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너 군대는 해결하고 있지?”
“문제없다. 나 내년이면 공학박사다. 너처럼 가방끈 안 짧아. 한국에서 특례를 받아도 되고, 미국 시민권도 나올 것 같고. 하여간 입대할 일은 없으니 걱정 마라.”
“돈이 많으니 뭐든 쉽군. 내년에 보자.”
“그래, 잘 가라.”
나는 재훈이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고는 자리를 떴다. 밥이야 두어 번 같이 먹었으니 됐고, 미국에서 더 이상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내 권역은 대한민국이다.
- *
「한중 정상회담이 경협으로 이어지나. 중국 국책 과제에 한국 기업들 대거 참여.」
「5자회담 급물살. 남북 경협이 한반도 긴장 완화의 핵심으로 부각.」
「개성공단 가동 시작. 1999년 매출 10억 불 목표.」
「초고속 인터넷 시대 개막. 1999년 상반기 중 국토 전역에 ADSL 광통신 완성 예정.」
「특집 기획, PC방으로 서민 경제 불황 이겨 낸다.」
「정부의 벤처 진흥책 결실을 맺나. 코스닥 상장사 500개 돌파.」
대한민국의 1998년 12월도 다이내믹하게 흘러갔다. 스마트그룹, 대현그룹, 신성그룹을 필두로 중국 시장 진입이 본격화되었으며, 정부는 ADSL 인터넷 망을 국토 전역으로 확장하고 있고, 코스닥 지수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나는 그런 와중에 한가로이 딴 일을 하고 있다.
“회장님, 저희 정말 이렇게 놀아도, 아니 이런 곳에 와도 되는 겁니까?”
“오 이사님, 이것도 일입니다. 잘 지켜보세요.”
스마트 클라우드는 11월 쇼케이스 이후에 쏟아지는 물량에 대응하기 위해 재고를 풀고, 연일 공장을 풀가동하고 있다. 대량 양산을 하다 보면 사소한 불량을 피해 갈 수 없기에 개발자들은 연일 괴로워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럴 때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김 실장을 부르지 않는 것이며 오 이사를 회사 밖으로 불러내 내년도 일을 기획하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투니버스 시청자 여러분. 드디어 오늘 여러분께서 고대하셨던 제1회 스마트 클라우드 배 스타크래프트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와아아아아아!”
50평 남짓 되는 스튜디오라 관람석이 수십 석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직접 후원을 했기에 무대 장치와 게이머들 방음 장치에 큰 공을 들였다. 관람석에서 앵커와 해설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회를 관람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전자 회사가 게임 대회를 개최하다니 영광이군요.”
“심지어 오늘 관람석에는 스마트그룹 회장님께서 직접 참석하셨다죠?”
“IT의 꽃은 엔터테인먼트이며, 게임을 그중에서도 핵심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앵커와 해설자들이 나를 언급했기에 나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살짝 들어 주었다.
“이제 선수들의 세팅이 모두 끝났다고 합니다. 카운트 들어갑니다.”
“오~ 시작하는군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대한민국 스타크래프트 공식 대회의 첫 대결은 강도경 선수의 저그와 강민 선수의 프로토스로 시작합니다.”
“와아아아아!”
짝! 짝! 짝! 짝!
‘열심히 하세요. 내가 당신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 줄 테니까.’
나는 열심히 박수를 쳤다. 드라마틱한 콘텐츠를 무한정 제공해 줄 선수들이잖나. 유튜브 전성시대는 이것 때문에 훅 하고 빨라질 것이다. 내가 다 먹어 버릴 거다.
- *
용인밸리 중앙 회관
펑! 펑! 펑!
“99 스마트 클라우드 배 스타리그 결승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와아아아아!”
“결승전에 최종 진출한 선수들부터 소개합니다. 먼저 프로토스! 강민 선수를 소개합니다.”
“우와아아! 강민! 강민!”
“이에 대항하는 저그 유저! 국기봉 선수입니다.”
“와아아! 국기봉! 국기봉!”
번쩍거리는 무대에 커다란 스크린이 있고, 대형 프로젝트 TV가 사방에 걸려 있다. LK가 PC와 완벽히 호환되는 디스플레이라며 특별히 협찬해 준 무대 장치다. 선수들이 우주선처럼 꾸며진 룸에 들어가자 정면 스크린에는 리그전에서 펼쳐졌던 명승부들이 광고와 함께 재생되기 시작했다.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작은 스튜디오에서 처음 시작한 스타리그가 이렇게 열풍을 일으키다니 말입니다.”
“열풍 정도가 아니죠. 가히 폭풍입니다. 3개월간의 풀리그를 거치면서 동영상 사이트는 스타리그로 도배가 되다시피 하고, 말 그대로 게이머들이 스타가 되었죠.”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결승전 무대를 용인밸리 중앙회관으로 급히 변경했지만 관중을 모두 수용하기엔 역부족이네요. 이 넓은 6천여 석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찼습니다.”
“스타를 사랑하시는 많은 팬들이 여기까지 오셨다가 입장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거듭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 집에서 투니버스로 시청하셔도 되고, 생방송을 시간을 놓치셨다면 VOD로 즐기셔도 되겠지요.”
“하하, 그렇죠. 저도 4강전은 VOD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명승부였죠. 건당 200원, 스마트 통신사를 이용하신다면 건당 100원이면 충분하죠.”
앵커 한 명과 두 명의 해설자들이 만담 같은 대화를 나눴다. 선수들이 PC 세팅을 점검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일 것이다. 대화 중간에 스마트 통신을 언급하는 립서비스까지 해 줬다. 이 방송을 LK 회장이 보고 있다면, LK 통신을 내게 넘긴 것을 무척 아까워할 것 같다.
“앗! 말씀드리는 와중에 선수들이 컴퓨터 세팅을 끝냈다고 합니다. 5전 3선승제인 결승전의 첫 번째 승부를 펼칠 때가 왔습니다. 관중 여러분의 환호로 시작해 볼까요?”
“강민 파이팅!”
“국기봉 파이팅!”
띠, 띠, 띠. 띠익~
“시작합니다!”
“와아아아아!”
카운트가 끝나자 대형 스크린의 게임 화면이 옵서버 시점으로 바뀌었다. 휘황찬란했던 스포트라이트가 일제히 꺼지자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수한 씨, 이거 정말 멋진 쇼인데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저 또한 회장님 혜안에 놀랐습니다. 이런 게임이 돈이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스마트 통신 시장 점유율이 석 달 새 5%나 올랐습니다.”
나는 2층 VIP석에서 관람을 하고 있었는데, 케이와 권 부장이 연달아 나를 치켜세웠다. LK 휴대폰 사업을 접수하면서 통신사도 같이 접수했는데, 고질적인 주파수 문제 때문에 점유율이 10%대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5% 증가라니 이제 15%쯤 치고 올라갔나 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점유율은 더 올라갈 겁니다. 휴대폰 결제액은 얼마나 늘었습니까?”
“50억쯤 됩니다. 스타리그의 모든 VOD의 편당 유료 다운로드 횟수가 백만을 넘었습니다.”
광고를 보면 무료인데, 유료가 백만 카운트라면 꽤나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리그의 VOD가 상품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VOD 결제액을 휴대폰 요금에 합산하는 시스템을 소비자들이 편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간단히 비번 입력만으로 요금을 결제할 수 있다.
“광고 수익은요?”
“3억짜리 광고가 6개입니다.”
“방송사에 1억, 대회 상금이 총 7천만 원. 1.7억을 후원하고도 그 정도 이윤을 남겼으면 괜찮군요.”
“스마트 통신 점유율 5%를 올렸는데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대박입니다.”
권 부장의 영업 감각은 매우 좋다. 표면적으론 소소한 돈벌이지만 그 뒤에 있는 광고 효과를 생각하면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보통 제조업체 영업맨이었다면 몇백억짜리 대형 거래에 신경 쓸 시간에 이따위 어린애 장난 같은 사업을 왜 하냐고 했을 것이다. 원래 역사에서 유튜브가 세상에 나왔을 때도 투자자들이 많지 않았던 이유라고 할 것이다.
“호호, 저도 대박이라는 데 동의해요. 근데 광고도 광고지만 전 수한 씨가 VOD 판매에 전화 결제 기술을 도입했다는 게 더 대박이라고 봐요. 이 사업은 무궁무진해요.”
케이는 꼭 자신의 일인 양 입이 귀에 걸릴 듯 좋아한다. 케이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돈을 벌었다는 의미다. 케이가 내게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분을 넘긴 뒤로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케이, 뭐 좋은 소식 있지? 그렇지?”
“호호호, 눈치도 빠르셔.”
“뭔데 그래?”
“AT&T랑 베이비 벨이 휴대폰 결제에 엄청난 러브콜을 보내고 있어요. 수한 씨와 연결해 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조건은 뭘 내걸어야 하는지 알지?”
“당연하죠. K폰 유저에게 결제액 할인을 해 주는 조건으로 기술 라이선스 줄 거잖아요.”
케이는 척 하면 척이다. VOD 사업의 목적은 광고 수익과 관련 제품 점유율 상승이다. 한국에선 스마트 통신의 점유율을 높인다면, 미국에선 당연히 K폰의 점유율을 높여야 한다. 케이는 스마트 스토어, 즉 버지니아 트레이딩 매출이 늘어나는 일이니 좋아라 하는 거다.
“말이 잘 통하니 좋네. 재훈이에게 전화해 놓을 테니까 스마트 클라우드, 버지니아 트레이딩, 파이오니어, 미 통신사 이렇게 다자 계약을 맺어 줘.”
“오케이!”
“회장님, 말이 나와서 말씀드리는데 차이나 유니콤, 소프트뱅크, 심지어 유럽 쪽에서도 비슷한 제의가 왔습니다. VOD 사업을 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쪽은 시간을 좀 두고 계약을 합시다.”
“굳이 계약을 미룰 필요가….”
“아닙니다. 미국은 K폰 점유율 확대를 노리며 계약을 하지만 나머지 시장은 VOD 사업 자체에서 최대한 수익을 내야 합니다.”
“……!”
특히 중국은 VOD 시장이 차원을 달리하게 될 거다. 중국에 앰팩 라이선스를 풀고 반도체를 팔고 있기에 음원 시장은 불법 유통을 모른 척하고 있는데, VOD는 그래서는 안 되지. 스타리그 같은 양질의 VOD는 다운로드 횟수가 수천만을 넘어가게 될 테니까.
“결국 중국은 차이나 유니콤, 일본은 소프트뱅크, 유럽은 우리 자회사인 톰슨이 VOD 허브가 될 겁니다. 지금은 판을 키워 보죠.”
“판을 키운다 하심은, 혹시 VOD를 무료로 뿌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권 부장도 내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다. 원래 소프트웨어 분야의 사업은 불법 유통이 시장 확대에 꽤나 영향을 미친다. 파이오니어라는 강력한 보안 프로그램이 있는 우리가 VOD를 무료로 뿌리면 유료 고객들을 배신하는 꼴이다. 공식적으론 할 수 없는 일이다.
“무료는 무료인데 우리가 직접 할 수는 없겠지요. 정식 VOD를 뿌려서도 안 됩니다.”
“방법은 이미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방법이 이미 나왔다고요?”
권 부장은 내 말에 대답하기 전에 내 앞에 놓여 있는 K-포토를 가리켰다. 내가 취미 삼아 스타리그를 촬영한 동영상이 꽤나 된다. VIP석에서 찍었기에 혼자 즐기기엔 딱이다.
“회장님처럼 현장 동영상을 찍은 팬들이 아주 많습니다. 벌써 인터넷엔 온갖 언어로 자막까지 달려서 업로드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진 발견되는 족족 삭제를 하고 있긴 합니다만….”
“음지에서 자발적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말이군요.”
“예.”
“하하, 좋군요. 중국과 유럽 팬들이 늘어날 동안은 잠시 내버려 두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권 부장이 맞장구를 쳐 주니 기분이 좋다.
원래 역사에서 대한민국 정부든 대기업이든 스타리그의 세계화를 도왔다면 e-스포츠 시장은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꽃을 피웠을 거다. 그럼 전 세계 게임 사업의 마케팅 허브로 대한민국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여하튼 이번 생에선 게임에 대한 인식과 투자금 문제를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스타리그 규모부터 키워 봅시다. 세계적으로 말입니다. 일단 미국은 재훈이에게 스타리그를 후원하라고 하겠습니다.”
“두 군데서 성공하면 중국, 일본, 유럽은 자연스레 마음이 급해지겠군요.”
“한미 지역 스타리그는 상금 총액을 2억으로 늘리고, 매년 12월 총상금 10억 규모의 스타 월드컵을 열어 보죠.”
“하하, 그럼 올해 말에는 한국, 미국은 지역 스타리그 우승자, 나머지 나라는 아마추어 선수를 초대하는 식으로 진행하면 되겠군요.”
“권 부장님께 업무를 맡겨야겠는데요? 이해가 정말 빠르십니다.”
“저는 이 VOD 사업에서 핸드 터미널을 팔 때와 비슷한 흥분이 느껴집니다. 일견 잘될까 하는 불안감이 있지만 소비자들에게 알려만 진다면 대박이 확실하다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수한 씨, 미국 리그는 저도 후원해도 되죠?”
얘기 도중에 케이가 살짝 끼어든다.
“안 될 거 없지. 한데 케이가 후원해서 뭐 이득 볼 게 있어?”
“버지니아 파이낸스가 덕을 좀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휴대폰 결제 수수료!”
“오호!”
“호호호, VOD 결제 시장은 앞으로 쭉쭉 커 나갈 거잖아요?”
케이는 벌써 전자 결제에 대한 촉이 오나 보다. 소비의 제왕인 미국인답게 돈을 쓰게 만드는 게 곧 돈을 버는 거라는 발상을 금방금방 해낸다.
“VOD는 건당 20센트를 넘으면 안 돼. 지금은 판을 키우는 단계라는 거 잊지 마.”
“아, 예. 유수한 회장님.”
“이제 업무 얘기는 끝. 결승전인데 집중해서 즐겨야지.”
“수한 씨, 여기 맥주 있어요.”
“허.”
케이가 왜 가방을 들고 왔나 싶었는데 그 안에서 맥주를 꺼내 준다. 케이답다. VIP석이라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강민 선수, 저그전에 리버를 등장시킵니다.”
펑! 펑!
“기가 막힌 전략입니다. 셔틀로 리버의 기동력을 보완하면 무적이죠! 일꾼들이 무더기로 녹습니다.”
“국기봉 선수 당황하죠. 저글링, 히드라 조합 전략이 완전히 막혔어요.”
“GG(Good Game: 항복 의사 표시)치나요? GG 치나요?”
“GG!”
“GG!”
“와아아아아!”
“첫 경기는 강민 선수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국기봉 선수가 채팅창에 GG라고 치차 경기장 전체가 환호성으로 휩싸였다. 맥주 한잔 하면서 즐기니 정말이지 재미있다. 혼자라면 나도 맘껏 소리를 지르고 싶다.
“요오오오오! 잘생긴 쪽이 못생긴 쪽을 이겼어!”
케이가 대신 소리를 마구 질러 준다. 게임에 별 관심이 없는 이 여자가 이 정도 반응을 보일 정도면 꽤 괜찮은 콘텐츠다.
- *
며칠 뒤.
신성그룹 회장 전용 대회의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룹의 핵심 인재라고 할 수 있는 10여 명의 임원들은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이희건 회장이 입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1/4분기 경영실적 회의에서 이희건 회장은 이렇다 할 질책도 없이 인상만 구길 뿐이었다. 회의 말미에 오늘 다시 모이라고 한 지시가 전부였다.
“송 전무님, 오늘 모이라고 하신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진 상무가 비서실과는 더 친하지 않소. 외려 내가 물어보고 싶구려.”
“비서실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이수학 비서실장이 회장님께 불려 갔다는 것만….”
“휴우, 경영 실적이 경쟁사 대비 참담할 정도니 그렇겠지요. 위기라는 말씀조차 하지 않으셨으니 정말 위기입니다.”
반도체 사업부의 핵심 인재인 진제대 상무와 컴퓨터 사업부를 맡고 있은 송기영 전무가 얘기를 나눴을 뿐이다. 다른 이들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적자는 아니지만 모든 사업에서 스마트 클라우드의 뒤꽁무니만 쫓아가는 꼴이었다. 와중에 DRAM 매출이 스마트 클라우드를 넘어서지 않았더라면 정말이지 어제 경영 회의는 이희건 회장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딸깍.
“회장님 오십니다.”
이수학 비서실장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난다.
뚜벅뚜벅. 털썩.
이희건 회장이 자리를 잡자 참석자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다들 앉게.”
척. 척.
임원들은 차분한 이희건 회장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목소리 톤이 높은 것보다 이게 더 최악이다. 이 회장의 손에 서류가 들려 있는 꼴이 오늘 이 자리에서 누군가 잘리겠구나 싶었다.
“어제는 내가 너무 충격을 받아 말도 꺼내질 못했지. 참담했어. 창립한 지 몇 년밖에 안 된 기업이 포보스지의 200대 기업 순위에 훅 하고 끼어들었는데, 우린 그 뒤에 이름을 올렸어.”
“플래시 메모리를 독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플래시 매출이 일어나고 있으니 역전은 문제없습니다.”
진제대 상무가 용기를 내서 말을 받았다.
“정말 그리 생각하나? 상대가 시장을 만들면 거기에 숟가락을 얹을 생각이나 하면서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스마트 클라우드의 라인업은 DRAM부터 GPU까지 너무 다양합니다. 신성은 메모리 영역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추고 있으니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격차를 벌여….”
“닥치게.”
“헉.”
진 상무는 이 회장에게 닥치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것도 서늘한 기운으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마치 ‘넌 해고야.’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다들 잘 듣게. 내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하네. 지금은 위기라는 말조차 필요 없을 정도의 위기일세. 창사 이래 이렇게 앞길이 절벽처럼 보였던 경우는 없었어.”
“…….”
이수학 비서실장을 비롯해 모두들 고개를 숙이며 이 회장에게 말없이 동의했다. 이 회장에게는 흑자를 냈다는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1등이 되지 못하면 언제든지 망할 수 있다는 위기론을 신봉하는 사업가였다.
툭!
“다들 읽어 보시게.”
이수학 비서실장이 서류 뭉치 중 한 부를 임원들에게 전달했다. 서류를 펼쳐 본 임원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신규 조직도가 아니었다.
「스마트 클라우드, 게임 사업에 진출하나? 스타크래프트 리그에 대규모 투자.」
주요 일간지 기사도 아니었다. 전자신문이라는 산업 경제지로, 보는 사람만 보는 신문의 기사였다.
“스마트그룹이 일을 대놓고 하는데, 그대들은 대체 뭘 하는 건가?”
이 회장이 불쑥 질문인지 질책인지 헷갈리는 말을 했다. 이럴 때 주저하면 정말 잘린다. 마지막 기회를 준다고 했으니 의견을 내야만 했다.
“게임 사업은 신성전자에서도 사내 벤처를 두고 있습니다. 직접 투자를 하는 것은 신성의 이미지를 감안해서….”
“송 전무, 걱정하는 이미지가 뭔가?”
“중소기업 영역에 대기업이 욕심을 내는 것은 여론도 호의적이지 못하고, 정부의 벤처 진흥책에도 역행하는 것이기에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역시 1차원적이군. 자넨에겐 마지막 기회도 아깝군. 자리 정리하게.”
“허헉….”
“나가게.”
송 전무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움직이지를 못했다. 이수학 비서실장이 그를 부축해 자리를 뜨게 만들었다. 다른 임원들도 바짝 얼어붙어 꼼짝하지 못했다.
“진 상무, 자네 의견은?”
진제대 상무는 1초가 아쉬웠다. 한 문제도 풀지 못한 답안지를 거둬 가기 직전의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압박감의 백만 배쯤 되는 것 같았다. 말을 다듬는 척하며 기사를 미친 듯이 읽어 내려갔다.
‘키워드가 뭐지? 게임은 아니냐. 이 회장이 뭘 본 거지? 뭐가 대박 사업이라고 이런 압박까지 주는 거야?’
진 상무는 미칠 것 같았다. 하필 두 번째 자리에 앉아 가지고.
“진 상무, 자네 의견이 뭐냐고 물었어.”
“예, 스마트그룹이 뭘 노리는지 알 것 같습니다.”
“으흠. 알 것 같다고?”
진 상무는 급한 김에 찔러봤는데 이 회장의 반응이 제대로다. 물꼬를 트는 방향은 맞힌 것 같은데… 대체 사업 아이템이 뭐지? 이 회장이 뭘 그리 탐을 내는 거지? 하며 기사 전문을 머릿속에서 마구 스캔해 댔다.
팟!
그때 진제대 상무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스포츠 마케팅입니다.”
진 상무의 대답에 이 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VOD 휴대폰 결제라는 답을 바랐지만 진 상무의 말도 틀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그림을 그렸다고도 할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이 회장의 말에 진 상무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최악은 피했다.
“게임 자체가 큰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광고든, 기업 이미지 제고든 부수적인 이득을 노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부수적 이득이라면 VOD 사업을 말하는 건가?”
이 회장의 말에 진 상무는 퍼뜩 머리를 굴렸다. VOD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래픽 디바이스를 개발하기 위해 비디오 코덱에 대한 논문을 읽어 본 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당연합니다. 방송 중계를 꼭 TV로 하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인터넷 VOD 사업에 광고를 끼워 넣는 것은 익히 알려진 마케팅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래서라고 하시면.”
진 상무는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뭘 더 말하라는 거지? 싶었다.
쿵! 쿵!
“또 숟가락을 올릴 셈인가? 스마트 클라우드는 파이오니어를 이용해 VOD 사업을 하지. 휴대폰 결제를 통해 통신사 점유율까지 올리고 있어. 미국에선 K폰에 휴대폰 결제 옵션을 걸겠지. 우리 S폰의 해외시장 점유율이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해! 그런데 그 대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못 하고 있어.”
이 회장은 답답한지 손바닥으로 탁자를 마구 쳐 댔다.
“회장님, 진 상무는 반도체 임원이기에 구체적인 해결책을 답하지 못한 겁니다. 그룹 차원의 마케팅은 신성카드가 나서야 하는 일로 보입니다. 앞에 계신 S폰 사업부 운성남 전무님도 마찬가지 생각이실 겁니다.”
신성카드 대표이사인 황기우 사장이 입을 열자 진 상무를 비롯한 나머지 임원들은 정말로 고마웠다.
그는 경영학 박사 출신으로, 이곳에 있는 공학박사들과는 전혀 다른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계열사 사장이기에 신성전자의 임원들과 동격으로 취급받지만 엄연히 경영자에 가까웠다.
“그래, 황 사장 생각은 뭔가? 말해 보게.”
“일단 진 상무가 말한 스포츠 마케팅은 스마트그룹의 현재 행보를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에, 회장님께서 답답해하시는 것은 VOD와 전자 결제를 통해 스마트 통신과 K폰의 시장 점유율이 날로 높아져 간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맞아. 정확해.”
황 사장의 말은 자신의 말을 반복한 것에 불과했지만 왠지 정리가 되는 느낌이 들었기에 동의해 주었다. 그리고 휴대폰 결제라는 말을 전자 결제라는 말로 바꾸니 더욱 그럴듯하게 들렸다.
“스마트그룹의 마케팅을 살펴보니 VOD라는 수단이 문제인데, 그중에서도 스타리그라는 게임 동영상을 우려하고 계시지요. 회장님께선 마케팅 타깃층이 매우 젊다는 점을 눈여겨보셨을 것 같습니다. 향후 소비의 주체가 될 계층이 전자 결제의 상징을 스마트그룹과 동일시하면 곤란하니 말입니다.”
“그 또한 정확해.”
이 회장의 답답함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는데 황 사장의 말을 듣고 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질 정도였다. S폰을 비롯한 첨단 제품 사업에서 젊은 계층을 사로잡는 회사가 결국 최종 승자가 된다. 더욱이 전자 결제는 언젠가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안은 매우 간단할 것 같습니다. 독점할 수 없게 하면 됩니다.”
“어떻게 독점을 못 하게 하나? 벌써 독점한 것 같은데. 회사 이름을 걸고 대회를 열고 있어.”
“축구, 야구 등등 모든 프로 스포츠는 리그가 있고, 협회가 있습니다. 방송 중계, 광고, 심지어 관객 입장료까지 협회와 구단에 나뉩니다.”
“판을 키우면 독점이 불가능해진다?”
“예, 그렇습니다. 스타리그에 신성만 불쑥 끼어들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겁니다. SJ, KT, 각종 게임사, 인터넷 회사 등이 프로팀을 만들어 스타 대회를 열자고 하면 당연히 협회부터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물론 신성그룹은 이미 보유하고 있는 프로야구, 프로축구팀에 대해 하이라이트 동영상, 유명 선수 인터뷰, 감독 인터뷰 등등 해서 VOD 사업을 시작해 버리면 이게 돈이 된다는 사실을 관련자들이 모두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독점을 막자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SJ도 KT도 통신사 할인을 하겠군. 스마트 통신의 점유율이 곤두박질치겠어.”
“그리 만들겠습니다. 신성카드가 두 통신사를 지원할 테니 말입니다.”
“전략이 다방면이군, 다방면이야.”
황기우 사장은 조만간 회의석상에서 몇 단계 앞자리로 옮겨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리 하나가 비어 버리지 않았나.
- *
“게임 협회라고요?”
“예. KeSPA(Korea e-Sports Association)라는 이름으로 설립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나는 권재욱 부장의 말에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벌써 KeSPA가 등장한다고? 이제 대한민국에선 내가 일만 벌이면 나비효과가 너무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KPGA가 아니고요?”
“예. 골프 협회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e스포츠라고 명명하기로 했답니다. 신성, SJ, KT, 그리고 각종 인터넷 회사, 심지어 케이블 방송사까지 팀을 만들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팀을 만들어서 어쩌자는 거죠? 내가 이미 리그 후원을 전담하겠다고 공언했는데.”
“개인전 리그는 후원사 입찰제로 하고, 프로 리그는 협회 주관하에 진행하겠다고 합니다. 개인 리그는 상반기, 하반기 해서 1년에 두 차례밖에 없으니 이벤트 성이고 프로 리그는 1년 단위로 진행하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명분은 프로 게이머들의 복지와 게임업계의 발전, 뭐 그런 거겠죠?”
“예. 협회 발기인들이 정확히 그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입맛이 쓰다. 이거 일의 진행 속도가 원래 역사 대비 너무 빠르다. VOD 시장을 먼저 키우고, 그에 따른 전자 결제 시스템을 내가 독점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래서는 스마트그룹이 전자 결제 시스템을 주도한다는 인상을 심어 줄 시간이 부족해진다.
“프로 리그… 현재 게임 시장이 그리 크지 않은데 어째서 그렇게 많은 기업들이 나서는 거죠?”
“각종 프로 스포츠 협회에서 VOD 사업을 수익 모델에 포함시키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청에서 힘을 보태겠다며 내년도 국책 과제로 VOD 기술과 전자 결제 보안 시스템을 혁신하고, 연내에 전자 결제 촉진법을 제정해서 법적 근거도 확실하게 마련하겠다고 합니다.”
중소기업청, 정부 기관까지 나서면 전자 결제 시스템 독점은 물 건너간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대한민국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야 당연히 정부가 나서야 하겠지만, 전자 결제를 먼저 시작한 나로서는 파이를 남에게 빼앗기는 기분이다.
빨리빨리 일 잘하는 한국이 전자 결제 시스템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하면 금방 결과가 나와 버린다. 만약 그런 나비효과가 미국과 일본까지 확대되어 버리면 내 큰 그림이 망한다.
IT 버블이 터지고 난 뒤에 망해 버린 회사와 인력을 끌어모으는 동력으로 전자 결제 시스템을 써야 한다. IT 버블이 터지며 주가 폭락이 일어나는 시점은 일본에선 2000년 1월, 미국은 2000년 3월! 이제 불과 10개월도 남지 않았다.
“이거, 누가 나선 것 같은데… 누굽니까?”
“신성인 것 같습니다. 그것도 이희건 회장이 직접 나섰다는 소문입니다.”
“이희건 회장이 직접 나섰다고요?”
“예. 회의석상에서 임원들에게 재떨이를 던졌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담배도 안 피우는 양반이 재떨이를 왜 던지나? 여하튼 최고 수준의 질책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신성… 만만찮네요. 혹시 전자 결제까지 손을 뻗었나요?”
“아, 그걸 말씀드리려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신성카드가 나서서 휴대폰 결제뿐 아니라 휴대폰으로 비번을 받아 카드 결제까지 가능한 시스템을 선보였습니다.”
“카드 결제까지 연계했다고요?”
“예. 포인트 적립이니 뭐니 하며 신성, SJ, KT 모두가 인터넷으로 결제 가능한 카드를 선보였습니다.”
“물밑에서 연합했군요.”
“우리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역력합니다.”
이희건 회장이 이런 실무적인 아이디어까지 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돈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아는 누군가가 판에 끼어들었다. 신성의 인력풀은 꽤나 괜찮단 말이야. 누군지는 모르지만 신성그룹에서 십수 년간 살벌한 경쟁을 통해 위로 올라온 사람일 것이다.
설립한 지 5년도 채 안 되는 내 회사에서는 나오기 힘든 사람이다. 특히 내 회사는 내 의견이 직접적인 전략이 되는 경우가 잦다. 내 회사의 강점이자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서둘러야겠네요. 대현과 LK에 연락해서 프로 스포츠 구단의 VOD 제작을 우리가 맡겠다고 해 줘요. 용인밸리에서 케이블 방송과 연결된 협력 업체가 있으면 같이 끼우세요. 톡톡 튀는 자막이나, 영상 편집 잘할 수 있는 업체로 말입니다.”
“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KeSPA 설립에 우리도 끼어드세요. 관건은 최대한 설립 시기를 늦추는 겁니다.”
“…늦추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권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현과 LK와의 접촉을 서두르라고 하면서 KeSPA 설립은 늦추라고 하니 말이다.
“전자 결제 시스템은 최대한 우리가 독점적 지위를 가져야 합니다. 성공적인 모습을 너무 일찍 보이면 안 됩니다.”
“명분이….”
“명분은 내가 만들 테니까, 일단 KeSPA에 끼어들어서 이슈부터 만드세요. 개인전은 일종의 취미라고 할 수 있지만 프로 리그는 다르다. 얇은 선수층으로 어떻게 프로팀을 만들거냐? 심지어 어린 선수들을 프로로 돌리는 데 도덕적 책임은 없나? 나이 제한은 어떻게 해야 하며, 연봉 책정과 직업 안정성은 어쩔 거냐? 등등 이슈거리는 많잖습니까.”
“말씀을 듣고 보니 이슈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군요.”
“내년 3월까지 끌어 보세요. 최소한 올해 말까지는 설립되면 안 됩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니 권 부장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내 어조가 사안에 비해 너무 극단적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회장님, 죄송하지만 평소 태도와 너무 다르신데… 따로 이유가 있으신가요? 제가 의중을 알고 있는 게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안을 가볍게 보지 마세요. 우린 VOD 사업 뒤에 전자 결제와 광고 시장이라는 큰 먹거리를 꼭꼭 숨겨 놓은 겁니다. 우리 스마트그룹을 눈여겨보고 있는 한국 대기업이야 빨리 반응한다고 해도, 해외 기업들까지 우리 의도를 알면 곤란해요.”
“해외 기업을 왜….”
“곧 알게 될 겁니다. 지금은 행동할 때입니다.”
말해 주고 싶지만 말해 줄 수 없다. 나는 IT 버블이 터지는 폭락장에서 떼돈을 벌 것이고, 그 뒤에 전자 결제라는 수단으로 상승장을 이끌고 나갈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인터넷 회사들이 망한 이유는 대규모 투자만 받았을 뿐 딱히 수익 모델이 없었기 때문이다. 폭락 뒤에 상승 국면으로 접어들게 만드는 일은 내가 해야 한다. 스마트그룹과 파이오니어를 앞세워서 말이다.
“뭔가 큰 건이….”
“내년도 3월쯤이면 알게 될 겁니다. 업무만 챙겨 주세요.”
“3월. 누가 들으면 안 될….”
권 부장은 자신의 입을 턱 하고 막고는 주변을 휘휘 둘러볼 정도였다. 실체가 뭔지도 모르면서 내 말에 일말의 의심도 없다. 대충 주식 시장에서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느낌이 드나 보다. 내가 하도 미래를 잘 예측하다 보니 내 사람들에게 이런 믿음은 기본이다.
“VOD 사업은 생각보다 타격감이 큽니다. 그러니 적당히 지연시키세요. 너무 뜨거워도 안 되고 너무 차가워도 안 됩니다.”
“사업 가능성은 증명하되 널리 알려지면 안 된다. 그 말씀이시죠.”
“그래요. 일단 한국에서는 핫하고 외국에서는 마니아층만 열광하는 그런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타리그를 후원… 세계 대회는 올해 말에… 오~!”
개인적으로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국운이 꽤나 좋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IT 버블도 있었고, 중국이 급격한 성장을 거듭했으니까. 그걸 100% 이용 못 했을 뿐이지. 내가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떼돈 정도가 아니라 아시아 최고 부자 국가가 될 수 있다.
“자, 서두르시죠. 나도 만날 사람이 생각났으니까.”
“예.”
나는 사무실을 벗어났다. 권 부장도 어디론가 휙하니 사라졌다.
삐리릭. 삐리릭.
-여보세요.
“아, 예. 박 총재님, 저 유수한입니다.”
-어이구, 바쁘신 분이 어쩐 일로.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늘 시간 되시면 점심 같이 하심이 어떤지요?”
-허허, 요즘 정치권엔 영 뜸하더니… 유 회장이 날 찾을 일이라면 꽤나 큰 일이겠군.
“하하, 그냥 점심 대접하려고 그럽니다. 수정각 괜찮으시지요?”
-그럼, 그럼! 유 회장과 점심이라면 비행기 타고 가서라도 해야지.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박준태 의원의 정치 인생은 이번 회차에서는 꽤나 오래간다. DJ 대선에 온몸을 바쳤고, 그 덕분에 영호남 지역감정을 해소시키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아 여당 총재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 *
팔랑. 팔랑.
수정각의 정원은 꽃이 만발했다. 5월의 꽃향기는 참으로 매혹적이다. 이름 모를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나무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나오니 산책하는 맛이 남다르다.
수정각은 돈을 많이 벌어서 그런지 이젠 산책길까지 만들어 놓았다. 식사를 마칠 때쯤 정원을 바라보던 박 총재가 먼저 산책을 제안했을 정도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식사를 하면서 밀담을 나누던 때가 언제였나 싶다.
“오랜만에 이리 산책을 하니 좋구만.”
“삼림욕이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일이 바쁘니 좋은 걸 알아도 하기는 쉽지 않았지. 이제 일보다 산책이 좋아지니 은퇴할 때가 되긴 했나 보이.”
“부럽습니다. 은퇴하신다니.”
내가 부럽다고 얘기하니 살짝 눈이 동그래지는 박 총재다. 이런 얘기를 하면 다른 이들이야 ‘아직 정정하신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며 아부를 했을 테니 말이다.
“후후, 역시 유 회장다운 말이군. 부럽다고 하다니.”
“열심히 살아오셨으니 후배들이 어쩌나 지켜보셔도 좋고, 돈 쓰는 재미도 느껴 보시고, 그 덕분에 시장에 돈도 풀리니 덕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은퇴가 아니라 저는 금(金)퇴라고 불러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그리되면 좋겠군. 그래, 내가 은퇴 전에 해야 하는 일이 뭔가?”
“중소기업청에서 전자 결제를 법제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걸 1년만 늦춰 주십시오. 보안 유지 기술, 카드사 포인트를 화폐로 취급할지 등등 검토할 명분은 충분할 겁니다.”
“전자 결제라면 전자 상거래를 말하는 것인가?”
“전자 상거래라는 말 자체도 지워 주십시오. 재계에 너무 퍼지면 곤란합니다.”
“어째서… 유 회장이 그런 말을 하는가? 그대는 첨단 기술의 기수가 아니었던가?”
“대한민국의 국운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어설프게 샴페인을 터뜨려 대박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내가 오늘 산책을 아주 길게 해야겠군. 얘기를 다 들으려면 말이야.”
박준태 총재는 야산으로 이어진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나는 조용히 옆에서 보조를 맞춰 걸어갔다. 오솔길은 마른 솔잎이 곱게 깔려 있어 걷기에 참으로 좋았다.
- *
1999년 8월, 스마트 클라우드 대회의실.
연구소, 개발, 디자인, 영업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올해 쇼 케이스를 장식할 시제품을 검증받는 시간이니까. 이번에는 나운영 부장도 참석했다. 개성공단이 잘 돌아가니 원가 절감에 대한 부담이 훅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떤 시제품이 나와도 ‘생산엔 문제없습니다.’라는 말을 연발할 것이 뻔하다.
영업팀도 나름 뭔가를 준비했는지 연신 웃음을 머금고 있다. 전자 결제에서 작전 성과가 잘 나오고 있나 보다.
“오 이사님, 시작할까요?”
“예. 올해는 드디어 1G DRAM과 1G 플래시 굿 다이(Good Die: 양품)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석 달간 안정화 단계를 거치면 11월엔 양산할 수 있을 거라 보입니다.”
이젠 반도체 출시 시점을 보면 DRAM은 신성과 동등, 플래시는 6개월가량을 앞서고 있다. 가히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회사가 되었다.
“12월엔 전통적으로 물량이 달리는 시점입니다. 선행 양산으로 물건 잔뜩 뽑아 놓는 거 잊지 마세요. 가격 좋을 때 한 방에 털어 내는 겁니다.”
“아유,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이번 레시피 아주 좋습니다. 4공장에서 팡팡! 찍어 낼 겁니다.”
이대로만 가면 올해 연매출은 드디어 30조를 돌파할 것 같다. 신성전자가 올해 목표를 28조로 잡고 있다고 하니 겉으로 보면 비슷한 규모지만, 순익률이 20%를 돌파했기에 자그마치 6조나 되는 유동자금이 생기는 해가 될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에 환율이 올라간 덕분이긴 하지만 제조업에서 순익 20%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다.
게다가 외환위기 때 부도 처리로 넘겨받았던 부동산도 하나둘씩 팔리고 있기에 연말부터 벌어질 IT 버블을 이용할 총알도 충분히 쌓일 것이다.
“좋네요. 대충 K-터미널, K-포토, 에그박스는 별다를 것 없어 보이네요. 결국 바뀐 것은 K폰과 앰팩, 아니 이제 아이팟… 그 두 가지인가요?”
“외형 변경은 K폰과 아이팟이 전부입니다.”
“LK가 많이 도와줬네요.”
“하하, 그리 말씀하시면 우리 개발자들이 섭섭해할 것 같습니다. 내부에 메모리 용량, 처리 속도, 해상도, 심지어 방수 처리 신뢰성까지 모두 업그레이드되었는데 말입니다.”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오해 마세요. 하하.”
K폰과 아이팟은 확실히 달라졌다. 드디어 화면이 컬러로 바뀌었다. 화면이 기존 대비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커졌고, K폰 역대 디자인 중에 가장 길쭉하게 생겼다.
LK 휴대폰 사업부를 합병하면서 그쪽 인력이 들어와서 그런가? 초콜릿 폰을 폴더형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직 디자인팀이 슬라이드 타입에 대한 아이디어를 도출하지 못했다.
“여하튼 메모리 용량에 여유가 생겨 K폰이든 아이팟이든 90분짜리 영화 두 편 정도는 저장할 수 있습니다. VOD는 수십 편을 저장할 수 있고 말입니다.”
“용량은 좋은데 화질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군요.”
“모니터와 같은 픽셀 사이즈인데도 작은 화면이라 상대적으로 더 거칠어 보입니다. 여기 아이팟은 상대적으로 나아 보이지 않습니까.”
오 이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보여 주는 아이팟은 바 타입이라 화면이 K폰에 비해 1.5배쯤 좀 더 크다. 그의 말대로 같은 해상도임에도 화질이 훨씬 깨끗하게 느껴진다.
외려 아이팟이 초콜릿 폰을 닮은꼴이다. 아마도 올해를 끝으로 K폰의 블레이드 타입 디자인은 끝날 것 같다. 조너슨에게 굳이 슬라이드 타입의 디자인을 알려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LK 개발자를 좀 더 괴롭혀야겠어요. 내년엔 이것보다 해상도를 높여 달라고 말입니다.”
“하하, 벌써 닦달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올해 양산은 이게 한계이고, 컬러 화면에다 동영상까지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 겁니다.”
“네, 동의합니다. 올해 쇼 케이스는 이 정도로 하죠.”
이제 시제품에 대한 회의도 점점 짧아지고 내가 이것저것 말해 줄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스마트폰이 손에 잡힐 것 같다. 터치스크린과 와이파이 기술만 개발하면 조각 맞춤이 끝나리라.
- *
나는 시제품 회의를 마치고 버지니아 트레이딩으로 향했다. 이 실장과 케이만 앞에 두고 얘기할 것이 있어서였다. 논의해야 할 사안이 묵직했고, 무엇보다 보안이 중요하기에 그랬다.
똑. 똑.
“들어오세요!”
딸깍.
“많이 기다렸어?”
“수한 씨, 그냥 들어오면 되지 무슨 노크예요.”
“기본적인 예의를 보여 준 거야. 내 사무실 올 때도 이렇게 노크를 하라고.”
“아, 예~ 회장님.”
케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커피를 내린다. 비서를 둘 법도 한데, 손수 커피를 내리는 것을 보면 케이다운 면이 없지 않았다. 옆에서 이 실장이 품에서 박카스를 꺼내 들기에 커피로 하겠다고 잔을 가리켜 보였다.
“다들 상황 보고부터 부탁해요.”
“먼저 중국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 못지않게 스타리그에 대한 관심도가 높고, 개인 리그도 두 달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VOD 시장은 폭발하고 있으며, 스타리그 전문 해설자도 여럿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상한 결과네요. 다운로드 시장은 어떤가요?”
“차이나 유니콤에서 정식 VOD를 파이오니어와 계약했습니다. 건당 천만 회 이상 다운로드되고 있으며, 불법 촬영 영상은 두세 배 이상 퍼져 나갔습니다. 해외 축구 불법 동영상은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입니다.”
“좋네요. 시중쉰은 어떻게 하고 있지요?”
“말씀하신 대로 전자 결제에 대한 법령을 내년 1월에 발의하는 것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자 결제 수수료는 1%로 판매자가 지불하는 것으로 결정될 것이고, 파이오니어 보안 프로그램 로열티는 통신사마다 따로 계약되어야 합니다.”
“로열티는 재훈이가 알아서 할 거고, 우린 수수료에 집중합시다. 시중쉰 일가의 요구 조건은 뭡니까?”
“수수료 중에 30%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중쉰의 이익 분배는 언제나 10% 수준이었는데 이번엔 30%라니, 욕심을 좀 부리고 있다. 점점 돈을 쓸 일이 많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시중쉰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직전에 하늘나라로 간다. 그때가 시진핑이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때다. 얼마 안 남았다.
“뭐, 법만 통과시켜 준다면 흔쾌히 받아들입시다. 전자 결제에 대한 벤처는 알아봤나요?”
“예. 그 또한 말씀하신 대로 미국 유학파 사장들 위주로 조사를 했습니다. 여기 12개 정도의 회사를 정리해 왔습니다. 알리바바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도 있을 만큼 모두 벤처 회사들입니다.”
“아, 그래요? 투자 설명회는 10월로 예약했나요?”
전자 결제, 즉 전자 상거래 회사를 조사해 오라고 했더니 이 실장이 대박을 건져 왔다. 1999년도에 마윈이 알리바바를 설립했던가? 여하튼 마윈이면 당연히 전자 상거래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VOD 사업부터 시작하려고 할 것이다. 자연스레 내 회사와 연결되기 마련이다. 현금 투자는 물론 전환사채까지 계약해서 지분을 있는 대로 매입해야 할 것이다.
“예, 10월 28일. 스타리그 중국 지역 챔피언 전 관람을 빌미로 만나실 수 있게 조치해 뒀습니다.”
“좋네요.”
이 실장은 확실히 중국 일에 한해서는 특급 로비스트 못지않게 일 처리가 좋다. 내 일거수일투족은 모니터링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뭐든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 스타리그 관람이 내 취미라고 알려졌으니 별문제 없으리라.
“이제 제 얘기를 할 차례인가요? 미국이 중국보다 밀리다니 의외인데요?”
“하하, 밀릴 리가 있나. 케이가 나섰는데.”
“아니에요. 미국 카드 회사들이 수수료율을 2%로 해야 한다고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어요.”
“안 돼. 수수료를 1%로 깎아야 전자 상거래 시장이 시작될 수 있어. 전자 상거래는 국제 거래도 활성화될 테니 한국, 중국, 미국 할 것 없이 수수료가 일정해야 한다고 로비를 좀 해. 카드 결제 옵션을 따로 줄 수 있다고 말이야.”
“호호호, 아무렴요. 버지니아 파이낸스가 이길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요. 대신 법제화 시점이 내년 3월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미국에서 법령이 통과하는 것은 대략 2년 정도가 걸린다. 내년 3월이면 지극히 빠른 거다. 케이가 자신하고 있지만 내가 볼 때 내년 3월보다 훨씬 늦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케이답지 않은 착각이다.
여하튼 전자 상거래는 중국이 미국보다 먼저 시작하겠군 싶다. 중국 정부는 세금을 제대로 거두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거든. 법제화하는 데 시간을 끌지 않을 거다. 알리바바가 나스닥에 상장하는 원래 역사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으흠, 그럼 미국에는 언제 가서 딜을 해야 하나?”
“11월 쇼케이스 때문에 미국으로 올 거잖아요. 미국에 두 달 정도 머물면서 내년 초에 통신사와 계약만 해 줘요.”
“내년 초? 너무 이른 거 아냐?”
“설마 미국 전자 결제 시행사로 다른 회사를 지목할 거 아니죠? 버지니아 파이낸스가 제격이라고요.”
케이가 마음이 급한가 보다.
“7 대 3인거 알지?”
“아유, 당연하죠, 회장님.”
단번에 오케이를 하는 케이다. 나와 딜을 하려다간 8 대 2가 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케이와의 거래는 내가 이끄는 대로 될 테고, 전자 상거래는 재훈이와도 상세히 논의해야 하니 미국에 내년 초까지 머무는 것도 괜찮겠다.
IT 버블이 터지는 역사적 순간도 내 눈으로 보고 싶고 말이다.
“그럼 미국 버지니아 사무실에 주식 거래 시스템 좀 열어 놔. 미국에 머물면서 소프트뱅크 주식이랑 AOL 주식 공매도 좀 하게.”
“호호호. 그러셔야죠. 근데 얼마나 크게 하려고 시스템까지 마련하라고 해요?”
“한국에 있는 부동산 담보로 200억 불을 빌릴 수 있고, 올해 순익 50억 불. 총 250억 불 정도 해 보려고 해.”
나는 원래 350억 불이라는 유동 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외환위기 때문에 부동산에 돈이 묶여 버렸으니, 담보대출로는 200억 불 정도가 최대치다.
“헉!”
“수, 수한 씨! 미쳤어요?”
“미치긴 뭐가 미쳐?”
이 실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간 큰 케이도 내게 미쳤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로서도 상상하기 힘든 금액일 테니 그럴 것이다.
“무슨 공매도를 수백억 불씩 해요. 주식이 100분의 1로 떨어지기라도 한다는 거예요?”
“어, 맞아. 100분의 1로 떨어질 것 같아.”
“헉!”
“케이도 소프트뱅크 지분 1% 가지고 있지? 그거 11월부터 팔아야 해.”
케이는 1억 불을 투자해 지분 1%를 가지고 있다. 그게 지금 80억 불로 올랐는데, 내년 1월이면 8천만 불이 될 거다. 내가 공매도 할 때 같이 던져야 한다.
“수, 수한 씨, 조언은 고마운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믿을 수가 없어요. 지금도 미국에서 IT 기업은 하늘을 날고 있어요. 오히려 너무 계속 올라서 두려울 정도인걸요.”
원래 폭락 직전엔 폭등세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게 대박인 걸 알고 있거든. 공매도를 위한 주식 차입이 이뤄지고 있다. 나도 이때쯤 끼어들어야 한다.
“착각이야. 미국 인터넷 기업들은 수익 모델이 딱히 없어. 적대적 M&A든, 합의하에 하는 합병이든 뉴스거리로 주가를 올리는 것에 불과해. 잘 생각해 봐. 실체가 없어!”
“……!”
“게다가 미 연준이 금리를 1% 올리겠다고 하고 있지? 지금도 5.5%라는 고금리인데 6.5까지 올린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최고위층 금융 전문가들은 아는 거야, 지금 부실 대출을 거둬들이지 않으며 곤란하다는 걸 말이야.”
“하… 매년 11월마다 곱게 넘어가는 경우가 없네요. 대박이든 위기든.”
케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현재 IT 기업의 주가는 비정상적이다. 소프트뱅크의 시가총액이 20조 엔 가까이 되는데 매출은 고작 2천억 엔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MS와 우리 스마트 스토어가 없다면 불가능한 수치다. 거기에 미 연준의 행동까지 더해지니 케이도 생각이 바뀌나 보다.
“묘하게 그러네.”
“저도 껴도 되죠?”
“방금 전엔 미쳤다며?”
방금 전 미쳤다고 할 정도로 놀랐던 케이가 이제 제정신이 드나 보다.
“미친 건 저네요. 낭떠러지로 걸어가고 있었잖아요. 고마워요, 수한 씨.”
“그럼 11월 말에 미국에서 보자고. 난 이 실장과 함께 중국에 들렀다 바로 갈게. 달러 옮기는 거 좀 부탁해.”
“알겠어요. 10월 말까지 처리할게요.”
척척 말귀를 알아듣는 케이다.
딸깍.
문밖으로 나가니 이 실장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신경 쓰지 못했는데 내가 심각한 말을 시작할 때부터 문밖을 지키고 있었나 보다.
“갑시다.”
“예, 회장님.”
뚜벅. 뚜벅.
이 실장은 믿음직한 사람이며, 내가 자기 몫도 알아서 챙겨 줄 거라 믿는 사람이다. 중국 일을 잘 처리했으니, 알리바바 지분을 조금 떼어 줘야겠다. 0.5%만 줘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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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 20일.
“99 차이나 유니콤 스타리그 대망의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삐유유우~ 펑! 펑!
중국답게 스케일이 장난 아니었다. 관객석만 2만 개가 넘는 공설 운동장에서 결승전을 열었다. 다소 어울리지 않는 초청 가수의 축하 무대도 있었고, 조금은 낯간지러운 선수 소개도 이었지만 여하튼 최적의 장소이다.
대형 프로젝트 스크린으로 중계를 하기에 늦은 밤에 경기를 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관람석은 만석이다. 일제히 조명이 꺼지고 VIP석에서 차이나 유니콤 부사장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았다. 우리를 향해 있던 카메라가 휙 돌아서 정면을 향한다.
“유 회장님, 이제 자리를 떠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신호였던지 차이나 유니콤 부사장이 내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속삭였다.
“경기 끝나고 우승 트로피를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우리 쪽 전무가 알아서 할 겁니다.”
저벅저벅.
자리에서 일어나 VIP석을 빠져나가니 이 실장이 안내를 맡는다. 럭셔리한 리무진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자 근사한 호텔이 보였고, 붉은 비단과 붉은 도자기로 장식된 회의실로 이동했다. 면접을 보는 것도 아니고, 12개의 벤처가 차례로 들어와 투자 설명회를 하기 시작했다.
“@@##$$%^&.”
누가 중국인을 만만디라고 했던가? 돈이 걸린 일에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일 처리를 한다. 이어폰으로 실시간 통역이 흘러나왔지만 듣는 척했을 뿐 질문도 하지 않았다. 우스꽝스러운 이름 때문이었을까? 알리바바는 열두 번째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