신들은 교회 앞에서 동의를 선언했습니다. 선하신 주님께서 당신들의 동의를 강하게 하시고 그의 축복으로 채워 주시길 기원합니다. 이 결혼은 하느님이 맺어 주신 것으로 사람이 가르지 못할 것입니다.”

기분 좋게 성혼사를 줄줄 읊어 대던 목사는 즉흥 결혼식답게 이제 서로 키스할 타이밍이라며 우리 둘에게 손짓했다. 유일한 증인이자 하객인 윌슨이 있는 힘껏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내가 양팔을 펼치자 케이는 내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춰 왔고 나 또한 그녀를 꼭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시간이 한순간 멈춰 버렸다.

목사님과 윌슨의 박수 소리가 더 커졌지만 그마저도 아스라이 귓가를 스쳐 갈 뿐이었다. 달콤한 케이의 입술에 온몸이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다시는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나의 가장 큰 행운은 회귀한 게 아니라 케이를 만난 것이 분명하다.

펑! 펑!

윌슨은 작은 폭죽까지 쏘아 댔다. 정말이지 마법 같은 날에 마법사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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