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완성되는 세력도
귀국하자마자 본가에 들러 결혼 의사를 밝혔다. 부모님은 놀라기는커녕 ‘음, 때가 됐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나는 이미 완벽히 독립한 아들이자 집안의 가장이나 매한가지기에 ‘케이는 언제 귀국하니?’ 하며 묻는 것이 전부였다.
큰누나는 이미 결혼을 했다. 유치원을 하나 차려 줬더니 그 옆에 있던 태권도장 원장과 연이 닿은 거다. 결혼식장에서 나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던 매형이 떠오른다. 솔직히 대현그룹에서 누나 혼사를 두고 내게 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단독으로 반대 의사를 전했었다. 한국 재벌가의 며느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증여하는 것이 낫다. 돈 될 만한 다른 안정적인 사업체를 차려 주거나.
“그래, 결혼식은 언제 할기고?”
“1월에 약혼식부터 하고 5월쯤 하려고 해요.”
“잘됐네. 딱 좋다. 그라면 니 작은누나 결혼식은 3월에 하면 되겠네.”
“어? 작은누나도 혼담 들어왔어요?”
“니도 아는 사람이다. 우메모토라고 재일 동포다.”
“스마트 케미컬 전무잖아요. 어떻게?”
히타치 케미컬은 스마트 케미컬로 이름을 바꿨다. 환란 때 완전히 한국 기업으로 바꿔 버렸기에 우메모토도 한국에 자주 오가긴 한다. 본사가 용인에 있으니 일본에 있는 공장이 지사가 되는 격이다.
“니 누나가 몬타베 단골 아니가. 우연찮게 합석했나 보더라.”
우연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우직한 양반이고 실력까지 있으니 내 누나 남편감으로 제격이다. 결국 미야자키가 은퇴하면 사장 자리를 꿰찰 사람 아닌가. 어머니도 맘에 들어 하는 눈치다. 솔직히 우메모토는 말투가 좀 느려서 그렇지 일본인 중에서 보기 드문 상당한 미남이다. 재일동포라 그런가? 여하튼 누나와 우메모토의 일을 어머니를 통해 듣게 되다니, 내가 가족 일에 신경을 못 쓰긴 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응? 요즘 니 아버지 바쁘다. 집 짓는다 아니가.”
“집요? 이 집 있잖아요.”
“뭔 바람이 들었는지 한옥을 짓겠다고 난리다. 이제 손자들도 생길 텐데 큰 마당도 필요하고 사랑방도 여러 개 만들어야 애들이 자주 놀러 올 거라 카면서.”
“허,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생활비 말고 따로 돈 달라는 말씀 없으셨는데….”
“니 아버지가 늘그막에 돈복이 터지는갑다. 이상하게 땅값이 엄청 오르고 있데이. 다른 데는 환란 어쩌고 해 가지고 땅값이 아직 요지부동인데.”
“하하, 그래서 어디 가셨는데요?”
“강원도에 나무 보러 갔다. 대들보로 쓸 나무는 직접 고르겠다 카더라. 대들보에 집안의 운이 깃든다고 말이다.”
이리 보면 우리 가족이 꽤나 특이하긴 하다. 내가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재벌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내 돈으로 뭔가를 해 보려는 생각이 없다. 나보고 빌딩을 사 달라고 해도 사 줄 텐데, 굳이 직접 나무부터 골라서 한옥을 짓겠다고 하시잖나.
“멋지네요. 제가 돈 좀 보태 드릴게요. 이참에 99칸 한옥을 지어 보세요.”
“무슨 99칸이고. 그 청소 우짤라꼬. 사랑방 4개면 충분하다. 딴소리하지 말고 내년 추석은 새집에서 보내게 될 기니까 꼭 오래이. 알았제! 바쁘다고 맨날 외국에서 명절 보내고 그라지 말고.”
“예, 어머니.”
그러고 보니 집 안에 덩그러니 어머니 혼자만 있다. 내 동생 우진이 녀석도 취업 준비로 바빠서인지 보이지 않고 말이다. 네 명의 형제 모두가 독립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내 부모님도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느낌이 든다.
- *
와글와글.
오랜만에 출근을 했더니 로비에 용인밸리 사장들이 잔뜩 몰려왔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한 달 전부터 면담을 요청했다며 떼로 몰려왔지만 모두 돌려보내고 권재욱 부장만 불렀다. 그러곤 도저히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정헌몽 회장과도 자리를 같이했다.
“아니, 무슨 일이기에 이 난리가 난 거죠?”
정 회장이 호탕하게 웃는다.
“하하, 난리라기보단 대박이라고 해야겠지.”
“대박이라고요?”
“그럼 대박이지. 유 회장은 이런 결과를 알고 일을 한 건가? 불과 1년 만에 순익을 10억 불이나 챙기다니.”
“10억 불요? 설마 개성공단의 순익이 10억 불이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원래 역사에서 개성공단 1년 치 실적은 20억 불 매출에 순익 4억 불이었다. 워낙 인건비가 저렴했기에 수익률 20%라는 실적이 가능했다. 그런데 10억 불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수치다.
“나도 믿기지 않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네. 유 회장이 북한 직원들이 초과 생산한 물량에 대해서는 순익을 절반씩 나누기로 하지 않았나? 그 전략이 아주 기가 막혔네.”
“그럴 리가요. 원부자재를 감안하면 기껏 해 봐야 110% 생산량이 최고치입니다. 매출 22억 불에 순익 4.5억 불 정도가 한계입니다.”
투입되는 원부자재의 여유분이 10%밖에 되지 않는다. 불량률을 감안한 일반적인 물량이기에 통관에 누가 딴죽을 걸 수도 없거니와 규정 이상으로 투입하기도 힘들다. 그 원부자재로 불량 하나 없이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생산율은 110%다.
“하하, 누구나 그리 생각했지. 듣고 놀라지 말게. 자그마치 생산율이 125%네.”
“네에? 125%라고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불량이 하나도 없었다고 해도 110개가 최고인데 125개를 만들었다는 소리잖나. 불가능한 얘기다.
“자네 회사가 대표적이네. 불량 웨이퍼를 가져가서 일일이 리워크(Rework)를 했다네.”
“웨이퍼 리워크를 했다고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는 실무적인 일이라 정헌몽 회장에게서 눈을 돌려 권재욱 부장을 쳐다보았다.
“회장님, 저희 엔지니어가 레이저 리페어(Repair) 장비 교육을 시켜 주면서 아이디어가 나왔나 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1G 칩이 불량이 났다고 치면 레이저 리페어로 절반만 살려도 512M가 되질 않습니까.”
나는 단박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우리가 넘겨준 저수율 웨이퍼는 한마디로 말하면 잡동사니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1G DRAM 웨이퍼를 예로 들면, 저수율 웨이퍼는 1G 칩이 고작 20%밖에 안 된다. 나머지 80%는 1G 용량을 만족하지 못하는 칩이다. 일일이 라벨을 붙여 ‘이건 512메가 칩으로 리워크하고, 이건 256메가, 이건 128메가로 리워크해서 패키징하자.’ 이렇게 작업을 할 수는 없기에 아깝지만 버린다.
“설마 칩을 일일이 분류해서 작업을 한단 말입니까?”
“예. 어이없게도 그리 하더군요. 실제로 잉여 생산품이 나오고 있습니다. 북미 수출은 힘들지만 중국 수출이나 내수에는 충분히 쓸 만한 제품입니다. 용인밸리의 중소기업들이 그 물건을 서로 사겠다고 난리가 난 겁니다.”
극단적인 재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용인밸리의 중소기업들은 값싼 반도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기고 있다.
“초과 수당은 20불을 넘을 수 없다고 규정했는데, 북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그 일을 했다고요?”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자체가 북한 사람들에겐 굉장한 특혜인가 봅니다. 저도 몇 번 방문했는데 서로 OT하겠다고 경쟁했기에 초과수당만 노리는 태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식권 한 장 더 얻는 것이나 간식조차 그들에겐 큰돈인가 봅니다. 간식을 초코파이와 캔 음료로 통일해 달라고 하더군요.”
“초코파이와 캔 음료라고요?”
“그게 회사 밖에서 되팔기가 가장 용이한가 봅니다. 야간 작업반 중에 아침밥을 자기가 먹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 테이크아웃으로 제공하는 빵과 멸균 우유를 가져갑니다. 나가서 파는 거죠.”
정말이지 이때의 북한은 식량 사정이 안 좋았나 보다. 개성공단에서 제공하는 기본적인 복지가 그들에겐 인센티브인 모양이다.
“점심때 사과 반쪽씩 주면 싫어하겠네요. 두 번 줄 거 모아서 한 개로 달라고 하겠군요.”
“하하, 맞습니다.”
“여하튼 유 회장, 완제품이 25%나 더 나와 매출 30억 불에 10억 불이 순익이네. 이런 경우는 전 세계 제조업을 뒤져도 유례가 없을 거야. 생산성이 어찌나 좋은지 대현전자 DRAM 저수율 웨이퍼도 깡그리 가져갔다니까.”
북한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긴 한가 보다. 먹고살 길이 보이면 악착같이 달려드는 모습이 그렇다.
“북한이 순익을 나누자고 하겠군요.”
“그래서 내가 직접 여기 온 게 아닌가. 계약의 범주에서 벗어난 5억 불에 대해선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 왔네.”
정부로서는 좀 곤란하긴 하겠다. 5 대 5로 나누면 북한의 개방을 노려야 하는 측면에선 한꺼번에 너무 많은 돈을 주는 꼴이다. 적당한 핑계가 없겠냐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에야 5억 불 정도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금액은 커질 수밖에 없다. 생각보다 개성공단 생산성이 극단적으로 좋다. 아니, 그보다 저가로 부릴 수 있는 가용 인력이 너무 많다.
“으흠, 3:3:3:1로 나누죠. 7 대 3으로 나누자고 하면 북한이 발끈할 테니까.”
“뭐가 그리 복잡한가? 3:3:3:1이라니?”
“우리 3, 북한 정부 3, 개성공단 위험 보험 3, 공단 직원 퇴직금 적립과 근린 지원비로 1.”
“위험 보험이라. 그거 좋은 아이디어군. 공단이 멈추거나 폐쇄되면 어쩌나 하는 의견이 많았는데.”
“양쪽 정치인들 모두 모양새가 나오는 일이니까요.”
“내가 그런 방향으로 이끌겠네.”
정헌몽 회장은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다. 공돈이 생겼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맘에 걸렸던 문제가 해결될 듯하니 더욱 기분 좋아 보인다.
“중국 진출은 잘되고 계시죠?”
“당연하네. 원자력 발전소, 철도 건설, 자동차 시장 진출 등등 호재가 넘쳐 나니 요즘 대현그룹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네. 스마트그룹 주가가 주춤하면 대현이 앞으로 치고 나갈 걸세. 방심하지 말게나.”
“하하, 열심히 하겠습니다.”
와중에 스마트그룹의 주가는 IT 버블이 터질 거라는 불안심리 속에서도 견고하게 오르고 있다. 전자 제품, 반도체, 소재, 부품, 증권 등등 사업의 범위가 넓어지니 이슈 한두 개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국 시장에서 반도체를 스펀지가 물 빨아 먹듯 수입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 뒤로 정헌몽 회장과 가벼운 얘기를 나눴다. 나는 특히 왕회장의 근황에 마음이 쓰였다. 왕회장은 두 달에 한 번은 개성공단을 들러 본다고 했다. 아직 개성공단은 100만 평 규모밖에 되지 않는다. 북한이 내놓은 땅이 2천만 평이니 왕회장에겐 노다지처럼 보일 것이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개성공단은 10년은 거뜬할 테고, 이런 상황이 조금만 더 이어지면 정말이지 중국으로 IT 제조업이 넘어가는 시점을 5년은 늦출 수 있다. 그렇다면 잡스는 한국에 스마트폰 조립 공장을 조성할 가능성이 높다. 나야 당연하고 말이다.
“대화 즐거웠네.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군.”
“살펴 가십시오. 왕회장님께 제가 내년 초에 한번 찾아뵙는다고 해 주시고요.”
“그러지.”
정헌몽 회장은 내가 신년 인사를 하러 가겠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이나 보다. 조만간 간소하게 약혼식을 하고 5월에 결혼식을 할 예정이라 주례를 부탁하고자 하는데 말이다.
- *
정헌몽 회장을 배웅하고서는 권 부장과 독대를 했다. 12월 매출을 예상할 수 있는 시점이기에 올해 실적에 대해 얼른 듣고 싶었다.
“권 부장님, 올해 실적은 정리되었습니까?”
“안 그래도 언제 물으시나 기다렸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그룹이 되다 보니 전체 실적 모으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상세 사항은 1월 회의에서 각 사업부장들에게 보고를 들으시면 되고, 부분별 실적을 간략히 보고 드리겠습니다.”
권 부장은 손에 들고 있던 다이어리를 펼쳐 내게 보여 주었다. 아직도 중요 사항을 손수 적어서 가지고 다니나 보다.
「반도체 부문 매출 15조 2천억, 영업이익 6조 2천억.
정보 통신 7조 6천억, 영업이익 9천억
정밀 부품 부문 매출 9조 4천억, 영업이익 5천억.
소재 부문 매출 2조 7천억, 영업이익 2천억
금융 부분 매출 1조 1천억, 영업이익 1천억」
“그룹 전체 매출 36조에 영업이익은 7조 9천억으로 예상됩니다.”
“스마트 클라우드 매출을 어떻게 보면 되나요? 반도체와 정보 통신을 합산하면 되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으흠, 반도체 사업이 역시 영업 비율이 높군요. 이익이 40%가 넘다니.”
“환율이 1,200원대가 되면서 이익 비율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국산화도 꾸준하게 추진되었고요.”
“그런데 나는 언제나 순익을 보지 영업이익을 보진 않았는데 말이죠. 왜 이렇게 정리를 했죠?”
“문제가 생겨서 그리 정리했습니다. 정부에서 내년 법인세법을 고치겠다고 공지했습니다. 영업이익 3천억 이상인 경우는 조항을 신설해 법인세율 25%를 매기겠다고 말입니다.”
“25%? 3%나 더 올린다고요?”
법인세는 영업이익 200억 이상은 일괄적으로 22%를 매겨 왔다. 세금이야 당연히 내야 하는 것이겠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1년 새 3%를 올리다니. 다분히 대기업에만 해당되는 세율 개정이다.
“그래서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스마트그룹은 각 부문의 덩치가 너무 큽니다. 일례로 정보 통신 부문에 속해 있는 K폰과 스마트 통신을 갈라서 영업 이익을 3천억 이내로 내려야 합니다. 정밀 기계 쪽이야 이미 법인이 5개쯤 되니까 문제가 없고요.”
“안 됩니다. 반도체와 K폰 부문은 정밀 기계나 소재와는 달라요. 나누면 조직 간에 벽이 생겨요.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야 합니다.”
“법인세 3% 인상은 타격이 큽니다. 순수 유동 자금을 떼 가는 것이라….”
“떼어 내면 대형 투자도 힘들어집니다. 아예 투자를 합시다. 정보 통신은 광통신 인프라에 더 투자하고, 세율을 계산해서 3년 약정으로 K폰에 보조금도 지원하세요.”
이럴 땐 투자가 답이다. 단기 순익을 깎는 한이 있어도 시장 점유율을 높여 놓으면 꾸준히 들어오는 이익으로 회사가 튼튼해진다.
“정보 통신 쪽이야 그리하면 어느 정도 절세가 가능하긴 합니다만, 반도체 부문은 시도 자체가 힘듭니다. 지금도 업무는 디바이스별로 나눠져 있으니 이참에 독립 법인으로 분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실제로 당해 보니 왜 이때쯤 재벌들이 법인을 잔뜩 찢어 댔는지 알겠다. 결국 법인세 때문이었군.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 5년 뒤 스마트폰을 출시할 때 내 그룹은 단단히 뭉쳐 있어야 한다. 조직을 찢어 놓으면 급변하는 제조 환경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
“지금 4공장 설립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가요? 나 부장이 계산해 줬을 거 아닙니까?”
“1조 8천억입니다. 최신식 설비에다 감가비를 한꺼번에 감해도 공장 하나에 그 정도가 최대치입니다. 그걸 감안해도 영업이익은 여전히 4.4조나 됩니다.”
“FAB 2개 더 지읍시다. 그럼 순익은 8천억 정도 되겠네요.”
“헉!”
“반도체 부문 임직원에게 특별 보너스 줍시다. 천만 원씩 주면 2천억 정도는 쓸 수 있겠네요. 그렇게 되면 6천억 남고… 아! 4공장, 5공장 건립에 직원 채용하면 되겠네. 그럼 3천억 밑으로 떨어지겠군요. 그쵸?”
“허헉!”
투자만으로 힘들면 특별 보너스가 답이다. 언론에서야 세금 내기 싫어서 돈 잔치 한다고 떠들어 대겠지만 나야 아무 상관 없다. 임직원이 왕인 스마트그룹의 사규에 부합하는 일이잖나.
솔직히 세금을 더 낸다고 우리나라 정부가 세금을 제대로 쓴다는 법도 없고, 그럴 바엔 내 직원들에게 돈 더 주고 내 직원을 더 뽑는 게 낫다. 5년쯤 지나면 이 짓도 힘들어지겠지만, 그때쯤이면 인플레도 덩달아 일어날 터. 법인세 3% 인상으로 느끼는 타격감이 한결 줄어들 것이다.
권 부장은 정신을 못 차렸다. 내가 너무 크게 지르는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5년 뒤에 이 모든 투자가 얼마나 크게 돌아올지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사내 인트라넷에 슬쩍 흘려 줘요. 특별 보너스 준다고 하면 다들 좋아할 거잖아요.”
“저, 저도 좋긴 합니다만… 그럼 유동 자금을 모두 써 버리는 꼴인데 어쩌시려고. 우리 그룹 정도면 못해도 2조 정도는 자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의 10배 정도는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권 부장은 내 대답에 아예 얼음이 되어 버렸다. 내 자금 이동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그였기에 이런 반응을 보인다. ‘또 어디서 대박 치셨군요.’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다.
여하튼 내가 주식 공매도로 얻은 돈도 투자를 빨리 서둘러야겠다. 합법적인 수출 이득에도 세금을 올리겠다고 하는데, 내가 외국 증시에 돈을 굴린 것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는 일이다. 불로소득이니 외환 관리법 위반이니 뭐니 하면서 나를 진흙탕으로 끌어들이면 곤란하다. DJ야 내게 호의적이라고 해도 정치권 전체가 내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원래 역사에서 신성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는지 모르겠다. 그들도 일본의 IT 버블이 터질 때 꽤나 돈을 벌었는데 말이다.
똑똑.
“들어와요.”
“회장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말씀하셨던 VIP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VIP? 아, 손정의 회장 말인가요?”
“예.”
이 실장은 와중에 말조심을 한 건데 내가 손정의 회장이라고 말해 버리니 흠칫한다. 괜찮다. 조금만 지나면 다들 알게 될 텐데, 뭘.
“설마 지금 날아온 건 아니죠?”
“날아왔습니다. 회장님께서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나 봅니다.”
허, 급하긴 급한가 보다.
“권 부장님, 내 말대로 일 처리하세요. 세법 개정에 꿈틀하는 모습은 보여 줘야죠.”
“예,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이 실장, 손 회장은 어디로 온다고 하던가요?”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뵙자고 합니다.”
“갑시다.”
“예.”
- *
부우웅.
차를 탈 때부터 왠지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실장, 내 차가 바뀌었어요?”
“예. 케이 님께서 며칠 전에 회장님 전용차를 바꾸라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멋진 선물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케이가 내 반지 선물에 화답한 셈이다. 케이를 지칭하는 말투가 확연히 달라진 걸 보니 내가 청혼한 것을 알고 있는 눈치다.
“이거 모델이 뭡니까?”
“벤틀리 컨티넨탈입니다. 6,750cc 8기통 엔진에 420마력, 가격은 4억… 어후, 그냥 예술 작품이죠. 대한민국에 한 대밖에 없습니다.”
“그럼 기존 벤틀리는 이 실장이 가지면 되겠군요. 차 좋아하잖아요.”
여태 이 실장에겐 딱히 선물을 못 했는데 잘됐다.
휘청.
“아! 운전 조심!”
“가, 감사합니다.”
벤틀리 컨티넨탈을 타고 인터컨티넨탈호텔로 간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역시 내 나라에 들어오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 *
뚜벅뚜벅.
“어서 오십시오, 유수한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손정의 회장님.”
“이리로 들어가시지요.”
“고맙습니다.”
손정의 회장은 통역사까지 대동하고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경이 멋진 회의실을 빌려 놓았다.
“상황이 급해,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손정의 회장은 급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공격적인 투자자답게 속내를 감추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주가가 폭락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것 때문입니다. 돌아가는 상황이 쉽게 반등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일본 투자자들은 손절할 생각부터 하고, 미국 투자자들은 이참에 주식을 현금화하려는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2년 전 이맘때의 한국 증시를 보는 것 같군요.”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손정의 회장은 내 눈길을 피하며 말을 잇는다.
“스마트 클라우드와 소프트뱅크는 상호 지분 교환까지 약속한 관계이지 않습니까. 소프트뱅크의 미래를 보시고 지분 투자를 조금 이른 시기에 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분 투자가 아니라 지분 상호 교환이었죠. 주가 차이는 현금으로 보상키로 했지 않습니까.”
현재 스마트 클라우드의 시가 총액은 50조에 육박하며, 소프트뱅크는 2조 엔에 불과하다. 한때 20조 엔에 육박하던 시가 총액이 10분의 1까지 박살 난 꼴이며, 원래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내년 3월쯤엔 2천억 엔까지 떨어지게 될 거다.
“그렇습니다. 원래 약속대로 내년 연말에 지분을 10%씩 교환하고, 주가 차익을 현금으로 지불한다면 저는 100% 파산하게 될 겁니다. 원래 지분 교환 대금으로 생각하셨던 일부 금액이라도 지금 투자를 해 주신다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저도 2년 전에 그런 부탁을 드렸습니다만.”
솔직히 환란 때 잡스 정도의 거금은 아니라고 해도 성의만이라도 보였다면 내가 이러지 않을 텐데 말이다. 물론 공매도로 덕을 본 것이 있으니 너무 매정하게 대할 수는 없고 말이다.
“그때는 솔직히 승산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오히려 저는 유 회장님이 사업을 접고 다시 시작할 때 투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따로 현금 200억 엔을 챙겨 두고 있었지요.”
“별로 유쾌한 변명은 아니군요. 내가 파산하길 기다렸단 말입니까?”
손정의 회장다운 정면 돌파다. 아예 내가 파산할 줄 알고 다시 회사를 세울 돈을 챙겨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 양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언론의 비난을 받는 말이라 해도 단 한 번도 자신의 말을 거둬들인 적이 없다.
쿵.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끝까지 동업자로 남으려 했을 뿐입니다. 곡해 마시고 제 진의를 믿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신다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양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고개를 팍 숙인다. 이제 투자자가 정말 남아 있지 않은가 보다. 일본 문화에서 한번 납작 엎드린 사람은 여간해선 뒤통수를 치지 않는다.
“저도 좀 더 기다린 다음 도와 드리면 어떨까요? 주가는 더 떨어질 것 같은데.”
“반등할 것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손 회장이 나를 끝까지 쫓아온다. 마치 내가 투자할 것을 뻔히 안다는 듯 말이다. 어째서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거지? 이대로 협조를 해 줘도 되겠지만 한 번 더 찔러보자.
“그뿐 아니라 일본 시장을 포기하실 게 아니라면 제 존재 자체가 가치가 있겠지요. 갈라파고스처럼 폐쇄적인 일본 시장에서 저만 한 동업자를 찾기는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저를 만나 주신 것 아닙니까.”
이리 말하니 할 말이 없다. 내가 소프트뱅크의 파산을 원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니까. 여하튼 이렇게 모든 속내를 드러내며 저자세를 보이니 지금 도와주긴 해야겠다.
“그런 의미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손 회장님이 이 정도 어려움에 사업을 포기하진 않겠거니 해서 나왔을 뿐입니다. 어째 방법이 있는지요? 소프트뱅크의 ‘투자자를 위한 경영’이라는 전략은 실패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이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소프트뱅크의 경영 전략은 ‘물주들을 위한 경영’이라고 공공연히 말해 왔다. 즉, 소프트뱅크는 산하 사업체로 하여금 영업 이익 전체를 재투자하도록 하여 각 사업체의 시가 총액을 끌어올리는 것을 경영 방침으로 정했다.
산하 사업체의 주가가 오르면 자연스레 소프트뱅크의 시가 총액도 오르게 되며, 필요한 유동 자금은 보유 주식의 일부를 팔아 해결한다는 전략이었다. 주식이 시장에 조금씩 풀릴 때마다 물주들이 주가를 왕창 왕창 끌어올리게 되는 거다. 일본에 대형 물주가 미국 못지않게 많기에 가능한 전략이다.
“전략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니, 여전히 유효해야 투자자들이 불만은 표할지라도 저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저는 소프트뱅크의 미래를 믿습니다. 인터넷 사업은 결국 기술 개발 속도가 문제이지 성공할 사업입니다. 견뎌 낼 자금만 있다면 지금이 외려 시장을 독점할 기회지요. 그러니 부탁드리건대 지금 가격으로 제 지분 10%를 사 주십시오.”
“제 돈을 어디다 쓸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 주시겠다고 하면 아이디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신하건대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겁니다.”
소프트뱅크의 현재 주가를 감안하면 지분 10%는 대략 2천억 엔, 지금 환율을 따지면 14억 불 정도 되는 돈이다. 그 돈은 별문제가 아닌데, 지금 공매도를 멈추면 수익률이 대충 40%밖에는 안 될 것 같다. 뭐, 그래도 5년만 지나면 다시 주가가 원상 복귀될 테니 지금부터 매집을 해도 그다지 손해는 아니다. 무엇보다 나비효과도 우려되고….
“알겠습니다. 기존 지분 교환은 없었던 일로 하고 현재가로 지분 매입을 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어찌나 급했던지 손 회장은 품에서 계약서를 꺼내 탁자 위로 내밀었다. 2천억 엔짜리 지분 매입 계약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쓱쓱 서명을 했다.
“이제 아이디어를 들어 봤으면 합니다만.”
“휴우, 현 상황을 타개하려면 소프트뱅크의 약점으로 지목된 것을 깨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에 한국처럼 광통신 인프라를 깔겠습니다.”
손 회장의 말을 들으면 사업하는 사람들마다 제각기 색깔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왕회장님은 ‘기업은 국가가 원하는 사업을 하면 돈을 번다’라는 생각으로 경영했고, 나는 ‘임직원의 열정을 유지시키면 대박 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라고 믿는 반면, 손 회장은 ‘대형 투자자를 끌어들여 끝없이 투자하면 결국 사업은 성공한다’라고 여기는 것 같다. 정답이 있을 수 없는 경영 전략이니 누가 옳다고 따질 수도 없다.
여하튼 손 회장은 이때부터 인터넷 인프라 사업부터 하겠다고 생각을 했군. 그런데 인터넷 인프라는 혼자서 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우리나라도 정부가 나서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른 시기에 완성되지 않았을 거다.
“광통신 인프라는 소프트뱅크만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만.”
“일본에도 광통신 인터넷은 일부 깔려 있습니다. 회선을 확장하면 되는 수준입니다. 랜카드를 무료로 나눠 주고 파이오니어 재팬의 VOD와 만화를 일정 기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쿠폰을 나눠 주면 됩니다. 한번 써 보며 절대 끊을 수 없지요. 인터넷은 그런 겁니다.”
VOD는 내 아이디어라 놀랄 것이 없지만, 만화는 손뼉을 쳐 주고 싶다. 아직은 흑백 화면일 테니 ADSL 속도에서도 실시간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일본 소비자들이 매우 좋아할 만한 테마다.
그것도 일정 기간 무료라고 하니 한번 접하게 되면 그만두기 힘들 것이다. 한마디로 소비자에게 ‘꽃신’을 신게 만들겠다는 말이다.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영업맨들은 흔히 이런 경우를 두고 흔히 ‘꽃신 신긴다’라는 은어를 쓴다.
영업맨들 교육에 자주 등장하는 오소리와 원숭이에 관한 동화가 있다. 잣을 먹고 싶어 하던 오소리가 나무를 직접 탈 수 없었기에 원숭이를 이용하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한다. 오소리는 고심 끝에 멋진 꽃신을 만들어 원숭이들에게 선물을 했다. 원숭이들이야 이게 뭐지? 하고 꽃신을 신었는데 발도 시리지 않고, 푹신하니 기분도 좋아 계속 신고 다닌 거다. 시간이 지나자 당연히 꽃신은 닳아서 해져 버렸고, 원숭이들은 그때마다 오소리에게 꽃신을 달라고 찾아갔다.
그런데 몇 번이나 꽃신을 다시 주던 오소리가 어느 날부턴 잣을 한 주먹씩 가져오지 않으면 꽃신을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었던 원숭이들은 뭔 개소리냐며 화를 내고 돌아갔는데, 이미 발에 굳은살이 모두 사라져 꽃신을 신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나무 가시에 찔려 엉망이 된 발바닥으로 오소리에게 가서 잣을 주며 꽃신을 살 수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새로 태어난 원숭이들도 당연히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견뎌 내질 못했고 말이다.
“그 정도로 출혈 영업을 계획하시다니….”
“일반 투자자들이라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유 회장님이라면 제 아이디어가 성공할 걸 아실 겁니다. VOD와 만화는 원래 그런 사업 아닙니까.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요. 결국 광통신을 신청하게 될 것이고, 통신비로 지불하게 될 겁니다.”
“이왕 하실 거면 통신비도 깎아 주셔야죠. 한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 아니면 도!”
“All or nothing! 멋진 말씀입니다. 통신비도 기존 전화선 통신 대비 8분의 1로 적용할 생각입니다.”
“8분의 1!”
원래 역사에서도 이렇게 과감하게 질렀나? 아니면 현 상황이 100분의 1 주가 폭락이 아니라 10분의 1 폭락 정도이기 때문에 이런가? 이 정도의 출혈 영업이면 웬만한 고객 규모로는 적자를 면치 못한다.
“가능합니다. 랜카드 2천만 개, 랜 허브를 포함한 각종 부품을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싸게 공급해 주신다면 말입니다. 대금은 내년 3월부터 매달 갚겠습니다. 이자는 5%를 쳐 드리겠습니다.”
이 양반 살짝 미쳐 버렸다. 2천만 개가 뉘 집 애 이름도 아니고 그걸 다 팔겠다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거지? 랜카드만 해도 단일 거래로 2억 불이 훌쩍 넘어가는 물량이다.
잠깐. 일본에서 초기 인터넷 유저가 어느 정도였더라? 신문 기사를 읽어 본 기억이 난다. 일본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가 그랬다. 일본 인구가 1억 2천만쯤 되니까, 초기 인터넷 유저가 3천만 명쯤 되는 거네. 계산상으로 불가능한 영업은 아니다.
“정상적인 거래는 아니군요.”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앞서 지분을 사 줄 때를 포함해 은혜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일본인이 거래에 은혜라는 단어를 얹을 때는 리스크를 받아 주면 차후 같은 수준의 리스크를 안아 주겠다는 의미이며, 흔히 은혜 갚기 장사라고도 부른다. 일본 정치를 은혜 갚기 정치라 부르는 이유도 그 연장선에 있다. 신성과 소니도 출혈 납품과 기술 협업으로 그 비슷한 관계를 맺었고 말이다.
여하튼 손 회장은 내게 은혜를 갚기 전까지는 나를 갑으로 대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언제 무엇으로 은혜를 돈으로 환원할지 모르겠지만 밑지는 장사는 아닌 것 같다.
“으흠,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받아들여야겠군요.”
“감사합니다.”
“식사도 못 하신 것 같은데, 바로 가실 게 아니라면 저와 식사 같이 하시죠.”
“아, 시간을 더 주신다면 저야 반가운 일이죠.”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영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니 통역은 없어도 될 것 같네요.”
“하하, 그러겠습니다.”
나는 그 이후에 2시간 가까이 손 회장과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이게 원래 역사인지 내 나비효과인지 알기 위해 꾸준히 대화를 이어 갔다. 결국 나로 인한 나비효과가 일부 섞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나의 VOD를 보고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처음엔 전자 결제도 검토했지만 일본은 소비자들이 카드조차 잘 쓰지 않을 정도로 현금 거래에 익숙해 포기했다고 하는 걸 봐서 거의 확실한 것 같다.
- *
며칠 뒤, 신성그룹 대회의실.
“이로써 4분기 경영 회의를 마치고, 회장님 말씀 있으시겠습니다.”
이수학 비서실장의 말에 모든 임원들이 자세를 바르게 했다. 4분기 경영 회의의 분위기도 여전히 좋지 못했다. 이 회장이 직접 지시한 내용이 9개월째 난항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회의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서실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이 회장에게 뭔가 말씀은 하셔야 한다고 진언을 하는 격이었다. 회의 말미에 이 회장이 따로 말하는 경우는 신성의 회의 문화가 아니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군. 누군 토끼처럼 훌쩍 훌쩍 뛰어가는데 신성그룹 주가는 거북이처럼 기어 올라가고, 전자 결제니 전자 상거래는 시작도 못 했고, 심지어 KeSPA인가 뭔가 하는 시답잖은 협회 하나 설립도 못 하다니… 대체 자네들 뭐하는 양반들인가?”
“회장님, 신성그룹의 시가 총액은 90조 가까이 되고 사업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스마트그룹처럼 IT 위주의 그룹이 아닌지라….”
“이 실장, 변명은 그만하게. 신성전자와 스마트 클라우드만 떼 놓고 비교해도 뻔한 그림 아닌가? 아니, 더 쉽게 반도체만 떼 놓고 봐! 그쪽은 15조 매출에 우린 12조야. 3조나 차이가 난다고.”
“DRAM만 비교하면 거의 비슷하고, 플래시는 올해부터 시장에 진입한지라….”
옆에서 진제대 상무가 나서 보지만 이 회장의 얼굴은 분노로 더욱 붉어질 뿐이었다. 진 상무도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 독보적이던 신성전자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쾅!
“그만! 변명은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나! 허면 전자 상거래는 왜 아직 시작도 못 했나? 왜?”
“그건 신성카드 황 사장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성카드 황기우 사장이 훅 하고 나섰다. 이제 그는 이수학 비서실장 바로 옆자리에 앉을 정도가 되었다. 이 회장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음에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말해 봐. 대체 일을 하고 있는 겐가?”
“예. 이제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한국에선 SJ와 KT가 함께했으며, 중국에선 차이나 텔레콤과 텐센트라는 벤처 회사를 파트너로 지정했고, 미국은 MS, 그리고 일본에서는 NTT와 계약을 완료하였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신흥 기업과 연합을 하기에 신성은 전통 강자를 끌어오는 전략을 택했다고 하겠습니다.”
“허! 그래서 시간이 필요했다?”
“예. KeSPA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VOD 사업 자체로 신성에서 돈을 벌 것이 아니니, 이리 계약을 맺어 두고 내년에 발족해도 늦지 않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회장님께 실시간으로 보고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째서 이제야 보고하는 건가?”
“스마트 클라우드가 신성이 노리고 있는 먹거리를 선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중국 시장에선 차이나 유니콤과 협업을 하고 싶었는데, 스마트 클라우드가 먼저 지분을 확보했더군요. 별수 없이 차이나 텔레콤과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정보가 빠져나가고 있다? 그런 얘긴가?”
“꼭 그렇다기보단 비서실의 정보 관리가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황 사장님, 말씀이 과하십니다.”
황기우 사장의 말에 이수학 비서실장이 눈을 부라린다. 그답지 않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비서실장만 자리했다면 결코 꺼내지 않았을 말인데 이 회장이 같이 있으니 목을 걸고 하는 소리였다.
“됐어. 일리 있는 말이야. 큰 건이니 마무리 단계에서 보고하는 것도 괜찮아.”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외려 황 사장의 말에 힘을 실어 주는 이 회장이었다. 황 사장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신성의 경영 방식은 비서실을 끼고 그룹 전체를 이 회장이 단속하는 형태다. 그런 룰을 깼음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이 자신을 두둔했다. 사안이 가볍지 않으니 이수학 비서실장과 각을 세우는 임원들은 모두 자신에게 줄을 댈 것이다.
“그래도 이제부터의 일은 비서실과 의논해서 진행하게. 돈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허면 전자 상거래는 스마트 클라우드를 앞서는 것이 확실하겠지?”
“믿어 주십시오. 신성 반도체, 신성 소프트에서 적극적으로 협조만 해 준다면 스마트 클라우드는 문제없습니다.”
“TF를 조직하고 직접 인선하게. 임원 몇 명까진 괜찮네.”
“헉! 감사합니다.”
이 회장의 말은 아주 파격적이었다. 인선을 누구에게 일임한 경우는 신성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임원까지 인선하라니. 황기우 사장은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