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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아버지의 마음 (81/104)

제7장 아버지의 마음

미국 버지니아.

나는 DJ의 외국 순방에 따라나섰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한국은 난리 법석이 나기 시작했다. 왕회장이 일주일만이라도 외국에 나가 있으라고 해서 쫓기듯 나왔는데, 도통 일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DJ조차 나에게 검찰 수사 결과를 보고 대응하자는 원론적인 말만 했을 뿐이다. 신성의 중상모략, 보수 언론, 환란에 망한 대기업들, 영국 환투기 이력, DJ 아들들의 비리, 대현의 대선 자금 등등 온갖 것들이 뒤섞여 DJ조차 감당하기 힘든 사태였다. 신성은 이참에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끊임없이 여론 몰이를 해 댔다.

결국 나는 DJ의 우산에서 벗어나 귀국해서 정면 돌파 하려고 했는데, 케이는 로메티 여사를 내게 보내 귀국하지 못하도록 종용했다. 자칫 내가 정면 돌파를 하다 케이가 증인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리면 버지니아 로직스가 소송을 진행할 수 없게 된다고 말이다.

「환란 피해 기업들 스마트그룹에 대규모 손해배상 소송」

「중소기업 연합 스마트그룹 지지 의사 밝혀. 보수 언론사를 검찰에 고발」

「대현그룹, 대선 자금 지원 시인. 세 차례에 걸쳐 100억 상당의 규모」

「스마트그룹의 비선 실세는 대현그룹? 검찰은 묵묵부답」

「비자금 조성 및 외환 관리법 위반으로 대현그룹 총수 구속은 불가피할 듯」

「스마트그룹의 추징액 수조에 육박할 듯. 불법 취득 부동산은 국고에 환원될 것인가?」

「대현그룹 추징액 7,800억으로 확정. 항소 포기.」

나는 예비 장모님의 저택에서 한국 신문만 읽고 있을 뿐이다. 수많은 기사 중에 나에게 호의적인 기사는 딱 하나. 내가 직접적으로 긴급 수혈을 했던 중소기업들이 나를 두둔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든 이들이 내 전화를 피하고 있었다. 간혹 케이와 윌슨이 전화로 상황을 알려 주지만 그들마저 소송 진행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수한, 신문 그만 읽어요. 마음만 상할 뿐이에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로메티가 나에게 읊조렸다. 정원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호미를 든 손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닙니다. 신문이라도 봐야 어찌 돌아가는지 알죠. 당장이라도 귀국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수한, 내 딸을 믿어요. 그 아이의 심장은 아빠를 닮아서 강철이에요. 잘 처리할 거예요.”

“로메티 님께서 보시기에도 이 방법이 맞는 것 같습니까? 신성의 공격이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째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나는 매국노 확정이고, 나를 도왔던 대현은 파산 직전까지 몰릴 겁니다.”

“큰일이 생길 때 기업 총수가 외유에 나서는 건 흔한 일이에요. 누가 옳은지 틀린지 중요하지 않아요. 어떻게 연착륙이 가능한지 작전이 세워져야 귀국을 하죠. 날 봐요. 파라곤 상임이사직을 내놓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명예가 회복되었어요. IT 버블이 증명되고서야 말이에요.”

“그 일과 제 일은 상황이 다릅니다만.”

로메티와 나는 만날 때마다 이와 비슷한 대화를 했다. 오늘은 끝장을 봐야겠다. 벌써 이곳에 머문 지도 한 달 가까이 된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똑같은 일이에요. 누군가 돈을 잃으면 사달이 나기 마련이에요.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리고 싶은 게 사람 마음입니다.”

“저는 기업을 사냥한 게 아니고 회생을 시켰습니다. 파산시킨 회사의 직원들도 대부분 새 일자리를 찾았고요. 자그마치 350억 불 넘는 돈을 썼습니다. 그 돈조차 대부분 해외 수출로 벌어들인 돈입니다.”

“경영권을 뺏긴 이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결과적으로 회사는 살아났고, 부동산은 남았고, 그 모든 게 원래 자신들의 것이라 여길 뿐이에요. 만약 수한이 소송에서 무죄를 증명하겠다고 하면 적이 짜 놓은 함정에 걸려드는 꼴이에요. 결국 수한은 세무 조사를 받게 될 테고, 회사는 정상적으로 경영을 할 수 없게 되고, 자칫하면 환란과 전혀 관계없는 AOL 공매까지 드러날 수 있어요. 지금은 참아야 하는 시간이에요.”

“…알겠습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죠. 그런데 어째서 저에게 이리 정보를 차단하는 겁니까? 케이를 믿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상하군요.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

그동안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까지 나가길 몇 번이었다. 그때마다 로메티는 경호원들을 보내 나를 데려왔고, 언젠가부터는 아예 공항에 경호원들을 상주시킨 것 같다.

파라곤은 나에게 있어 강력한 아군.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솔직히 정도를 벗어났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한국에서 일이 잘 안되고 있는 거다.

“일이 잘 안되고 있는 거죠?”

“아니에요.”

“제가 가야 합니다. 아니, 외유를 택한 것부터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겁니다.”

“그것도 아니에요. 모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모두라뇨? 누구를 지칭하는 겁니까?”

“수한 씨를 믿는 사람들.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로메티가 자꾸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만 한다. 이렇게 얼버무리는 게 이상하다. 그리고 표정 관리를 힘들어하는 게 느껴진다.

“로메티 님, 케이와 저는 부부가 될 사이입니다. 부부끼린 그 어떤 비밀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을 겁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

“로메티 님!”

“아, 알았어요. 하아… 이건 대현에서 신신당부를 한 것인데….”

“대현?”

로메티의 입에서 대현이라는 생뚱맞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호미를 내려놓고 장갑을 벗은 뒤 앞장서기 시작했다.

딸깍.

“다들 자리를 비워 줘요.”

“예.”

모니터로 잔뜩 채워진 방에 있던 이들이 로메티의 말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로메티는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다루기 시작했다. 어이없게도 VOD 파일을 뒤지더니 그중 하나를 플레이시켰다.

“헉!”

동영상엔 왕회장이 담겨 있었다. 법정에서 촬영된 듯 화면이 어두웠지만 분명히 왕회장이었다. 단 한 달 만에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늙어 버린 모습이었다. 거동조차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어… 제가… 모든 것은 제가 한 일입니다. 대선 자금을 전달한 것도 제가 직접 했고, 환란 때 컨소시움으로 일을 추진하도록 시킨 것도 제 지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현전자가 컨소시움 사무실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유수한 회장이 강제로 기업을 파산시키고 경제를 파탄 낸 것을 인정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유수한 회장은 기업의 회생과 환투기 세력을… 막는 업무를 했고, 기업사냥은 제 지시에 따라 내 아들이 했습니다. 그가 불법적인 일에 관련되지는… 으으, 검사님도 한때는 유수한 회장을 구국의 영웅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무슨 당치 않은 소립니까! 구국의 영웅이라니요. 외화 밀반출로 국부를 유출시키려는 범죄자입니다. 대체 어떤 밀거래가 있기에 그런 거금이 오갈 수 있었던 겁니까?

-밀거래라니요. 유수한 회장은 저와 달리 정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수출로… 돈을 버는 거지요. 밀거래라니 당치 않습니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수조 원에 달하는 비자금이 있습니다. 밀거래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거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자금의 출처가 어딥니까? 기업사냥으로 남긴 돈 아닙니까? 불법 자금은 모두 국고에 환원해야 합니다.

-수한이… 수한이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탐욕스러운 기업가는 나지요. 그 녀석은 집 한 채, 차 한 대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추징금이 있다면 대현이… 대현이… 쿨럭쿨럭. 항소도 포기… 쿨럭….

왕회장의 몸이 무너지자 동영상을 찍고 있던 사람이 카메라를 내던지고 달려가는 듯했다. 공격하고 있던 검사마저 왕회장에게 달려갔고 판사가 정회를 선언하는 소리가 들렸다.

픽!

“이게 현재 상황이에요.”

“이, 이거 언제… 언제 찍은 겁니까?”

“어제예요. 휴우.”

“어찌 이럴 수가…. 케이가 이걸 숨기고 있었단 말입니까?”

“케이가 동영상을 보냈어요. 수한이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고… 외려 대현 쪽에서 수한에게 알리지 말라고 연락이 왔고요.”

소송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신성에선 이수학이 자폭하는 셈이라면 왕회장이 폭탄을 모두 끌어안고 동반 자살하는 식이다. 아주 끝까지 대현답다.

“귀국합니다.”

“수한, 이대로 끝낼 수 있어요. 반격은 그다음에….”

“이 화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아군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수한, 대현이 원한 방식이에요. 이대로 덮고….”

“다시 한 번 그런 소리 하시면 파라곤도 내 적입니다.”

“헉! 수한!”

나는 즉시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문 앞에서 척 하니 사내들이 나를 막아선다.

“뭐하는 짓이야! 비켜!”

“…….”

사내들도 움찔거린다. 내가 헤치고 나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로메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공항 갈 필요 없어요. 제이드, 미스터 유를 한국까지 모셔다 드리세요.”

“예, 알겠습니다.”

로메티 여사도 내가 동영상을 보고 나면 무슨 수를 쓰든 한국으로 갈 줄 알았나 보다. 불과 30분 만에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하늘에서 보니 로메티의 정원 한쪽 귀퉁이에 방금 떠나온 활주로가 가느다랗게 내려다보였다.

    • *

부르릉. 우르르….

“온다! 유 회장이다!”

공항을 통과하며 내가 입국한 사실이 알려졌는지 왕회장의 청운동 자택 앞에는 기자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었다. 전용기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공항을 빠져나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텅! 텅! 텅!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비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신 겁니까?”

“항소를 포기하셨는데, 직접 지시하신 건가요?”

기자들이 내 차창을 마구 두들기며 마이크를 들이민다.

“회장님, 기자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뒷문으로….”

“아뇨, 그냥 밀고 갑시다.”

“예.”

마중 나온 사람은 이 실장 혼자였다. 기자들 사이로 차를 잘도 들이밀어 결국 정문을 통과했다. 기자들도 자택까지 밀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딸깍.

“수한 씨!”

“유 회장.”

“들어가시죠.”

케이와 정헌몽 회장까지 같이 있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나는 소독약 냄새를 따라 걸어가 보았다. 왕회장이 나를 알아봤는지 ‘으으으….’ 하고 신음하며 몸을 움찔거렸다.

“왕회장님.”

“수한이, 왔나….”

왕회장의 목소리엔 죽어 가는 사람 특유의 가래 끓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내 나이쯤 되면 몇 번이고 누군가의 임종을 지켜보게 된다. 왕회장의 목숨은 꺼져 가고 있었다. 워낙 강골이었기에 산소호흡기를 달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자고 직접 나서셨어요. 몸부터 살피셨어야죠.”

“아니다. 이 정도 판이면 늙은이 하나는 쓰러져야 해결되는 기라. 니가 귀국할 빌미도 되고….”

“뭔 빌미를 찾고 그러세요. 제가 뭔 잘못을 했다고.”

왕회장이 쓰러진 건 연극이 아니다. 왕회장의 원래 수명은 2001년 3월까지였다. 나 때문에 월드컵은 보고 가겠거니 했건만, 나 때문에 1년이나 앞서 쓰러져 버렸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다, 이눔아. 니는 티끌 하나 묻으면 안 돼. 귀족 될라므 이리해야지… 쿨럭….”

“저한테 왜 이러세요, 왕회장님.”

“니…를 보고 있으므… 내 아들이… 내 큰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 같구마. 눈빛이… 처음 볼 때부터 그랬다….”

“하아.”

사고로 잃은 큰아들을 나에게 투영했나 보다. 왕회장이 내 눈빛을 제대로 보긴 했다. 나는 정말로 다시 살아났으니까.

“다들… 다들 비키라. 내 이누마랑 따로 할 말이….”

“아버님, 그냥 말씀하셔도 됩니다. 유 회장은 저희 형제와 같습니다.”

정헌몽 회장이 왕회장의 손을 붙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옆에서 케이와 정씨 형제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정도다. 이제 누구나 임종 직전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내 소원이다… 어서….”

“아이고.”

정헌몽 회장이 왕회장의 팔을 내 손에 얹어 주고는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을 닫아 버리곤 밖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것 같았다.

“이리… 이리 가까이….”

왕회장이 나를 끌어당기는 몸짓을 했기에 나는 콧김을 닿을 정도로 가까이 왕회장에게 다가갔다. 그 정도가 원하던 거리였는지 희미하게 웃는다.

“말씀하십시오.”

“니 누꼬?”

“누구긴요? 유수한이죠.”

“니 미래에서 왔나? 아니면 내 아들이 환생한 기가?”

“흐흑, 둘 다입니다.”

왕회장의 유언과 같은 말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 가시면 되지.

“대현은 미래에 우찌 되누?”

“반도체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고, 자동차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듭니다.”

“신성은?”

“세계 1등 하는 사업이 수두룩합니다.”

“니가 대신 할기제?”

“예, 그리하겠습니다.”

“헌몽이하고 같이 가므 대현도 세계 1등 하겠네.”

“예, 당연하지요.”

“대한민국은 우찌 되누.”

“20년만 지나면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선진국이 됩니다.”

“진짜가? …좋은 세상 오는구마.”

“예… 좋은 세상입니다.”

“20년 뒤에는 우찌 되누? 통일은 되나? 일본 제끼나?”

“30년 뒤에 남북통일이 되고 대한민국은 일본을 제치고 G7에 당당히 입성합니다. 으흐흑.”

나는 왕회장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줬다. 까짓것 30년이면 남북통일은 몰라도 일본 정도는 내가 제쳐 버리면 그뿐이다.

“니 덕분에 좋은 꿈 꾸겠네. 쿨럭쿨럭… 커어억!”

“왕회장님!”

나는 얼른 목에 막힌 가래를 흡입기로 뽑아냈다. 이미 임종 직전, 이 정도의 쇼크에도 왕회장의 숨이 끊어질 수 있다.

벌컥!

“아버님!”

정헌몽 회장을 비롯해 집안사람들이 밀어닥쳤다. 어찌 된 영문인지 왕회장이 팔을 번쩍 들었다. 마지막 불꽃이었다.

“헌몽아.”

정 회장이 손을 덥석 붙잡자 왕회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꺼지기 전의 마지막 불꽃인 듯 또렷한 목소리였다.

“예, 아버님.”

“수한이하고 같이 가라. 너희는 형제다.”

툭!

“예… 예, 아버님. 으허엉.”

“편히… 편히… 꿈꾸세요, 아버님. 흐으윽.”

나는 내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슬펐다. 아니, 분노가 치솟았다.

이런 사태를 만든 놈들, 한 놈도 남김없이 다 불태워 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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