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챕터 6
삐리릭. 삐리릭.
“여보세요.”
-회장님, 이 실장입니다. 중국 사업 건에 대해 긴급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TV를 보면서 좋았던 기분이 훅 하고 가라앉았다. 이 실장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긴급 보고라니요? 뭡니까?”
-상세 내용은 메일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만 일단 간략히 말씀드리면 신성이 나서서 회장님의 그림을 망치고 있습니다.
“신성이 내 그림을 망친다고요? 내 그림을 신성이 어찌 알고요?”
-저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오는 꼴입니다.
“차근차근 말해 보세요.”
-먼저 중국 정부의 대외경제무역부에서 전자 상거래 세칙을 발표했는데 허가 사업체가 총 다섯 곳입니다. 그중 알리바바는 1순위로 선정되었고, 신성이 계약한 텐센트도 같은 1순위 사업체로 선정되었습니다.
“텐센트?”
-예. 게임 퍼블리싱을 주로 하는 회사라 VOD 판매 이력이 있어 1순위 사업체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텐센트의 전자 상거래 항목 중에 신성의 메모리 반도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도체를 전자 상거래에 올렸다고요?”
-예. DRAM 모듈은 10개, 반도체 단품은 100개 단위로 구매가 가능토록 되어 있습니다. 판매자가 신성전자라고 명확히 되어 있습니다.
신성이 미쳤네. 판매자를 자신으로 하면 거래에 무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오픈마켓에 반도체 메이커가 직접 물건을 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도체 부품은 시스템과 궁합을 맞춰야 하는 부품이라 소매품에 대해 반품을 허용할 수 없기에 대량구매자와 거래하고, 기술적 문제로 반품 이슈가 생기면 엔지니어를 파견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회사 대 회사로 클레임을 처리한다.
일본 시장에서는 오픈마켓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긴 하나 그조차 딜러를 통해 거래한다. 소매는 딜러를 통해야 자질구레한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설마 대형 거래도 전자 상거래를 통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게 문제입니다. 전자 상거래 세칙을 기반으로 정부 조달 건도 전자 상거래로 수량과 납품가, 심지어 품질 검사까지 투명하게 운영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트레이딩 홍콩 지사에서 직접 확인한 내용입니다.
“이런 빌….”
하마터면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나는 시중쉰 일가에 불량 10%를 빌미로 비자금조로 여분의 물량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 짓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게 생겼다. 결국 신성은 전자 상거래를 관장하는 정부 인사에 뇌물을 줄 생각이다. 클레임이 발생되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돈으로 보상하는 것이니까, 그 핑계를 이용할 셈이다.
-중국 정부도 세금을 투명하게 거두는 혁명이라며 부패 척결과도 연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거야 당연하죠. 전자 상거래의 성장 동력이니까.”
전자 상거래는 중국이 메인 시장이다. 한국과 미국은 카드, 일본은 현금, 중국은 전자 결제가 대세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2018년이 되면 전자 결제가 전체 거래의 80%를 차지할 정도까지 발전하며, 중국에 본격적으로 휴대폰과 인터넷이 보급되는 올해부터 매년 50% 넘는 성장세를 보일 것이다. 즉, 전자 결제액이 2년마다 두 배씩 늘어나는 거다.
절대 과한 추측이 아니다. 중국은 금융 인프라가 굉장히 낙후된 나라이기에 국민 개개인의 신용을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고, 당연히 신용카드의 발급도 어렵다. 따라서 1990년대까진 대부분 현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위조 화폐가 많아서 사회적 문제가 심각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자 결제라는 새로운 수단이 나타났고, 현금보다 훨씬 편하고 안전한 결제 환경을 제공하는 데다 정부에서는 세금까지 제대로 거둘 수 있게 된다.
이 실장이 언급한 세칙을 근거로 알리바바나 텐센트 같은 비금융 기업에도 지급 결제 업무를 허용해 주면서, 금융과 관련 없던 기업들이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알리바바와 텐센트가 세계 10위권 기업에 들어가게 된다.
문제는 그 세칙이 몇 년은 이른 시기에 나왔고 내 핵심 수출품인 반도체를 끌고 들어갔다는 것. 아무래도 내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핸드 터미널, 즉 K-터미널 기반의 기술이 성숙해져서 가능한 일인 것 같다. 내 나비효과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영향을 미친 것은 확실하다.
-계속 안 좋은 소식을 보고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차이나 유니콤도 문제입니다. 기존에 유니콤이 독점하고 있던 인터넷 사업에 차이나 텔레콤도 진출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텔레콤이 독점하고 있던 무선 통신 사업권을 차이나 유니콤에 허용한다고 합니다. 유니콤이 판매할 휴대폰 신제품에 대해선 통신칩 로열티 계약을 갱신할 필요가 있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있습니다.
쾅!
“뭐라고요! 대체 이런 정보를 어째서 이제야 알게 된 거죠? 시중쉰 일가는 뭘 했습니까? 제 돈도 못 지키는 바보입니까?”
신성도 통신칩에 대해 생산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회사다. 중국 시장을 선점한 나와 경쟁자로 나서는 것도 모자라 로열티 계약까지 갱신시키려 하고 있다. 자칫하면 시중쉰 일가에 위임한 로열티 뇌물까지 사라지게 생겼다.
-그게 너무 공교롭습니다. 전자 상거래 세칙이 워낙 급작스럽게 튀어나온 데다 시중쉰 선생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서 제대로 대처를 못 했다고 합니다. 아직 시진핑은 전면에 나설 때가 아니라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저와 회장님에게도 사전에 연락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말입니다.
“아, 이런….”
뭐지? 시중쉰이 쓰러지는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직전인데 말이다. 나이 든 양반이라 언제 쓰러질지 그 시기는 원래 역사대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보다. 나로 인한 나비효과일 리는… 아니, 나로 인해 정계 로비에 너무 심력을 쏟았나? 원래대로라면 심천에서 편히 은퇴 생활을 즐겼어야 하는 사람이지 않나.
그러고 보니 왕회장의 건강도 나비효과 덕을 보는 것 같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지금쯤 거동이 불편해져야 하는데, 내가 IMF 스트레스를 줄여 준 덕분인지 아주 정정한 편이다.
결국 신성에 운이 닿았다는 말이네. 시중쉰의 존재를 알지는 못했지만 내가 발목을 잡으려고 사업체를 이리저리 휘저어 봤는데, 나이 든 양반이 그 공격에 쓰러져 버린 격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차기 공산당 조직이 논의되는 시점은 2002년, 후진타오가 새로운 국가 주석이 되는 해가 2003년이다. 2002년까진 시중쉰이 살아 있어야 시진핑이 빛을 볼 수 있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정신줄을 되돌려 놨다. 일이 벌어진 걸 어쩌리? 시중쉰 일가를 타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럴 때일수록 성의를 보여 줘야 한다.
“시중쉰 선생의 건강이 최우선이에요. 중국 의사들에게 맡기지 말고 한국이든 독일이든 의료진을 불러서 치료하도록 해요. 이 실장이 직접 나서 줘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자 상거래 건에 대해선 어떻게….
“이 실장은 시중쉰 일가의 안위에 일단 신경 쓰세요.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내가 처리를 해 보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툭. 삐이익.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외환위기 이후에 처음으로 상황이 나빠졌다. 그리고 신성의 공격 시기가 너무 공교롭다.
나는 지금 파라곤 지분 매집, 소프트뱅크 지원, AOL 공매도 건으로 유동 자금이 묶인 상황이다. 와중에 법인세 인상에 대항한다고 영업 이익마저 모두 공장 건설과 보너스로 처리해 버렸다. 3개월 뒤에야 돈벼락을 맞겠지만 말이다. 자세가 안 나오긴 하는데, 파라곤이든 재훈이에게든 돈을 좀 빌려야겠다.
‘잠깐. 그 전에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지? 이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고 하기엔 너무 실무적이야. 돈의 흐름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분명해.’
삐리릭. 삐리릭.
자리를 뜨기 전에 먼저 확인을 해야 했다. 권 부장 자리로 인터폰을 연결했다.
-예, 회장님. 찾으셨습니까?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신성의 최근 조직도를 봤으면 합니다.”
바로 용건부터 말했다. 아래층이라 올라오는 데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딸깍.
내가 인사도 없이 용건부터 말해서인지 권 부장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뭔가 심각함을 눈치챈 것이다.
“회장님, 이게 최근 개편된 신성의 조직도입니다.”
언론에 노출된 정보, 하도급 업체를 통해 얻은 정보들을 종합해 추측한 조직도이겠지만 99% 정확할 것이다. 사다리 타기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워낙 큰 조직이다 보니 복잡하기 그지없다.
“새로 임원이 된 이들은 파란색으로 표시해 뒀습니다.”
나는 권 부장의 말에 내 인생 1회 차의 기억을 더듬어 임원들을 비교해 보았다. 나 또한 20년 넘게 반도체 업계에 종사했기에 신성의 반도체 조직은 대략적이지만 기억에 있다. 진제대 상무 정도에 위치한 임원들을 위주로 살펴보다 보니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황기우 사장? 신성카드 사장 아니었어?’
나는 묘한 위치에 있는 황기우 사장의 이름을 가리키며 권 부장을 쳐다보았다.
“이 황기우라는 사람 신성카드 사장 아닙니까? 어째서 반도체와 무선 사업부에 걸쳐 있죠?”
“최근에 이 회장의 신임을 받고 있는 양반입니다. 황기우 사장이 이 회장의 지원을 등에 업고 그룹 차원의 TF를 운영한다는 말이 들리고 있습니다. 반도체와 모바일 폰 영역에 해당되는 일인 것 같은데 명확히 업무가 파악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전자 상거래일 가능성은요?”
“저도 그걸 유심히 살폈는데, 딱히 SJ와 KT와의 연결선이 보이질 않습니다.”
“신성의 다른 사업부에서 SJ와 KT를 접촉하고 있나요?”
“신성의 무선 사업부에서 여전히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다. 중국에서 내 전자 상거래 사업이 발목 잡혔다는 소리는 해당 조직의 기능과 인력이 강화되었다는 뜻이다. SJ와 KT와의 연결선이 보이지 않아도 신규 TF가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라는 가정하에 더 조사를 했어야 한다. 오히려 조직의 인선이 매우 정교하다는 뜻인데….
‘비서실, 비서실을 강화해야 해.’
우리 회사에서 보는 눈이 가장 넓은 권 부장마저 상황 파악을 잘 못 하고 있다. 비서실의 확장은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이제 나로 인한 나비효과의 범위와 타격감이 커져서 미래를 알고 있는 나조차 제어하기에 벅차다. 급변하는 상황에 따라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즉각적으로 대응책을 만들 조직이 필요하다.
“황기우 사장이 핵심 멤버군요. 알겠어요.”
“아….”
“이 실장이 자리를 비웠으니까, 전화로 상의해서 해당 TF가 어찌 움직이는지 비서실 직원을 붙여 주세요. 나는 나대로 움직일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이제야 권 부장이 감을 잡은 것 같다.
“조만간 신성이 K-터미널 관련 부품과 시스템을 개발할 가능성이 큽니다. 용인밸리의 부품 기업에 선발주를 해 두세요. 신성에 부품 공급이 원활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시, 신성이 핸드 터미널까지 진출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핸드 터미널 핵심 부품을 조금 변경해 S폰에 채용하려 할 겁니다. K폰 전자 결제 부품을 대놓고 카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
- *
뚜벅뚜벅.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전화부터 걸었다.
삐리릭. 삐리릭.
-여보세요.
“이 회장님, 접니다. 강령하시지요?”
-허어, 어쩐 일인가? 구국의 영웅께서 나에게 전화까지 다 하고.
“그래도 외환위기 때는 같은 편이었는데 너무하십니다.”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치킨게임을 하려면 신사답게 선전포고를 해야지 발목을 잡으면 어쩝니까? 선점한 시장에서 남의 전략을 흩어 대는 건 상도의가 아니지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오늘 시간 좀 내주셔야겠습니다. 같은 한국 기업끼리 싸우면 되겠습니까? 혹시 압니까? 제가 파이를 좀 나눠 드릴지 말입니다.”
-반도체 시장에서 치킨게임이야 일상적인 일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돈 잔치를 하면 어쩌나? 쯔쯧, 치킨게임을 할 돈은 남겨 두고 장사를 해야지.
이 회장이 나를 도발한다. 괜찮다. 이 정도만 해도 내가 선전포고는 한 셈이니까 말이다.
“하하, 절 안 만나시는 것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슨 기술로 승부를 볼지 어찌 알고요?”
-후후, 기술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고리타분하지. 그보다 한 수 위를 봐야겠지 않나. 기술은 기본이고 말일세.
“카드사 사장을 너무 믿으시네요. 이 회장님답지 않으십니다.”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끊겠네.
툭. 삐이익.
개발실에 다다를 즈음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능구렁이 같으니. 현재로선 아쉬울 거 없다 이거지. 몇 달만 있어 봐라!
“어, 회장님이다.”
“어쩐 일로 오셨지? 뭔 일 있나?”
나를 발견하고 저들끼리 속삭이는 엔지니어들. 저 멀리 김 실장이 깜짝 놀라 사무실에서 튀어나왔다.
“회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저를 부르시지 않고요.”
“간혹 와 봐야죠. 조너슨은 어디 있나요? 안 보이네요.”
개발실은 개발팀과 디자인팀이 같이 쓴다. 복작거리는 다른 공간과 달리 조너슨의 사무실은 텅 비어 있다.
“연구소에 있는 디자인실에 있을 겁니다.”
“연구소? 좋네요. 오 이사도 불러서 같이 얘기하면 되겠군요.”
“아, 예. 잠시만요.”
김 실장은 사무실로 돌아가 후다닥 다이어리를 챙겨 오더니 앞장서 디자인실로 향한다. 가면서 휴대폰으로 오 이사와 조너슨에게 연락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돌파구를 만들려면 8월에 시제품을 내고 11월에 쇼 케이스를 하는 룰을 깰 필요가 있다. 이미 잡스의 컴퓨터도 준비되어 있고 말이다.
1년 안 돼서 새로운 모델을 내면 올 초에 K폰을 샀던 고객들이 아우성을 치겠군. 기존 고객에겐 할인을 좀 세게 해 줘야겠네. 어후, 보조금을 줄 돈도 따로 들어가겠군. 원래대로 출시하면 들어가지 않을 돈인데.
그래도 김 실장의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를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빼빼 마른 양반이 실장이 되고 나서 살이 약간 붙었는데 또 빠지겠네 싶다.
- *
스마트그룹 종합 연구소.
원래 스마트 클라우드 내의 연구소였지만 지금은 그룹 전체의 미래 먹거리를 개발하는 조직이다. 용인밸리에서 제일 처음 사업을 시작한 3층 건물 바로 옆에 반원 형태로 지어진 건물에는 스마트그룹에서 가장 비싼 기계들이 즐비하다. 몇억짜리 전자 현미경이 접근성 좋게 각 층마다 놓여 있을 정도니까.
그중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꼭대기에 조너슨의 디자인 실험실이 있다. 제품 개발은 디자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나 할까.
“회장님, 오셨습니까?”
“여긴 언제나 활기가 넘치네요. 올 때마다 인원이 느는 것 같군요.”
“네. 이제 3천 명이 넘었습니다. IT 제품, 반도체, 펌웨어, 정밀 기계, 화학 공학 등등… 말 그대로 종합 연구소니 인원이 많이 필요합니다.”
최근 그룹 내에 공학 석박사가 아주 많아졌다.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은 스마트그룹에 입사하면 과장 1년차부터 시작하기에 한 해에 수백 명씩 지원하고 있다. 결국 보너스를 고려하면 다른 회사보다 월급이 수십 프로는 많기에 그럴 것이다.
“기자재가 모자라지 않게 예산 팍팍 쓰세요. 여하튼 올라가죠.”
“예.”
연구소답게 그룹 내에서 가장 큰 로비와 가장 큰 휴게소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12층까지 바로 향했다. 용인밸리 전체가 내려다보이니 마치 커다란 고급 호텔에 방문한 느낌마저 든다. 우리 회사가 돈을 많이 벌긴 벌었나 보다.
삑.
연구소답게 곳곳을 지날 때마다 사원증으로 체크를 하고 출입한다. 조너슨이 살다시피 하는 디자인실로 들어가자 커다란 탁자 위에 각종 부품과 목업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바쁜데 방해한 건 아니죠?”
“방해랄 것은 없습니다. 부담스러울 뿐이죠. 벌써 1월 말인데 올해 신제품의 콘셉트조차 잡지 못했으니까요.”
조너슨은 매우 직설적인 사람이다. 이제 제품 사양과 외관 정도만 바꾸는 것으론 만족이 안 되나 보다. 하긴 2년째 새로운 플랫폼이 안 나왔으니 조바심이 날 만도 하다.
“애플에서 랩톱 컴퓨터에 적용하기로 한 와이파이 기술이 있지 않습니까?”
“컴퓨터를 휴대폰으로 그대로 옮기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소비자의 요구 사항을 선택적으로 반영해야 합니다. K폰의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연결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여기 모여 있는 이들이 고민하는 것의 정체라고 할 것이다. 올해 신제품의 콘셉트는 와이파이를 이용해 컴퓨터 기능을 일부 가져오는 것인데, 어떤 기능을 취사선택해야 휴대폰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는 거다. 게다가 말하는 투로 봐서는 키보드와 마우스 기능을 세련되게 처리할 방법이 없나 보다.
“소비자는 올해 신제품엔 요구 사항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에?”
“조너슨, 고객들은 당신이 뭘 만들어 낼지 전혀 몰라요. 당신은 올해 K폰 신제품이 기존 휴대폰 개념을 뛰어넘을 것이라 직감하기에 이리 고민하는 겁니다. 내가 그 고민을 덜어 주죠.”
“어, 어떻게?”
“디자인에 한계를 지으면 안 됩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개발자는 당신의 디자인을 제품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요. 그냥 믿고 디자인하면 됩니다.”
“아하.”
내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했다는 듯 한숨부터 쉬는 조너슨이다. 한숨이 나오겠지. 현재 기술로는 인터넷을 연결한다면 자판을 휴대폰에 배치해야 할 것 같으니까. 결벽증에 가까운 그에겐 자잘하게 배치된 수많은 버튼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는 휴대폰은 끔찍하게 보일 것이다. 어쩌겠나? 현재로선 터치스크린 기술이 없는걸.
‘조너슨, 초콜릿폰이나 만들자고! 터치스크린은 5년 뒤에나 만들 수 있어.’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조너슨과 타협을 해 보기로 했다. 원래 역사에서 LK가 내후년쯤 발매하는 초콜릿폰은 지저분한 자판을 최소화한 디자인이며, 고급 카메라를 장착하기도 매우 적당하다.
대한민국의 휴대폰 역사를 보면 LK에서 내놨던 초콜릿폰은 가장 아쉬운 제품 중 하나다. LK가 전 세계적으로 1,700만 대를 팔았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했지만, 내가 볼 때 그건 마케팅의 실패였다. 해외 판촉만 제대로 되었다면 대히트를 쳤을 것이다.
외국 모바일 회사와 연합을 해서라도 그 디자인을 휴대폰의 대세로 만들었어야 하며, 전자 상거래의 모바일 플랫폼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 말인즉슨 스마트 클라우드와 애플이 나서면 된다는 뜻이다.
“하하, 한숨부터 내쉬는군요. 내가 볼 땐 벌써 디자인은 다 했던데.”
“제가 디자인을 다 했다고요?”
내 말에 조너슨과 다른 두 사람도 고개를 갸웃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천기누설을 표시 내지 않고도 알려 줄 방법이야 아주 간단하다. 나는 K폰과 아이팟을 동시에 집어 들었다. 이미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에 가져오라고 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에겐 컴퓨터 마우스는 필요 없죠. 우리가 개발한 아이팟의 조그셔틀이 있으니까. 그리고 키보드는 깔끔하게 포기하죠. 그래도 전화는 해야 하니까 키패드는 이렇게 속에 숨깁시다.”
“……!”
난 아이팟과 폴더를 펼친 K폰을 겹쳐서 보여 주었다. 조너슨은 뭔가 머릿속에서 팍 하고 스쳐 가는 것이 있는지 눈을 깜빡깜빡한다.
“속에 숨긴다고 하시면 폴더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너무 큰 데다 화면을 동시에 볼 수 없잖습니까.”
오 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고 말이다.
“아뇨, 폴더형으로 만들면 안 되죠. 이렇게….”
“슬라이드! 슬라이드군요.”
“맞아요. 슬라이드 형태가 가장 효율적인 플랫폼이에요.”
조너슨이 소리를 쳤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회장님 말씀을 들으니 감이 팍 옵니다. 겹치는 부분에 두꺼운 부품이 들어갈 수 있겠네요. 그 정도 두께라면 카메라 모듈까지 장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거예요.”
김 실장도 말을 보탠다. 역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던 양반들이라 내가 한마디를 하니 봇물처럼 아이디어가 터져 나온다.
“오 이사님, 파이오니어와 협업하면 이런 플랫폼으로 전자 상거래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겠죠?”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물건 검색은 조그셔틀로, 그리고 결제 비밀 번호 입력은 키패드로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것뿐일까요? 슬라이딩이 스프링처럼 위로 한 번 더 슬라이딩되는 기능을 넣자고요. 엔터키, 페이지 넘기기, 더블 클릭 등을 대체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일종의 토글 키라 할 수 있겠죠.”
짝!
“허!”
“그런 방법이!”
사방에서 손뼉 치는 소리와 탄성이 튀어나왔다. 터치 패드 스크롤이 안 되면 기계식으로 만들면 되지. 난 21세기 인간인지라 모바일이 어떤 기능을 가져야 하는지 뻔히 알고 있다.
“하하, 감탄하기엔 일러요. 아주 어려운 작업이 남았으니까.”
“아니, 아이디어가 더 있으시단 말입니까? 와이파이, 슬라이딩, 토글 키, 심지어 카메라까지 더하는 제품인데 말입니다.”
“그게 문제가 되겠죠. 그런 기능을 갖추면 아주 비싼 제품이 될 덴데, 비싼 값어치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우리 고객들에게 돈 버는 느낌이 들게 해 줘야 합니다.”
“돈을 번다고요?”
“내가 이런 플랫폼을 만드는 것은 전자 결제, 즉 전자 상거래를 모바일까지 확장하기 위해서예요. 새로운 K폰을 산 고객들이 대형 마트, 전자 상가, 패밀리 레스토랑, 심지어 커피숍에 갔을 때도 할인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
오늘따라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느라 목이 아프겠다 싶을 정도다. 21세기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지금은 문화 충격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생각해 봐요. 가족들과 같이 패밀리 레스토랑에 갈 때 쿠폰 없이 가는 사람 있나요? 카드사마다 할인 이벤트가 있잖아요. 아, 이제 다들 부자라 쿠폰 없이 외식하나요?”
“아, 아닙니다. 모두 쿠폰을 쓰죠. 그 또한 재미인 데다 손해 보는 것은 싫으니까요.”
“인터넷 쇼핑으로 물건을 사면 휴대폰에 쿠폰이 자동 저장되면 어떨까요? 할인 바코드를 화면에 출력하는 것은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바코드 인식 기술은 우리가 세계 넘버원이잖아요.”
“맞습니다. 핸드 터미널과 연계하면 에러는 제로일 겁니다.”
“오프라인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도 마찬가지죠. 카메라로 구매하려는 상품의 바코드를 찍으면 할인 쿠폰이 바로 뜬다고 해 보세요. 그런 판촉을 이용할 기업은 수도 없이 많을 것 같은데요? 아, 와이파이가 연결되어 있으니 기존 구매자의 사용 후기도 읽어 볼 수 있겠어요.”
“헉!”
오 이사는 터져 나오는 탄성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생각할수록 대박이니 그럴 것이다. 비슷한 두 개의 물건을 앞두고 카메라로 바코드를 찍으면 할인 쿠폰이 있는지, 사용 후기는 어떤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면 소비 행태는 극단적으로 바뀔 수 있다.
“조너슨, 디자인해 줘요. 개발팀에서 바코드 인식, 카메라 모듈 장착, 슬라이딩, 토글 키 뭐든 할 테니까.”
“연구소에선 펌웨어와 보안 요소에 올인하겠습니다. 와이파이 기술과 모바일 전자 상거래가 가능하도록 말입니다. 물론 파이오니어와 긴밀히 협업하겠습니다.”
“아, 디자인… 디자인은 한 달, 아니 3주만 주세요.”
세 명이 동시에 각자의 업무를 챙겨 간다. 여태 고민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럼 시제품은 석 달이면 될까요?”
“예, 회장님. 맡겨 주십시오.”
“으흠, 양산이 문제인데…. 올해 6월까지 가능할까요? 프리미엄 제품으로 명명하고 풀었으면 합니다. 11월 쇼 케이스엔 보급형 제품을 같이 선보이고 말입니다.”
“6월까지면 문제없습니다.”
김 실장답게 문제없다고 한다. 오 이사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오랜만에 새로운 플랫폼이라 벌써부터 흥분되는 모양이다.
“보안 유의하시고요. 나는 중국으로 가서 사전 작업을 하겠습니다. 6월 양산이라는 목표는 반드시 달성해야 합니다.”
내 말에 모두들 굳은 표정으로 각오를 다진다. 내가 직접 마케팅을 하러 가는 것 이상의 압박은 없을 것이다. 각자 자기의 일을 할 때다. 조너슨이 벌써부터 부품을 이리저리 배치하는 것을 보니 문제없을 것 같다.
나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중국으로 가야 한다. 중국의 전자 상거래 시장은 절대적으로 선점해야 한다. 모바일로 타격을 주는 것은 6월에나 가능하니 지금은 순수 인터넷 기반에서 신성을 밟아 버려야 할 것이다. 간 김에 시진핑도 위로하면서 더욱더 사이를 돈독히 해야 할 것이다.
- *
휘이이잉.
홍콩 공항의 입국장으로 나서니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뭐라 표현할 순 없지만 중국에 왔음을 확인시켜 주는 냄새 말이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어서 갑시다, 이 실장.”
“예. 이쪽으로”
입국장에서 단박에 나를 찾은 이 실장이 황급히 차를 몰아 심천으로 향했다. 홍콩에서 심천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왔음에도 시중쉰의 저택까지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끼이이익.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편석으로 멋지게 마감한 정원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가니 소독약 냄새가 진동을 한다. 침대에 시중쉰이 힘없이 누워 있다. 시진핑도 같이 자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온다는 소리에 잠시 공관을 비웠나 보다.
“으으으. 어서 오시게, 유 선생….”
“아이고, 기력을 아끼십시오.”
시중쉰이 나에게 팔까지 뻗어 대기에 나는 훅 하니 옆으로 가서 손을 잡아 주었다. 링거가 몇 개씩이나 달려 있는 것을 보니 상황이 꽤나 좋지 못한 것 같다. 풍이 온 건지 얼굴의 반쪽이 굳어서 표정이 어색하다.
“내 미안허이. 막지를… 쿨럭….”
“아버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편하게 계십시오.”
시중쉰이 가래를 뱉어 내자 시진핑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냈다.
“어르신께서 어찌 되신 겁니까? 작년에 통화를 했을 땐 정정하셨는데 말입니다.”
“사방에서 탈세 혐의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날씨에 그걸 막아 보시겠다고 백방으로 사람을 만나시더니 휴우….”
중국인에게 사람을 만난다는 말은 술을 함께했다는 의미다. 늙은 양반이 겨울에 독주를 과하게 마시면 몸이 어찌 견디겠나. 몸을 챙길 새도 없이 일이 다급하게 벌어졌나 보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유니콤 지분, 로열티, 반도체 잉여 물량이 박살 났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습니다.”
“예,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장쩌민 주석과 후진타오 부주석이 동시에 저희 집안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 편을 들겠냐고 말이지요.”
중국 공산당 주석이 교체되기까지 3년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파벌 싸움이 시작되었다. 원래 이랬나 싶을 정도다.
“그 양반들이 통신 사업의 가능성을 알게 된 거군요.”
“통신 사업에 실제적인 돈이 오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겠지요. 단순한 휴대폰 사업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요.”
신성이 눈먼 돈이 있음을 알려 준 격이다. 신성 반도체, 휴대폰, 심지어 전자 상거래까지 한꺼번에 테이블 위로 올려 버렸다. 그 바람에 시중쉰 일가가 수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신성! 내가 선점한 시장에 들어오면 파이를 나눌 생각을 해야지 파투를 놓고 있다. 내가 1990년대 신성의 영업 전략은 지극히 탐욕적이라는 것을 살짝 잊고 있었다. 여태 내 등 뒤에서 나를 노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똑같이 돌려줘야 한다.
“시진핑 선생께선 돈을 탐하시면 안 됩니다. 최종 목적은 권력이지 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헌데 지금 이대로 조사를 받게 되면 중앙 진출도 물 건너갈 테니 그게 문제지요.”
“벌었던 돈을 탈탈 털어서 모두 바치세요. 후진타오, 장쩌민, 보시라이에게 2:1:1로 돈을 주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돈을 뿌리면 각자 생각을 달리하겠죠. 장쩌민은 제 수하인 보시라이까지 챙겨 주니 자신에게 줄을 섰다고 여길 테고, 후진타오는 장쩌민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으니 자신에게 줄을 섰다고 여길 겁니다.”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런 빌미만 주면 되는 것이고, 시진핑은 그 앞에서 빈 주머니를 탈탈 털며 넙죽 엎드리기만 하면 되는 거다. 속된 말로 중국 8대 원로의 아들이 넙죽 엎드리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을 거 아닌가.
“그걸로 중앙 정치국 위원으로 나설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일반 위원이 아니겠지요. 확실하게 엎드리시면 이참에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실 겁니다.”
“헉!”
“으으윽….”
옆에서 시중쉰마저 신음성을 흘렸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2003년에 25명이 정원인 일반 위원이 되고, 2007년에 상무위원이 된다.
시간을 빨리 돌려 2003년에 상무위원을 시도해 볼 만하다. 내가 회귀하고 역사가 앞으로 당겨지는 경향이 있잖은가. 시진핑이 양쪽 모두에게 자금줄이라고 여겨지면 가능성은 높아지니 더 강력하게 뇌물을 주면 된다.
“양쪽 파벌 모두에게 전자 상거래에 직접 투자하는 외국 기업은 나라별로 한 개로 제한하자고 해 주시죠. 핑계는 태생부터 외국 자본에 잠식되면 곤란하다고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
“물론 한국 기업은 제가 될 것임은 믿으셔도 됩니다. 미국 기업도 말이죠.”
“애국자 노릇을 하라!”
“바로 그겁니다.”
“유 선생의 돈 줄은 두 개, 파벌도 두 개!”
“정확하십니다.”
시진핑은 바로 알아듣는다. 내가 돈지랄을 할 것도 뻔히 아는 눈치다.
- *
중국 충칭시 모처.
시진핑은 즉시 움직였다. 일은 터졌지만 그나마 터진 시점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2000년 춘절은 2월 5일로 매우 빨랐다. 이때 중국의 경제는 한 해 성장률이 20%에 육박할 정도로 초고성장을 하고 있었다. 춘절은 말 그대로 중국인의 최대 명절이었기에 온갖 군데에서 폭죽이 터지고 음식점은 손님으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시진핑과 보시라이 정도의 거물이 만나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춘절이 그걸 가능케 해 주고 있었다.
“하하하하, 오늘은 맘껏 드시고 서로 오해가 있었다면 남자답게 화끈하게 풀어 버립시다.”
보시라이는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다. 여색을 밝히는 보시라이답게 여자를 둘이나 끼고 술자리를 즐기고 있다.
“보 선생(보시라이)께서 이리 자리를 마련해 주셨으니 오해가 있을 리 있겠습니까?”
시진핑은 그의 팔에 매달려 비비적거리고 있는 여자의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그만하라고 한다. 보시라이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리라.
“시중쉰 선생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셔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시길 바라오. 바빠서 문병을 가지도 못했다고 양해 말씀 전해 주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시중쉰을 자리에 눕게 만든 장본인이 문병을 못 가서 미안하다고 한다. 시진핑은 지금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속으론 이를 으드득 갈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내 옆에서 속삭이듯 통역을 해 주던 이 실장마저 곤혹스러워했다.
“자, 건배합시다. 사업 번창하시오!”
“사업 번창하십시오.”
“사업 번창하십시오.”
나는 시진핑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며 잔을 부딪쳤다. 옆에서 이 실장은 사업 번창하라는 말은 일상적인 새해 인사 중 하나라고 덧붙여 주었다. 돈에 대한 개념이 남다른 중국인다운 새해 인사다.
“여하튼 내가 만든 자리에 물주도 데리고 나오다니 우리의 관계가 확고해졌다고 여겨도 되겠군요.”
보시라이는 비어 버린 잔을 다시 채워 주며 자화자찬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자기가 만든 자리에 시진핑과 내가 순순히 나온 것을 보고 시진핑이 넙죽 엎드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중국인의 관념상 뇌물을 주는 사람은 술자리를 만들지 않는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일단 뇌물을 먼저 주고, 뇌물을 받은 사람이 이런 술자리를 만들어서 형님 행세를 하며 대가가 뭐냐고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 갑을 관계가 명확해지며, 꽌시라는 커넥션이 생기는 거다.
“올 한 해도 건강하십시오. 모쪼록 이번 세무 조사에 힘 좀 써 주시고 말입니다.”
“후후, 그러려고 이 자리를 만든 거 아니오.”
“도와만 주신다면 좀 더 성의를 표하겠습니다. 춘절이 끝나면 묶인 자금이 풀릴 겁니다.”
“오호, 자금이 묶여 있었소이까?”
보시라이가 시진핑의 말에 솔깃해하길래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저희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지불할 돈이었지요. 대략 3천만 불쯤 될 겁니다.”
여태 시중쉰 일가에 넘어간 돈은 1억 불. 그 돈 중 3천만 불을 떼어 주자고 내가 운을 떼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보시라이와 잔을 부딪쳤다. 중국인은 술을 마실 땐 두 번 연속 잔을 비우는 경향이 있다. 짝수는 복을 부른다는 미신 때문이라고 하는데 좋은 게 좋은 거다. 나 또한 술잔을 들어 같이 합세했다.
“내 기분이 좋으니 말 한번 들어주리다. 말해 보시오. 스마트 클라우드 쪽에는 뭘 도와 드리면 좋겠소?”
3천만 불이라는 액수를 들어서일까? 대뜸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자, 여자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운다. 보시라이도 여자들을 주물럭거리는 짓은 할 만큼 했는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시그널이 괜찮다.
“반도체 수출 관리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중국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으면 합니다.”
“기업사냥을 하는 것 같던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 스마트 클라우드는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협력 업체를 찾는 겁니다. 투자하는 지분도 15% 이하지요. 경영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
“그보다….”
보시라이가 내 말꼬리를 물면서 빙그레 웃었다. 마치 나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말이다.
“이 협력 업체는 중국에서 자금 이동 통로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요? 돈을 그냥 드리는 것보다 안전하고 명분 만들기도 쉬워서 말이죠.”
“명분이라! 하하하하하!”
내 말에 보시라이는 무릎을 팡팡 치며 좋아라 한다. 주식으로 뇌물을 대신하겠다는 뉘앙스를 바로 알아채는 것이리라. 그래, 좋아해라. 시진핑이 권력을 잡으면 넌 한 방에 갈 테고, 그 주식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올 테니까.
“바야흐로 중국도 인터넷 산업에 뛰어들 때입니다. 차이나 유니콤과 전자 상거래 업체 정도가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시진핑이 끼어들었다. 작전을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다.
“으흠, 좋은 사업이 많은데 굳이 인터넷 산업이라니. 반도체 합작 회사를 짓고 그 지분을 받는 게 좋지 않겠소?”
보시라이가 욕심을 부리고 있다. 시진핑이 내게 요구해도 들어줄 수 없는 일인데 말이다. 시진핑은 내가 격한 반응을 보일까 봐 그랬는지 내 무릎을 살짝 두드리며 보시라이의 말을 받았다.
“한국의 신성전자가 그런 제의를 해 왔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거래는 서로에게 득이 되어야 유지가 되는 법인데 핵심 사업을 넘길 리가 없습니다.”
시진핑이 판을 깔아 준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합니다. 저희는 중국의 전자 상거래에 진출하는 대가로 좀 더 싼 가격에 반도체를 납품하겠습니다. 대국인 중국은 반도체를 수입해 더 큰 사업을 하셔야죠.”
“더 큰 사업이라. 으흠….”
“충칭에서도 무선 통신과 인터넷 시범 사업을 해 보셨지 않습니까? 휴대폰, 중계기, 서버를 비롯해 온갖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보 선생님의 사업은 그런 방식이 되어야지요.”
“부품은 한국이, 최종 제품은 중국이, 소비는 미국이… 뭐 그런 식인가?”
“정확하게 꿰뚫어 보셨습니다. 학자들이 글로벌 체인이라고 말하는 시스템이지요. 역시 차세대 지도자라 불리실 만합니다.”
어려운 말까지 쓰며 띄워 주자 보시라이의 입이 귀에 걸린다.
“하하하하, 내 어찌 도와주면 되리까?”
“차이나 유니콤, 그리고 전자 상거래 업체에 대해서는 외국계 투자 기업을 국가별로 한 곳만 허락하는 법안을 실행했으면 합니다. 보 선생님이 나서시면 안 될 일이 없잖습니까.”
“오호! 기업사냥을 방지하겠다! 그 말 아닙니까. 명분도 아주 좋구려.”
“더 설명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밤은 길고 술맛 또한 근사하군요. 건배합시다.”
“감사합니다.”
“멋진 결정을 하셨습니다.”
흥에 겨운 보시라이가 술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하고 시진핑이 옆에서 분위기를 돋운다.
쨍! 꿀꺽꿀꺽.
“캬아~ 이봐 뭣들 해! 새로운 애들 들여보내!”
보시라이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거의 옷을 벗다시피 한 여자들 수십 명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또다시 보시라이 특유의 여자 고르기 놀이가 시작되었다. 보시라이는 시진핑을 끝까지 시험했다. 부친이 와병 중인데 색을 가까이하는 것은 중국 귀족들에겐 모욕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모욕감을 속으로 감춘 채 잘도 흥겨운 척 표정 연기를 했다.
잠시 삐걱거리던 역사의 톱니바퀴가 다시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보시라이와 시진핑이 나를 제외하고 물밑 접촉을 할 가능성은 1도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