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K폰 예약했어요. 예약 번호 SM2890071이에요.”
“신규 고객이시면 3년 약정에 12만 원입니다.”
“보상 구매하려고요. S폰도 바꿔 준다면서요.”
“아, S폰 고객이셨어요? S폰은 모델별로 보상금이 따로 책정되어 있어요.”
“산 지 1년밖에 안 된 거예요.”
스마트 스토어 점원은 고객이 S폰을 내밀자 팸플릿에 기재된 모델명을 꼼꼼히 확인했다.
“18만 원까지 보상되는 모델이네요. 3년 약정 안 하시면 퓨처 K폰 정가 60만 원에서 18만 원 제하고 42만 원에 판매 가능합니다.”
“42만 원씩이나 내야 해요? 그럼 아예 신규 구매하는 게 나은 거 아니에요?”
“42만 원을 내시면 기존 통신사와 계약을 계속 유지하실 수 있어요. 스마트 통신과 3년 약정하는 조건을 택하시는 고객에게 퓨처 K폰을 12만 원에 드리는 겁니다.”
“당연히 신규 구매가 낫겠네요. 으흠, 그럼 이 S폰은 어쩐다?”
“다른 분에게 양도하시든, 아니면 저 옆에 가시면 중고폰을 사는 딜러들이 있어요. 말씀 잘하시면 5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스마트 스토어 점원은 가게 한쪽 구석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가리켰다. 고객이 잠시 갈등하는 듯하자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로부터 ‘안 살 거면 비키지?’ 하는 눈초리가 빗발쳤다. 그 기운을 느꼈는지 대뜸 구매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바로 개통되죠?”
“옆에 부스로 가시면 저희 직원이 도와줄 겁니다.”
“이야, 정말 멋지긴 멋지네.”
12만 원을 결제하자 바로 손에 쥐어지는 퓨처 K폰.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정말이지 멋지다. 딱 석 달 동안 진행되는 판촉 이벤트라고 하니 인터넷으로 일찍 예약한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이젠 퓨처 K폰은 웃돈을 주고도 산다는 사람이 생길 지경이니까.
출퇴근 시간에 인터넷 동영상을 봐도 되고, 음악을 들어도 되고, 전자 결제도 된다고 하니 얼른 개통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S폰을 옆에 나란히 두고 보니 어떻게 이런 후진 걸 들고 다녔지 싶을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개통하는 것보다 S폰을 산다는 중고 거래상에게 먼저 줄을 섰다.
요즘 스마트 스토어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 *
「퓨처 K폰 전 세계를 휩쓸다. 중고가가 800불까지 치솟는 기현상」
「반도체 치킨게임 점입가경. 1G 현물가가 1달러 50센트로 역대 최저가 갱신」
「반도체 기업 주가 폭락. 스마트 클라우드만 K폰 판매 호조로 상승세 유지」
퓨처 K폰을 출시한 지 이제 한 달하고 보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의 실력을 보여 주었다. 휴대폰과 반도체는 생산 목표치의 120%를 달성했으며, 영업맨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성의 고객사를 끌어당기고 있다.
출혈 경쟁이기에 스마트 클라우드에 적자가 쌓이고 있지만 그에 따라 팍팍 늘어나는 시장 점유율을 보면 그다지 손해도 아닌 것 같다.
분당 집 정원 풀밭에 드러누워 맥주 캔을 뜯으며 K폰으로 신문을 보고 있자니 21세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아직 실시간 동영상을 즐기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수한 씨, 뭘 생각하고 있어요?”
“이리 와, 케이. 같이 별이나 보자고.”
“호호호.”
결혼식을 미룬 것도 마음이 쓰이고, 그녀를 내 옆에 두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며칠 전 케이에게 분당 집으로 이사를 오라고 했다. 동거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어서인지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고, 지금 그녀는 맥주 캔 하나를 들고 내 곁으로 걸어오고 있다.
케이는 내 옆에 앉으며 당연한 듯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 향긋한 살 냄새에 기분이 좋아진다. 바쁘고 급한 상황일수록 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지나 보다. 지금 시간이 12시 가까이 되는데 잠을 조금 줄이는 한이 있어도 이 시간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어때요? 잔디를 깎았더니 냄새가 좋죠?”
“응, 좋네.”
정원은 있었지만 나에겐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케이는 이사를 오자마자 정원사부터 고용했다. 웃자란 잔디를 깔끔하게 깎으면 풀냄새가 짙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마치 깊은 숲속에 들어온 느낌마저 든다.
“올해 여름은 더울 건가 봐요. 아직 7월도 아닌데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져요.”
“응, 그러네.”
“다들 오늘은 잠을 못 이루고 있겠죠?”
“그렇겠지.”
“퓨처폰 1,000만 대 돌파 기념행사는 왜 안 했어요? 사람들이 잔뜩 기대했을 텐데.”
케이마저 다른 사람들처럼 퓨처 K폰을 퓨처폰이라고 부른다. 케이를 포함해 모든 이들이 새로운 휴대폰임을 인정하고 있음이다.
“그냥… 치킨게임을 벌이는 와중에 축하연을 벌일 수는 없잖아.”
“호호, 그럼 우리끼리 축하해요. 세계 시장 점유율이 7%나 올랐고, 할부금 8억 불이 들어오는 기적을 봤잖아요? 6개월만 지나면 50억 불은 회수되고 그다음부턴 흑자가 확실해요.”
툭!
맥주 캔끼리 부딪치며 가볍게 한잔을 나눴다. 센스 좋게 케이는 안주로 김을 챙겨 왔다. 짭짤한 김 한 장을 입에 넣고 녹여 먹으니 참으로 좋다.
“맛있네. 김은 언제 샀어? 장 보러 갈 거면 같이 가지 그랬어.”
“인터넷으로 주문했어요. 열 박스 시켰더니 배달해 주더라고요.”
“열 박스나?”
“정원사 아저씨에게 한 박스 드리고, 이웃들에게 한 박스씩 선물했어요. 집에는 두 박스 있어요.”
“하하, 동거한다고 광고라도 한 거야?”
“뭐 그런 셈이죠, 호호호.”
“김보다 떡을 돌려. 그게 한국 문화니까.”
유쾌한 케이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만간 동네 반상회에 히로인이 탄생하겠군. 사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여기 사는 줄도 모를 텐데 말이다.
“호호호,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여하튼 수한 씨, 오늘 너무 늦게 자는 거 아니에요? 컨디션 조절해야죠. 사흘 뒤엔 큰일이 있잖아요.”
“큰일?”
“남북 정상회담에 중요 수행원이잖아요.”
“그게 무슨 큰일이야? 난 안 갈 건데, 뭘.”
“에에, 참석 안 한다고요? 아무리 DJ에게 분이 안 풀려도 그러면 어떡해요.”
“분이 안 풀린 게 아니라 대북 사업의 주체는 대현이야. 나보다 대현의 최 상무가 참석하는 게 맞아. 나도 굳이 DJ를 만나고 싶지 않고.”
“생색은 내야죠. 중고폰을 개성공단에 넘겨서 리워크할 거잖아요. 중고폰 중국 수출 건도 DJ에게 언질을 해야죠.”
“내가 아쉬운 일도 아닌데 생색낼 필요가 뭐가 있어? 면전에서 아부 안 했다고 정부가 중국 수출을 막을 것도 아니고.”
이제 한국에서는 퓨처폰 때문에 기존 휴대폰은 설자리가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다르지. 기존 휴대폰이라도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수천만 명에 이르지 않나. 전 세계에서 거둬들인 K폰과 S폰을 잘 닦아서 포장만 새로 해도 불티나게 팔릴 거다. 퓨처폰은 출혈 제품이기에 각 나라마다 월별로 100만 대만 풀고 있는 데다 그 적자를 중고폰 판매를 통해 일부라도 벌충하는 게 좋으니까.
“DJ랑 너무 적대하는 거 아니에요, 수한 씨?”
“괜찮아. 미국과 달리 한국은 정치 로비가 불법이잖아.”
“여태 접촉해 왔잖아요.”
“이젠 필요 없어. DJ가 최소한 신성에 경고라도 했다면 이러지 않았을 거야.”
실망이 크지만 어찌 보면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알리는 사건인지도 모른다. 사회 전반에 걸쳐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자라는 인식이 점차 옅어지고 있다. 오히려 검찰이 신성과 합작해 날뛰었으니 말이다. 신성을 밟으면 검찰 조직에서도 자연스레 신성 장학생이 사라지리라.
“그래요. 수한 씨가 내린 결정은 언제나 옳으니까.”
케이는 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뒤로 넘기는 손장난을 반복하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할 때 졸리는 느낌 그대로다. 오늘은 잠이 잘 올 것 같다.
“10분만 이러고 있을게.”
“얼마든지요.”
케이와 나는 집을 합치고서야 연인처럼 행동하고 있다. 생각보다 결혼 생활이 재미있을 것 같다. 케이의 손길, 풀 냄새, 같이 마시는 맥주 한 캔, 심지어 입안에 감도는 짭짤한 소금기마저 나를 치유하는 느낌이다.
- *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 햇볕 정책이 결실을 맺다」
「한반도의 시곗바늘이 평화 통일로 성큼 다가서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속보를 내보내고 있었지만, 신성그룹의 회장실에는 냉랭한 공기가 감돌았다. 신성의 이 회장은 이수학 비서실장과 진제대 상무를 불러다 앉히고는 몇 분째 노려만 보고 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내 사재는 물론, 전환사채 8천억까지 쏟아부었는데 S폰과 반도체 점유율은 더 떨어졌어. 이젠 바닥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아.”
“그래도 그리하셨기에 와중에 버티고 있는 겁니다.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시간이 약이라는 말 따위 한 번이면 족해.”
진 상무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 회장이 대신 하자 입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해야지 생각했을 뿐, 따로 할 말도 없었다. 1G 현물가가 1달러 50센트까지 떨어졌으니, 재료비를 겨우 건지는 수준이다. 이제 반도체를 팔면 팔수록 적자폭이 커지고 신성이 가격을 맞출 수 없다고 선언하는 즉시 고객들은 완전히 스마트 클라우드로 돌아설 것이다.
특히나 북미 점유율에서 마이크론도 이때가 기회라고 여기는지 덤핑에 동참하며 신성의 고객을 뺏어 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시장의 25%를 차지했던 점유율이 12%로 떨어져 간신히 한 자리 숫자를 모면했다.
“S폰은 이미 떨이 제품이나 다름없습니다. 인터넷 폰으로 갈아타야 합니다. 개발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으니 반도체만 좀 더 버텨 주면 내년에는 신성이 다시 한 번 약진할 수 있을 겁니다.”
이수학 비서실장이 반도체를 물고 들어갔다. 그러자 입을 다문 채 이 자리를 모면하고 싶었던 진 상무도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진 상무, 말해 보게. 대안이 있을 게 아닌가.”
이 회장은 진 상무에게는 말투가 날카롭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던 양반이 비서실이 저지른 사달에 말려들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이다.
“딱히 대안은 없습니다. 메모리 시장에서 10% 넘게 점유율이 빠진 것도 위험하지만 더 큰 위험은 더 이상 플래시 메모리를 공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꿀꺽.
‘그래서라니요? 그렇다고요! 스마트 클라우드에 항복하셔야죠!’
하마터면 속내가 튀어나올 뻔했다. 진 상무는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이 회장은 정말이지 자신에게 탈출구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차마 스마트 클라우드 유수한 회장에게 넙죽 엎드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무 말이든 해야 한다. 가능성이 있든 없든.
“NEC, 도시바와 연합하셔야 합니다. 신성 못지않게 스마트 클라우드 덤핑 작전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회사도 스마트 클라우드와 연합했다고 하지 않았나?”
“1G 가격이 2달러를 왔다 갔다 할 때만 해도 시장 점유율 상승을 꾀하더니, 1달러 50센트까지 떨어지니 견딜 수가 없나 봅니다. 미국 마이크론이야 원래 가격을 고수해도 미국 고객사들이 2차 납품 업체로 유지해 주지만 일본 반도체 회사야 그렇질 못하니까요.”
“DRAM은 NEC와 같이, 플래시는 도시바와 같이 하자는 말이군.”
“예, 그렇습니다.”
“역시 진 상무는 대안이 있을 줄 알았어. 내 생각과 똑같군. 헌데 연합하자면 S폰에 그 회사들 메모리를 채용해 줘야 하는데 적자폭이 더 커지지 않겠나?”
‘팔리지도 않는 S폰인데 적자폭이 왜 커집니까?’
오늘따라 진 상무는 속으로 말을 삼키느라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코너에 몰리니 이 회장과 비서실마저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신성이 정말 망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S폰에 신성의 운명을 맡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구한 제품이 있습니다.”
진 상무는 미국 반도체 고객을 설득하러 갔다가 고객이 내미는 제품을 보고는 미친 듯이 해당 회사를 찾아가 시제품을 얻어 왔다.
“헉! 이게 뭔가?”
“블랙베리라는 퓨처폰의 일종입니다. RIM이라는 캐나다 회사가 만들었고 버라이즌이라는 미국 통신사에서 눈독 들이는 제품입니다.”
“허… 블랙베리. 그러고 보니 이 버튼들이 꼭 포도 알맹이처럼 보이는군.”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였나 봅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퓨처폰보다 디자인이 좀 복잡하긴 합니다만, 간단한 이메일도 쓸 수 있고 좀 더 인터넷에 특화된 제품입니다.”
“RIM이라는 회사도 그렇고 버라이즌이라는 회사도 그렇고 생소하구만. 미국에선 AT&T나 베이비 벨이라는 지역 통신 연합이 메인 업체가 아닌가?”
이 회장은 부정적인 질문을 하면서도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을 기대하는 듯 말이다.
“RIM이든 버라이즌이든 기존에 있던 회사들입니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지만 워낙 1, 2위 업체의 점유율이 높아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잘하면 기존 휴대폰 업체인 노키아도 동참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이 구세주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반도체를 써 준다고?”
이 회장은 동아줄이라도 잡은 듯 진 상무의 말을 마음대로 넘겨짚기 시작했다.
“메모리 반도체는 향후 몇 년간 스마트 클라우드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출혈 경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출구는 통신칩에 있습니다. 우린 이 블랙베리라는 제품에 올인해야 합니다. S폰도 블랙베리의 라이선스를 받아 같은 OS에, 같은 콘셉트의 디자인을 채용해야 합니다.”
“통신칩! 그러고 보니 어째서 통신칩은 라이선스가 끊어지지 않았지?”
“통신칩 라이선스는 대현의 왕회장이 결정한 사안입니다. 대현의 정 회장은 절대 왕회장의 선택을 무르는 법이 없으며, 솔직히 지금 라이선스를 끊어도 상관없습니다. 통신칩에 관한 한 우리 신성도 포트폴리오가 완성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하하하! 완벽해! 완벽한 탈출구야! 역시 전문가가 나서니 빛이 보이는구만! 비서실 멍청이들과는 차원이 달라!”
이수학 비서실장은 욕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깜깜한 밤중에 멀리 별빛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정작 진 상무는 이 회장에게 극찬을 들었지만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솔직히 이걸 말해야 하는지 갈등했었다. 이런 방식으로 스마트 클라우드와 다시 한 번 경쟁자로 나서는 것보다, 아예 이 회장이 유 회장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상생을 도모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왠지 유수한 회장 정도의 안목이라면 블랙베리 같은 디자인을 생각 못했을 리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 상무는 자신의 안목으론 블랙베리가 훨씬 나아 보이는데 어째서 유 회장은 이런 디자인을 채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에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진 상무님, 지금 당장 휴대폰 개발자와 같이 미국으로 출장 가실 수 있습니까? 솔직히 현재 S폰 개발자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이수학 비서실장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런 면이 그를 이 자리까지 올려놓은 장점이었다. 옆에서 이 회장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거 정말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왜 이리 불안하지? 내가 뭘 놓친 거지?’
진 상무는 그러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뭐하나? 업무 영역 때문에 그러나? 무선 사업부까지 업무를 보라고! 자네가 사업부장으로 적격이네!”
“옙!”
이 회장이 대뜸 사업부장을 언급하자 진 상무의 입에서 즉시 대답이 튀어나왔다. 회장의 호통에 가까운 승진 통보에 자기도 모르게 주사위를 던지고 말았다.
제9장 필살기의 마지막 조각
“보고드립니다. 신성에서 움직임이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대로더군요.”
윌슨이 비서실장을 맡고 난 뒤부터는 출근하자마자 나의 스케줄을 정리해 준다. 그런데 오늘은 일정 대신 대뜸 신성 얘기부터 꺼냈다.
“어디로 향했나요? 노키아인가요? 아니면 RIM인가요?”
“RIM입니다.”
“결국 블랙베리로 갔군요.”
“그리 보입니다. 추가로 확인했더니 블랙베리 시제품을 입수해 갔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신성의 탈출구는 휴대폰밖에 없다. 반도체는 나와 치킨게임을 하고 있고, 디스플레이는 LK가 독주하고 있으니 그 또한 경쟁이 만만치 않고, 가전은 크게 남는 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휴대폰은 통신 매체로 반도체 시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기에, 통신 서버 고객이 반도체를 사 줄 수밖에 없게 만든다. 더구나 통신칩은 수익률이 메모리 대비 월등히 높기도 하고. 여하튼 노키아 폰이 아닌 블랙베리를 퓨처 K폰의 대항마로 보다니,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경영자가 아닌 기술자가 분명하다.
“누가 갔나요? 이 회장이 직접 가지는 않았을 테고.”
“진제대 상무입니다. 며칠 전 무선 사업부 사업부장으로 승진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반도체 개발실장을 겸임하는 것도 그렇고, 차기 사장으로 승진할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하필 진제대 상무다. 부지런하고 기술도 잘 아는 데다 촉까지도 좋은 사람이라 썩 반가운 소리는 아니다. 너무 쉽게 함정에 빠진 것이 이상하다.
진 상무 정도면 블랙베리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그 양반을 너무 높게 평가했나? 아니면, 신성의 핵심 멤버들조차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할 정도로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함정에 빠지긴 했어도 진 상무는 촉이 좋은 사람입니다. 만만히 보면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반도체 치킨게임은 휴대폰 사업을 망가뜨려야 끝이 나죠.”
윌슨은 큰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긴 이렇게 간이 크지 않았다면 파라곤 펀드 매니저를 할 수 없었겠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매니저 업무를 하다 간이 쪼그라들어 결국 병원 신세를 졌을 거다.
“오래 걸리는 싸움입니다. 서두르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윌슨은 깍듯하게 묵례를 했다. 영어를 쓴다는 것을 제외하면 마치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대단한 적응력이다.
“오늘 스케줄은 어찌 되죠?”
“1시간 뒤에 애플과 컨퍼런스 콜이 있을 예정입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잡스와 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리 상황은 알려 줬습니까?”
“알려 주기도 전에 전화가 왔더군요. 사장님 출근하면 바로 컨퍼런스 콜 연결하겠다고 했습니다. 대회의실에 회의 세팅해 놓겠습니다.”
미국과 시차는 반나절. 윌슨은 잡스의 전화로 새벽잠을 설쳤을 것 같다. 컨퍼런스 콜을 제외하곤 딱히 스케줄이 없나 보다.
“좋네요. 먼저 가 있어요.”
“예.”
잡스와 얘기하기 전에 먼저 확인할 일이 있다. 터치스크린 기술에 진척 사항이 있을 리 없겠지만 김 실장은 뭘 하고 있나 살펴볼 겸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사내지만 전화로 나눌 얘기가 아니다.
- *
내 사무실 바로 아래층은 그룹 총괄 영업팀인데 자리가 텅텅 비어 있다. 요즘처럼 영업맨들이 바쁜 날이 없을 것이다. 치킨게임은 단순히 가격만 낮춰 들이미는 게임이 아니다.
출혈 경쟁이기에 신성보다 아주 약간 싼 가격을 내밀어야 우리 회사의 출혈이 최소화되는 것이다. 신성의 납품가를 추측하고 고객에게 물량은 얼마 정도 때려 박아야 신성을 2차 벤더에서도 퇴출시킬지 가늠하기 위해서 해외 출장과 온갖 술자리에 자신들을 갈아 넣고 있다.
퓨처 K폰도 마찬가지. 3년 약정에 6개월 할부라곤 하지만 판매가 100달러면 단기간에 유동자금을 잡아먹는 하마 같은 제품이다. 이벤트 판매 기간인 석 달 동안 적당한 물량을 내보내며 인기만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어찌나 바쁜지 권 실장은 아예 한 달째 얼굴을 보지 못했을 정도다.
뚜벅뚜벅.
영업팀보다 한 층 아래에 있는 총괄 개발팀은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밝은 느낌이다. 지금도 자잘한 불량은 발생하고 있겠지만, 퓨처 K폰을 출시한 영웅들 아닌가?
김 실장의 자리에는 커다란 탁자 위에 퓨처폰이 부품 단위로 늘어져 있고, 그 옆에 있는 화이트보드에는 온갖 이슈에 대해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 그룹 전체에서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김 실장이라 품질팀, 생산팀, 심지어 영업팀마저 한 수 접어주는 양반이 되었다.
“김 실장.”
“엇! 회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여전히 문제가 많은가 봐요.”
“아니라곤 말씀 못 드리겠네요. 퓨처폰은 마치 양파 같아서 까도 까도 문제가 있습니다. 고객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김 실장이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문제는 대부분 소프트웨어인 펌웨어에 관련된 일일 것이다. 물리적인 문제야 없진 않겠지만 품질 시험을 거친 제품에 대량으로 발생할 리 없다. 클레임이 들어오면 깔끔하게 A/S를 해 주면 되니, 차기 제품에 불량률을 어찌 줄일지 기술 개발을 하면 되고 말이다.
“개발자들은 다들 휴가는 다녀왔습니까?”
“예. 대부분 다녀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2주씩 강제로 보냈습니다. 여름휴가는 별도로 보낼 거고요.”
“김 실장은 언제 갈 건가요?”
“저야 뭐, 회사 나오는 게 휴가입니다. 라인에서 구르는 것도 아니고.”
“하와이나 몰디브 정도는 다녀와요. 2주는 힘들어도 일주일 정도는 괜찮으니까.”
“11월 쇼 케이스 갈 때 식구들 데리고 가면 됩니다. 그게 제일 자세 나오는 일이더라고요. 마누라랑 애들도 좋아하고.”
“으흠.”
생각해 보니 그것도 괜찮다. 다소 춥긴 하지만 그게 시카고의 매력이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큰 무대에 올라 프레젠테이션 하는 모습도 보이고 말이다.
“여하튼 제 휴가 때문에 오신 것은 아니실 텐데, 지시 사항이 있으신가요?”
“잡스와 컨퍼런스 콜이 있어서 말이죠. 말하다 보면 아무래도 퓨처폰 입력키 문제가 나올 것 같군요.”
“현재로선 버튼을 더 추가하려면 플랫폼을 변경시킬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도, 그리고 디자인팀도 극구 반대하는 일이고요.”
“그 전략에는 변경이 있을 수 없어요. T 프로젝트는 진척 사항이 있나요?”
“아직 크게 진척 사항은 없습니다. 극비로 처리하라고 하셔서 인원이 세 명밖에 없고, 모두 해외 출장을 보냈습니다.”
T 프로젝트는 터치스크린 기술이다. 입이 무거운 사람들만 뽑으라고 했더니 세 명밖에 없나 보다. 아마도 김 실장의 최측근들일 것이다. 해외 출장을 보냈다고 하는 걸로 봐서 기술 정보를 수집하러 갔나 보다.
터치스크린 기술은 크게 감압식 터치스크린과 정전식 터치스크린, 적외선식 터치스크린으로 나뉜다. 스마트폰이 개발되고서야 상용화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감압식 기술은 1965년쯤에, 정전식은 1980년대에 태생했을 정도로 오래된 기술이다.
감압식 기술은 반도체 장비의 컨트롤러에 쓰일 정도로 대중화되어 있지만, 정전식 터치스크린 기술은 이상하리만치 상용화를 연구하는 곳이 없었다.
“미국 연구소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한국인을 찾으세요. 분명히 T 프로젝트를 하고 있을 겁니다.”
“예. 말씀하신 대로 한국인 위주로 찾고 있습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계속 찾아봐요. 한국인이어야만 해요. 알았죠?”
“예.”
김 실장은 내가 보안상 이슈로 한국인 개발자를 찾으라고 하는 줄 알겠지만 결코 아니다. 정전식 터치스크린 기술, 정확히 말하면 멀티 터치스크린 기술은 한국인이 2005년에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다.
IT 분야에선 MP3도 그렇고 유독 한국인이 혁신을 이룬 경우가 꽤나 있다. 애플과 스티브 잡스라는 걸출한 마케팅 고수에게 밀려서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내 기억으로는 ‘닥터 한’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2005년 TED에서 세계 최초로 멀티 터치스크린 기술을 선보였다.
재미 교포인 것 같은데 그 양반이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나. 지금쯤 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거라고 추측하는 게 전부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퓨처폰을 상용화시키고, 인터넷과 전자 결제의 시대를 훅 앞당겨 버린 만큼 스마트폰의 등장도 빨리질 것은 당연하다. 내가 먼저 찾아야 한다. 설령 찾지 못한다고 해도 본격적으로 개발팀을 T 프로젝트에 집어넣기 전에, 정전식 터치스크린 기술의 상용화가 왜 이리 늦어지는지 그 이유라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 정보는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김 실장과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러가 버렸다. 1시간은 생각보다 무척 짧은 시간이다.
- *
딩동.
컨퍼런스 콜로 전화가 걸려 오는 신호음이다.
“잡스?”
-수한, 오랜만이군요. 잘 지냈습니까?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죠? 올해 여름휴가는 어디 갈지 정했나요?”
-하하, 나야 휴가를 빙자해 개발자 회의나 할 생각입니다.
“사람들 괴롭히는 건 여전하시네요.”
-수한도 참석하면 좋을 텐데.
“정중히 사양하죠.”
잡스와 나는 심각한 얘기를 하기 전에 농담부터 시작했다. 개발자 회의를 빙자해 농담을 하는 걸로 봐서 최근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나 보다.
-여하튼 수한의 퓨처 K폰은 나에게 아주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겠죠. 휴대폰의 꽃에 근접한 제품이니까요.”
-으흠, 역시 그렇군요. 내 와이파이 기술도 꽤나 도움이 되었죠?
내 블루투스 칩으로 와이파이를 구현했음에도 자기 기술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스티브 잡스다운 말투라 할 것이다.
그는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는 피카소의 말을 곧잘 인용했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든 상용화를 먼저 하고, 최적화를 먼저 하면 ‘창조적인 모방’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 또한 일정 부분 동의하는 바다.
“그럼요. 스마트 클라우드의 퓨처 K폰과 애플의 아이북은 환상적인 조합이죠. 라이브러리가 완벽하게 호환되지 않습니까.”
-동의합니다. 수한이 의도한 바인 거죠?
“의도했다기보다 애플의 OS가 워낙 안정적이니 그런 거죠.”
-하하하! 수한이 그리 말해 주니 내가 말을 아낄 필요가 없겠군요.
“뭐든 말씀하세요. 전부 협조할 테니까.”
-RIM이라는 회사를 들어 본 적 있습니까?
나는 잡스의 말에 윌슨을 힐끗 쳐다보았다. 상황 설명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RIM이라고 바로 지칭해 버렸기 때문이다. 윌슨은 양 손바닥을 펼치며 정보가 새어 나간 게 아니라는 뜻을 전했다.
“저도 눈여겨보는 회사죠. 신성이 접촉하고 있거든요.”
-아, 오해는 말고요. 수한의 치킨게임에 관여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RIM이 내놓은 퓨처폰에 BBM이라는 인스턴스 메신저 기능이 아주 맘에 들더군요.
BBM은 21세기 카카오 톡과 같은 프로그램이다. 블랙베리는 BBM으로 흥하고 BBM으로 망해 버렸다. RIM사는 BBM을 사용하는 기업 고객들로부터 일어나는 매출을 포기하지 못해, BBM을 무료로 배포해 모바일 메신저 시장을 장악하자는 사내 아이디어를 기각해 버렸다.
원래 역사를 비틀어서는 안 된다. 신성이 같이 빠져야 한다. 어느 정도 성공 가도를 달려 사업이 성공했다는 착각을 해야 한다. 그래야 버튼 입력식 OS와 해당 플랫폼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설마 버튼 입력 방식을 시도해 보자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인터넷 메신저는 파이오니어에서 컴퓨터용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아이북에도 상용화를 시켰지 않습니까?”
-모바일 메신저는 전혀 다른 비즈니스가 아닙니까? 쉽게 포기가 안 되는군요.
“잡스답지 않군요. 그건 스스로 플랫폼의 한계를 만드는 겁니다.”
-으흠, 버튼 방식은 아니라고 확신하는군요.
스티브 잡스도 RIM사의 방식을 보고 고민했던 모양이다. 모바일 시장은 결국 소비자에게 얼마나 많은 자유도를 주느냐에 따라 플랫폼의 승부가 갈린다.
“메신저는 수많은 기능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심미적인 디자인을 바꿀 바에야 과감히 포기해야죠. 우리는 조그셔틀, 토글키, 기존 키패드로 인터넷 쇼핑, 동영상 및 음악 감상으로 승부를 봐야 합니다.”
내 말에 잡스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나에게 이리 전화를 한 것은 자신도 확신을 얻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수한은 터치스크린 방식을 시도하고 있군요. 신성을 함정으로 몰아가는 재미가 어때요?
“……!”
잡스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내 말에서 어떻게 추측을 해낸 걸까? 아니,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것을 지금에서야 확신하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잡스의 상상력은 차원을 달리한다.
“뭐라 둘러댈 말이 없군요.”
그의 말에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나는 그와 함께 가겠다고 수차례 맹세한 동업자 아닌가. 내가 힘들 때 70억 불을 투자해 준 양반이며, 상당 부분 비즈니스를 같이 하고 있다. 섣부른 핑계로 거짓말을 하기보단 정면 돌파가 답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두 회사의 치킨게임에 관여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터치스크린 방식은 극비로 진행해야 합니다. 쉽게 개발팀을 투입해서는 안 되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해당 OS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 고민하고 있지요.
“개발팀 구성은 최소 1년, 길게는 2년 뒤에 해도 무방합니다. 내가 시제품을 만들기 전에 OS에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정보를 누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오래 걸릴까요? 하긴 정전식 방식은 답이 없긴 하더군요. 너무 민감한 데다 무엇보다 배터리 충전도 쉽지 않으니….
으응? 배터리 충전? 터치스크린 기술에 배터리 충전 얘기가 왜 나오지? 잡스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나 또한 얻는 게 있었다.
기본적으로 정전식은 전기 자극을 신호로 하는 것. 그렇다고 전원과 분리할 수도 없고. 배터리 충전에 필요 이상의 누전이 발생하면 신호 센서가 모두 타 버리겠네. 그래서 상용화가 늦어지고 있는 거다. 터치스크린 전문가만 찾을 게 아니라, 센서 전문가를 찾는 게 정답이다. 여태 닥터 한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일 수 있다.
“감압식, 정전식, 적외선식 터치 방식 모두 접근해 보고 있으니 시제품을 기다려 주시죠. 어쨌든 휴대폰의 꽃은 같이 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잡스는 내 제품이, 나는 잡스의 OS가 필요하니까요.”
말문이 막힐 때는 다각도로 접근하고 있다는 말보다 나은 변명은 없다. 그리고 동맹을 한 번 더 강조해 안심시키고자 했다.
-결국 RIM사의 버튼 방식은 실패할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요?
“자칫 흥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길어 봐야 2년입니다.”
-으흠,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이팟에 카메라 기능을 삽입해 주세요. 올해 11월 쇼 케이스에 애플의 메인 제품으로 밀도록 하지요.
“로열티가 비싼 건 아시지요?”
-하하, 원래 아이팟은 비싼 게 마케팅 포인트잖아요. 뭐가 걱정입니까? 게다가 로열티는 3%로 책정해 줄 거 아닌가요? 우린 동맹인걸요.
“언젠가부터 차기 애플 제품의 개발을 우리 쪽에 맡기고 있군요.”
-고객 대접 좀 해 주시죠. 생각난 김에 에그박스에도 와이파이 기능을 넣어 주시고요. 11월에 같이 발표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신성 반도체는 애플에서 배제하고 있죠?”
-당연하죠. 스마트 클라우드와 대현의 메모리가 훨씬 싸고 좋은걸요.
“RIM사는 견제하지 마시고요.”
-그건 수한 의견에 따르도록 하죠. 함정도 같이 파야죠. 외려 훅 하고 성공하도록 RIM의 메신저에 감탄하는 인터뷰 기사를 내 보겠습니다.
스티브 잡스도 내 작전을 돕겠단다. 이래저래 서로의 의도를 확인했다고 할 것이다. 안드로이드가 나올 때까지 이 동맹은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 터치스크린 기술은 미리 특허 등록을 해 둬야겠다. 애플이 아무리 동맹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방어는 필요하니까.
- *
“오늘 좋은 얘기 많이 나눴습니다. 시제품은 8월에 보낼 테니 11월에 시카고에서 보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삐이익.
“휴우….”
잡스와의 컨퍼런스 콜을 마치자 참았던 한숨이 나왔다. 곁에서 한마디도 안 하고 있던 윌슨이 싱긋이 웃는다.
“역시 잡스는 만만찮네요. 신성을 빌미로 꽤나 많은 정보를 얻어 갔습니다.”
“RIM을 견제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아주 중요해요. 그 외의 정보는 잡스가 추측을 잘할 겁니다.”
“잡스가 터치스크린 기술을 추측했다면 타사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디선가 툭 튀어나오면 난감할 것 같습니다. RIM은 관심을 둘 것 같지 않지만, 노키아나 소니가 터치스크린에 관심을 가진다면 일이 복잡해질 것 같군요.”
“잡스도 그걸 아는 거예요. 서로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 그래서 잡스가 정보를 흘렸군요.”
보안도 보안이지만 정전식 터치스크린은 기술적으로 꽤나 난제가 있는 모양이다. 잡스도 은근슬쩍 내게 문제점을 흘렸을 정도니까. 여하튼 잡스 또한 스마트폰의 조각을 모두 맞춘 셈이다. 결국 누가 먼저 개발하느냐로 동맹의 우위를 점하게 될 듯하다.
휴대폰에 필수적인 배터리마저 터치스크린에 문제를 일으킬 정도라면 절대 개발이 쉬울 것 같진 않다.
“오늘 다른 스케줄은 없다고 했죠?”
“예, 없습니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 건설 건은 나운영 실장이 귀국해서 구두로 보고하겠다고 하더군요. 생각보다 빠르게 일이 진행되고 있나 봅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알겠어요.”
여태 해 왔던 일과 비슷한 업무는 내 동료들이 아주 잘 해낸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일을 찾아가는 것은 나의 일이다. 이번엔 나조차 전문성이 없는 일이기에 빠른 시간 내에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단서를 얻었고, 시간도 나니 LK로 가 봐야겠다. 배터리를 잘 만드는 회사 아닌가. 디스플레이도 같이 하고 있고 말이다.
- *
삐리릭.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구 회장님. 유수한입니다.”
-오! 유 회장, 어쩐 일이신가? 요즘 바쁘다고 들었는데 나에게 전화도 다 하시고?
구 회장은 기분 좋은 말투로 나를 존대해 준다. 왕회장의 장례식이 끝나고 바뀐 것 중 하나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게 생각이 나서요. 구미에 LCD 3공장을 지으신다고 했잖습니까? 최신 공장이 어찌 지어지나 구경도 할 겸 한번 내려가 보려고요. 담당 임원 한 명만 붙여 주세요.”
-어허, 이런 우연이 있나. 구미 LCD 3공장 양산식이 며칠 안 남았다네. 최종 보고를 받으러 가고 있던 길이었네. 지금 유 회장은 어디 계신가? 사무실인가?
“예, 사무실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시게. 나와 같이 가세. 내 긴히 물어볼 것도 있다네.
“하하, 좋네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마 중간에 차를 내 쪽으로 돌리는 모양이다. 뭐 어떤가? 내가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와 독대할 시간을 주는 것이니 구 회장이 호의를 베푸는 게 아니라 내가 호의를 베푸는 거다.
- *
스르릉.
“유 회장, 많이 기다렸나? 늦어서 미안하이.”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정말 30분도 안 돼서 LK 회장이 나를 데리러 왔다.
“미안하긴요. 정말 가는 중이셨나 보네요.”
“하하, 농담일 리가 있겠는가? 어서 타시게. 구미에 점심 식사도 준비해 뒀다네. 혹시 복어튀김 좋아하시는가?”
“뭐든 좋습니다. 내려가시죠.”
구 회장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니 부드럽게 차가 출발한다. 새로운 공장을 지을 때마다 회장이 직접 내려가 관련자들과 함께 축하하는 것은 LK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원래 역사에선 휴대폰을 몇 번이고 말아먹은 여파로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아졌지만 말이다. 이번 역사에선 있으려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 유 회장이 어려운 때에 확실한 목소리를 내지 못해 미안하네.”
단둘이 자리하고 있으니 대뜸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는 말부터 한다. 왕회장의 장례식장에서도 들었는데, 또 한 번 같은 말을 한다. 왕회장보다야 덜하지만 구 회장 또한 재판의 증인으로 나가 곤욕을 겪은 것만으로도 할 일을 충분히 했다. 사실 한국에서 신성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내 편이란 뜻이다. 간접적으로 신성을 응징해 달라는 말일 수도 있겠다.
“회장님도 곤욕을 겪으셨는데, 이제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저에게 맡기세요.”
“고마우이. 그리 말해 주니 마음이 편하네그려.”
구 회장이 내 손등을 툭툭 두드려 주니 나 또한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까 전화드렸을 때 긴히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그렇지, 그렇지. 내 긴히 물어볼 것이 있었네. 허허허.”
구 회장은 본래의 말투로 돌아왔다. 그러곤 다소 낡아 보이는 보고서를 내게 내밀었다. 어찌나 꼼꼼히 읽었던지 곳곳에 줄이 쳐져 있고 중간중간 메모를 한 흔적도 있다.
「PDP vs LCD」
제목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급히 웃음을 삼켰다. 이때가 이때구나 싶다. 2000년은 LK가 LDC 모니터의 양산에 성공하는 해였다. 지금은 덩치가 커졌기에 더욱 성공했고 말이다. 아마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의 20%는 족히 가져가고 있을 거다. 일본 업체랑 사활을 걸고 싸우고 있을 테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완승을 거둘 것이다.
여하튼 그건 구 회장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고, 결국 지금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어디다 투자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대형 평판 TV를 만들긴 해야 하는데 어느 방식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수백 수천억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다.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기에 이렇게 보고서가 해질 정도로 읽었겠지.
21세기 사람이면 누구나 알지만 LCD TV가 PDP TV를 압도한다. 두 방식은 기술 초기에는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각자의 장단점이 확연했었다. 하지만 10년쯤 지나면 PDP와 LCD의 경쟁 구도에서 LCD가 시장을 주도하며 PDP에 투자했던 기업들은 패배를 인정하고 손을 놓기 시작한다.
응답 속도, 휘도, 소비 전력 등등 공학적인 차이보다는 근본적인 구조와 구동 방식에 있어 LCD가 PDP대비 개선에 유리한 구조였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긴 거다. 태어날 때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부실한 떡잎이라고 해도 커 나갈수록 좀 더 뿌리를 깊이 내리는 녀석이 이기기 마련이다.
“허허, 우스운가? 유 회장에겐 너무 쉬운 선택인 모양이군.”
“아뇨, 구 회장님이 고등학생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상상되어서요.”
“그러지 말고 좀 알려 주게. 유 회장이라면 뭘 선택하겠나?”
그걸 공짜로 알려 주면 되나. 좋은 핑계가 생겼으니 연구소에 한번 들러 봐야지.
“하하, 저라고 단박에 어찌 결정을 합니까? 그래도 제 능력을 믿으신다면 디스플레이 연구소 엔지니어들과 얘기해 봤으면 하네요. 그럼 제가 어느 한쪽의 손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호! 얘기 한번 나누고 한쪽 손을 든다고?”
“아니요. 어느 한쪽 손을 드는 게 아니라 제 의견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죠.”
“그게 그 말 아닌가? 유 회장은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인데 선택이 틀릴 리가 없네.”
“허,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구 회장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운전석을 향해 소리쳤다.
“이보게, 차 돌리게. 구미에 가기 전에 청주 연구소부터 들러야겠네.”
“아, 예. 회장님.”
오늘따라 운전기사가 차를 돌리느라 고생이 많다. LK 디스플레이 연구소가 청주에 있었나? 그러고 보니 LK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연구소가 청주에 같이 있었지. 원래 역사와 달리 순순히 반도체를 대현에 넘겼기에 연구소 건물이 남아 있나 보다.
- *
지이잉.
연구소 정문을 막고 있던 전동 바리케이드가 한쪽으로 접혔다. 보안이 생명인 연구소에 검문검색도 받지 않고 차를 끌고 들어가는 것은 구 회장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어디가 연구소죠?”
차가 도로의 중앙선에 딱 멈췄다. 길 하나를 두고 두 개의 빌딩이 서로를 마주 서 있었는데, 묘하게 서로를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습게도 둘 다 LK 디스플레이 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있다.
“하하하, 나도 처음 왔을 땐 아주 헷갈렸지. 연구소장 자리를 두고 PDP 박 전무와 LCD 이 전무가 엄청 싸우고 있다네.”
“싸워요? LK에서요?”
“하도 큰 건이라 내가 사내 경쟁을 시켰네.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어느 한쪽을 편들 수가 없었다네.”
“그럼 이쪽이 LCD 쪽, 이 전무가 있는 건물이겠군요.”
“어찌 알았나?”
“건물이 반대쪽보다 조금 높네요. LCD가 모니터로 돈을 좀 벌고 있으니까 건축비가 좀 더 넉넉했겠죠.”
“허허허허! 그렇군, 그렇군! 나도 이제 알았어.”
“LCD부터 들렀으면 합니다.”
“그러자고.”
LK 구 회장을 앞세워 조금 높은 건물로 먼저 들어갔다. LCD를 먼저 둘러보고 PDP는 적당히 시간을 때우면 될 일이다. 내 관심사는 터치스크린에 대한 얘기를 어떻게 간접적으로 물어볼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뚜벅뚜벅.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바쁜데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네, 이주환 전무.”
“아닙니다. 외려 사전에 준비를 못 해 송구합니다.”
“불쑥 찾아왔는데 준비를 어찌 하나? 여하튼 이분은 알지?”
“예. 스마트그룹의 유 회장님 아니십니까?”
“오늘 LCD와 PDP 중 한쪽 손을 들어 주시겠다고 하네.”
“어헉!”
나는 옆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느라 혼이 났다. LCD의 이주환 전무는 원형 탈모가 심했다. 정말 열심히 스트레스받으며 싸우고 있나 보다.
“가세! 어서 가서 유 회장에게 기술 설명을 해 주라고.”
“예, 예!”
나는 구 회장의 손에 어디론가 마구 끌려갔고, 도착한 방은 뜯어진 TV가 수십 대는 족히 있는 곳이었다. 실무 엔지니어로 보이는 이가 지휘봉을 들고 꾸벅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LCD 개발팀 민상준 책임연구원입니다.”
책임연구원이면 과장급이다. 구 회장 앞에 과장급을 내세웠다는 것은 이 양반이 정말 개발자들조차 인정하는 전문가라는 말이다.
“반갑습니다. 제가 초보자이니 디스플레이 기술에 대해 기초부터 설명해 주세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서 시작해 보시게. 내 마음이 급하이.”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LCD는 능동형 박막 트랜지스터(Active-matrix Thin Film Transistor)로 이루어진 액정 디스플레이 (Liquid Crystal Display)라는 말로서 AMTFT LCD가 정식 명칭입니다.”
이 양반 어려운 말부터 시작했지만 핵심을 짚을 줄 안다.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름부터 아는 게 매우 중요하다. 구 회장은 전문용어부터 읊어 대는 민 과장의 말에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이다. 자신이 이해가 안 된다고 발표자에게 그러면 안 된다.
“아주 좋네요. 이름부터 알려 주시니. 제대로 된 발표입니다.”
이런 양반이 미운털 박히면 안 되니 내가 슬쩍 칭찬을 해 줬다. 구 회장의 표정이 달라졌으니 됐다. 내가 계속하라며 손짓하자 민 과장이 말을 이어 간다.
“LCD는 TFT를 이용해 능동형 매트릭스(Active-matrix) 구조를 가집니다. 이는 TFT와 커패시터(Capacitor)를 이용하여 원하는 픽셀(Pixel)에 원하는 전압을 일정 시간 동안 유지시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픽셀에 걸린 전압은 프레임 시간 동안 유지되고 그만큼 액정의 방향을 틀어 줍니다. 액정이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액정이 틀어진 만큼 빛이 투과되는 양을 바꿔 주고 이는 픽셀이 낼 수 있는 밝기의 차이를 만듭니다. 즉, 편광된 빛의 각을 바꿔 줘 편광판의 통과하는 빛의 양을 바꿔 주는 것이죠.”
“으음, 저는 그냥 유리판인 줄 알았더니 최외각엔 편광판이 있는 거네요. 그래서 전원을 끄고 보면 반질반질한 회색빛이 도는군요.”
“예, 정확하신 말씀입니다.”
민 과장은 꽤나 말을 어렵게 하는 양반이라 다른 이들은 연신 고개를 갸웃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알아들으면 그뿐이다. LCD는 액정이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반도체 박막 공정과 닮아 있다.
“LCD 엔지니어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문제는 뭐가 있나요?”
“쉽게 말씀드리면 LCD의 핵심인 액정을 다루는 데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압을 걸면 원하는 만큼 액정이 움직이는 데 꽤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LCD의 구동은 이 액정의 움직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전압을 유지시키는 방식을 택했고, TFT와 커패시터가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방식은 각 픽셀의 휘도에 해당하는 전압을 각기 달리 넣어 주고 그 전압을 유지해 주니, 아날로그 구동(Analog Driving)으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
나는 속으로 ‘이래서 LCD를 이용한 터치스크린 방식이 난제라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눈앞의 민 과장은 LCD를 설명하고 있었지만 나는 꾸준히 그걸 터치스크린 기술로 환원해서 듣고 있었다.
민 과장의 말을 내 방식으로 해석해 보자면, LCD의 액정에 꾸준히 전압을 유지시킨다면 터치스크린에서는 손가락을 댔을 때 생기는 극미량의 정전 용량 차이를 구별할 센서가 따로 필요한 거다.
게다가 말하는 폼으로 봤을 때 LCD 화면에는 꾸준히 전압이 가해지는 상태인데, 모바일 제품은 TV와 달리 배터리의 전압이 그다지 높지도 않고 심지어 사용 시간에 따라 전압이 떨어질 수도 있다. 시시각각 제어해야 하는 정전 용량이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터치 센서의 기술은 패널이 만져졌을 때 생기는 작은 전기 변화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전기 노이즈를 방출하는 LCD에서는 설계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겠네. 그런데 21세기엔 어떻게 만들었지? 알면 알수록 터치스크린은 단박에 개발될 제품이 아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퓨처 K폰은 몇 년은 안심하고 팔아먹을 수 있겠다. 그동안 신성의 돈줄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말라 갈 것이다. 그런 다음 터치스크린으로 치명타를 날리는 거다.
여하튼 이 양반에겐 한번 물어봐도 되겠다. 엔지니어 특유의 성품을 가진 사람 같으니, 내 말을 사업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잘 들었어요. 어렵긴 하네요. 여하튼 TV 평판 사업성을 평가함에 있어서 미래 지향성은 꼭 고려해야 하니까, 엉뚱한 질문 하나 해 보죠.”
“질문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답변하겠습니다.”
“SF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들이 꽤나 있잖습니까? 특수 장갑을 끼고 허공에 화면을 척척 띄웠다가 확대도 했다가 어디론가 휙휙 던지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LCD는 그게 실현 가능할까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아직 개봉하지 않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해당 장면은 SF 영화에서 꽤나 나왔고,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심심찮게 나왔던 장면이다.
“그, 그건….”
“유 회장님, 그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기술입니다. 현재로선 가능하지 않습니다. 허공에 TV 화면을 띄우고 이리저리 움직일 수는 없지요.”
민 과장은 어리바리한 모습이고, 옆에 있던 이주환 전무가 손사래를 치며 그건 공상일 뿐이라고 흥분해서 말한다. 그게 안 된다고 LCD가 미래지향적인 사업이 아니라고 할까 봐 말이다.
“민 과장님, 전혀 불가능한가요? 허공에 투명한 유리판을 펼쳐 놓고 위치를 센싱할 수는 없나요?”
LCD 위에 투명 센서를 장착하는 것이 터치스크린의 핵심 기술이다. 나는 내심 대답을 잔뜩 기대했다.
“뭐, 적외선 센서를 장착한 장갑을 끼고 천장에 센스 허브를 만든다면 가능할지도….”
그건 소니가 했던 방식이다. 2010년쯤 여러 전시회에서 화려하게 쇼 케이스를 했지만 처참하게 망했다. 너무 비싼 데다 소니 특유의 폐쇄적인 인터페이스 때문에 말이다.
“그건 너무 번거롭네요. 유리판에 투명한 위치 센서를 만들 수는 없나요?”
“센서를 어떻게 투명하게… 아, 마치 제 미친 후배가 말하는 것 같은… 흡.”
“미친 후배?”
“허헉,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누군가 있다. 이걸 연구하는 한국인이 있다. 내가 볼 때 민 과장도 꽤나 대단한 엔지니어인데, 그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되물었다.
“아뇨, 아니에요. 나는 공상을 좋아해요. 비슷한 기술을 연구하는 곳이 있나 보네요.”
“연구가 아니라 SF 영화를 실현하겠다고 하는 박사 과정 후배가 있어서….”
“하하, 미친 사람이 박사 과정을 밟고 있어요? 어디에 누구예요? 한번 보고 싶네요.”
“뉴욕대 화상 시스템 연구소, 한재식이라는 후배입니다. 미친 것까진 아니고 석사 논문이 있을 텐데, 제가 카피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나는 애써 농담처럼 말했는데 윤 과장이 엔지니어답게 대답을 해 줬다.
대박! 대박! 이름이 한재식이란다. 닥터 한! 그 양반일 가능성이 99.9%다. 뉴욕대라니, 김 실장이 그리 찾아도 못 찾았던 이유일 것이다. 내가 한국인 박사를 찾으라고 했을 때 MIT, 스탠퍼드, 칼택만 주야장천 뒤지고 다녔을 것이 분명하다.
“부탁드려요. 하하, 그럼 이쯤 해서 PDP를 보러 갈까요, 구 회장님?”
“더 안 들어도 되겠는가?”
“일단 엔지니어는 합격이네요. 너무 설명을 잘하지 않습니까? 과장급으로 아까울 정도네요.”
“오~ 그 정도인가?”
나는 기분 좋게 민 과장을 한 번 더 칭찬하고 뒤돌아섰다. PDP는 티 안 나게 최대한 짧게 들어야겠다. 어떻게 빨리 뉴욕으로 날아갈 수 있을까.
- *
나는 구 회장에게 LCD에 한 표를 던진다는 말을 남기고 휙 하니 본사로 복귀했다. PDP 임원이야 똥 씹은 표정을 했지만 구 회장은 큰 고민거리 하나를 덜어 낸 양 기분 좋게 구미로 향했다. LK에서 따로 운전기사와 공용차를 내줬기에 나는 편안하게 되돌아올 수 있었다.
“회장님, 구미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윌슨이 내가 복귀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쩌다 보니 가는 중에 일이 해결되어 버렸군요. 뉴욕 갈 일이 생겼으니 비행기 예약 부탁합니다.”
“어떤 일로 가시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T 프로젝트의 키 멤버가 있는 곳을 알아냈어요.”
“오홋! T 프로젝트.”
나는 윌슨에게 ‘뉴욕대 화상 시스템 연구소, 한재식 박사’라고 적힌 메모지를 건넸다.
“한 박사와 면담을 주선해 주세요. 내가 직접 가서 데려오죠.”
“이 일로 가시는 거라면 뉴욕으로 바로 가시면 안 되겠네요. 인재 영입은 조심스럽게….”
윌슨은 메모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윌슨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우리도 신성의 임원이 어디로 향하는지 비행기를 보고 확인하니까. 내 일거수일투족은 모니터링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다른 이를 보내기도 그렇고.
“일본이나 홍콩으로 끊어 줘요. 내가 알아서 환승하죠.”
좀 귀찮긴 해도 경유를 해야겠다. 윌슨은 특급 로비스트답게 보안에 대한 생각이 각별하다.
딸깍.
“수한 씨, 뉴욕 간다고요?”
“어! 케이 와 있었어?”
환승하는 것쯤이야 하고 있었는데 내 사무실에서 케이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언제 온 거야?
“같이 퇴근하려고 왔죠. 오늘 수한 씨 오후 스케줄이 없다고 윌슨이 알려 줬거든요. 여하튼 뉴욕 가요?”
“응, 갈 일이 생겼어. 케이도 원하면 같이 가. 뉴욕이면 버지니아도 가까우니까 오는 길에 장모님, 아니 로메티 님도 뵙든지.”
“호호호,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엄마 핑계 대면 비행기 표를 끊을 필요 없잖아요. 전용기가 있는데.”
“그거 아직 안 돌아갔어?”
“돌아갔다가 윌슨이 또 타고 왔잖아요. 매번 번거롭다고 한 대는 한국에 두기로 했어요.”
“…….”
허, 무슨 차도 아니고 비행기가 두 대였어? 하긴 할리우드 배우들도 전용기가 한 대씩 있는데, 파라곤의 상임이사 집안에 비행기 두 대쯤이야.
사실 나도 돈으로만 따지면 전용기는 몇 대라도 살 수 있다. 600억 정도면 구매가 가능하고, 파일럿과 유지비용도 감당할 만하다. 하지만 너무 눈에 띄는 일이라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10년쯤 뒤에는 한국 대기업들도 모두 전용기를 마련하니 그때 제일 멋진 걸로 한 대 사야지 싶다.
“전용기라면 보안 이슈는 없겠네요. 한 박사 면담 확인 후에 일정 잡겠습니다.”
윌슨은 내게 인사를 하고는 어디론가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왠지 자리를 비켜 주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칼퇴근이나 해 볼까.
“이왕 왔으니 저녁 같이 먹고 들어가지.”
“요후~ 정말 지금 퇴근하는 거예요?”
“응. 아주 기분이 좋거든! 아무 메뉴나 골라 봐.”
“힐튼호텔에 철판 요리 전문 셰프가 새로 왔대요. 거기서 오늘 저녁 어때요?”
오랜만에 철판 요리 좋지. 큰 새우가 나오는 9월이면 더 좋겠지만, 소고기 위주로 구워 달라고 해야겠다.
“맛있겠는데. 그런 자잘한 정보는 대체 어디서 얻는 거야?”
“인터넷엔 없는 게 없다고요.”
케이는 퓨처 K폰을 흔들어 보이며 내게 팔짱을 꼈다. 예전 같으면 보는 눈 많다고 손사래를 쳤을 텐데, 이젠 나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러려니 한다. 인터넷도 그렇고 연인 놀이도 그렇고, 케이의 적응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 *
끼이잉. 쏴아아아아.
뉴욕행 전용기 안.
“뉴욕까지는 14시간 정도 걸립니다. 도착하고 4시간 뒤에 면담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 처리 고맙습니다.”
한 박사와의 면담 예약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의 소재를 알아낸 지 불과 이틀 만에 약속이 잡혔다. 가서 연구소에 기부 좀 하고 한 박사와 함께 그가 했던 연구 자료를 깡그리 가져오면 그뿐이다.
“뉴욕에 도착하면 밤낮이 바뀌니 지금 주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러네요. 윌슨도 쉬어요.”
윌슨이 마치 승무원처럼 나에게 와인을 권한다. 윌슨이 왜 따라왔을까 싶었지만 나와 케이가 동시에 자리를 비우니 업무상 같이 따라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운전기사 노릇도 하겠다면서 말이다. 하긴 그의 007 가방만 있으면 비서실 직원들과는 수시로 통화할 수 있으니 내 곁에 있는 게 더 편하긴 하다.
전용기 안에서는 각자의 공간이 있다. 작게나마 테이블이 있고, 좌석이 소파처럼 되어 있어 누울 수도 있다. 내 곁에 있길 좋아하는 케이마저 칸을 따로 썼다. 신문을 읽든, 영화를 보든, 잠을 청하든 14시간 동안 옆 사람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란 쉽지 않으니까.
「DRAM 가격 끝없는 추락. 현물가 1G당 1.4달러로 1.5달러 저항선 무너져」
「반도체 수출의 난항으로 올해 무역 수지 흑자는 100억 불에 그칠 듯」
잠을 청하기 전에 신문을 읽어 보았다. 언론에서는 나에 대한 언급도 그렇고 치킨게임이라는 단어 자체를 자제하고 있다. 신문 기사에 그리 썼다가는 내가 왜 신성을 겨냥해 출혈 경쟁을 하는지도 언급해야 하고, 그랬다간 대현을 희생양으로 덮어 버린 내 스캔들에 대해서도 다시 말이 나올 테니까.
보수 언론들도 아는 거다. 대현이 정치 자금 문제를 끌어안고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린 마당이니, 더 이상 내 스캔들이 확대되면 신성이 나를 중상모략했다는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하지만 나도 바라는 바다. 내 손으로 신성을 작살낼 테니까.
여하튼 반도체 치킨게임 여파가 상당하긴 하다. 내가 출혈 경쟁을 하고 있다고 작년 무역 수지가 200억 불 흑자였는데, 그중 50%가 줄어 버렸다. 역시 순익을 내는 것이 힘들지 까먹는 것은 한순간이다.
‘환란 때 내가 정헌몽 회장에게 3년을 버티자고 했었지.’
환란의 여파가 걷히는 시기를 올해 말쯤으로 예상했는데, 내 예상과는 전혀 딴판이다. 환란의 여파는 훅 하고 걷혀 단박에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나를 향한 찬사는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돈 까먹는 것 못지않게 평판을 까먹는 것도 한순간이다.
- *
같은 시각.
신성의 진제대 상무는 귀국하자마자 회장실로 직행했다. 원래는 어디 가서 샤워라도 하고 이 회장을 만나는 게 정석이겠지만 기쁜 소식을 한시바삐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딸깍.
“오! 진 상무, 고생 많았네.”
“예, 회장님.”
이희건 회장은 사무실로 들어오는 진 상무를 발견하자마자 포옹을 했다. 그답지 않는 환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 갔던 일은 잘됐다고만 들었는데 어디 한번 자세히 말해 보게.”
“여기 계약서부터 보시지요.”
이 회장의 말에 진 상무가 탁자에 서류를 잔뜩 올려놓았다. 하나씩 살펴보던 이 회장은 깜짝 놀랐다. RIM과 버라이즌과의 계약은 당연하지만 마이크로 소프트가 끼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마이크로 소프트가 이 일에 관련이 있나?”
“생각보다 RIM의 재무 사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고, 버라이즌은 전자 결제 시스템에만 투자하겠다고 하더군요. K폰의 대항마로 RIM사의 퓨처폰을 대량으로 뿌려야 하는데 보조금 지불에 난색을 표했습니다.”
이 회장은 버라이즌의 행태가 당연하다고 여겼다. 스마트그룹이 퓨처폰에 보조금을 지원하면서 대당 100달러에 팔고 있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까운 출혈 판매였다. 수조 원의 돈을 한꺼번에 뿌리고 할부금과 통신비로 천천히 거둬들이는 전략인데, 대출 이자를 생각하면 수익이 나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스마트그룹이 무차입 경영을 한다는 소문이 있긴 한데, 표면상 그럴지는 몰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그런 경영을 할 리도 없다.
“그래서 빌 게이츠를 찾아간 것인가?”
“예. 한국의 신성전자에서 왔다고 하니 흔쾌히 면담에 응해 주더군요.”
“그 양반이 DJ와 몇 번 만났지 않나. 친한파 재벌로 봐도 되는 양반이네.”
“그것도 그렇지만, 스마트그룹의 유 회장에게 살짝 실망한 느낌이 있더군요.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우리 쪽에 투자를 결정한 것 같습니다.”
“스마트그룹에 실망을 해?”
빌 게이츠는 신성전자가 스마트 클라우드의 대항마가 맞는지 면담을 하는 와중에 몇 번이나 물었었다. 진 상무는 빌 게이츠와 2시간이나 지속되었던 대화를 곱씹어 보니 그의 속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신성은 대박 물주를 확보한 것이 분명했다.
“예. MS는 엑스 박스라는 홈 엔터테인먼트 허브를 용인밸리 업체들과 협업하고 있습니다. 나름 애플의 에그박스의 대항마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지요.”
“그게 우리 일과 무슨 상관인가?”
“MS는 애플과 사사건건 경쟁하고 있는데, 윈도우를 제외하면 이기는 구석이 없나 봅니다. 최근 퓨처폰을 필두로 VOD 시장과 전자 결제 시장이 커지고 있는데 시장 선점에 실패했다는 것이죠. 애플은 스마트그룹과 연합해 아이팟에 해당 기능을 넣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하군. VOD 사업은 스마트그룹에서 MS와 먼저 접촉했다고 하지 않았나? 청와대의 우리 사람들이 직접 포착한 정보네. 정보가 틀렸을 리 없어.”
신성은 빌 게이츠가 DJ와의 면담을 수락할 때부터 전담 끄나풀을 붙여 뒀다. 청와대에서 빌 게이츠와 논의했던 사항은 거의 다 알 수 있었다.
“예, 맞습니다. 빌 게이츠도 그리 말하더군요. 하지만 VOD의 성공을 확신했다면 유 회장이 자신에게 좀 더 확실하게 투자를 권유했어야 하고, 퓨처폰의 개발에 대해서도 사전에 말해 줬어야 했다는 겁니다. 대한민국 외평채를 110억 불이나 사 줬다고 말입니다.”
“하하하, 더 확실하게 말했어야 한다? 빌 게이츠가 아쉽긴 아쉬운가 보군.”
“미국에서 퓨처 K폰의 인기는 상상 이상입니다. 800불을 호가하고 있는데도 중고 시장에 아예 나오질 않습니다.”
“외려 그게 더 좋은 소식이군. RIM사의 블랙베리는 K폰보다 더 근사한 제품이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RIM사의 블랙베리에 채용된 쿼티(QWERTY) 키보드는 소비자들이 인터넷이나 메신저를 사용할 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가 될 겁니다. 유 회장이 제품 디자인에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겁니다.”
“치명적인 실수!”
“아무래도 OS 최적화와 보안 요소 때문에 인터넷 접근성을 일부러 떨어뜨린 것 같은데, MS가 합류했으니 우리에게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RIM사의 OS 개발에 MS가 인원과 자본을 대겠다고 합니다.”
“보안 요소까지? 그건 파이오니어가 독점하고 있잖나?”
“RIM사의 보안 기술도 대단했습니다. MS도 파이오니어의 대항마로 극찬을 했을 정도니까요.”
“오호! 이런 호재가 있나!”
진 상무가 말할 때마다 이 회장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 상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어 갔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MS가 투자를 하는 데 있어서 신성전자의 지분 3%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현재가에 프리미엄을 더해 구매하겠다고 말이지요. 거래할 대주주를 물색해 달라고 합니다.”
진 상무가 체결하고 온 계약에서 유일하게 이 회장에게 찍힐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진 상무는 이 회장으로 부터 전결권을 받아 갔지만, 이런 조항을 포함한 계약서 서명을 할 때는 솔직히 손이 덜덜 떨렸다. 신성의 주가가 하락하고 있다고 해서 대주주들이 쉽게 주식을 내놓을 게 아니니 총수 일가가 가지고 있는 지분을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협상에 나서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 계약을 하고 왔단 말인가? 신성전자는 그룹의 핵심이네.”
“이미 반도체 치킨게임에 8천억 전환 사채가 걸려 있습니다. 자칫 시일이 지체되면 은행에서 권리 행사를 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빠른 시간 내에 회수하셔야 합니다. 그게 더 리스크가 크지 않겠습니까?”
진 상무는 그룹 내에서 금기시되는 전환 사채 얘기를 꺼냈다. 이수학 비서실장이 먼저 꺼냈던 얘기니 자신이 금기를 깬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극히 맞는 얘기였다. 은행 대출 담보로 맡긴 전환 사채를 회수하지 못하면 해피랜드가 은행 채권단에 넘어갈 가능성 있잖나. 해피랜드는 그룹의 순환 출자의 목줄이니 자칫하면 신성전자가 아니라 그룹 전체가 분해될 수 있다.
“으흠, 그럼 MS가 물주 노릇을 한다는 건가?”
“물주가 아니라 연합의 대장 노릇을 하겠다는 겁니다. RIM사의 지분도 노리는 것 같더군요. 저희는 RIM사에 통신칩과 메모리를, 버라이즌에는 서버 시스템을 납품하며, MS는 OS와 보안 시스템은 물론 마케팅까지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애플에 대항해서 MS의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말이군.”
“정확한 표현이십니다.”
“우린 납품 업체가 되는 것이고?”
“예. 반도체 산업에서의 위탁 생산 전문 업체, 일명 파운드리 업체가 되는 것이죠.”
“절대로 스마트 놈들이 치킨게임을 벌일 수 없는 영역이군.”
“그래서 제가 계약했습니다.”
텅!
“잘했군! 잘했어! 지분 3%는 내가 주식 시장을 뒤집든, 대주주들에게 갹출을 시키든 내가 알아서 하겠네. 계약 완료 최종 통보하게.”
“옙.”
진 상무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일이 술술 풀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MS마저 확신하고 덤벼드는 일인데, 어째서 자신이 RIM사의 퓨처폰을 보고 불안해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가슴 한구석에 있었던 찝찝함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재벌을 넘어서 귀족으로』 10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