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청혼 (75/104)

제2장 청혼

“이리 앉아요. 차는 뭐 좋아하나요?”

“취향은 딱히 없습니다. 다 좋아합니다.”

“호호, 내가 키운 로즈마리가 아주 향이 좋아요. 케이, 부탁하마.”

“예, 준비할게요.”

분명히 실내로 들어왔는데 마치 식물원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케이가 강원도에 세운 카페가 이곳의 인테리어를 따라 했나 보다. 묘하게 분위기가 닮았다. 기둥을 두고 유리창만으로 벽을 만들었는데, 사방이 흔히 볼 수 없는 화초와 나무로 가득했다.

쪼르륵.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케이가 찻잔을 채워 준다. 차향이 기가 막히다. 직접 키운 게 다르긴 다르다. 하워드도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자! 차도 대접했으니 불청객의 말부터 들어 볼까요?”

로메티 여사가 하워드를 쏘아보며 재촉했다. 뭔 말인지 들어 보고 후딱 내쫓겠다는 뜻인가.

“로메티, 일단 필립의 일은 정말이지 유감이야. 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그 말은 이제 그만해요. 필립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요.”

“흐흠… 그래, 그렇겠지.”

“하고픈 말이 뭐예요? 케이와 미스터 유까지 앞세워서 말이에요.”

“여기 오기 전까지 이사들이 모여 회의를 했어. 아주 큰 건이지.”

하워드는 시카고에서 했던 회의를 요약해 로메티 여사에게 설명했다. 차분히 차를 마시며 듣던 로메티 여사는 내가 미국 제조업에 투자하겠다고 말한 부분에서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와 눈을 맞췄다. ‘진심이냐?’ 하는 눈짓이었을 거다.

나는 정중한 목례로 답을 했다.

“마치 내가 10여 년 전에 했던 실수를 반복하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하워드, 정말 고민한 거 맞아요?”

“솔직히 두 가지 일로 고민했어.”

“두 가지씩이나요?”

“한 가지는 미스터 유가 지금까지 벌인 사업이 하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그걸 케이가 지지했다는 거지.”

“결국 둘 중 어느 것이 되어도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거군요.”

“그래, 맞아. 솔직히 AOL 공매도는 실패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로메티 당신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핑계가 되잖아.”

“……!”

“하워드 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세요?”

케이가 발끈했지만 하워드는 진심이라는 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언제나 월가의 청혼은 그런 식이죠. 사람을 정치와 돈으로 보다니.”

“엄마는 또 무슨 말이에요? 청혼이라뇨!”

케이가 번갈아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로메티 여사는 나와 눈을 맞추면서 말은 하워드에게 했다.

“하워드, 리처드가 부탁하던가요?”

“맞아. 그의 아들은 로메티도 본 적 있지 않나? 하버드를 수석으로 졸업했을 뿐 아니라 못하는 스포츠가 없어. 한마디로 흠잡을 데 없는 청년이지. 케이와 아주 잘 어울릴 거야.”

“여태까지 실망이 컸겠어요. 케이가 실패하지 않고 차곡차곡 지분을 쌓아서.”

“조금은 의외였지. 영국에서든, 일본에서든 한 번은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심지어 미국에선 유통업으로 훨훨 날고 있으니 연결시킬 재간이 없었어.”

“그래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오시는 거군요.”

“그리 말하니 섭섭하군. 여태 우리는 서로 도우며 많은 이득을 챙겨 오지 않았던가. 결혼은 가장 안전한 투자임에 분명해.”

로메티도 하워드의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하지 못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돈 있는 이들은 서로 뭉치기 마련이다. 자본이 모이면 힘이 커지고, 혈연은 정보 교환의 한계를 무너뜨린다. 심지어 돈세탁과 탈세에 가까운 절세까지 가능해지고 말이다.

“아쉬워서 어쩌죠? 벌써 경쟁자가 있네요.”

“경쟁자라니. 누군가?”

“눈앞에 있는데 보면서도 몰라요?”

“응? 미스터 유? 그럴 리가…. 이 청년은 케이가 동업자라고 선을 그었어.”

“동업자는 무슨! 내 딸이 그 정도로 만족할 것 같아요? 스스로 돈을 벌어 보겠다고 미국을 떠났던 아이예요.”

로메티 여사와 하워드의 말이 길어질수록 나와 케이는 자리가 불편해졌다. 굳이 이런 식으로 얘기가 진행되는 건 바라지 않았는데 말이다. 청혼을 한다면 로메티 여사에게 먼저 운을 떼고, 케이에겐 근사한 곳에서 청혼하고 싶었다.

로메티 여사의 말은 케이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케이는 나와 티격태격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결국 모든 사안에서 내 의견을 따라왔다. 일방적으로 나를 믿고 의지했다기보다 내가 벌이는 도박에 확신을 더해 주는 역할을 했다. 단순한 동업자가 아니다. 나도 내심 그걸 알았기에 케이가 내 밥상에 숟가락을 얹으면 모르는 척 반찬까지 더 밀어 줬고 말이다.

“로메티, 난 케이가 아니라 미스터 유를 말하고 있어. 미스터 유의 눈빛을 보고도 그러나? 우리 정도의 경험자면 그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 알잖아.”

“…….”

“하워드 아저씨! 수한 씨 눈빛은 원래 저래요. 언제나 침착하다고요.”

“케이, 남자든 여자든 사랑에 빠지면 눈빛부터 달라져. 너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구별할 줄 알게 되지.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눈빛과 미지근한 눈빛을.”

하워드가 나를 두고 선을 넘는다. 근데 어느 면에선 맞는 말이라 한숨부터 나온다. 회귀하고서 처음으로 내가 전생의 기억을 잊고 케이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불꽃같은 사랑이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건 노력한다고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나는 전생의 아내였던 젊은 희연이를 만나면 다시 불꽃이 피어날 줄 알았는데, 그것조차 헛된 일이었다. 아마도 난 내심 그걸 확인하기 싫어서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던 것이리라.

“하워드 님, 1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봐, 미스터 유! 난 지금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어. 아직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했다고.”

“그 정도면 충분히 의사 전달은 하신 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로메티 여사가 어떤 결정을 하건 하워드 님은 셋 중 하나를 얻으실 것 아닙니까.”

“자네가 나설 때가 아니야. 잠자코 듣기나 해.”

“돌아가서 결과를 기다려야 할 사람은 하워드 님이십니다. 한미 합작 회사의 지분을 얻게 되든, 로메티 가문의 호의를 얻으시든, 리처드 님의 변함없는 우정을 얻으시든 뭐든 얻으실 테니까요.”

옆에서 로메티가 끼어든다.

“미스터 유가 제대로 말했네요. 돌아가요, 하워드.”

“로메티!”

“지금 돌아가면 사과를 받아 주겠어요. 그리고 리처드에게도 전해 줘요. 정중한 청혼에 감사한다고.”

로메티는 대뜸 사과를 받아 주겠다는 말을 했다. 하워드가 깜짝 놀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로, 로메티… 정말인가?”

“네. 그러니 돌아가요.”

“그래, 내 당장 돌아가지. 아!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난 로메티가 무슨 결정을 하든 동의할 거야.”

하워드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뭔 말을 했는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돌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무조건 동의한다는 말을 남기곤 휙 하니 사라져 버렸다.

    • *

차가 식어 버렸다. 원래 이런 분위기를 만들고 싶진 않았는데 하워드가 다 망쳐 버렸다.

“수한 씨, 하워드 아저씨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원래 말을 막 하시는 분이에요.”

“신경 안 써. 케이도 신경 쓸 필요 없어.”

“당연하죠. 수한 씨 눈빛은 식은 게 아니고 원래 침착할 뿐이에요. 지성의 증거죠.”

케이는 내 말에 눈빛을 반짝거린다. 마치 제 말에 어서 동의해 달라는 듯 말이다. 나는 케이의 손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걱정 마. 나도 진심이니까.

“수한, 뭐가 그리 불안하죠?”

로메티가 내 눈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린다. 하워드보다 한층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보는 눈빛이다. 한때 파라곤 상임이사를 지낸 여성답다. 내 이름을 직접 부르며 말을 하니 심장을 쿡쿡 찔러 대는 기분이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으로 충분한가 싶어서요.”

“가지고는 싶은가요?”

“케이는 물건이 아니잖습니까? 물건이었다면 안주머니에 넣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을 겁니다.”

내 말에 케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이런 반응조차 나의 불안을 키운다. 과연 내가 이런 케이의 열정에 맞춰 줄 수는 있을까? 호의와 믿음만으로 국적과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호호호, 월가의 청혼보단 외려 낭만적이군요.”

“…….”

“하지만 낭만만으론 부족하죠. 그리고 수한의 불안감을 없앨 방법도 있어요.”

케이가 의아한 얼굴로 로메티를 본다.

“엄마, 대체 수한 씨가 뭘 불안해한다는 거예요?”

“수한, 미국인이 되세요.”

“엄마!”

케이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두 손을 꼭 모았다. 그런 묘안이 있었네! 하며 몸이 먼저 반응했다고 할 것이다.

“싫습니다.”

내가 미국인이 되려고 했다면 회귀 초기에 그렇게 했을 거다. 케이를 얻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미국에 본거지를 두면 나는 귀족이 되는 게 아니라 로메티 가문의 데릴사위가 될 뿐이다.

“한국인으로 있으면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파라곤의 힘을 빌려야 할 거예요. 이참에 로메티가의 일원이 되세요. 아니, 수한이라면 로메티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어요.”

“국적을 바꾸다니,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아시안은 태생적 한계가 있어요. 월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

“엄마! 수한 씨는 여태 한국인으로서도 놀랄 만큼 잘해 왔어. 그냥 우리 가문은 도와주기만 해도 돼. 서로 윈윈할 수 있다고.”

케이가 마주 잡았던 두 손을 풀고 휘휘 저으며 내 말을 지지했다. 오늘따라 유독 귀가 얇아 보이는 케이다. 그래, 내가 저래야 하는 건데. 내가 케이처럼 감정에 휘둘려 오락가락하는 순수한 모습을 보였다면 이 청혼은 단박에 결혼으로 향했을 거다. 로메티는 우리 둘의 손을 맞잡고 축복을 해 줬겠지. 굳이 미국 시민권을 얻으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미안하지만 난 동의할 수 없구나. 수한은 의견이 확실한 것 같으니 케이 네가 결정하거라. 미국인과 결혼할 거냐? 아니면 한국인과 결혼할 거냐? 만약 후자라면 난 축복해 줄 수 없어.”

“엄마!”

“결정해.”

로메티 여사는 한때 큰 집단을 이끌었던 리더답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압박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정면이 안 되면 측면으로 찌르는 거다.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상관없어. 난 수한 씨면 족해! 엄마도 아빠를 택할 때 그랬다며!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상관없다고 했다며!”

“그래서 결국 일이 터졌잖니. 필립이 왜 그 일을 당했는데! 군대 다녀온 남자에게 경호원이 왜 필요하냐며 영웅 행세를 가르쳤어.”

“엄마, 그건 사고였어! 사고였다고!”

“막을 수 있었어. 내가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고.”

“자학하지 마. 필립 오빠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어. 아빠한테 인정받고 싶었을 거라고.”

“그럼 넌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니? 난 이제 그런 멍청한 짓은 두 번 다시 못 봐! 결정해! 미국인이야, 아니면 한국인이야?”

“난 수한 씨라고 했지!”

두 모녀의 대화는 언제나 이렇게 흘러갔을 거다. 케이가 연말에 미국에 머물다가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여독 이상의 피곤이 묻어 있었거든.

“케이, 조금만 진정해.”

보다 못해 내가 끼어들었다. 모녀지간에 싸워서 좋을 게 없고, 그 타깃이 내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도 로메티 못지않은 경험치가 있다. 옆구리를 찌르는 공격은 슬쩍 흘려 내면 그뿐이다. 그럼 원래대로 돌아온다.

“난 수한 씨를 알아. 언제나 어려운 길을 택하지. 그런데 그 길을 가는 이유는 가장 좋은 결과가 그 길 끝에 있기 때문이야. 수한 씨는 쉽고 작은 열매를 바라지 않았어.”

“그 열매라는 게 뭐니? 결국 돈과 권력 아니니? 파라곤을 제대로 이용하려면 미국인부터 되어야 해. 그러면 너희 2세는 누구도 넘보질 못해. 내가 그리 만들어 주마.”

“아니야, 엄마는 수한 씨가 한국에서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그래. 부러움이 아니라 존경을 받고 있다고! 수한 씨는 월가의 돈벌레들을 뛰어넘을 거야. 난 알아!”

“……!”

케이의 말에 로메티가 처음으로 뒤로 밀렸다. 솔직히 나도 케이의 말에 조금은 감동했다. 내 욕심을 이리 완벽하게 이해하며 포장해 줄 수 있는 여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케이, 나와 함께해 주겠어?”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수한 씨… 진심이에요?”

“진심이야.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너무나도 상투적이지만 생각나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가지고 있던 반지함을 꺼내 열었다. 하워드의 말을 듣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 다녀온다는 핑계로 후다닥 사 가지고 왔었다. 5천 달러쯤 하는 다이아 반지가 제일 비싼 거라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오오! 수한 씨, 너무 예뻐요.”

“한국 가면 더 멋진 거 사 줄게. 당신 백화점에서.”

“필요 없어요. 너무 예쁜걸요.”

나는 케이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고 이마에다 뽀뽀를 해 줬다. 로메티 여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축복은 아니더라도 동의는 가능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집안 내력인가 보군요.”

로메티 여사도 이런 식으로 로메티 장군과 이어졌나 보다. 그녀는 케이에게 다가가 뺨에 뽀뽀를 하며 축하해 주는 모습이었다. 결국 나와 케이의 마음을 확인하는 조언자 역할을 한 셈이다.

“엄마, 축복해 줘. 이거 너무 예쁘잖아.”

“그래, 네 인생은 네 것이지. 축복은 네 아이들에게 하마.”

로메티 여사도 한발 물러서는 모습이다.

“감사합니다. 동의해 주셔서.”

“최종 결재는 아직이에요. 사윗감 후보의 실력 좀 볼까요?”

“실력이라뇨.”

“내가 하루 종일 정원 관리만 할 리 없잖아요? 따라와요.”

“…….”

뚜벅뚜벅.

로메티 여사는 정원처럼 꾸며진 거실을 빠져나갔다. 대체 집이 얼마나 큰 거야. 기다란 복도를 지나가면서 중간에 마주친 사내에게 뭔가를 이르는가 싶더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개인 집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케이는 연신 내 팔에 찰싹 달라붙어 꽁냥꽁냥하고 있다.

위잉.

3층 정도인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모니터가 수십 대쯤 있고, 설치된 컴퓨터는 한눈에 봐도 가정용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사내들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자세를 잡는다.

“AOL이라고 했던가요?”

“최종 목표는 AOL이지만 지금은 소프트뱅크부터 처리했으면 합니다.”

“흐흠, IT 버블은 일본부터 터져야 하나 보죠?”

“그래야 미국에 신호를 주니까요. 지금 공매도하고 내년 1월 말에 모두 AOL로 옮겼으면 합니다.”

“그리고요?”

“3월 말에 전부 정리합니다. 미국에 대한 100억 불 투자는 그때까지 상세 계획을 가져오겠습니다.”

“100억 불씩이나.”

“대신 나머지 수익이 묶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파라곤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로메티 여사는 내가 시점까지 들먹이며 주가 폭락을 확신하자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여하튼 주식 선매도야 파라곤이 나서면 상황 변동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심지어 내 돈을 먼저 앞세우니 파라곤이야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케이, 뭐하니? 네 남편 될 사람 계좌는 알려 줘야지?”

“호호호! 수한 씨 돈이 얼만지 보면 엄마도 깜짝 놀랄걸.”

타타타타타….

케이는 아주 기분 좋게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반지가 유독 반짝거린다. 예쁘다. 대충 보고 후다닥 주머니에 넣고 왔는데 차분히 살펴보니 잘 고른 것 같다.

    • *

「시카고 IT 제품 박람회, 올해의 키워드는 LCD 디스플레이와 VOD」

「엔고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1달러 환율 145엔 돌파」

「일본 주식 시장 대폭락 중, 소프트뱅크 연일 하한가」

「IT 버블이 현실화되나, 인터넷 선두주자 파이오니어 주가 급락」

「America Online 대규모 합병을 준비 중. 상대는 누구인가?」

경제지에 실린 기사들이 모두 심각한 뉴스들이다. 거의 모든 것이 원래 역사대로였지만 파이오니어 주식은 생각보다 빨리 급락세로 돌아섰다.

특히 일본 주식 시장이 폭락하는 원인은 월가의 경제지에서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미국 금리 인상에 따라 외국인들이 일본 주식을 미친 듯이 매도하고 있어 엔화 환율이 천장을 뚫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여파로 소프트뱅크처럼 달러로 판권을 계약한 회사들의 수익률이 급격히 떨어져 또다시 매도세가 발생하는 악순환이었다. 소프트뱅크가 MS 윈도우를 팔 때마다 적자를 보는 식이 되어 버렸으니 현상적으론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문의 분석은 단순히 현상만 본 것이고, 결국 주식 투자자들은 IT 버블이 터지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논리대로라면 VOD 사업의 최대 수혜자인 파이오니어 주식은 오히려 주가가 올라야 하지만 동반 폭락하고 있지 않나. 사람이란 결국 논리보다 감정에 굴복한다. 그런 감정 중에서도 강력한 것이 큰 손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수한, 여기도 땅을 좀 파 줘요.”

“예, 로메티 님.”

나는 오늘로 닷새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 불과 닷새 만에 주식 시장 판도는 완전히 바뀌고 있다. 케이와 나는 소프트뱅크의 추이를 살피기 위해 여태 머무르고 있었다. 오늘 정도면 케이만 남기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다. 로메티 여사의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AOL건도 잘 처리할 것 같아 한국에서 모니터링을 해도 될 듯싶다.

“튤립 구근은 따로 담아야 하나요?”

“종이 박스에 담아서 창고의 냉장고에 넣어 줘요.”

“예.”

나는 튤립 구근은 고구마 캐듯 캐내서 따로 보관해야 한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온실 속에 사는 녀석들은 이렇게 인공적으로 겨울을 느끼게 하지 않으면 이듬해 건강한 꽃을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정원 전문가의 말이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오히려 이런 일을 로메티 여사가 직접 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땅을 파고 구근을 하나씩 종이로 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보통 아줌마나 다름없다.

텅! 텅!

나는 커다란 냉장고 안으로 구근 박스를 차곡차곡 옮겼다. 대체 튤립을 얼마나 심어 놓은 건지 구근만 열 박스 넘게 옮겨야만 했다.

“휴우, 수고했어요. 이제 좀 쉴까요?”

꿀꺽꿀꺽.

온실에 놓인 탁자에는 이미 차갑게 식힌 차가 있었다. 차가운 로즈마리 차를 보리차처럼 들이켜니 꽤나 신기한 맛이 난다.

“더 도와 드릴 일이 있을까요?”

“오늘 할 일은 이게 전부네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운동도 하고 좋죠.”

장갑을 벗고 철제 의자에 털썩 앉은 로메티 여사는 깔끔하게 정리된 온실을 보며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호미를 잔뜩 사서 보내 줄까 싶다. 모종삽과 괭이만으론 섬세한 작업이 힘들다.

“어째 수한은 여느 사람과는 다르네요. 다른 이들은 이쯤 되면 내가 왜 정원을 가꾸는지 묻곤 하는데.”

“취미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호호, 수한과 대화를 하면 꼭 내 또래와 말하는 것 같아요.”

“딱히 의미를 둔 말이 아니라, 부러워서 드린 말씀입니다.”

“호호호호.”

로메티는 기본적으로 케이와 비슷하다. 맘에 드는 말을 들으면 웃기부터 한다. 로비와 투자를 본업으로 하는 양반치고는 감정 표현에 너무 솔직하다고나 할까? 오히려 그런 점이 돈이 전부인 물주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일 수도 있겠다.

“저는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AOL 건은 케이에게 맡겨도 될 것 같습니다.”

“케이를 두고 갈 건가요?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약혼자를 집안에 소개시키는 것이 관례 아니던가요?”

“제가 먼저 돌아가서 기본적인 준비를 한 뒤에 본격적으로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준비는 핑계고 여기에 더 머무는 것보다 한국에서 일하는 게 훨씬 편할 것 같다. 아무리 로메티 여사가 친절하다고 해도 내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으흠, 연말을 같이 보내면 좋을 텐데. 결혼 준비를 같이 하는 것도 아주 멋진 경험이고.”

“약혼식도 하고 결혼식도 하고, 좋은 시간일수록 길게 길게 가져가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수한은 일하는 재미를 아는군요.”

“로메티 님만 하겠습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혼자서 땅을 가꾸시는데요. 결혼 준비는 케이와 의논해 가며 같이 하니까 오히려 즐겁습니다.”

“호호호, 맘에 드는 말만 쏙쏙 골라서 하는군요. 로비스트 하면 참 잘하겠어요.”

“맘에 드실 때 굿바이 해야겠죠?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따로 배웅은 하지 않을게요. 케이는 아마 거실에 있을 거예요.”

“예.”

로메티 여사가 나를 가볍게 포옹했기에 나 또한 양쪽 뺨을 맞대며 인사를 했다. 흙이 묻어도 별 상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기 와서 느낀 점 중 하나는 흙은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손에서 느껴지는 보슬보슬한 느낌과 특유의 흙냄새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쏴아아아.

나는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챙겨 온 슈트케이스도 따로 없었기에 누군가 사다 놓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기성복은 아닌데 어떻게 내 사이즈를 아나 싶을 정도로 핏이 정확하게 떨어진다.

뚜벅뚜벅.

거실로 나왔더니 케이가 서성거리고 있다. 오늘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해 둬서 그럴 거다. 요즘 나를 보는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 왠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눈빛을 바꾸라고 할 수는 없기에 싱긋 웃어 줬을 뿐이다.

“언제 나왔어? 날 기다린 거야?”

“정말 크리스마스 따로 보낼 거예요? 올해는 아버지도 시카고가 아니라 버지니아에서 연말 휴가를 보내기로 하셨는데.”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나름 까칠함을 표한다. 이런 것조차 그녀에겐 재미다. 3층에서는 어마무시한 돈이 오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한 층 아래에선 이런 사소한 일로 대화가 오간다.

“쇼 케이스는 동료들에게 맡겼지만, 소프트뱅크는 그럴 수 없잖아. 너무 망가지면 안 된다고.”

“여기서 원격으로 일 처리하면 되죠. 결국 주가 보존해 주는 게 전부잖아요.”

“로비스트가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인데? 더 배워야겠어, 케이.”

로비스트가 제일 먼저 받는 수업은 ‘사람 장사를 어찌 하느냐?’이다. 단기적으론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사람이 남는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투자하는 게 로비의 정석이다. 마음의 빚은 이자가 크기에 결국 남는 장사가 된다.

손정의 회장은 조만간 나를 찾을 것이 분명하다. 내년에 나와 주식 지분 10%를 교환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걸 빌미로 주가 회복을 모색하려 할 것이다.

“휴우, 아쉬워서 그러죠. 여기 겨울 날씨가 얼마나 좋은데요.”

“언제는 시카고 겨울이 멋지다고 하지 않았어?”

“시카고 겨울도 멋지죠. 그래서 우리 가족은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겨울 휴가를 보내요.”

“내년부터 서울의 겨울도 끼워 넣으면 되겠네. 강원도 카페도 지낼 만하잖아.”

“오홍.”

케이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간다. 케이는 말 그대로 금수저. 태어날 때부터 돈 쓰는 재미를 알고 있는 여자다. 내가 운을 떼자 벌써부터 강원도 카페를 어떻게 확장할지 생각하나 보다.

“자, 연말 휴가 잘 지내고 1월 중순에 한국에서 보자고.”

“한 번은 안아 주고 가야죠!”

“이렇게?”

휘이이잉.

“꺄아악!”

나는 케이의 허리를 감싸 안고 휘잉 한 바퀴 돌려 주었다. 내 행동이 케이에게 조금은 의외였는지 무척이나 좋아한다. 두어 번 돌려 주고 마루에 내려놓고는 이마에 살짝 뽀뽀를 해 줬다. 케이는 구겨진 셔츠를 매만져 주는 척하며 고개를 들지 못한다. 케이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너무 일만 하지 말고 건강도 생각하세요. 가끔 전화도 주고요.”

“잔소리도 귀엽네.”

“잔소리가 아니라 챙겨 주는 거예요.”

볼멘소리로 대답하는 케이의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오른다.

“AOL 잘 진행되는 거 보고 와. 알았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연말 휴가 잘 보내고, 내 사랑.”

쪽.

나는 한 번 더 이마에 뽀뽀를 해 주곤 민망함에 뒤돌아섰다. 두 손을 뺨에 대고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케이의 모습이 뒤통수에서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생경한 단어를 썼구나 싶다.

“내가 요 앞까지 배웅할게요.”

케이는 배웅한다면서 내 등에 올라타 질질 끌려왔다. 발에 힘을 쭉 뺐는지 계단을 내려가는데 퉁퉁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등 뒤에서 연신 까르르 웃는 소리를 내면서 좋아라 한다. 다 큰 여자가 어린애처럼 행동하니 나도 클클거리며 웃어 줬다.

“수한 씨, 한국에서 봐요.”

“조심해서 와.”

“예에~”

이미 집 앞에는 럭셔리한 리무진이 도착해 있었고 내가 올라타자마자 휭 하니 공항으로 향했다. 케이는 연신 내게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버지니아의 겨울은 마치 가을 같다. 봄에서 가을까지, 그리고 다시 봄. 겨울 따윈 냉장고에서나 느껴야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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