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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약혼식에서 오가는 얘기들 (77/104)

제4장 약혼식에서 오가는 얘기들

2000년 1월 21일.

“지금부터 유수한 회장님과 버지니아 케이 로메티 사장님의 약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오오오!”

“하하하!”

짝짝짝짝짝.

케이가 귀국하는 날짜에 맞춰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약혼식을 올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사람들이 꽤나 모였다. 양가 부모님은 당연하고, 대현과 LK 총수 일가를 비롯해 은행장들 몇몇도 참석했고, 재훈이와 케이의 친구들도 참석했다. 심지어 스마트 클라우드와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주요 멤버들도 있었다.

수정각의 최 마담이 우연찮게 내 약혼식 소식을 들었다면서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하더니 이리되었다. 한겨울 날씨인데 전혀 춥지가 않다. 수정각 정원을 빙 둘러 투명 아크릴로 벽을 세웠다. 천장을 적당히 터 놓고 야외 난로까지 켜 뒀기에 마치 온실에 들어온 느낌이다.

“식순에 따라 예비 신랑과 예비 신부는 서로 맞절!”

약혼식에 맞절을 하나 싶지만 최 마담이 섭외한 사회자가 실수할 리 없을 테니 시키는 대로 했다. 맞절을 하니 예비 신랑은 어쩌고저쩌고, 예비 신부는 어쩌고저쩌고 하며 한참을 떠들어 댄다. 외국인이라 궁합 보는 게 매우 어려웠지만 결과는 찰떡궁합으로 나왔다며 너스레를 떨자 좌중이 크게 웃는다. 케이의 부모님은 ‘궁합이 뭐지?’ 하며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다.

“자! 그럼 예비 신랑은 신부 손을 잡고 단상에 올라 인사하세요.”

“다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휘이이익~ 짝짝짝짝짝.

이것도 식순인가? 여하튼 최 마담이 시키는 대로 올라가 케이와 함께 허리 굽혀 인사를 하니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와 함께 박수가 쏟아진다. 저기 구석에 있는 재훈이 녀석이 휘파람을 분 것 같다. 애인하고 같이 왔네. 나중에 똑같이 해 주마.

“신랑이 대표해서 한 말씀 하세요.”

“아, 그것도 식순인가요?”

“와하하하하!”

식순을 좀 알려 줘야 준비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내가 당황하는 것 자체가 약혼식의 재미인 모양이다.

“먼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먼 걸음 마다하지 않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축복과 덕담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겠습니다.”

“언제 눈이 맞았습니까?”

“사랑한다고 해야죠!”

사방에서 나를 놀리는 말이 튀어나온다. 즐거운 자리니 흥겹게 받아 줘야지 싶다.

“언제나 앞만 보고 달렸다고 여겼는데, 옆에서 손잡고 같이 뛰는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케이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군요.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케이. 사랑합니다.”

“수한 씨….”

쪽.

“와하하하하!”

케이는 특유의 성격답게 내 뺨에 살짝 뽀뽀를 했고 좌중은 웃어 대기 바빴다. 뽀뽀 해프닝 뒤에는 연신 식순이 이어졌다. 국제결혼이긴 하지만 한국식으로 사주와 결혼 택일단자를 양가 부모들이 교환했고, 양가 부모들의 덕담도 통역을 통해 잘 이루어졌다.

약혼 예물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지만 나는 케이에게 대한민국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비싼 16캐럿 다이아 반지를 끼워 줬고, 케이는 그와 비슷한 정도의 시계를 내 손목에 채워 주었다. 수정각에선 사람 키만 한 축하 케이크를 내놓았고, 그걸 톱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큰 칼로 잘랐다. 정헌몽 회장이 하객을 대표해 축배사를 했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한참 동안 흘러갔다.

불과 2시간 만에 달이 휘영청 떠올랐고, 야외 난로가 화르륵 달아오르는 소리에 맞춰 여기저기서 축배가 이어졌다. 양가 부모님은 서로에게 관심이 많은지, 아니면 내 어머니의 유머 코드가 미국식인지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케이가 중간에 껴서 통역도 잘해 주고 말이다.

“여어어~ 축하한다, 수한아.”

“응, 고맙다. 언제 귀국했냐?”

“어젯밤에 들어왔어. 네 약혼식 보고 있으니 나도 지수랑 빨리 결혼해야지 싶다.”

“지수 씨가 좋아하겠네. 일편단심 민들레라서.”

“여하튼 고맙다. 그리고 직원들도 고맙다고 전해 달래.”

“직원들이?”

“나는 이제 지분 5%짜리 월급쟁이 사장이고, 오너는 네가 될 거라고 했거든. 좋아하더라.”

“후회는 안 하지?”

“당연하지. 주식 쥐고 있다가 이리 폭락했으면 난 정말이지 죽고 싶었을 거야.”

사람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10조짜리 부자에서 수천억짜리 부자로 바뀌면 정말 억울하지.

“여하튼 VOD가 결제될 때 보안에 구멍은 없는지, 해외 결제가 될 때 법적 요소가 어떻게 되는지 다각도로 살펴야 해. 알지?”

“당연하지.”

VOD는 전자 상거래의 시험 모델이나 다름없다. 그럴 리 없겠지만 행여라도 해킹이 있는지, 고객 정보 노출이 되는지, 결제 금액에 오류가 발생하는지 등등 실제 물건을 두고 실험하기에 곤란한 것들을 사전에 체크할 수 있다.

쨍.

재훈이가 모를 리 없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한 번 씩 짚어 줘야 한다. 이런 데서 업무 얘기를 길게 할 게 아니니 서로 와인잔을 부딪쳤을 때다.

“후후, IT 재벌이 두 분이나 있군요. 나도 껴도 될까요?”

“하하. 어서 오세요, 회장님.”

정헌몽 회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안 보이디가?”

“이미 인사드렸잖아요, 왕회장님.”

“그건 신랑 신부가 하객한테 인사한 거고.”

정 회장의 등 뒤에서 왕회장도 나타난다. LK 구 회장이 안 보이는 게 다행이다. 바쁜 일이 있는지 먼저 갔나 보다. 하긴 혼사가 오갔던 사이이니 약간은 꺼림칙하겠지.

“아,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이만…. 수한아, 나중에 보자.”

“그래, 조심해서 가.”

재훈이가 알아서 자리를 비켜 준다.

“니 시간 좀 되나?”

왕회장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같이 걷자고 한다. 케이 쪽을 바라보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걸로 봐서 20분 정도는 시간이 될 것 같다.

“예. 저기 오솔길이 좋네요. 가시죠.”

“앞장서이라.”

수정각에선 마치 비닐하우스처럼 산책길도 바람막이를 해 뒀다. 오솔길에 마른 솔잎을 잔뜩 깔아 놓고 밖에선 은은하게 가로등이 켜져 있어 산책하기에 딱이다. 최 마담은 우리가 뭘 원하는지 뻔히 안다. 그러니 이런 약혼식으로 당연하다는 듯 세 장씩이나 받아 가는 것이다.

바삭. 바삭.

구둣발에 솔잎이 밟힌다. 코너를 돌아 나오자 휘황찬란한 조명은 사라지고 은은한 가로등만 비닐 터널을 밝혀 준다.

“하실 말씀이 무엇인가요?”

“몇 가지가 있다.”

“몇 가지씩이나요?”

“허허, 오늘 경사스러운 날에 이런 말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뭔데 그러십니까?”

“전경련에서 요즘 전자 상거래가 화두다. 신성이 SJ와 KT를 끼고 뭔가 해 볼 건가 보더라. 그거 원래 니가 K폰 가지고 하던 거 아니가?”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 정도는 예상 범주에 있습니다.”

뭐 별로 큰 일 아니다. 결국 전자 상거래 시장은 중국과 연계되어야만 대박을 치는 거고, 2006년까지 중국은 온라인 시장을 외국 기업에 허가하지 않는다. 전자 상거래의 최대 수혜자인 화장품이 2006년부터 빛을 보기 시작하는 이유라 하겠다. 여하튼 내가 알리바바를 선점했으니 지금 한국 시장 정도는 파이를 나눠도 된다. 미국은 버지니아 트레이딩, 일본도 소프트뱅크가 있으니 내가 이기는 게임이다.

“한국만 아니라 아주 국제적으로 해 보려고 하는 것 같던데. 중국, 미국, 일본 할 것 없이 협력 업체가 걸쳐 있는가 보더라.”

“네에? 중국… 미국, 일본이라고요?”

“VOD를 이용해 해외 시장을 타진하고, 인트라넷 프로그램을 B2B로 거래하면서 최종적으론 인터넷 쇼핑몰을 해 본다고 하네. 전경련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떠벌리더군.”

정헌몽 회장이 옆에서 거든다. 어쭈, 전략도 비슷하다. 동영상과 프로그램으로 거래 양상을 시험하고 결국 물건을 팔겠다는 거 아닌가. 왠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 아무리 나로 인한 나비효과가 있다지만, 지금 신성이 국제적으로 커넥션을 가져간 건 너무 빠르다. 원래는 전사 상거래 시장 진입이 한참은 늦었는데 말이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대비를 좀 해야겠네요.”

중국에 어떤 업체와 협력하는지 알아야겠다. 만약 텐센트라면 지금 알리바바에 돈을 퍼부어서라도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

“그러니까 니도 전경련에 한 번씩 나와서 식사도 같이 하고, 골프도 같이 치고, 큰돈 안 되는 사업 아이템은 넌지시 알려 주고 그래라. 그래야 적이 덜 생기지.”

“예. 말씀하신 뜻 잘 알겠습니다.”

정헌몽 회장이 갈 때 동행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유 회장, 아버님 말씀 중에 한 가지 빠진 게 있네. 전경련에 오면 필히 혼사가 오갈 것이네.”

“혼사라뇨?”

“자네 말고 아우가 있지 않나?”

“……!”

“대현과는 이미 확고한 관계지만, LK와 SJ는 다르지. 두 그룹 모두 자네는 부담스러워도 자네 동생은 욕심을 낼 것이네.”

“굳이 제 가족을 사업과 연관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유 회장 뜻은 충분히 알고 있네. 하지만 남자에겐 그리 나쁜 일도 아니야. 신중히 고려해 보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일은 분명 있을 것이네.”

“동생은 아직 어립니다.”

“유 회장도 대학생 때 개발팀장이었네. 그 피가 어디 가겠나?”

“으흠, 일단 알겠습니다. 그 또한 새겨듣겠습니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 가지고 가타부타 말을 길게 할 필요는 없다. 우진이의 인연이 그리 닿으면 내가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잖나.

“수한이 니는 주변을 좀 살펴야 돼. 혼자서만 너무 많이 뛰면 안 된다. 비서실도 키우고 해야 된다. 케이가 법도 잘 아니까, 이참에 회사 합치고 비서실장 하라 해 봐라.”

“비서실장은 이미 있습니다. 비서실을 키우는 것은 저도 생각 중입니다.”

정말 케이를 비서실장으로 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나? 버지니아도 그룹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말이다.

“비서실이 있는데 박준태 의원한테 초청장도 안 보냈나? 이제 은퇴한 퇴물이라고 해도, 정치인은 안 삐지게 잘 다뤄야 하는 기다.”

“뭐, 결혼식도 아닌 약혼식에 부를 수는 없지요.”

“그 능구렁이가 초청한다고 약혼식에 오겠나? 그냥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

“으흠….”

그러고 보니 박준태 의원은 챙겼어야 했다. 환란 때나 대선에서 한몫했던 사람 아닌가. 게다가 내가 대선 후에는 은퇴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그 부탁까지 들어준 양반인데 어른 대접을 해 줬어야 했다.

“하하, 아버님이 농담하신 거네. 우리가 유 회장 이름으로 초청장이랑 선물을 보냈으니까 걱정 말게.”

정헌몽 회장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는다. 어이없게도 대현에서 선물을 챙겼다고 한다. 신성도 아닌 대현의 비서실조차 챙기는 일인데 놓치다니 비서실에 인원을 충원하긴 해야겠다.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오해가 있을 뻔했군요.”

“결혼식엔 꼭 초대해라. 은퇴했으니 주례를 봐 달라고 해도 괜찮을 테고.”

“결혼식 주례는 왕 회장님께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만.”

“허허허, 그리 생각하고 있었나? 호의는 고맙다만 우리는 이미 굳건한 사이인데, 큰 건을 그리 쓰면 되나? 박준태 의원한테 부탁을 하든, 정치인이 싫으면 LK 구 회장이나 SJ 최 회장한테 부탁해라. 이참에 한 명이라도 더 니 편 만들어야지.”

“…….”

내 편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들라.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오늘은 그냥 듣고 있어도 될 것 같다. 역시 사적인 일에 관한 한 나도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최 마담이 약혼식임에도 불구하고 재계 인사들을 초청한 이유도 알겠다.

“아버님,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이제 말씀하셔야지요.”

“아, 그래. 수한아, 니한테 의견을 구할 게 하나 있다.”

“제 의견이 필요하시다고요?”

“그래. 판단이 어려운 일은 니 의견이 제일 좋더라.”

“하하, 말씀하십시오.”

“정부에서 내년 6월쯤 남북 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더라.”

“오호, 그런 큰일이….”

나는 일부러 놀란 척해 줬다. 덤덤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그래서 사전 협의 때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더라. 북한에서 개성공단으로 재미를 보고는 발해만 유전 탐사나 금강산 관광을 꼭 성사시키고 싶다고 말이다.”

유전 탐사는 개뿔. 결국 금강산 관광으로 쉽게 돈을 벌고 싶은 거지. 거절해야 한다.

“둘 다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거절하십시오.”

“으음, 전혀 사업성이 없나?”

“사업성이 없는 게 아니고 사업성이 있으면 더 큰 일입니다. 북한과는 조심스럽게 교류해야 합니다. 우리가 투자만 하고 북한 주민의 참여가 제한적인 사업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긴장 완화 효과는 없고 정치 자금 문제가 얽히기 마련입니다.”

“듣고 보니 사달이 나겠네.”

“예, 거절하셔야 합니다. 남북 정상회담은 개성공단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 건도 있으니 미국 눈치도 볼 겸 유화책을 쓸 겁니다.”

왕회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젠가부터 내 말은 일단 믿고 보는 듯했다. 다행이다. 자칫 여기서 발을 더 깊이 담그면 정치 자금 문제가 벌어진다.

“유 회장, 정부의 요청을 마냥 무시하기가 좀 그렇네. 남북 정상회담에서 경협이 한 건만 더 이루어지면 북한이 국빈 방문에 준하는 의전을 한다고 하네. 양국 국기가 내걸리고, 군대의 사열이 이뤄지면 지정학적 리스크가 훅 떨어질 거네. 국가 신용 등급 자체가 한 단계 오를 수 있는 일이네.”

DJ가 판문점이 아니고 평양을 방문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바로 태극기가 인공기와 같이 내걸리고 국빈 방문의 격을 갖춘다고 해서 그렇다. 한번 국빈 방문이 이뤄지면 일종의 국가 승인을 하는 절차이기에 남북 관계는 국가 대 반국가단체가 아니라 미수교 국가 대 미수교 국가가 된다. 정권이 바뀌어도 번복할 수 없는 일이라 DJ가 과감히 일을 진행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국제사회가 노벨평화상을 줄 만한 일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북한의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기에 실익이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다. 금강산 관광이라는 리스크를 안을 필요가 전혀 없다.

“왕회장님 대신 정 회장님께서 참석하시지요. 유전 탐사, 금강산 관광 절대 안 됩니다. 대신 개성공단에 2억 불짜리 물량을 줄 것이 있습니다. 그걸 협상 테이블에 올리시죠.”

“2억 불짜리 물량이 있는가?”

“일본에 수출할 랜카드 물량입니다. 극히 싼값에 줘야 하는 물건이라 개성공단이 적합합니다. 용인밸리에서도 수지 타산이 안 맞는 물건입니다.”

“으흠, 북한도 이리저리 재 보겠군.”

“여하튼 저는 이 정도로 해 보고도 안 되면 더 끼어드는 것은 반대입니다.”

정헌몽 회장도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산책 한번 하면서 참으로 많은 얘기가 오간다 싶다. 대한민국의 경제든 정치든 외부 자극에 매우 민감하다는 뜻이리라.

“유 회장의 물량인데 내가 나서도 되겠나? 성사된다면 대가로 개성공단 개발권을 추가로 줄 텐데.”

“결국 할 수 있는 기업은 대현밖에 더 있습니까? 정 회장님이 적격입니다. 그리고 저는 북한보다는 중국이나 미국을 보는 게 낫습니다. 전자 상거래 건도 있고.”

지극히 진심이다. 솔직히 중국이 5개나 되는 경협 권리를 내걸지만 않았어도 북한 관련 일에는 절대 나서지 않았을 거다. 이왕 나서는 김에 개성공단으로 중국 제조업 투자를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고자 한 거지.

“알겠네. 유 회장 말이 맞아. 맞는 말이네.”

“내려가자. 사람들 돌아갈 때 신랑이 배웅해 줘야지.”

“하하, 알겠습니다. 내려가시죠.”

보름달이 산등성이를 타고 있었고 수정각 마당이 가까워지자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케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마구 흔든다. 나도 손을 마구 흔들어 주었다. 오늘따라 그녀를 보고 있으니 방금 전까지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휙 날아가 버린다.

뭐가 걱정인가? 나는 미래를 알고 있고, 돈도 충분히 있으며, 절대적으로 나를 지지해 줄 사람도 있다. 일단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봐야 하는 일이 생겼을 뿐이다. 아, AOL 공매도를 챙기려면 케이도 잠시 미국에 보내야겠다.

    • *

딸깍.

「회장님 약혼식 축하드립니다.」

“헉!”

약혼식을 마치고 주말까지 쉰 다음 회사에 출근했다가 깜짝 놀랐다. 메일을 확인하러 인트라넷에 들어갔을 뿐인데, 메인 게시판에 축하 멘트가 헤드라인으로 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룹 전체의 공지를 하는 게시판인데 내 약혼식을 축하하는 글귀를 적어 놓다니 공사 구별이 엉망이다. 인사팀? 관리팀? 대체 누구 짓인지 살폈더니 사원 대표들이 게시자다.

내용도 글이 아니라 커다란 종이에 수많은 이들이 축하 멘트를 써 둔 것을 찍은 사진이었다. 하트 스티커가 수백 장은 족히 붙어 있다. 나름 사원들에게도 이벤트였나 보다. 멘트 중 상당수가 약혼 기념 특별 보너스에 감사한다고 적혀 있다. 약혼 때문에 준 게 아니고 영업이익 초과분이 법인세로 나갈 상황이라 차라리 보너스로 바꾼 건데 말이다.

시기가 맞았을 뿐인데, 보너스에 아무런 언급이 없었기에 이런 오해가 생겼다. 공과 사는 구별이 명확해야 한다. 차후 특별 보너스엔 적절한 타이틀을 달아야겠다.

“수한 씨, 뭔데 그리 놀라요?”

“직원들이 우리 약혼 축하한대.”

“어머! 예뻐라! 호호호호.”

케이가 내 자리로 와서는 축하 멘트로 가득한 화면을 보고 환하게 웃는다. 논의할 사항이 있어 케이에게 내 사무실로 출근해 달라고 했는데 엉겁결에 이벤트를 해 준 격이다. 케이는 원래 웃는 상인데 요즘은 더욱 웃음이 많아졌다.

“하하, 이쁘긴 이쁘네. 여하튼 이걸 보여 주려고 부른 건 아니고, 오늘 미국으로 갈 거지?”

“예. 부모님과 같이 갔다가 AOL 건 처리하고 올게요. 너무 큰 돈이라 제가 직접 챙기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겠지. 그리고 소프트뱅크는 지금부터 매수 주문으로 바꿔 주는 것도 잊지 마.”

“알겠어요.”

예전 같으면 너무 이른 시기에 매수 주문으로 바꾸는 거 아니냐고 했겠지만 이젠 딱히 토를 달지 않는다.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될까?”

“수한 씨, 뭔데 그래요?”

“윌슨을 내 회사에 합류시켰으면 해. 그룹 비서실장으로 말이야.”

“헉, 이 실장을 경질하는 거예요?”

“경질이 아니야. 이 실장은 여전히 내 개인 비서이기도 하고 내년쯤엔 홍콩 지사를 맡겼으면 해. 내겐 좀 더 정치적으로 그룹 일을 고민해 줄 사람이 필요해.”

“윌슨이 한국 정치는 잘 모를 텐데요?”

“그건 비서실 직원들이 보필해 줄 거야. 문제는 내가 벌이는 일에 대해 경쟁사, 정치권, 그리고 글로벌 트렌드를 분석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야.”

약혼식을 마치고 비서실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케이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윌슨을 절대 내 밑으로 끌어들일 수 없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으흠, 긍정적으로 설득해 볼게요. 파라곤에서도 조직 변경을 준비해야 하니까.”

케이가 상임이사가 되면 결국 조직은 물갈이를 하게 될 거다. 1년 일찍 윌슨이 자리를 옮긴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어려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요 앞까지 같이 나갈까.”

“주말에 열심히 봉사해서 봐주는 거예요.”

쪽.

케이는 내 뺨에 뽀뽀를 했고 나도 이마에 뽀뽀를 해 줬다. 솔직히 이번 주말엔 봉사를 단단히 하긴 했다. 예비 장인, 장모가 하도 이곳저곳 열심히 돌아다녀서 내가 운전하느라 힘들었다. 운전도 힘들었지만 두 분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도저히 구별이 되질 않아 더 힘들었다. 내가 중간에서 아주 열심히 대화에 참여했었다.

위이이잉.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을 흔들어 주며 케이를 배웅하고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주말을 포함해 나흘이나 자리를 비운 터라 마음이 급하다. 신성이 벌이는 일도 살펴봐야 하고, 스티브 잡스와 약속한 대로 와이파이 제품을 어디까지 개발할지 작전도 짜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뚜벅뚜벅.

회장실로 돌아오니 이 실장이 서류를 들고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안 그래도 중국 출장을 보내려 했는데 잘됐다.

“이 실장, 그렇지 않아도 찾으려 했습니다. 들어와요.”

“예, 회장님.”

“요즘 신성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나요?”

“예. 분위기가 조금 심상찮습니다. 전자 상거래에 대해선 우리 전략을 턱밑까지 쫓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중국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리 보면 이 실장도 감이 없진 않은데, 알아채는 시점이 살짝 늦은 느낌이다. 일이 너무 많아서일 수 있으니 윌슨이 합류하면 중국 일에만 집중시켜야겠다.

여하튼 이 실장에게 윌슨 영입 건에 대해 언제 얘기를 하지?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말이다. 일단 현재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신성이 중국 전자 상거래 시장을 어찌 뚫으려 하는지 알아봐 줬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바로 출국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보고드릴 것이 하나 더 있는데….”

“으음?”

이 실장이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일단 종이 자체가 보통 종이가 아니다. 청와대에서 내려온 공문이었다. DJ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한다. 황송하게도 내가 시간이 될 때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적혀 있었다.

“언제든지라고 적혀 있지만 오늘 오후 2시에 대통령께서 스케줄이 빈다고 합니다. 그때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초청 공문조차 정치적이다. 나를 최대한 정중하게 초대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기 싫은데 딱히 핑곗거리가 없다.

“독대를 원하신답니까?”

“예, 독대랍니다.”

“뭘 얘기하시려고?”

“청와대에서도 그건 모른다고 하더군요. 특이한 점은 앨빈 토플러라는 미국 학자를 만난 직후에 유 회장님과 독대를 청했다고 합니다.”

“앨빈 토플러요?”

“예. 미래 학자이자 ‘제3의 물결’이라는 책을 출판했다고 합니다.”

“으흠, 알겠습니다. 정확히 2시에 도착한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차도 대기시켜 주고요.”

“알겠습니다.”

DJ가 앨빈 토플러를 이때 만났었나? DJ는 임기 중에 빌 게이츠, 손정의 같은 기업가들을 불러 의견을 구하기도 했고, 앨빈 토플러 같은 학자를 부르기고 했으며, 심지어 마이클 잭슨과도 독대를 했었다.

여하튼 DJ는 책을 아주 많은 읽은 다독가이며, 그 뜻을 차분히 곱씹는 정독가이기도 하니 단순히 유명인이라고 해서 앨빈 토플러를 만나지는 않았을 거다. 인류 문명 발전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첫째 물결이 농업 혁명, 둘째 물결이 기계화 산업 혁명, 세 번째 물결이 정보화 혁명이라는 주장을 깊이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IT 기업가인 나를 부른 거다.

    • *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삑. 삑.

“협조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청와대 경호원들의 검색을 거쳐 방으로 들어섰다. 영빈관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었고, 차분히 대화를 나눌 요량이었던지 소파가 딱 두 개밖에 없었다.

“어서 오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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