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로메티 여사
파라곤이 미국 월가에서도 유명하긴 한가 보다. 잡스마저 그 집안을 알고 있잖은가. 내가 묵묵히 있자 그도 말을 멈추고 무던하게 바라본다.
“가능하다고 여기십니까? 결국 동업자 관계도 끊어질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만약 그게 두렵다면 AOL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제가 건드리지 않아도 IT 버블은 터집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하지만 잘못 건드려서 월가의 공적이 되느니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어쩌다 얘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나. 나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조언을 해 주는 잡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표정이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몇 가지만 더.”
“그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었….”
“아뇨. 도움이 될 겁니다. 버지니아 로메티 여사는 미국의 전통적인 제조업에 투자하는 것이 파라곤의 역할이라고 믿었지요. 그래서 IBM과 Sun사(社) 같은 초기 컴퓨터 회사에 투자하지 않아 투자자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결국 닥터 케이슨이 다시 전면에 나서며 IT 기업을 밀었죠. 내 회사 애플이 상임이사가 바뀌는 시기에 가장 큰 수혜를 받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잡스가 파라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유를 듣게 되었다. 파라곤이 애플에 엄청 투자를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로메티 여사의 예견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IT 버블은 미국 제조업 몰락의 증거이며, 실체가 없는 사업에 달러만 몰려든 격이니까요. 금융업은 제조업이 없으면 허상에 불과합니다.”
“거대 담론은 제 관심 밖입니다. 저는 제 회사를 키울 방법에 집중할 뿐입니다.”
“그게 당신의 가장 큰 무기입니다. 제조업을 기반으로 승부를 보고 있기에 파라곤의 후계자에게 딱 어울리는 배우자입니다.”
“한국인이라는 넘지 못할 단점이 있지요.”
“당신이라면 방법을 찾을 겁니다. 왠지 그런 확신이 듭니다.”
잡스는 정말이지 내가 파라곤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듯했다. 나를 아끼는 건가? 하긴, 잡스 입장에서 나처럼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을 거다. 나도 잡스에겐 마음의 빚이 크기에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그래요. 좋은 결과! 있기를 기대합니다.”
청혼을 하든, AOL 공격을 멈추든 결국 결정은 내가 할 수밖에 없다. 잡스는 월가를 적으로 돌리는 짓은 하지 말라며, 좋은 결과라는 말에 방점을 찍었다.
“무선 인터넷은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아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했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쇼 케이스에서 뵙죠.”
“이 길 또한 휴대폰의 꽃으로 가고 있는 거죠?”
“…….”
내가 화제를 바꾸며 자리를 뜨려고 하자 잡스는 마지막까지 내 심장을 쿡쿡 찔러 댔다. 괜찮다. 터치스크린은 아직 기술이 여물지 않았고, AP(Application Processor)의 핵심 협력사인 퀄컴과 ARM사 또한 내가 대주주다. 아무리 잡스라도 끼워 넣기 힘든 조각이며, 나 또한 안드로이드의 출현을 기다려야 하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뚜벅뚜벅.
나는 못 들은 체하며 그길로 애플 지사를 빠져나왔다. 나름 실속 있는 대화였다. 내년에 출시할 제품을 미리 상의한 것이지 않나. 애플은 무선 인터넷으로 홈 엔터테인먼트 제품군을 꾸밀 것이며, 나는 그에 맞춰 에그박스와 아이팟을 디자인하면 된다.
- *
“끝났어?”
“응.”
“배고프지?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입구로 나오니 재훈이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곤 대뜸 밥부터 먹으러 가자고 한다.
“너, 내게 숨기는 거 있지?”
“무, 무슨 소리야?”
재훈이가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한다.
잡스가 내게 청혼하라고 조언한 것은 파라곤 쪽에 뭔가 낌새가 있다는 걸 넌지시 알려 준 거나 다름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 애플 지사에 먼저 데려올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대체 케이가 뭐라고 했기에 내 접근을 막는 거야?”
“무슨 말이야. 접근을 막다니.”
“파이오니어, 버지니아 트레이딩, 파라곤 시카고 지사, 모두 한 건물에 있잖아. 뭔 일 있지?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가면 안 되는 이유 말이야.”
“…….”
재훈이 녀석이 말을 못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지금 케이는 내 작전을 실행하려고 하는데, 닥터 케이슨이 반대하고 있는 거다. 그녀가 케이슨에게도 알리지 않고 내 작전에 합류하지는 못할 테니까.
“말해. 얼마나 시간 끌라고 한 거야?”
“이야, 도사 다 됐네. 그래, 케이 누나가 널 사흘만 밖으로 돌려 달라고 하더라. 네가 중국에서 이리 빨리 올지 몰랐다고 말이다.”
“설득이 잘 안된대?”
“대체 무슨 일인데? 그것부터 알려 줘야지.”
“본 것부터 알려 줘. 케이 표정이 어땠어?”
“잘 안되는 느낌이었어. 입꼬리의 웃음이 싹 지워졌더라고.”
케이는 가만히 있어도 입꼬리가 웃음을 띤다. 그 웃음이 지워졌다면 상황이 정말 안 좋은 거다.
“안 되겠다. 네 지분부터 팔자.”
“뭐?”
“자칫하면 IT 버블이 더 빨리 터질 수도 있겠다. 그전에 팔아야 해.”
“무슨 말이야?”
“너, 집에서도 주식 거래할 수 있지?”
“그거야 당연한데, 대체 무슨 일이냐고.”
“10년 더 기다릴 게 아니라면, 올해 말까지 지분을 모두 처분해야 해.”
파이오니어 주식은 증자를 두어 번 했기에 재훈이의 현재 지분은 대략 15%일 것이다. 주당 100달러에 시총이 800억 불이 넘지만 내년 초에는 원래 역사의 야후가 그랬던 것처럼 10분의 1까지 폭락할 게 뻔하다. 120억 불과 12억 불은 차이가 크잖나.
나는 재훈이의 팔을 잡고 일단 주차장으로 갔다. 한 달 치 매도 주문을 주르륵 깔아 놓고, 파라곤을 찾아가도 늦지 않다.
- *
다음 날 정오.
“어후, 피곤해.”
나는 깨어날 줄 모르는 재훈이를 내버려 두고 혼자서 파라곤 지사 앞까지 차를 몰고 왔다. 지분을 모두 처분하라는 내 말에 당연히 재훈이는 펄쩍펄쩍 뛰었고, IT 버블은 반드시 터지게 되어 있음을 설명하느라 거의 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결국 녀석은 지분 중 5%는 남기고 10%만 처분하기로 했다. 80억 불, 한화로 10조만 처분해도 대대손손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러라고 했다. 내가 재훈이의 지분을 다시 거둬들이면 25%는 무난하게 확보할 수 있으니 문제없으리라. 이 정도면 녀석이 고등학교 시절 내게 베푼 호의에는 충분히 보답한 것 같다.
띠링.
‘파라곤이 딴죽 걸 수도 있으니 파이오니어와 소프트뱅크는 미리 터뜨려야 해.’
나는 거듭 다짐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맨 꼭대기로 직행했다. AOL까지 터뜨려야 대박인데 말이다.
뚜벅뚜벅.
다이아몬드 로고가 선명히 새겨진 프런트 데스크가 보인다.
“닥터 케이슨을 만나고 싶습니다.”
“오늘 스케줄이 꽉 차 있으신데, 따로 약속을 하셨는지요?”
“스마트 클라우드 유수한이라고 해 주십시오. 아마 시간이 나실 겁니다.”
“오, 스마트 클라우드. 알겠습니다.”
내 신분을 밝히자 비서가 훅 하고 문 뒤로 사라졌고, 잠시 후 건너편에서 ‘아악!’ 하는 케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
딸깍.
“으흠, 바로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케이슨의 비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 주며 안쪽으로 팔을 뻗었다. 한 번 와 봤던 곳이지만 홀을 가득 채운 휘황찬란한 장식은 다시 봐도 예술이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특급 호텔이나 다름없다. 저 멀리 문이 하나 더 있고, 그 문이 빠끔히 열리며 케이가 어설픈 손 인사를 한다.
“수, 수한 씨, 어서 와요. 전화를 줬으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휴대폰 꺼 놨잖아. 대체 며칠째 여기에 머물렀던 거야?”
“호…호호.”
나는 어설프게 웃고 있는 케이의 등 뒤로 케이슨과 더불어 물주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케이 말에 무조건적으로 찬성하는 로메티 장군만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케이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 케이는 이들을 건물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을 테니 공항에 마중도 못나 왔던 거다. 정보가 통제되고 있는 지금 재훈이의 주식을 팔아야 한다.
“어서 오게, 수한.”
“오랜만에 뵙습니다, 닥터 케이슨.”
“여기 리처드와 하워드는 익히 알 테고, 여긴 저스틴일세.”
“반갑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입니다.”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리처드와 하워드는 핸드 터미널 투자 설명회 때 참석한 이들이다. 파라곤이 시타델파와 결별하면서 이사 자리를 꿰찼나 보다.
저스틴의 딱딱 부러지는 악센트에서 그가 시카고학파의 일원임이 느껴진다. 다른 이들은 60대 할아버지인데, 혼자 40대쯤으로 보이니 파라곤의 물주치고는 매우 젊은 편이다. 하지만 나이만 젊을 뿐, 파라곤의 이사 자리를 꿰찼다는 것은 앉은자리에서 수십 수백억쯤은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하튼 이런 사람들이 내 공매도를 두고 며칠째 감금에 가까운 논의를 하고 있다고?
케이의 부친 로메티 장군은 자리에 없으니 일단 찬성 확정, 닥터 케이슨은 반대에 가까운 중립처럼 보이며, 나머지 세 명의 물주들은 반대가 분명하다. 부정적으로 보면 4 대 1,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3 대 2니 이대로 가면 내 작전은 승인받지 못하겠군. 솔직히 파라곤을 끼지 않고는 AOL을 건들기 어렵다. 아무리 탐이 나는 사냥감이라고 해도 말이다.
“흐흠, 이제야 제대로 된 논의를 할 수 있겠어. 역시 이런 종이 쪼가리보다야 당사자를 앉혀 놔야 되는 거야.”
“후후. 하워드, 그런 소리는 자리부터 권하고 해야지. 미스터 유, 이리 앉게.”
“감사합니다.”
오각형의 탁자에 자리 하나를 내준다.
“긴장하지 말아요, 수한 씨. 잘되어 가고 있었어요.”
케이는 내 자리의 팔걸이에 앉는 척하며 한국어로 귓속말을 해 왔다. 팔걸이조차 푹신하고 넓적해서 앉기에 불편하지 않다. 여하튼, 그리 잘돼 가는 꼴은 아닌데 싶다.
“미스터 유, 케이의 말에 따르면 증시 대폭락이 있을 거라고 하던데.”
역시나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하워드였다. 내가 처음으로 했던 투자 설명회 때 가장 회의적으로 반응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화끈한 지원을 했던 양반이다. 여기서도 반대파의 핵심인가 보다.
“그건 굳이 제 의견이 아니라 파라곤의 전문가들도 예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워드 님도 나름 정보를 수집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타깃이 정해졌으면 툭 질문을 해서 지속적으로 얘기를 끌고 가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인원들에 대한 설득이 자연스레 이뤄진다. 케이가 내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타깃을 잘 정했다고 신호를 준다.
“으흠,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AOL을 폭락시키는 방법론이 너무 과격해. 소액 투자자들이 피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다. 소액 투자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이끌고 있는 중급 물주들이 피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말이다.
“제가 AOL을 폭락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 폭락하는 겁니다. 3,500억 불을 들여 타임워너를 합병한다는 것은 기정사실 아닙니까? 이미 합병 뉴스를 담보로 투자자를 잔뜩 끌어들였고, 계약금으로 350억 불이나 지출했으며 타임워너 임원들도 모두 퇴직시켰습니다. 이미 폭락을 막기는 불가능합니다.”
“허, 정보 한번 빠르군.”
정보가 빠른 게 아니고, 원래 역사를 읊은 거다. 버블이 꺼지는 신호탄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다.
“빠르다뿐이겠습니까? 저는 AOL 투자자 중 일부는 탈출할 계획까지 세웠을 거라 확신합니다.”
“흐흠….”
나는 나름 폭탄 발언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워드는 ‘당신이 그것도 알고 있었어?’ 하며 눈썹만 꿈틀댔을 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AOL의 주식 폭락을 노리는 이들이 나만은 아닌 게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합병 뉴스가 발표되자마자 주가가 10분의 1로 단박에 폭락하기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내 손등에 얹힌 케이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이면을 읽은 것에 놀란 것이리라. 복잡해 보여도 당연한 추측이다. 대규모 사건 뒤에는 꼭 이득 보는 사람이 따로 있다. 아무리 표면적으론 꽁꽁 숨겼다고 해도 누가 이득을 보는지 끝까지 쫓아가면 배후 세력을 감지할 수 있다.
“하하. 하워드 님, 미스터 유가 천재라고 하더니 정말 그렇군요.”
“저스틴,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야. 이건 단순한 주식팔이 돈놀이가 아니라고.”
“하하, 그렇죠. 월가에 대항하는 제조업의 리더신데 어련하시겠습니까.”
“돈놀이에 심취해선 안 돼. 미국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제조업에 투자가 되질 않으면 결국 금융업도 망해. 시장엔 그 정도의 시그널을 주는 것만으로 족해. 적당히 IT 버블을 터뜨려야지 폭락은 곤란하다고.”
“어설픈 하락보단 차라리 폭락이 낫습니다. 아무리 높은 절벽이라도 한 번 떨어지면 회생 가능성이 있지만 여러 번 떨어지면 결국 죽거든요.”
으흠, 저스틴과 하워드의 말을 듣고 있자니 케이가 말했던 ‘잘돼 가고 있다’는 뜻을 알 것 같다. 나름 저스틴은 AOL의 공격에는 찬성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스틴이 반대하는 것은 단 하나. 폭락장에 나라는 아시안이 끼어들어 파이를 나누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파라곤의 상임이사로서 한마디 거들겠습니다. 우리는 일개 투자자가 아니라 파라곤 전체 투자자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파라곤의 운영 지침은 ‘안전’이며, 목적은 언제나 ‘부의 영속성’에 있습니다. 현재 인터넷 산업이 과열되었다고 판단하는 데는 모두 동의하실 테니, 이를 연착륙시키고 올바른 방법으로 재차 끌어올릴 방법까지 강구해야 합니다.”
“닥터 케이슨, AOL을 먹이 삼아 금융업에 돈을 돌려야 합니다. 부동산에 투자해도 되고, 석유에 투자해도 되고, 세계 유통 시장을 독점해도 됩니다. 인터넷 기업 주식은 지속적으로 먹잇감이 되어 줄 겁니다. 말 그대로 선순환이자 세계 경영을 하는 거죠.”
“저스틴, 그런 사고방식이 문제야. 그따위 투자 전략으론 미국의 제조업이 죽어 나갈 수밖에 없어. 부의 영속성은 언제나 생산에 있어.”
“나도 하워드의 말에 동의하네.”
“하하, 왜들 그러십니까? 이미 투자의 트렌드는 금융 자체로 옮겨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AOL 공격은 여기 미스터 유가 아니라 내게 맡겨 주십시오. 그게 궁극적으로 파라곤에 이득이 될 겁니다.”
저스틴은 아예 인터넷 기업은 주식을 부풀려 돈을 만드는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이 판은 2:3이 아니라 2:2:1 정도라고 하는 게 맞겠다.
“IT 산업은 제조업, 금융업이자, 인프라 산업이기도 합니다. 그걸 먹잇감으로 여기시면 곤란하죠.”
“후후. 미스터 유, 사안을 협소하게 보면 안 되지. IT 산업이 소중한 이유는 세웠다 무너뜨리기 쉽기 때문이지. 솔직히 인터넷 망은 공짜가 아닌가. 주인이 없기에 회사가 무너져도 작동이 멈추지 않아.”
“한 단계만 올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AOL을 무너뜨린 대가는 제가 충분히 치르게 해 드릴 수 있지요. 제조업이자 금융업이자 인프라 산업이기도 한 제대로 된 IT 생태계를 꾸며 드리죠.”
“하하하, 꿈이 아주 크구만. 아직도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니. 인터넷 산업은 속이 텅텅 비었어. 알맹이가 없다고.”
“그럼 제가 AOL 공매도 참여하는 걸 반대하시면 됩니다. 하워드 님, 리처드 님, 저의 뒷배가 되어 주십시오. AOL을 무너뜨린 대가로 미국의 제조업을 띄워 드리죠. 제돈 250억 불, 파라곤이 500억 불쯤 투자하시죠. 공매도라 투자금의 60%쯤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숫자를 언급하며 제조업을 들먹이자 하워드와 리처드가 표정을 달리한다.
“미국의 제조업을 띄운다고?”
“그럼요. 한국도 중국 못지않은 공장이 되어 드리죠. 대신 싸구려 말고 제대로 비싼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말입니다.”
“여태 무슨 소리를 들었나? 한국에 제조 공장을 세우면 그게 어떻게 미국 제조업을 띄우는 건가? 자네를 끼울지 말지 고민한 게… 흐흠.”
하워드가 말하다가 속내를 들켜 버렸다.
“미국에 한국 기업이 공장을 지으면 되죠.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인터넷 보안, 전자 상거래 센터 등등 원하시는 대로 말입니다.”
“허헉!”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진심입니다.”
다른 이들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하워드는 내 말의 진의를 의심했다. 미국에 제조업 공장을 짓는 것은 미친 짓이다. 인건비는 IT 버블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단위 시간당 생산성은 딱 평균이며, 환경 안전 규정은 지극히 까다로우니까. 애플마저 생산 공장을 대만과 중국에 짓고 있는 판국이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미국에 공장을 세우게 된다. 빌 클린턴의 임기 말에 슈퍼 301조를 들이밀며 관세로 압박을 했기에 미국 정부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자동차 공장과 반도체 공장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왕 짓게 될 바에는 땅값이 싼 지금 투자하는 게 낫다. 무엇보다 이런 거금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먹는 것은 결코 안전하지 않으며, 내 순수 유동자금을 헐지 않고 버블로 번 돈으로 공장을 짓는 것만 해도 큰 이득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미국에 제조 공장을 짓는 것은 남는 장사가 아니네.”
“미국에 공장을 세우는 대가로 관련 품목의 관세 인하를 로비해 주신다면, 미국 법인의 지분 49%를 투자하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수익률을 좀 손해 보더라도 관세 장벽을 낮추고, 점유율을 올리겠다. 그런 전략인가?”
“그렇습니다. 투자할 만하실 겁니다.”
“IT 버블이 터지면 경기는 한동안 바닥을 기게 될 거야. 그걸 알고도 하는 소리인가?”
“버블이 터지는 바람에 얻은 돈으로 투자를 하는데 왜 반대를 하시는 거죠? 파라곤의 ‘부의 영속성’에 부응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크흠.”
하워드는 내 말이 끝나고서야 자신이 속내를 너무 드러냈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이 양반들이 이리 반응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주식 시장 폭락은 경기 하락의 신호탄이니까.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간 미래를 알고 있다. 희한하게도 IT 버블의 끝은 경기 침체가 아니다. 내가 배팅하는 것은 이 대목이다. IT 버블이 터지고 불과 1년 만에 미국 경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된다. 왜냐고? 경기 침체를 두려워한 미국인들이 값싼 소비재를 찾기 시작하고, 중국의 대미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중국 정부는 무역 수지 흑자를 보기 시작하면서 미친 듯이 미국 국채를 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쇄 반응은 미 연준이 금리를 6.5%까지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중엔 달러가 넘쳐 나는 이상한 현상으로 이어졌다. 대출 금리가 예금 이자와 거의 비슷해져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소비 심리가 되살아났다.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경기 활황세가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는 2007년까지 7년간이나 이어진다. 나비효과 정도로 바뀔 역사가 아니기에 반드시 벌어질 일이다.
그러니 이참에 미국 제조업 부흥에 일조한다는 핑계로 미국에 공장을 세워, 해마다 반복되는 반덤핑 소송도 피하고 점유율도 높인다면 결국 남는 장사가 될 거다. 반도체만으론 로비의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우니 고용 효과가 훨씬 큰 대현자동차도 같이 껴야 한다.
“으흠, 미스터 유가 저리 나오니 우리도 이제 의견을 정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스틴의 의견에 따라 AOL을 터뜨려 금융 회사에 투자를 할 거냐, 아니면 미스터 유와 함께 제조업에 투자할 거냐.”
닥터 케이슨이 두 가지 결정 사항을 정해 버린다. 은근슬쩍 내가 AOL 공매도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시 해 버렸다. 케이슨은 내게 표를 던졌다고 여겨도 될 것 같다.
“AOL 공매도도 일종의 도박인데, 제조업 투자라는 도박을 또 하시겠다고요? 이제 파라곤은 주식, 부동산, 외환 시장에서 활약해야 합니다. 설마 여러분이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모르진 않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