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틴은 은근히 이사들을 압박했다. 하워드와 리처드가 표정이 굳어지며 대뜸 말을 받지 못했다.
“손을 들어 보도록 하지요. 일단 한 표를 위임받은 케이는….”
“저는 수한 씨에게 한 표예요.”
다들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럼 상임이사인 저도 의견을 밝히는 게 좋겠군요. 저는 기권하겠습니다.”
“으음.”
“헉, 할아버지!”
“…….”
케이슨이 왜 기권을 하지? 나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스틴은 당연히 자신에게 표를 줄 테니 현재 1대 1로군요. 이제 제조에 투자하느냐 금융에 투자하느냐는 하워드, 리처드 두 분 결정에 따라 정해지겠군요. 무승부로 만들어 전체 투표로 가져가고 싶진 않으시겠지요?”
조금 이해가 될 법도 하다. 케이슨이 내심으론 나를 밀고 있다고 해도 나로 인해 파라곤의 이사들이 대립하길 바라지 않는 거다.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할 바엔 내게 AOL 공격은 포기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하워드, 리처드 둘 다 나에게 표를 던져야만 승산이 있다는 뜻이다.
“이봐, 리처드. 아무래도 케이슨이 우리 둘에게 공을 넘긴 것 같은데?”
“평소처럼 우리 둘의 표를 찢어 중립을 지킬 수가 없겠어.”
“어렵군. 이럴 때 버지니아가 있었다면 제대로 된 판단을 했을 텐데.”
“하아! 좋은 생각이군. 버지니아에게 의견을 물어보자고.”
버지니아? 버지니아 로메티 여사를 말하는 건가? 내 추측이 맞는지 저스틴이 인상을 와락 구기며 말을 내뱉었다.
“어찌 버지니아 로메티를 끌어들이십니까? 제조업의 대모나 마찬가지인데.”
“이봐, 저스틴. 그녀는 자신의 투자 전략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상임이사를 내놓은 인물이야. 자네라면 그럴 수 있겠나?”
“맞아. 그녀라면 이 일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거야.”
“으흠….”
저스틴은 두 할아버지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파라곤의 상임이사직을 내놓는 것은 그가 생각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워드, 내 표를 자네가 행사하게. 버지니아를 직접 만나 의견을 물어 주게. 자네라면 버지니아가 만나 주지 않겠나.”
“하아, 왜 어려운 일은 내게 미루는가.”
“케이도 나서 줄 것 같으니 같이 가면 되잖나.”
“케이가 앞장서 준다면야….”
“아니, 저보고… 이사님들을 모시고 가라고요?”
나는 대화 분위기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로메티 여사가 무서운 사람이라도 된다는 듯 얘기하고 있다. 케이슨도 뭐라고 나서지 않는다.
“버지니아는 전화도 안 받잖아.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어.”
“하워드, 간 김에 내 사과도 전해 주게.”
“이 사람 참…. 같이 안 갈 건가?”
“부탁하네.”
“휴우, 알았네.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들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보다. 케이슨과 저스틴은 묵묵히 대화를 듣다가 함께 자리를 떴다. 케이슨이 같이 나갔으니 저스틴의 입단속은 할 것이다.
“저도 같이 가죠.”
“어머, 수한 씨도 가게요?”
내 말에 케이가 반색한다.
“오호. 좋구만, 좋아. 젊은 사람이 끼면 좋지.”
당연히 나도 같이 가야지. 이런 대박 기회는 향후 20년 내에는 없다. 게다가 왠지 이번 미국 방문은 나비효과의 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잡스의 말도 마음에 걸리고 말이다. 정략결혼이 내 인연의 끝이라면 청혼은 케이의 부모 앞에서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짝!
“수한 씨가 낀다면 무조건 제가 앞장서야겠네요. 어서 가요.”
“바로?”
“여기 너무 오래 있었더니 미치겠어요. 어디로 가든 일단 밖으로 나가자고요. 비행기 표는 바로….”
“비행기는 걱정 말거라. 내 전용기로 가자꾸나.”
“아, 전용기 타고 오셨구나.”
이 양반들 정말 오랫동안 감금당했나 보다. 가자고 하니 벌떡 일어나 공항으로 직행했다. 가면서 물어보니 케이의 모친은 버지니아에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기분이 좋았다. 정말 피곤했기에 비행기에서 한숨 자고 싶었으니까.
- *
휘이이잉!
전용기는 처음 타 보는데 서빙을 해 주는 직원도 따로 있었다. 잠을 청하려 자세를 잡으니 와인을 가져다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실눈을 떠 봤더니 하워드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다. 전용기라 자리가 널찍하니 마주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니까.
“하워드 님.”
“미안하네. 내가 잠을 깨웠나?”
“아닙니다.”
“혹시 나와 잠시 얘기를 할 수 있겠나?”
“케이도 불러야 합니까?”
“아닐세. 앞 칸에서 자고 있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네.”
“…….”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자를 곧추세워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미 간이 식탁이 펼쳐져 와인잔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으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알고 가야 할 일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버지니아는 매우 진보적인 여성이었네.”
“그렇겠죠. 케이도 그러니까요.”
“그런데 아이 복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야. 케이를 낳고 난 뒤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거든.”
“어….”
“그에 반해 로메티 장군은 보수적인 집안이지. 아들을 얻지 못한 것을 꽤나 안타까워했어. 그래서 어쨌는지 아나?”
“입양을 했나요?”
나는 뻔한 추측을 했지만 하워드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랬지. 그런데 버지니아는 특이하게도 흑인을 양자로 들였어. 지금에야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지만 1980년대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네.”
나는 그의 말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와 개인적인 얘기를 많이 했지만 형제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얘기는 곧잘 했어도 어머니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 케이에게 오빠인가요? 남동생인가요? 이름은 어찌 됩니까?”
“그건 중요치 않네.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헉!”
“내가 굳이 이 말을 해 주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네. 분명 내가 버지니아를 만나러 가면 그녀는 나를 쫓아낼 게 뻔하니 말해 주는 것이네.”
“어째서 하워드 님을 쫓아낸다고 하십니까?”
“얘기하자면 너무 기니까 대충 말해 보겠네. 시카고 대학 일대는 우리가 정비하기 전까지는 우범 지역이나 다름없었어. 부동산을 매입하고 대규모 정비 사업을 벌일 때 나와 리처드는 필립을 교육시킬 요량으로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지. 로메티 장군이 친히 부탁한 것도 있고 해서 말일세.”
아들의 이름이 필립이었나 보다.
“사고가 있었군요.”
“맞아. 지역 주민들과 같이 공청회도 하고 보상책도 논의하고… 나름 일을 열심히 했다네. 그런데 애꿎은 필립이 타깃이 된 거지.”
“타깃이라면….”
“언제나 부동산 개발은 이견이 있기 마련 아닌가. 재개발 단지를 돌아보는 와중에 총격을 당했어. 범인을 잡지도 못했지. 차를 털어 간 걸 보면 단순한 강도 같기도 하고…. 여하튼 나와 리처드의 불찰이지. 혼자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걸 방치했으니까. 내가 왜 그랬는지 지금도 후회막급이네.”
“로메티 여사는, 그가 백인이었다면 홀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겠군요.”
“휴우, 오해야. 나와 리처드는 정말로 필립을 아꼈네. 필립이 공청회에 바로 오지 않고, 현장부터 들러 본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을 뿐이네. 정말 똑똑하고 착한 청년이었는데.”
하워드와 리처드가 파라곤의 시카고학파를 미는 이유겠군. 케이슨이 다시 상임이사가 된 것도, 두 양반이 케이가 하는 일에 유독 호의적인 이유도 그 일의 연장선인가 보다. 역시 세상사엔 가정사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재벌가엔 유독 사건 사고도 많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로메티 여사와 만날 때 조심하도록 하지요.”
“그보다 이리 긴 얘기를 한 것은 부탁이 있어서네.”
“부탁이라 하시면….”
역시 투자자가 하는 일엔 공짜가 없다.
“월가에 로메티 가문과 케이슨 가문의 입김은 대단하지. 우리가 케이를 밀고 있지만, 버지니아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가까워지긴 어렵다고 봐야지.”
“이보다 가까워진다고 하시면….”
“이미 내 아들은 결혼을 했기에 어렵지만, 리처드는 아직 결혼 안 한 아들이 있으니 케이와 연을 맺을 수도 있고, 그게 안 된다고 해도 케이의 아이가 장성하면 내 손자 손녀와도 이어질 수 있지 않겠나.”
그들끼리의 리그를 얘기하고 있다. 로메티 여사 입장에서는 정말 마음에 안 들 수 있겠네. 나름 진보적으로 흑인 아들을 내세워 백인 위주의 혈연을 깨고 싶었던 모양인데 처참한 일을 당한 셈이잖나. 그게 아무리 사고사라고 해도 말이지.
“제가 도울 일이 무엇인지요?”
“버지니아의 오해를 풀어 주게. 자네가 리처드 아들 친구 행세를 해 줘도 좋을 것 같고 말이네. 자네라면 그녀의 오해를 풀어 줄 수 있지 않겠나.”
내가 유색인종인 게 이리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근데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 나를 지칭한 것부터가 맘속 한구석에선 인종차별을 하고 있는 거니까. 역시 세대 차이와 문화 차이는 극복하기 힘든 거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믿고 가겠네. 이것만 도와준다면 나와 리처드의 표는 자네 것이네.”
“알겠습니다.”
하워드는 다시 앞 칸으로 건너갔고 그가 마시다 만 와인잔이 찰랑거릴 뿐이었다.
삑.
딸깍. 뚜벅뚜벅.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자리 좀 치워 주세요.”
“예, 다른 것은 필요 없으신가요? 가벼운 식사도 가능하십니다.”
“필요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기내 승무원을 불러 식탁을 깔끔하게 치웠고, 담요도 치워 버렸다. 이미 잠이 확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승무원을 내보내고 내 전용 칸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나 자신을 다독거렸다. 솔직히 하워드의 말을 곱씹을수록 케이 옆에 다른 남자가 서는 게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왠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 *
부우우웅!
“버지니아는 날씨가 참 좋죠?”
케이는 정말 날씨가 마음에 드는지 차창을 조금 열어 놓았다. 나도 약간은 생경한 날씨에 감동하고 있다. 11월이면 겨울이 지척인데 바람이 온화하다. 동부 연안은 한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렇다.
“응, 좋아. 바람이 온화해.”
“어머니 정원을 보면 더욱 놀랄 거예요. 밀림이거든요.”
“음? 정원?”
“예, 정원. 내 어머니는 모든 시간을 정원 관리에 써요.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 시간이 없고, 거미도 매우 사랑하니까 놀라지 말아요.”
“거미를 사랑하신다고? 하하.”
케이와 떠들어 대며 가고 있는데 뒷좌석에 앉은 하워드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연신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숲을 가로지르는 길을 한참 지나왔다고 생각할 무렵, 여태까지 보지 못한 엄청난 크기의 담벼락과 함께 대저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가 있는 것처럼 나지막한 언덕 위에 뜬금없이 서 있다.
“저 언덕이 케이 어머니 정원이야?”
“정원엔 이미 들어왔고, 집으로 들어가야죠.”
“허….”
어쩐지 숲에서 사람 손길이 느껴지더라니. 이 주변이 전부 정원이라고? 분수대가 있고 꽃밭이 있는 정원을 상상했던 나로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정말 정원이 밀림이잖아.
부우우웅, 끼이익.
차가 다가가자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문 뒤에서 통통한 얼굴의 아줌마가 챙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철컥!
“엄마!”
“케이, 어서 오너라. 뜬금없이 오는 건 여전하구나.”
“연말은 언제나 같이 보내잖아요.”
“작년엔 한국에 있었잖니.”
“그건 그거고!”
케이는 차문을 열고 나가 로메티 여사를 껴안고 마구 볼을 비벼 댔다. 나름 사이좋은 모녀지간인 것 같다.
“오랜만이군, 버지니아.”
“케이, 여기 잘생긴 청년은 누군지 소개해 줘야지?”
로메티 여사는 하워드가 인사를 했음에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외려 내 쪽만 보면서 케이를 재촉했다.
“수한 씨예요.”
“오~ 드디어 데려왔구나.”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입니다. 버지니아 로메티 여사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서 와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말로 듣던 것보다 더 잘생겼군요.”
“하하.”
“날씨가 차갑네요.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해요. 그럴 시간 되죠?”
로메티 여사가 내 팔을 잡고 저택 안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하워드가 같이 따라붙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어디선가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내들이 나타나 하워드를 막아섰다.
“버지니아, 내가 여기 온 게 몇 년 만이야. 나도 어렵게 찾아온 거라고.”
“말 걸지 말아요. 당신과 말 섞기 싫으니까.”
로메티 여사는 하워드에게 저택과 한참은 떨어져 있는 별채를 가리켰다. 그러곤 재차 나에겐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으로 향했다. 하워드가 나와 눈을 맞추며 도움을 청한다.
“로메티 여사님, 하워드 님도 같이 자리했으면 합니다. 조언을 구할 것이 있어서요.”
“…….”
“부탁드립니다.”
“부탁이라고요?”
“예, 부탁입니다.”
“흐흠, 1시간이 넘지 않는다면…. 그 이상 같이하기는 힘들겠어요.”
“그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로메티 여사도 ‘부탁’이라는 말에 약한 것 같다. 모녀가 참으로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