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약혼식에서 오가는 얘기들(2) (78/104)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내가 외려 감사하네. 바쁠 텐데 이렇게 걸음 해 줘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DJ는 내 어깨를 감싸며 자리를 권했고 나는 다분히 형식적인 대화를 했다.

“덕분에 200억 불 외평채는 성공리에 발행을 마쳤다네. 이제야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되는군.”

빌게이츠가 110억 불을 사 가고, 나머지 90억 불은 어찌어찌 팔았나 보다. 빌 게이츠가 투자하니 다른 투자자들도 안심하고 샀겠지.

“대통령께서 중국 국빈 방문에서 운을 잘 떼어 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MS의 중국 진출을 도우셨으니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렇게 겸손해하지 않아도 된다네. 이래저래 모든 게 유 회장이 열심히 일해 준 덕분이니까.”

“감사합니다.”

DJ가 나에 대한 칭찬으로 얘기를 시작하는 걸 보니 조금 따질 것이 있나 보다.

“그런데 어째서 대북 사업에 대해선 그리 회의적인가?”

역시나 내 예상이 비껴 나가지 않았다.

“기업으로선 그다지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긴장 완화는 정부의 일이며, 저는 개성공단에 협조한 것만으로도 할 일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 대현, 용인밸리 이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재벌들은 비협조적이지 않습니까?”

“으흠, 유 회장마저 그리 생각한다니 안타깝군. 우린 대륙 쪽으로 길을 뚫어야 미래가 있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미래이지 않습니까. 너무 조급히 생각하시는 게 아닌지요.”

“한쪽에서만 튼 물꼬는 마를 수밖에 없네. 북한을 돌아 중국을 통해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을 만들지 않고선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어. 미국이 다소 우호적일 때 일을 어느 정도 진전시켜야 하네.”

역시 DJ. 물류가 양자 거래가 아니라 삼자 거래 정도는 되어야 활력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미래를 아무리 곱씹어 보고, DJ와 대현을 더 적극적으로 갈아 넣는 시나리오를 써 봐도 DJ 임기 내에 더 나아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개성공단 정도가 그나마 시도할 만한 시나리오다.

“정말로 그리 생각하셨다면 저를 부르진 않으셨겠지요.”

DJ가 대북 사업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자고 나를 불렀을 리 없다. 그리 결심했다면 정치적인 압박을 해 왔을 터. DJ는 지금 갈등하고 있는 거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나?”

“남은 임기 내에 정책 운영의 큰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을 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역시 듣던 대로구만. 그래, 내가 뭐로 고민하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겠나?”

“누구나 비슷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대북 사업, 지식 정보화 사업. 이 두 가지 중 어디에 100억 불을 써야 할지 고민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미 외평채 200억 불 중 100억 불은 초고속 인터넷을 까는 데 모두 써 버렸다. 그런데 DJ가 봐도 100억 불로는 왠지 부족한 거다. 대북 사업도 부족해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고 말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1년 예산이 채 100조도 안 되는 때이니, 100억 불이라는 돈은 예산의 10%를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게다가 국민들이 미래에 낼 세금을 담보로 외국에서 빌려 온 돈이니 제대로 써야 한다.

정치에 좀 더 무게를 두는 학자들은 대북 사업으로 국가 리스크를 줄이라 조언했을 테고, 앨빈 토플러 같은 미래 학자들은 정보화 사업에 올인하라고 조언을 했을 것이다.

“허어… 허허허허.”

DJ는 감탄인지 웃음인지 한참 동안 소리를 냈다. 결국 맨 마지막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유 회장은 지식 정보화 사업에 투자하라고 하겠군.”

“예,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북한, 중국! 삼자 물류 체계가 국가 리스크를 경감시킨다는 것에는 저 또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대북 경협보단 우리부터 잘 사는 게 훨씬 나은 전략입니다.”

“지식 정보화 사업이란 게 어떤 이득을 가져오는지 확실히 보이지가 않네. IT 버블이 터지고 있다는 말도 있고 말일세.”

“산업혁명이 증기 기관에서 시작해 인류 문명을 기계화 사회로 탈바꿈시켰다면, 정보화 혁명은 컴퓨터로 시작해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디지털 사회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지금도 반도체, 자동차, 선박, TV, 심지어 건축물 그 어느 것도 컴퓨터의 도움을 배제하고는 만들 수 없는 사회입니다.”

“앨빈 토플러와 똑같은 말을 하는구만.”

“정부가 나서 IT 벤처를 더 지원하십시오. 컴퓨터는 제조, 엔터테인먼트, 금융, 의료, 예술 등등 사방으로 뻗어 나갈 겁니다. 산업혁명을 먼저 이룬 영국이 좋은 예입니다.”

내 말에 DJ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대었다. 칠순이 훌쩍 넘은 노회한 정치인.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지혜롭다고 평가되는 분이다.

내가 역사적인 판단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솔직히 원래 역사보다 더 강력하게 IT 벤처를 지원했으면 좋겠다. 옥석을 가리는 데 조언을 할 수 있다면 코스닥이 비정상적으로 과열되는 것도 어느 정도 제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흡수한 신라증권과 서우증권을 이용해도 되고 말이다.

“그럼 자네라면 100억 불을 어찌 쓰겠나?”

“IT 교육과 벤처 지원에 써야 합니다. 소득의 격차가 IT 능력의 격차로 나타나면 빈부 격차가 커지고 재생산됩니다.”

“모든 국민이 컴퓨터를 손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군. 그런 교육 체계 자체가 벤처 지원이 될 수도 있겠어.”

“예, 그렇습니다.”

DJ는 내 말을 척척 해석했다. 주저리주저리 말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조언 고맙네. 남북 정상회담은 정치 놀음 정도로 끝내야겠군.”

“양국 국기가 내걸린 장면이 TV에 방송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내가 무슨 말을 못 하겠군.”

DJ는 내 등을 툭툭 두드려 주며 웃어 댔다. 그의 눈은 어느덧 확신으로 차 있었다. 역시 돈을 어찌 써야 할지 고민할 때는 돈을 굴리는 사람 얘기가 가장 현실적으로 들리기 마련이다.

    • *

DJ의 행보는 주저함이 없었다. DJ를 만난 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뉴스에서 독대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국민의정부는 IT 벤처에 대한 지원 목표 금액이 1조원이며 이것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올해 2천억은 성공리에 투자가 된 만큼, 내년에는 3천억….

DJ가 용인밸리 입구로 보이는 곳에서 ‘벤처 사업의 요람 용인밸리’라고 새겨진 커다란 기념비를 세우며 연설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오늘 대통령 국무 회의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컴퓨터 의무 교육이 공식화되었습니다. 저소득 계층이 정보화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부 방침에 따른 것입니다. 이에 대통령의 주요 연설을 전문가와 함께 분석해 보겠습니다.

앵커마저 흥분된 톤으로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전문가를 비추기 전에 국무 회의에서 DJ가 했던 연설이 하이라이트로 TV에 나오기 시작했다. DJ는 뿔테 안경을 쓰고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지식 정보화 시대에는 이미 말한 대로 지적인 능력과 정보화 교육만 발전시키면 부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정보화 교육, 문화 콘텐츠를 개발해서 보급시킨다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는 빈곤 타파가 가능한 세기입니다. 여러분이 앞장서서 대한민국의 빈곤 타파에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무원을 앞두고 말하는 듯했지만, 결국 DJ는 IT 기업가들에게 덕담을 해 주고 있었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내 개인사와 국가의 운명, 둘 다 훈풍이 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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