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적의 목줄을 움켜쥐다
“받게, 아버님이 자네에게 남기신 유품이네. 첫 공사 대금을 넣었던 지갑이라며 평생 이 지갑만 사용하셨네.”
왕회장의 장지까지 함께했다. 정헌몽 회장이 무덤 앞에서 내게 가죽 지갑을 건넸다. 맨바닥에서 시작한 사람답게 왕회장이 남긴 유품은 고작 낡은 면장갑, 구두 한 켤레, 가죽 지갑이 전부였다.
“고맙습니다. 잘 간직하겠습니다.”
“다른 사업체는 잠시 형제들에게 맡겼네. 대현전자는 전문가가 필요하니 자네가 봐 주게.”
“회사 일은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감옥에 그리 오래 계시게 보고만 있지도 않을 겁니다.”
정헌몽 회장에겐 이미 최종 판결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 형 집행을 장례식 후로 미룬 것에 불과했으며, 못해도 3년형은 받을 것이다. 왜 그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말만으로도 고맙네. 건투를 비네.”
“가 보겠습니다.”
저벅저벅.
나는 왕회장의 무덤에 다시 한 번 묵례를 하고는 언덕을 내려왔다. 기자들이 여기까지 쫓아와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다.
“유수한 회장님, 한 말씀….”
“최소한의 장소와 때는 가려야 사람 소리를 듣는 겁니다.”
“헉!”
나는 마이크를 들이미는 기자에게 딱 한마디만 했다. 내가 워낙 사나운 얼굴을 했던지 길이 훅 하고 열렸다. 이 실장이 몸으로 기자들을 막아설 필요도 없었다.
저벅저벅.
“다들 이제 회사로 돌아갑시다.”
“예.”
스마트그룹의 핵심 멤버들을 비롯해 나와 관련 있는 이들이 모두 함께했다. 돌아가서 신성을 박살 내면 될 일이다.
- *
스마트 클라우드 대강당.
지잉.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내가 단상에 오르니 마이크에 전원이 들어왔을 뿐이다. 직접 참석하지 못한 임직원들도 사내 방송으로 보고 있으리라.
“친애하는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협력 업체 여러분. 최근 스마트그룹을 두고 벌어진 일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제가 대승적 차원이라는 알량한 마음으로 적을 내버려 뒀기에 벌어진 일이며,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앞에 있는 이들은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보고도 주저리주저리 적어 둔 문장을 모두 읽은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나는 발표문을 꾸깃꾸깃 구겨서 던져 버렸다.
“배후에 신성이 있음은 누가 봐도 뻔한 일. 이 시간부로 저는 신성그룹이 파산할 때까지 제 사재를 전부 쏟아붓겠습니다. 이 전쟁은 둘 중 하나가 망하기 전까지는 그만둘 수 없기에 그룹 전체에 힘든 시간이 올 겁니다. 1년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주가는 하락하고 보너스는 드릴 수 없으며 협력 업체에도 원가 절감을 요청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신성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디 함께해 주십시오.”
척!
나는 단상 옆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짝짝짝짝짝!
“회장님, 힘내십쇼!”
“파이팅입니다!”
“신성 따위 밟아 버립시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이미 주가는 20% 이상 폭락했고, 몇몇 협력 업체들마저 세무 조사를 받았기에 나의 전쟁 선포는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회장님! 생산팀은 뭘 하면 겁니까?”
“반도체와 휴대폰을 찍어 내십시오. 수율을 올리고 원가를 낮춰 주세요. 그러시면 됩니다.”
“영업맨들은 뭘 하면 됩니까?”
“신성의 고객을 모두 만나십시오. 신성보다 품질 좋고 가격은 싸게 납품하겠다고! 치킨게임을 시작하는 겁니다.”
“협력 업체는 뭘 하면 됩니까?”
“우리에게 모든 생산품을 올인해 주세요. 신성을 배제하고 우리를 선택한다면 분명 대가가 있을 겁니다.”
“와아아아아!”
그 뒤로도 질문이 몇 개 더 나왔지만 각오를 다지는 중언부언에 불과했다.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꾹 참고 있는 개발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 실장을 비롯해 개발실 전원은 두 달간 하루에 6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양산 목표가 6월이었는데, 5월로 당기는 기적을 보여 줬다. 사실 6월조차 달성 가능한 목표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개발실장, 제품 가져오세요.”
“예.”
뚜벅뚜벅.
김 실장이 신제품이 담긴 목합을 들고 왔다.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K폰을 꺼내 들었다.
“와아아아아!”
내가 K폰을 번쩍 들어 올리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신성을 퇴출시킬 비장의 카드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기 때문이다.
기존과는 전혀 다른 휴대폰. 터치스크린만 빠져 있는 스마트폰이라고 할 수 있는 제품이다. 현재 기술로는 궁극의 폰이기에 신성은 물론, 전 세계에서 경쟁자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디자인도 기존의 K폰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흰 바탕에 파란 사선이 K폰의 트레이드마크였는데, 이번엔 검은색에 붉은 사선으로 디자인했다. 정말이지 멋지다.
이름을 퓨처-K(Future-K)라고 지었다고 했다. 미래에서 온 나조차 손뼉을 칠 만큼 멋진 이름이었다. 이 휴대폰에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을 지어 줄 순 없잖나.
짝! 짝! 짝!
“적을 압살할 무기를 만들어 준 개발실 임직원들에게 박수를!”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
나는 김 실장의 양어깨를 감싸 쥐고 힘껏 포옹했다. 다른 칭찬은 필요 없을 것이다.
“신성을 압살하면!”
나는 구호를 외쳤다.
“신성을 압살하면!”
기존 구호와는 전혀 달랐지만 임직원들은 거리낌 없었다.
“우리가 왕이다!”
“우리가 왕이다!”
“우린 부자가 될 거다!”
“우린 부자가 될 거다!”
최종 목표는 언제나 같다.
“와아아아아!”
대강당 천장이 들썩거릴 정도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 *
신성그룹 본사 대회의실.
-스마트 클라우드가 출시한 퓨처 K폰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출시한 지 일주일 만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싱가포르 등지에서 모두 매진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차주부터는 스마트 스토어뿐 아니라 미국 1위 이동 통신사 AT&T, 미국 최대 전자 제품 판매업체인 버지니아 트레이딩, 파이오니어 온라인 스토어 등을 통해서도 판매를 계획 중이라고 합니다. 최근 비자금 문제로 겪었던 곤욕을 깨끗이….
딸깍.
-퓨처 K는 3년 약정에 100달러로 판매되고 있으며 향후 석 달간 기존 K폰은 물론, 타사 휴대폰에 대해서도 보상 판매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 스마트 클라우드 광고였습니다.
퍼억! 픽!
이희건 회장이 리모컨을 던져 TV를 꺼 버렸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계와 언론에 줄을 대어 스마트그룹에 호의적인 뉴스가 나가지 못하도록 차단했는데, 모든 채널에서 광고를 빙자한 뉴스를 틀어 대고 있었다. 일주일마다 달라지는 시리즈 광고였기에 시청자들의 호응도 대단했다. 과장 광고로 징계를 내릴 수도 없었다. 모든 게 사실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놈들이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수학, 자네 입으로 단언하지 않았나. 놈의 유동 자금은 바닥이라고.”
“사실입니다. 놈은 미국에 100억 불, 일본에 수십억 불, 중국에 수억 불을 투자했고 심지어 검찰에서 수조 원의 추징금을 부과하고 모든 부동산까지 동결시켰습니다. 국내 은행에도 돈을 빌려 주지 못하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DJ가 직접 나서도 도와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 모양이야! 저게 돈이 없는 꼴이야! 어! 대현에서 돈을 댔을 수도 있잖아!”
“대현도 돈이 말랐습니다. 중국에 자동차 공장 설립, 철도 사업 컨소시움, 심지어 미국에도 자동차 공장을 세운다고 유동자금이 씨가 말랐습니다. 돈이 하도 없어서 추징금을 최대치로 박박 긁어도 수천억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수학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지도 못했다. 이 회장도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몇 번은 확인한 사항이었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유동 자금이 수백억 달러씩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검찰에 물을 부어. 더 물을 부어서, 추징금을 최대치로 올려.”
“검찰은 현재 법제로는 2조 정도가 최대치라고….”
“더 올리라고! 놈을 더 밀어붙여야 한단 말이야. 저놈을 이번에 못 죽이면 우리가 죽어!”
“헛!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이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 하는 거야! 당신 멍청인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이 회장의 입이 이렇게 거칠었나 싶을 정도로 회의장은 난리 법석이었다. 아무리 충성심을 보장하는 임원들이 모여 있는 자리지만 말은 새어 나기가 마련이다. 이렇게 말을 거칠게 하는 것 자체가 신성그룹 전체에 위기가 닥쳤다는 의미였다.
‘정말 큰 위기야. 휴대폰뿐 아니라 반도체도 미친 듯이 추락하고 있어. 왜 유수한 회장을 건드려 가지고…. 건드려도 적당히 견제해야지 하필 왕회장이란 역린을 건드린 거야?’
상석에 앉아 있던 진제대 상무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뭐, 왕회장을 건드린 게 아니라 왕회장이 유 회장을 각성시킨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엄연히 추측일 뿐이었다. 여하튼 자신을 비롯해 모든 임원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진 상무, 반도체! 반도체는 어찌 되어 가고 있나?”
“최악이라고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플래시 메모리 라이선스 계약을 위약금까지 물면서 해지했으며, 모든 고객사들에게 저희 제품을 밀어내는 조건으로 가격을 다운시킨 것 같습니다. 6월은 4분기 고정 거래가를 결정하는 시기인데, 여태 고객사들이 재계약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뭐라고? 재계약이 없어? 고객들에게 제의해! 우리가 더 싸게 주겠다고! 우리가 스마트 놈들보다 더 싸게 주겠다고 말이야! 아니면 오픈마켓에 풀어 버리면 되잖나!”
“이미 오픈마켓에서 1G당 2달러가 무너졌습니다.”
“2달러? 커억!”
이희건 회장은 저도 모르게 신음성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이 회장은 반도체 원가를 대충 계산할 수 있다. 자신이 FAB를 지을 때마다 원가 분석표를 보며 직접 서명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공장을 100% 돌려 원가를 최대한 낮췄다고 하더라고 2달러 50센트는 되어야 한다. 지금 가격으로는 팔 때마다 25%를 밑지는 셈이다.
“스마트 클라우드뿐 아니라 대현까지 같은 가격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배후에 스마트 클라우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덤핑이야! 덤핑이라고! 타사와 연합해서 대응해! 마이크론이며 NEC도 타격받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어?”
“퓨처 K폰에 마이크론과 NEC 반도체를 채용해 주는 데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공공연히 신성의 점유율만 갈라 먹자는 식으로 타사를 설득한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서로 간엔 시장 점유율을 탐내지 않겠다는 물밑 계약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스마트 클라우드가 전 세계 반도체 업체를 연합해 신성을 공격하는 식이다. 진 상무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신성의 반도체 사업은 끝이다.
“중국은 아니잖나. 국가가 시장을 틀어쥐고 있다고. 상하이파는 우리 편 아닌가?”
“이미 전자 결제로 반도체 시장이 넘어갔고, 어찌 된 영문인지 전자 결제 업체 전부가 신성 반도체를 배제하고 있습니다.”
쾅!
“대체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해! 이건 불법이야! 국부 유출이라고! 한국 기업끼리 상도의라는 게 있잖아! 정부는 대체 뭘 하고! 우리 돈 처먹은 정치인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진 상무는 아무 말 없이 이수학 비서실장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부와 각을 세운 건 비서실이 아니냐는 말을 대신한 것이었다. 정치꾼들이야 국내 문제야 어찌어찌 한다고 해도 국제 무역에 어떻게 나서나? 게다가 스마트그룹을 때리다 대현의 왕회장까지 저세상으로 가 버렸기에 국민 정서가 훅 하니 돌아서 버려, 더 이상 여론 몰이를 하기도 힘들다.
“돈이… 돈이 더 필요합니다.”
“으익! 돈! 돈이 없어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이냐!”
“8천억 정도만 있으면 S폰을 K폰의 대항마로 만들고 반도체 치킨게임도 해 볼 만합니다. 더 늦기 전에 8천억을 시장에 뿌린다면 불씨를 살려 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않을까 합니다? 확신도 못 하는 일에 수천억이나 쓰겠단 말인가?”
“회장님, 저는 지금 제 목을 걸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수밖에 없습니다. 치킨게임은 한번 밀리면 나락입니다. 협력 업체 납품가도 20% 이상 깎겠습니다.”
“으으으으.”
이 회장은 분을 참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점차 차가워졌다. 이수학 비서실장이 5천억도, 1조도 아닌 8천억을 말한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해피랜드 전환사채가 딱 8천억이었다. 그룹 승계를 위해 아끼고 아껴 뒀던 비자금이었다. 그걸 쓰자는 걸 보면 정말이지 그룹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회장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반도체와 휴대폰이 무너지면 신성의 미래는 없습니다.”
“말은 바로 해야지. 스마트그룹 때문에 신성의 미래가 없는 거겠지.”
“예, 그렇습니다.”
“사용해. 8천억 사용하라고!”
“예.”
이수학 비서실장은 달랑달랑하던 목을 겨우 붙였다. 진 상무를 비롯한 임원들은 아무 말도 보탤 수가 없었다.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 *
스마트 클라우드 대회의실.
“사재로 78억 불을 지원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사재를 털어도?”
나는 보는 눈이 많아 재훈이에게 존댓말을 썼다. 80억 불 중에 78억 불을 내놓겠다고 한다. 2억 불만 있어도 자자손손 돈 때문에 서러울 일 없다는 결연한 눈빛을 하고 있다.
“친구로서 당연합니다. 게다가 친구분께선 이제 파이오니어 오너인데 망하시면 안 되죠.”
“고맙습니다.”
나는 재훈이에게서 눈을 돌렸다. 오랜만에 웃음이 나오는 말이었다.
“LK에서도 돕겠습니다. 돈은 어렵고, 디스플레이 가격을 20% 깎겠습니다. 신성엔 가격 할인 없고, 물량도 소송당하지 않을 만큼만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LK 구회장이 사람을 보내왔다. 디스플레이 김원지 사장이라고 했다. 나는 충성 맹세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소프트뱅크는 50억 불을 지원하겠습니다. 퓨처-K폰의 보상 판매금 중 50%도 소프트뱅크에서 감당하겠습니다.”
“아직 어려울 텐데 무리하시는 것 아닌지요?”
“아닙니다. 외려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정의 회장도 직접 회의에 참석해 충성 맹세를 했다.
“형님은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네, 아우. 내 현금 지원은 어렵지만, 신성 반도체만큼은 확실히 시장에서 배제시키지.
내가 스피커폰으로 말을 하자 중국어가 튀어나온다. 이 실장이 옆에서 열심히 통역하는 말이 실시간으로 따라 나왔다. 나와 시진핑은 언젠가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시중쉰의 병석을 며칠 동안 지켰더니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고맙습니다.”
-아우를 괴롭히는 자는 나에게도 적이야. 당연한 일이네.
나는 스피커폰에서 멀어지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충성 맹세는 필요 없었지만 다른 이들이 들어야만 했다. 원래라면 지금쯤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신혼여행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버지니아 그룹은 미국 반도체 회사와 고객들을 책임지겠습니다. 관세니 덤핑이니 하는 불편한 말은 나오지 않을 거예요. 유동 자금은 110억 불을 지원하겠어요.”
“좋습니다.”
미국의 100억 불 투자금 중 49억 불이 회수되면 내 유동 자금은 120억 불 정도다. 케이는 일부러 내가 가진 유동 자금보다 조금 작은 규모의 지원금을 말한 것이다. 전쟁의 지휘자는 나임을 명확히 한 셈이다.
“회장님, 각오 한마디 하셔야죠.”
케이답지 않게 딱딱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왕회장의 영결식 이후로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신성이 무너질 때까지 공격은 멈추지 않습니다.”
“신성이 무너질 때까지!”
“무너질 때까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는 치킨게임은 그렇게 무르익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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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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