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영웅에서 매국노로
2000년 3월.
신성그룹 회장실의 분위기는 폭발 직전이었다.
“다시 말해 봐, 황기우 사장.”
“면목 없습니다.”
“다시 말해 보라고!”
“예, 중국 전자 상거래 업체에 대한 지분 투자에 외국 기업은 국가별로 한 곳만 허락된다고 합니다. 이에 알리바바는 스마트 클라우드가, 텐센트는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1순위 계약자로 선정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 두 회사는 모두 유수한 그놈 거라는 거 모르나? 당신 말로 알리바바와 텐센트가 투자할 만한 회사라고 하지 않았나? 두 회사를 제외하고 다른 업체는 다 쓰레기라고 말이야!”
이 회장은 환장할 것 같았다. 두 회사 중 어느 것 하나는 지분을 가져와야 순조롭게 중국에 진출할 수 있는데 말이다.
한국에서 VOD가 팔리는 것을 보면 중국의 전자 상거래 시장 규모는 못해도 수십조는 되어 보였다. 더욱이 중국은 신용카드도 대중화되지 못한 곳. 전자 상거래는 중국에선 대박이라고 신성의 금융 전문가들도 한결같은 말을 했다.
“예,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둘 중 하나도 공략을 못 했어! 어!”
이 회장이 이렇게 반말로 상대에게 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황기우 사장은 말을 꺼내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자본에 밀렸습니다. 스마트그룹에서 우리가 제시한 지분 매집 비용에다 무조건 프리미엄으로 20%를 더 지불하겠다고 나왔습니다. 외려 신성이 계속 가격을 올리자 다른 입찰자들이 제풀에 떨어져 나가 버린 격입니다.”
“허, 신성이 청소부 역할까지 했다? 그 말인가?”
“그리되었습니다. 계약을 아예 파투 놓으려고 지분 1%당 천만 불을 불렀는데도 물러서질 않았습니다.”
“허….”
이 회장은 1,000만 불이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전망이 밝은 회사라곤 하지만 1%당 1,000만 불, 아니 프리미엄 20%까지 포함하면 1,200만 불을 지불했다는 말이다. 황기우 사장이 그런 계약을 했다면 당장 해고하고 계약을 무산시켰으리라. 결국 자신이 직접 나섰다고 해도 성사될 일이 아니었다.
“유수한 그놈은 대체 몇 프로나 투자한다고 하던가?”
“중국 정부가 최대 15%로 정했습니다. 아마도 최대치까지 질렀을 것 같습니다.”
“허어….”
“투자액만 1억 8천만 불이나 됩니다. 한화로는 2천억이 넘는 돈입니다.”
“유수한 그놈 미친 거 아닌가? 일개 벤처에 그런 돈을 투자하다니.”
“스마트 클라우드가 투자한다는 소리에 국제 신용평가사에서도 알리바바와 텐센트의 가치를 상향 조정했다고 합니다. 그걸 노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지금 남의 회사 역성드는 건가?”
“흡! 아닙니다, 회장님.”
황기우 사장은 급히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뭔 말을 하든 자신은 패장이었다.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미끄러지나 싶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결국 이 회장은 임원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자를 것이 분명했다.
똑. 똑.
“회장님.”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문밖으로 심각한 분위기가 흘러 나가고 있을 텐데 어떤 간 큰 사람이 방해를 하나 싶었다.
“누구야?”
“저 이수학입니다.”
“무슨 일이야?”
“들어가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딸깍.
이수학 비서실장이 들어오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회장실로 들어왔다. 황기우 사장은 오늘따라 그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분위기를 깬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이수학 비서실장은 최근 벌어지는 모든 일에서 자신과 각을 세우고 있었는데 말이다.
“뭔데 그러나?”
“회장님, 지금 TV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TV?”
“유수한 회장이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뭐라?”
픽!
이수학은 리모컨까지 들고 들어와서 바로 TV를 켰다. 이 회장의 심기가 불편함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스마트그룹은 국민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해외 투자에 성공했음을 발표합니다. 미국에 100억 불 규모의 반도체 합작 회사를 세우기로 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IT 관련 기업과 합작하여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설 예정입니다. 국내에서 정부의 벤처 지원 정책에 합류해 휴대폰, 서버, 인터넷 부품, 전자 상거래 등등의 해외 진출을 도울 것이며…(중략)…이는 비단 스마트그룹뿐 아니라 대현그룹도 자동차 북미 공장을 설립해 공격적인 시장 진출을 노릴 것이며….
쾅! 쾅! 쾅!
“꺼! 끄라고!”
TV를 보던 이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를 두들겨 댔다.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용인에 회사 하나 세우고,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온 녀석이 초대형 그룹의 회장이 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픽!
“죄송합니다.”
이수학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였지만 전혀 죄송한 말투가 아니었다. 이 회장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탁자를 부술 듯 쳐 댈 뿐이었다.
“대체 뭐하는 짓이야! 저놈이 승승장구할 때 당신들은 뭔 일을 하고 있었던 거야! 뭔 짓을 하고 있었던 거냐고!”
이 회장은 탁자 위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면 당장 집어 던졌을 것이다.
“회장님, 이건 기회입니다.”
“뭔 개소린가? 나보고 지금 속 터져 죽으라고 하는 소린가! 어! 커억!”
“어엇, 회장님.”
털썩.
이 회장은 욕지거리와 함께 뒷목을 쥐고 풀썩 소파에 쓰러져 버렸다. 숨을 휙휙 몰아쉬며 이수학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까지 했다. 이수학 비서실장은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기에 황급히 인터폰의 비상벨을 누르고, 이 회장의 입에 약을 흘려 넣고는 몸을 마구 주물러 댔다. 그럼에도 말을 멈추질 않았다.
“이건 분명 기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놈의 돈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외환위기로 국내 기업을 사냥하고 부동산을 강탈해서 나온 돈 아닙니까? 그걸 투자를 빌미로 해외로 빼돌리는 겁니다.”
“으으….”
이 회장의 몸이 움찔움찔했다. 혈압이 올라 몸은 빳빳하게 굳었지만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 이수학의 말은 거짓말이었지만 일반 국민들에겐 그리 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론만 조작하면 됩니다. 대체 그런 거금이 어디서 나왔나? 어떤 불법이 있었나? 하고 묻기만 하면 되지요. 그럼 정치꾼들이 알아서 스마트그룹을 압박할 테고, 유수한 그놈은 뇌물을 토해 내든 세금을 토해 내든 뭐든 토해 내야 할 겁니다.”
“크으으… 역시 비서실장….”
이 회장은 그제야 몸이 조금씩 풀리는지 팔을 움찔움찔했다. 이수학은 몸을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이 회장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적이 죽을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말라는 이 회장님의 가르침 덕분이지요.”
“흐흐흐. 시작해… 어서 시작해.”
“예.”
다다다다다.
바로 아래층에 상주하고 있던 주치의와 간호사가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이 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뭘 상상하는지 입가에 웃음기마저 어렸다.
이수학 비서실장은 이 회장에게 깍듯하게 묵례를 하고는 회장실 밖으로 나섰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황기우 사장에게 이수학은 손끝으로 목을 두어 번 그어 보이며 자리를 떴다. ‘감히 내 자리를 넘보다니!’ 하는 표정과 함께 말이다.
- *
2000년 3월 중순.
“어서 와요, 윌슨.”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첫 번째로 맡은 일은 제대로 처리한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만족합니다. 공장 부지가 22만평이라고 했나요?”
“예. 100억 불 투자 중 지분 49%를 투자자들에게 넘기고 왔습니다. 즉, 49억 불이 6개월 뒤에 고스란히 스마트그룹에 회수됩니다.”
“아, 일이 드디어 마무리되는군요.”
나는 그룹 비서실장으로 윌슨을 임명하고, 이 실장은 홍콩 법인장으로 발령을 냈다. 이 실장도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의 중요성을 알기에 인사 발령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윌슨, 수한 씨에게 최종 계산은 해 줘야죠.”
“아, 그렇군요.”
케이가 옆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꺼내자 윌슨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007가방을 열고 내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서류에는 AOL 공매도, 반도체 공장 100억 불 투자, 파이오니어 지분 매입, 소프트뱅크 지분 매입, 중국 투자, 한국 시중은행에 대한 부동산 담보 대출 상환 등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원래 재산이 늘어나고 회사를 경영하다 보면 자기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시세 변동에 자산끼리 서로 보증을 서는 경우가 있기에 케이조차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다. 그런데 윌슨이 들어오니 단박에 내 재산이 숫자로 정리된다.
내 재산을 숫자로 확인하니 감회가 새롭다. 스마트그룹의 법인 자산은 600억 불, 내 개인 자산은 280억 불에 달한다고 적혀 있었다. 법인 자산은 당연히 공장과 부동산이 대부분이고 경영권을 담보하는 주식 지분과 20억 불가량의 현금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내 재산은 대부분이 주식이었고, 현금은 고작 45억 불에 불과했다.
“현금이 생각보다 적군요.”
“그만큼 경영을 효율적으로 하셨다는 의미겠죠. 오히려 이렇게 큰 회사가 무차입 경영이라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자산의 30% 정도는 차입해 두시는 게 유동 자금 확보 차원에서 오히려 안전합니다.”
금융 전문가의 시각은 은행 빚조차 자산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여하튼 현금이 생각보다 작은 것은 중국에 투자금이 많이 들어간 탓이 크다.
알리바바와 텐센트 지분 투자에만 1.8억 불이 들어갔고 물밑 거래로 전환 사채까지 사는 바람에 5억 불이 추가로 투자되었다. 원래는 수천만 불이면 충분할 일이었는데, 신성이 끼어드는 바람에 10배나 비싸게 투자한 셈이 되어 버렸다. 10년 뒤에 수백 배로 부풀려 먹을 수 있는 걸 수십 배 장사밖에 못 하게 된 거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난다.
이희건 회장이 완패를 당한 뒤 뒷목을 잡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중국에 반도체를 수출할 때도 가격 경쟁을 해서 금전적 피해를 좀 더 입혀야 할 것이다. 그래야 다시는 섣불리 덤비지 못할 거 아닌가. 대승적 차원에서 중국 수출이라는 파이를 나누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하하, 금융 수학은 나중에 알려 주시고, 일단 여독도 풀 겸 이삼일은 쉬세요.”
“제가 공항에서 바로 유 회장님을 뵈러 온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고할 것이 또 있나요?”
“보고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한국 기자들이 월가에서 취재를 하던데 말입니다.”
“취재를 한다고요? 뭘요?”
“한국의 외환위기 사태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하던데 너무 전문적인 걸 물어보고 다니더라고요. 환투기 세력과 직접 인터뷰까지 하는 것 같던데, 혹시 들은 내용이 있으신가요?”
“으흠?”
“호호호, 한국 사람들이 좀 드라마틱한 걸 좋아해요. 수한 씨가 환란을 극복한 영웅이라는 건 다 아는 내용이니 좀 더 전문적인 걸 찾나 보죠. 수한 씨가 인터뷰를 죄다 거절하니까 미국까지 갔나 보네.”
“아, 그런가요? 하하하.”
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지만, 나는 왠지 불안해졌다. 환란을 극복한 직후 다큐멘터리 요청이 줄을 잇긴 했지만 정중히 거절했고, 기자들이나 PD들도 내 의사를 존중해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그게 벌써 2년 전의 일인데 말이다.
- *
며칠 뒤.
「환란의 이면, 영웅인가? 협잡꾼인가?」
「환란의 이면, 스마트 클라우드를 재조명한다.」
「환란의 이면,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
불안한 예감은 어째서 꼭 현실이 되는 걸까? 고려일보, 동하일보, 중도일보의 공격이, 아니 신성이 주도하는 여론 조작이 나를 타깃으로 삼기 시작했다. 어이없고 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젯밤 고려일보 산하의 케이블 방송에서 ‘환란의 이면’이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는데 아침에 배달된 신문에는 대문짝만 하게 기사들이 실려 있다.
으드득.
“아무리 건드릴 게 없어도 이걸 건드려… 개새끼들!”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삐리릭. 삐리릭.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누굽니까?”
-수한 씨, 걱정 마요! 미친놈들은 깡그리 처넣어 버려야 해요! 이건 명예훼손 정도가 아니에요. 수한 씨를 죽이려는 악의적인 중상모략이에요. 소송팀 바로 구성할게요.
케이가 전화기를 씹어 먹을 듯 흥분해서 내게 전화를 했다.
“뉴스 조금만 더 보고 데리러 갈게.”
-수한 씨, 이건 명백히 신성 놈들이 한 짓이 분명해요. 뉴스 볼 필요도 없어요.
“알아. 확인만 할 거야.”
툭.
나는 휴대폰을 아예 꺼 버렸다. 지금쯤 다른 신문 기자들은 신성그룹에 달려갔을 테고, 이수학이든 누구든 내게 최강의 공격 카드를 내놓을 터. 그걸 보고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 뉴스 전문 채널에서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내 얘기만 하고 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이 실장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드디어 TV 화면에선 출근하는 이수학 비서실장에게 마이크를 들이미는 기자들의 모습이 생방송으로 방영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인터뷰를 거절하는 척하다 결국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 여론 조작을 꾀할 것이다. 그러면 나와 신성, 둘 중 하나는 죽어야 싸움이 끝난다. 모든 것을 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적을 확실히 확인해야 한다.
-이수학 비서실장님, 어젯밤 ‘환란의 이면’이란 다큐멘터리를 보셨습니까? 불법 환투기의 배경에 스마트그룹의 유수한 회장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는데, 신성그룹에서 제보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말씀드릴 사항이 없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요. 유수한 회장은 구국의 영웅입니까, 아니면 환투기 세력의 앞잡이입니까?
-휴우, 어제 다큐멘터리를 보셨으면서 그러십니까? 구국의 영웅이라니요.
-한 말씀만 더 해 주십시오.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더 말씀드릴 게 뭐가 있습니까? 결국 환란으로 돈을 번 사람이 누굽니까? 수십조나 되는 돈이 다 어디로 흘러갔습니까? 그 양반 주머니 아닙니까? 일개 반도체 회사가 몇 년 사이에 거대 그룹이 되었습니다. 정권의 비호와 미국 물주들과 합작하지 않았다면 가능했겠습니까? 워낙 큰일이라 이제야 사실이 밝혀진 거죠.
이수학은 가던 길을 멈추고 거룩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준비한 말을 뱉어 냈다. 대사를 얼마나 외웠을까? 청산유수다.
-배경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유 회장 뒤에 버지니아 트레이딩이라는 거대 미국 자본이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 아닙니까? 환투기 세력이 미국 자본이었는데, 미국 자본이 그 양반을 도왔다면 그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제 국내 기업사냥을 끝내고 미국에 은혜를 갚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미국에 100억 불짜리 투자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명백한 국부 유출이며, 해외로 돈을 빼돌리려는 수작입니다.
-기업사냥이라니요. 컨소시움이 재계를 개편한 것은 신성도 동의한 일 아닙니까?
-그건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성은 컨소시움에 20억 불이나 갖다 바치고 쓰러져 가는 자동차 회사와 중공업 몇 개를 인수했을 뿐입니다. 국민들이 길바닥에 나앉는 것을 어찌 봅니까? 알짜배기는 스마트그룹과 대현그룹이 다 가져갔습니다. 조금만 조사해 보면 알 겁니다.
-대현도 배경 중에 하나라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요. 대현그룹은 유 회장의 지시에 따라 환란 전에 원유를 사 두는 짓까지 했습니다. 환율이 오를 것을 뻔히 안 거죠. 국내 기업들엔 위험을 경고하지도 않았습니다. 망하는 기업을 헐값에 사려고 말입니다. 그 일이 국민 여러분 눈앞에서 벌어졌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대현은 국내 기업을 사냥한 돈을 개성공단을 빌미로 빼돌리고 있습니다. 정권과 결탁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정권과 결탁했다는 말씀은 증거가 있는지요?
-그건 기자 여러분께서 취재하셔야지요. 신성은 환란 극복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에 정치 자금은 꿈도 못 꿨습니다.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겠지요. 돈이 있던 곳은 어딜까요? 정권은 대현에 대가를 주고 있는 겁니다.
퍽!
“신성, 이 빌어먹을 새끼들.”
나는 리모컨을 TV로 내던져 버렸다. 당장 저놈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환란 극복을 위해 내놓았던 돈만 350억 불이었고 심지어 250억 불 이상이 아직도 부동산에 묶여 있다. 수십 개 이상의 대기업들이 내가 지원한 현금으로 회생했으며, 모자라는 돈은 중국과 스티브 잡스까지 끌어들여 환투기꾼들을 협박하면서 해결했다.
내가 그런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도박을 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경제는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권과 결탁했다고? 내가 대한민국 정권을 살려 준 거다.
신성 이 새끼들, 완전히 죽여 놔야 한다. 다시는 이따위 짓을 못 하도록.
벌컥. 저벅저벅.
내가 차를 타려고 하는데 이 실장을 대신한 운전기사가 매우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 뒤에서 대현그룹의 최 상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유 회장님, 지금 출근하시면 안 됩니다. 왕회장님부터 봬야 합니다.”
“바쁩니다. 내일 찾아뵙죠.”
“아뇨. 바쁘신 이유를 알기에 봬야 합니다. 왕회장님이 직접 오시겠다는 걸 제가 말렸습니다.”
최 상무 뒤쪽으로 왕회장이 타던 다이너스티가 스르륵 나타난다. 뒷좌석에서 정헌몽 회장이 얼굴을 보이며 차를 타라고 한다.
그래, 잠시, 아주 잠시 들렀다 가자. 소송을 어찌 진행할지 논의도 할 겸 말이다.
스르릉.
내가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차가 떠났다.
“정 회장님, 버지니아 로직스로 가시죠. 케이가 소송팀을 꾸며 놨을 겁니다.”
“유 회장, 자네가 모르는 일이 있네.”
“모르는 일이라니요?”
“어제저녁 검찰이 박준태 의원, 아니 전(前) 총리의 집을 압수 수색 했네.”
박준태는 DJ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나는 그가 결국 부동산 명의신탁으로 불명예 퇴임을 하게 될 것을 알기에 은퇴를 권유했었다. 이미 은퇴를 했기에 압수 수색을 당할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건가?
“그게 신성의 음모와 무슨 상관입니까?”
“검찰이 대선 자금의 꼬투리를 물었네. 아버님께서 무기명 채권을 줬는데, 박준태 총리가 근거를 남겼던 모양일세.”
“빌어먹을. 그걸 왜 증거를 남겨서….”
“박 총재도 당황했는지 내게 전화를 했더군. 자신의 선에서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가능할 것 같지 않네.”
은퇴한 정치꾼이 타깃일 리가 없다. 그보다 검찰이 나서게 된 배경이 더욱 궁금하다. 신성이 어떻게 이렇게 대통령의 눈치도 안 보고 막무가내로 작전을 펼치지? 신성의 원래 기조는 불가근불가원이라 정권에 밉보일 짓은 절대 안 하는데.
DJ의 최대 치적 중 하나가 나와 함께 환란을 무사히 넘겼다는 것 아닌가. 나는 대선 선거판에서 유세만 안 했을 뿐 DJ를 향한 지지 의사를 공공연히 밝혔었다. 나를 공격하는 것은 DJ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짓인데.
“대통령은 어쩌고 계신가요? 검찰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데.”
“신성이 아주 작전을 잘 짰네. 대통령은 세간에 ‘홍삼 트리오’라고 불리는 세 아들에 대한 권력형 게이트를 정면 돌파하려고 검찰에 자율권을 줬다네. 신성은 그 칼날이 우리에게 향하도록 대선 자금의 출처를 파악하게 만든 거네. 대통령은 아들들이며 여당이 덜 다치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를 방패 삼아 내던질 수도 있는 상황이네.”
“신성….”
역시 정치를 가까이하면 역풍이 불기 마련이다. DJ도 레임덕에 빠지기 시작했다는 뜻인가? 아직 대선이 2년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여하튼 DJ 정권 말기에 아들들이 모두 각종 권력형 게이트에 휘말리면서 곤욕을 치른 것은 원래 역사대로다. 결국 DJ의 아들들은 각종 이권 개입 및 알선수재 혐의로 기소당해 실형까지 살게 된다. 검찰도 확신이 있으니 이리 과감히 움직일 수 있는 거다. 그리 보면 대선 자금은 권력형 범죄의 첫 단추이니 걸릴 수밖에 없는 일이리라.
“게다가 신성이 이창회 전 총재를 전격적으로 밀고 있네. 검찰도 차기 대통령은 이창회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네. DJ와 각을 세우는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고, 자네와 대현을 DJ까지 묶어서 지는 해라고 여기는 것 같네.”
“하하하.”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부터 나왔다. 그래, 이창회 정도면 개혁우파에 가깝고 실제로 권위주의 세력의 적폐를 청산하는 데 앞장섰지.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에서 최후의 보루라 여길 만한 인물이다.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하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제가 좌파 적폐라도 된답니까?”
“개성공단 때문이지 않겠나. 미안하네, 대현이 발을 담그지만 않았어도.”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후회해서 뭐합니까? 여하튼 그게 문제가 아니지요. 이 정도면 필요한 내용은 모두 들은 것 같은데 굳이 왕회장님을 봬야 합니까? 저는 한시가 급합니다.”
“아버님을 뵙고 가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네.”
- *
차는 어느덧 왕회장의 청운동 자택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직 기자들이 몰려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선 자금이 밝혀지면 이곳도 조용하긴 글렀겠다 싶다.
“수한이 오나.”
“왜 나오셨어요? 거실에서 기다리셔도 되는데.”
“마음이 급할 긴데 내 어째 안에서 기다리겠누.”
3월 중순이 지났지만 나이 든 양반에게는 아직 바람이 차다.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마당에서 나를 맞이하는 왕회장. 나이는 못 속이는지 올해 들어 기력이 많이 쇠한 느낌이다. 그래도 원래 역사보다는 건강이 좋은 편이다. 2002년 월드컵은 즐기실 수 있으리라.
‘결전을 앞두고 무슨 딴생각을 해! 유수한!’
나는 어금니를 깨물고 각오를 다졌다. 왕회장이 무슨 말을 하든 이참에 신성을 자근자근 밟아 뭉개 버리리라.
“하실 말씀이란 게 뭡니까? 더 이상 신성을 살려 두지는 않을 겁니다. 이 판국에 둘 다 사는 게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말씀을 하시려면 안 하셔도 됩니다. 듣지 않을 테니까요.”
“그게 아이다, 수한아.”
“그게 아니라뇨, 왕회장님?”
“니 혹시 몇 년 전에 영국에서 환투기를 했나?”
“……!”
“그게 사실이가?”
“그게 이 문제와 무슨 상관입니까?”
“최 상무가 신성의 비서실에 끄나풀이 있어 정보를 캐냈다. 이수학이 저리 나서는 이유가 뭐겄누? 자폭을 꿈꾸고 있는 기다. 영국에 이수학과 같이 가서 일했다며? 모든 자료가 완벽히 남아 있다고 하더라. 2년 정도만 니하고 함께 감옥에 갔다 오면 니 회사는 파탄 나고, 케이는 한국에서 퇴출될 거고, 이수학은 신성의 영웅이 되는 기지.”
“빌어먹을! 그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저도 이제 힘이 있습니다.”
왕회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러서라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DJ가 유럽 순방 일정이 있다. 뭇 기업인들이 동행하니 니 이름 올리는 것은 문제없을 기다. 나가서 한 달쯤 외국에 있어라. 국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왕회장은 내 말에 대꾸도 없이 딴소리부터 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피해선 안 됩니다. 소송으로 맞붙겠습니다. 승산도 있고요.”
“보수 언론이 붙어 버렸다. 국민의 절반을 적으로 돌릴 셈이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저더러 지금 물러서란 말입니까?”
“물러서는 게 아니라, 신성을 확실히 죽이려면 때를 기다리라는 말이다. 지금 니가 신성과 싸우면 DJ 편에서 싸우는 게 되는기다. 그라믄 넌 좌파라는 목걸이를 끼게 된단 말이다. 기업이 정치색을 띠면 절대 안 되는 기야. 대선까진 기다리야 해! 이 판을 접고 새로운 판에서 싸워야 하는기라. 놈들이 내지른 창은 대현이 다 맞아 주고, 니는 생생한 몸으로 싸워야 하는기야.”
“으익!”
나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비겁해 보이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외환 관리법? 그따위 것이 뭐 어때서? 나는 남의 나라에서 돈을 벌어 왔을 뿐이다. 그걸로 우리 직원들, 우리 식구들 잘 먹고 잘살면 된다고.
“유 회장, 잠시 외유를 하게. 자네를 보호해 줄 사람은 현재로선 DJ네. 신성의 공격은 내가 다 받고 감옥 갈 일이 있으면 내가 가겠네.”
“정 회장님!”
“수한아, 헌몽이 말 따라라. 그게 최선이다. 신성을 확실히 죽일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